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이 있는 부름 (마11:28-30)
본문
1. 현대인의 삶의 특징을 말하려면 '바쁘다'는데 있습니다. 아침에 다 같이 일어나 밭으로 나가 일하고, 저녁이 되면 다 같이 들어와 잠자던 농경사회와는 달리,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출근하고 퇴근하는 산업사 회, 과학 기술사회에서 그 흐름에 발마추어 살려다 보니, 옛날에 비하여 얼마 나 바빠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통 수단도, 통신 수단도, 심지어 가정의 식탁에까지 빨리빨리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침 출근에서부터 저녁 퇴근에 이르기까지 바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유치원 학생들도 바쁜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침 먹고 세수하고 유치원에가 12시까지 공부하고, 집에 오자마자 피아노 학원, 미술학원, 속셈학원 등등.쉴 틈이 없습니다. 모두가 남보다 먼저 뛰고 달려서 일등을 해야 그것이 '성공'이라고 평가를 받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뛰고 또 뛰어도 앞선 사람이 있기에 죽을힘을 다하여 달리고 또 달 립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중 현대인을 이렇게 비유한 것이 있습니다. 어느 양지바른 산중에서 토끼가 낮잠(午睡)을 자고 있는데 그만 도토리 한 알이 콧잣등에 떨어졌습니다. 갑자기 놀라 깬 토끼는 무조건 달리기 시작하였 습니다. 토끼가 뛰는 것에 놀란 꿩이 후닥닥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습니다. 그 주위에 있던 노루도 놀라서 뛰게 되었고, 호랑이, 늑대, 여우, 각색 동 물이 모두 한결같이 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참 숨이 하늘에 닿도록 달리던 동물들이 누군가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뛰고 있지"하니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현대인의 삶이라고 은유(隱喩)적으로 말하였습니다. 즉 아무런 삶의 목적도 없이 그저 남들이 하는 그대로 바쁘게 일상생활에 매몰되어 자신 의 실존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의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무런 삶의 의미도 못 느끼 면서도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살아간다는 말 입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보면 모두가 자기를 잃어 버린 채, 남에게 보조를 맞 추어 살려고 하다보니 분주하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가을이 되어 가을을 타는 사람들 중에서는 남들처럼 단풍놀이도 가야 하고, 또 주부님들 가운데는 옷 때문에 불편스러움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여름내 입었던 옷을 참기면서 가을 옷을 꺼내 보니, 하나같이 입을 만한 옷이 없다고 아마도 그런 것 때문에 오늘 아침 다투고 교회에도 나오지 못한 사람들도 없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옷도 유행에 맞추어 입어야 하겠고, 머리스타일도 유행에 맞추어 해 보고 싶고, 그리고 집안 가구(家具)들도 남들이 좋아하는 그런 것으로 바꾸어 보고 도 싶고, 모두 남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려다 보니 바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고 하 면서도 얼마나 세상적인것들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2. 그러다 보니 우리의 마음 밭은 묵은 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영(靈)이 살아 있어야 '성령님의 사람들'이라고 하겠는데, 그 성령님이 들어와 있을 방이 없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를 영접할 방이 없어 말구유에 뉘이셨던 것처럼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마음 속에 주님을 모셔들일 방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크리스천들을 보면 과거에 비하여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문분야에서 엘리트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경제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깊이 반성해야 할 점은 주님이 가신 길을 걸어가는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사는 그러한 삶을 의미합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은 날마다 죽고 날 마나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날 마다 주님과 함께 죽고, 날 마다 주님과 함께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고, 그를 따르겠 노라고 나선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주인 되신 주님을 제쳐 버리고 자신의 육신 적 욕심대로 살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아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영적 성장은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될 수 없습니다. 영적 성장은 학벌과 전문지식과는 무관합니다. 아무리 세상 지식이 많아도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랫동안 나오고, 형식적으로 직분을 받았다고 해도 그런 것 으로 영적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 범죄의 양상이 점점 전문화되어 갑니까 전문지식인들이 범하는 죄가 전문화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죄는 모두 탐심과 욕심으로 좇아온다고 하였습니다.(약1:15) 또 정욕을 좇아 죄를 범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약4:1) 죄는 거짓의 아비 마귀에게서부터 기인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8:44)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영이 메말라지고, 심령의 밭이 묵은 밭이 되어 가는 것은 세상의 잡초들이 너무 많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탐심으로 눈을 멀 게하고, 정욕으로 유혹하는 사탄의 세력에 의하여 마음들이 황폐해 졌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둔감해져 도무지 가책을 느끼지 못 하는 자리에까지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요즘 제가 어떤 글을 읽는데 양심(良心)을 양심(兩心)으로 표기해 놓은 것 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오늘의 세태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각계각분야에서 양심(良心)의 소리보다는 양심(兩心)의 소리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정치가들이나, 종교가들, 심지어 우리 크리스천 들까지도 두마음으로 말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굴도 붉히지 않은 채 일구이언(一口二言)하는 경우들을 보면서, 가장 두 려운 것은 죄책감(罪責感)이 없어졌다는데 있습니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죄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못 느낀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비방하는 어떤 사람이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목사님! 교회에서는 늘 죄의 짐이 무거운 것이라고 말하고, 목사님들이 죄 짐을 벗어 버려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아무 짐도 못 느끼거든요. 도대체 그 죄짐이라는게 얼마나 무게가 나갑니까 한 50파운드 나가나요 아니면 100파운드쯤 되나요" 목사님이 그 사람을 한참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 만약 여기 죽은 사람이 누워있는데 그 사람 위에 무거운 짐을 올려 놓는다면 그 죽은 사람이 무게를 느낄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죽은 사람이 무슨 무게를 느끼겠습니까" 이때 목사님이 "선생! 바로 그것입니다. 죄 가운데 죽어있는 상태에서는 죄 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죄가운데 양심이 죽어있는 사람이 어떻게 죄짐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영(靈)이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이기에 죄책을 느낍니다.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이기에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탄하게 된다는 말 입니다.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해 내랴" 고 사도 바울과 같이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영혼의 갈 급을 느끼 고 있는 사람입니다.
3. 죄짐에 눌린 사람들이 그 짐을 내려놓을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종교 개혁자 루터는 어느 날 친구와 함께 들판 길을 걷다가 갑자기 낙뢰에 함 께 가던 친구가 쓸어져 죽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죄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을까 그것을 위해 무던히 애썼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고 계명을 지키려고 했고, 수도원에 들어가 수 도원의 모든 계율(戒律)을 남보다 더 성실하게 지키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 러면 그럴수록 마음의 시원함도 없고 왜 그런지 마음에 평안히 없었습니다. 반복되는 일과 속에서 그는 교황청을 방문하여 보다 높은 수도사들을 본 받 아 보려고 했지만, 막상 저들의 일상생활에 실망을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기도문을 아무리 암송하고 기도에 기도를 해도 클클한 마음은 살아지지 않 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편 31편 1절을 읽다가 무릎을 치며 깨달았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In You, O LORD,
I put my trust; Let me never be ashamed; Deliver me in Your righteousness). 여기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Deliver me in Your righteousness)라는 말에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당신의 의'로 나를 건져 달라는 말이 새삼 가슴 을 두근거리게 하였습니다. 지금껏 루터는 자기의 의로 하나님 앞에 옳게 설줄 그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토록 고행을 하면서, 자기갈등을 느끼면서 살아왔는데, 그래서 구제 불능의 죄인임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구나하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렇다! 나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것이아니라, '주님의 의로 내 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그렇게 깨달았습니다. 그 후 그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참 평안이 마음에 깃들이 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비록 죄중에 있지만, 당신의 의로 나를 구원하실 그분 이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는 감격! 감격!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루터와 같이 아직도 복음의 은총에 감격하지 못하고 믿는 생활 이 클클하고 답답한 분들이 계십니까 오늘의 본문을 깊이 음미하셔서 그 뜻을 바로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주님께서는 지금도 부르시고 계십니다. 여기 무거운 짐이란 죄로 인한 짐을 말합니다. 죄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입니다. 다른 곳에서 쉼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성능 좋은 오디오로 마음을 달래 보려고 해도, 거기에서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넓고 큰집에 살아도, 거기에서 죄의 짐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죄의 짐은 숨기면 숨길수록 더 커져 갑니다. 죄의 짐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죄의 짐을 어디에서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죄의 짐은 우리에게 쉼을 주시려고 부르는 '그 분'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의 짐을 해결해 주실 뿐입니다. 우리가 지난번 성지에 갔을 때, 바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걸어가신 그 길을 밟아 보았습니다. 채찍에 맞으면서 쓰러졌던 곳마다 교회당이 세워졌고, 오늘도 수많은 순례 객들이 그 길을 걸으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바로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영원한 쉼이 있는 부름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자신이 보아도 구제불능의 죄인들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나의 의(義)가 아니라, 주의 의(義)로 나를 세워 주겠기 때문 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과거의 죄책감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고민하고 있습니까 주 앞에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배에 올랐으니, 짐을 내려놓아야 하겠습니다. 거기에 복음적 신앙의 확신과 하나님께 향한 자발적 응답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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