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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곡하고 춤추는 천국 운동 (마11:16-19)

본문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 중입니다.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 국은 침노를 당하는데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침노 당하는 천국을 말씀하셨습니다(마 11:12). 오늘의 본문은 애곡하고 춤추는 천국 운동의 성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평범 속에서 나타내는 확실하고 멋진 영원한 진리입니다.
I. 아이들의 장터 놀이와 같은 이 세대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6-17절에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 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 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세대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살던 당대의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를 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를 '장터'로 묘사했습니다. 여기 '장터'는 '모임' 에서 나온 낱말로서 '모이는 곳'을 뜻합니다. 이는 당시 도시의 광장에서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서로 매매한 데서 생긴 말입니다. 그곳은 또한 회합과 대화의 장소였기도 합니다. 우리 성경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비유에서는 이 장터를 사람들이 일이 없어서 일하 지 않고 놀고 게으름을 피우는 장소로 표현하였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이곳을 장사하는 장소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약 4:13). 이곳은 또한 모든 사람들이 시끄럽고 분주하 게 오락을 즐기는 장소로 이해되었습니다. 이 세대의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시장(장터)에 있는 자들이고, 또 거기 앉아서 세 월을 보내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서 사고, 팔고, 주고, 받고, 장가가고, 시 집가고, 다투고, 웃고, 울고, 태어나고, 살고, 죽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장터에 아이들이 놀이(장난)하고 있는 모습을 비유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한쪽의 아이들이 다른 쪽의 아이들에게 "이리 오라. 우리 함께 혼인 놀이하자."라 고 하면서 피리를 불었습니다. 그때 저들은 함께 그 피리소리에 맞추어 박수를 치고 즐거워하면서 춤을 추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피리 소리를 듣고도 즐거워하 지 않고 춤추지 아니했다고 하였습니다. 전혀 그 혼인놀이 게임에 즐거워하거나 기뻐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아무런 반응이나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처음 놀이를 제의한 쪽(무리)의 아이들이 "그러면 좋다. 이리로 와서 우리 함 께 장레식 놀이하자."라고 하면서 애곡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쪽(무리)의 아 이들은 가슴을 치거나 슬퍼하지 아니했다고 하였습니다. 역시 아무런 반응이나 관심 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이런 류의 사람들을 스코틀랜드에서는 '외고집장이'라고 부 른다고 합니다.
Ⅱ. 예수님의 이러한 장터 놀이의 이야기는 천국 복음 운동에 대한 불신앙의 세대를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18절에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 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천국 복음 운동에 대한 불신앙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 하자면 세례 요한의 회개와 천국의 외침이나, 예수님의 천국과 회개의 외침에 대한 저들의 불신앙적 핑계를 꼬집은 것입니다. 천국 복음 운동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금욕적 생활에 대하여 귀신들렸다고 하였 습니다. 반대로 평범한 현실생활을 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하여는 먹기를 탐하는 탐닉 자요, 술주정뱅이요, 또 죄인들과 함께 하는 한 통속이라고 매도하였습니다. 역시 예수의 천국 복음 운동에 대한 저들의 불신앙을 꼬집은 것입니다. 천국 복음 운동에 대한 저들의 불신앙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1. 그것은 진리(천국 복음)에 대한 무감동, 무표정, 무관심, 무감각, 무반응으로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혼인하는 잔칫집과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손뼉치고 춤추어야 할 사건과 시간에 기뻐하지 아니한다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장례 집과 같이 슬퍼하고 애곡할 사건과 시 간에도 진정으로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그것은 불신앙적 매도행위로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천국 복음의 선구자 세례 요한을 귀신들렸다고 매도하는가 하면, 예수님을 현실주 의적 탐닉자요 저속한 사람으로 매도하였습니다. 애통하는 세례 요한은 귀신들린 자 로 보였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은 탐닉자로 보였습니다.
3. 그것은 참된 슬픔과 참된 기쁨의 조화를 깨뜨리는 불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참된 회개(슬픔)와 천국은 직결하고 있습니다. 불가분리적 관계성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세대의 유대인들, 소위 종교가들은 이 두 가지 조화의 아름다 움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유대주의적 종교생활에는 기쁨에도, 슬픔에도 조화가 없었 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보신 저들이야말로 장터에 앉아있는 어린아이들과 같았습니다. 어린아이 들 같이 어리석고, 고집이 세고, 조심성이 없고, 놀기를 좋아하는 장난꾸러기들이었 습니다. 사실상 예수님 세대의 유대종교가들은 거룩한 종교를 가장하고 장터에서 외 식하는 장난꾸러기들이었습니다.
Ⅲ. 예수님의 천국 운동은 애곡하고 춤추는 복음 운동이라고 한 사실 입니다. 마태복음 11장 19절 하반절에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 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의 초점은 하나님의 복음(지혜)은 그 복음 자체의 역사로 말미암아 구원 얻을 사람에게 믿음의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 보기에 슬프게 보이는 애곡이나, 기쁘게 나타나는 춤추는 복음 운동이 그 결과는 구원으로 이어지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즉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천국 운동은 애통하고 춤추는 복음 운동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천국 운동은 애통하는 운동이요, 춤추는 운동입니다. 다시 말하면 애곡과 피리운동이라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애곡하면서 온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 시면서 우리 중에 오신 사람입니다. 기독교는 철두철미하게 죄인의 종교입니다. 죄는 모든 인류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비극이요, 아픔이요, 슬픔입니다. 그것은 모든 삶의 욕구를 절단내어 버리는 사망의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이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강세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 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은 죄인을 향하여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 라 고 한 것이 그의 처음 메시지가 되었습니다(막 1:15). 말하자면 회개와 천국입니다. 애통과 천국입니다. 그래서 저 유명한 산상수훈 중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였습니다(마 5:4). 여기 예수께서 말씀하신 애통 은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슬픔을 가리킵니다.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함은 '곁으 로'+'부른다'의 합성어로 예수의 영접을 받음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요 천국입니다. '애통'과 '위로'는 바로 천국 운동의 특성이란 사실입니다.
※자기 죄에 대한 애통, 예수의 용서와 구원에 대한 기쁨! 그것이 바로 천국 운동입니다. 예수로 말미암는 회개와 믿음은 영원한 구원의 기쁨 으로 춤추게 되는 행복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제일 먼저 일어나는 반응이 자기 죄에 대한 슬픔과 애통, 회개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 구원의 사죄로 말미암는 사죄의 기쁨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된 자라면 누구든지 경험하는 기본적인 은혜체험입니다. 그리스도 안의 새사람의 기본 출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시대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무감동, 무반응, 무관심, 무감각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가리켜서 피리를 불어도 춤출 줄 모르고, 애곡하 여도 슬퍼할 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복음, 예수, 구원, 천국, 영생에 대한 이 세대의 특징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대의 사람들이 장터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의 사람들은 장터에서 사고, 팔고,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육체 적 욕구 충족의 타락성 때문에, 그 시장 밖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일들에 대하여 전혀 마음을 쓰지 아니하려 합니다.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하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 유명한 천국 운동의 비유, 곧 왕자(王者)의 혼인 잔치 비유로 이 악한 세대의 표정(表情)들을 설명한 것입니다. 천국은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 나라 의 임금님은 그 아들 곧 왕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고, 모든 것을 다 갖춘 잔치 를 준비했습니다. 큰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종들을 보내어 왕께서 준비한 왕 자의 혼인 잔치에 오라고 사람들을 초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반응은 실로 처 참하리 만큼 냉정하였습니다. 모두 다 일치하게 사양(거절)하였습니다. 나는 밭을 샀으매, 나는 소를 샀으매, 나는 장가를 들었으매 가지 못하겠다는 이유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일치하게 왕의 잔치 따위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큰 이유는 왕의 잔치보다는 자기의 밭(부동산), 소(동산), 장가(육체적인 쾌락)에 더 관심이 있었고, 기대가 있었고, 즐 거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마 22:1-14, 눅 14:15-23). 천국보다는 이 세상, 영생보다는 현실, 영혼보다는 육체의 일들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왕(하나님)에 대하여, 왕자(예수님)에 대하여, 왕자를 위한 잔치(구원의 복음)에 대하여 무반응이요, 무감각이요, 무관심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애통이나, 예수의 용 서에 대한 기쁨 따위는 참으로 관심 밖의 일로 간주되어 버립니다. 오히려 장터에서 의 장난(놀이)이나 농담으로 여겨 버리는 이 세대의 표정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인 교회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주일예 배나 교회의 각종 예배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이 세우고, 보내신 전 도자들을 통하여 외쳐지는 설교(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하여 무관심이요, 무반응입니다. 교회의 각종 모임과 각종 기도회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교회가 받은 그 시대적인 사명수행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전도와 선교, 구제운동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각종 사랑의 봉사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함 에 대한 무감각입니다. 무감각, 무관심, 무반응, 무표정, 무감동의 특징은 모든 활동의 중지(stop)입니다. 모든 활동의 중지는 바로 죽음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생명이 없는 무생물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송장에게 옷을 입혀 본 경험이 있습니까 참으로 힘든 작업 중의 하나입니다. 송장을 방바닥에서 바로 앉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송장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울 수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감각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 입니다. 호흡이 끊어진 결과입니다. 호흡을 해야 피를 온 몸에 돌게 하고, 피가 온 몸에 돌아야 사람에게 각각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런 활동이 정지되어 버리면 전혀 무감각, 무반응, 무표정, 무감동, 무관심의 상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각 기능'은 바로 생명과 직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감각, 무관 심은 죽음과 직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육신 생명의 감각 기능은 호흡작용과 관계 하고 있습니다. 영적 생명 작용도 영적 생명의 호흡과 관계합니다. 바로 그것이 물과 성령님으로 거듭나는 새 생명의 역사입니다. 영이 죽은 사람은 영적인 일, 곧 하나님의 나라, 천국 복음 운동에 무반응이요, 무관심이요, 무감각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운동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가 받은 진정한 은혜는 애 통(슬퍼함)과 기쁨(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천국 비유는 그 내용이 모두 기쁨 과 즐거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저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잃은 양을 찾는 비유나,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나, 돌아온 아들에 대한 비유의 마지막은 저희가 다함께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잔치한다고 하였습니다(눅 15:5-7, 9-10, 23-2
4). 바로 애통하고 춤추는 천국운동의 특성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라고 하시던(눅 6:21) 예수님의 말씀은 천국 복음 운동의 달콤한 맛을 우리에게 싣고 옵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자기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입니다. 결 코 귀신들린 자들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구원)로 말미암아 아이들이 장난하는 장터 (세상)에서 기쁨의 춤을 추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많은 사람을 옳은 데 (예수)로 돌아오게 하는 복음의 표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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