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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의식에 도전하라! (막9: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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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 배우는 외국사람들 정말 어렵게 만드는 말이 있습니다. 말은 저주스런 말인 데 사랑스런 애칭으로 쓰는 겁니다. 문디자 식! 징그럽다! 망할 놈! 앞의 두 말은 경상도에서는 좋다는 말로 통합니다. 뒤의 말도 때에 따라서는 그렇게 나쁜 감정이 아닌데 도 씁니다. 좋고 좋은 말 다 접어 두고 이런 말을 막 씁니다. 이 만큼 부정의식은 만연해 있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살인은 한 사람 밖에 죽이지 않 지만, 험담은 반드시 세 사람을 죽인다' 험담을 말하는 바로 그 자신,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 험담의 주인공 이렇 게 세 사람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면 자신도 죽고, 듣는 사람도 죽이고, 말의 대상자도 죽입니다. 대개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인 의식에 뿌리를 대고 있습니다. 때문에 사단은 인간에게 부정적 의식을 집어넣습니다. 특히 하나님 을 향한 인간의 생각에 대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부정적 인 의식을 가지고 실패한 성경적인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일 먼저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따 먹지 말라고 하더냐 아니다 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는 거야! 하나님은 너를 이용하고 있어!" 사단은 이렇게 하와 에게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을 자꾸 심어줍니다. 결국 그 싹은 무성하게 자라 하나님 배반으로 이어집니다. 사단은 믿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 밭에 부정의식이란 씨를 뿌립니다. 또 다음은 광야의 이스라엘입니다.
모세가 이끌던 광야의 이스 라엘은 어려울 때 한껏 부정의식이 싹 텄습니다. 홍해를 앞두고 에굽 군대의 추격을 받을 때, 신광야에서 먹을 것이 떨어 졌을 때, 마라에서 쓴물이 나올 때 하나님께 대한 부정의식에 폭발합니다. '우리를 광야에서 죽이려고 이끌어 냈구나' 이런 부정의식 입니다. 그러더니 결국은 모세가 시내산에 십계명을 받으러 갈 때는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고 맙니다. 결국은 이방신의 소유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음은 한 달란트 받은 자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 두 달란 트 받은 자는 모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일을 합니다. 주 인들 적극적인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주인에 대한 신뢰가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주인은 손해를 보더라도 이해해 주시겠지 이렇게 신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이렇게 주인을 인색한 사람, 엄격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손해볼 때를 먼저 생각합니다. 주인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그래서 땅에 묻어 두고 한 달 란트 그대로 쏙 꺼내 가지고 오는 겁니다. 이게 부정적인 의식이 예요. 특히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은, 대개 하나님에 대한 신뢰 상실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사단의 공격에 무너지는 겁니다. 부정적 의식은 사단이 주로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부정적 의식에 도전하고 하나님 신뢰를 잃지 않은 승리 의 사람도 성경에는 많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두로와 시돈 근처의 이방 여인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딸의 병을 위 해 예수님께 간청을 합니다. 제자들은 거들어 주지 않고 오히려 핀잔을 주고 방해를 합니다. 예수님도 '자녀들의 떡을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시면서 요청을 거절합니다. 상황은 최악의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끈질긴 간청과 낙관으로 상황을 돌파합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물론 다급해서이기도 하지만, 이 여인은 자신의 내부에서 싹트는 부정적인 의식과 싸운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돋아 오는 부정적인 의식을 순 간 순간 싹뚝 싹뚝 잘라 버렸습니다.
"그래, 이 정도로 애걸 복걸 을 했는데도 매몰차게 거절하시는 걸 보니 안되겠구나!,글렀구나! 하긴, 자기네 유대인들도 다 고쳐 주지 않는 데, 나 같은 이방 여 인을 상대해 주시겠나 예수님도 딱 부러지게 거절하고 있잖 아 그냥 포기하자. 무슨 수로 상황을 뒤집어. 끝장이야!" 뭐 이 런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과 투쟁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결국 이 여인은 이런 부정적인 의식과 싸워 이겨 딸의 병을 고침 받습니다. 큰 믿음이란 칭찬도 받습니다. 그 다음 사례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던 이스라엘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참 믿음이 좋았습니다. 부정적인 의식을 집단적으로 말끔히 몰아냈습니다. 승리였습니다. 여리고 성 잘 아시지요. 매 일 한 번씩 엿새 동안 돌고, 일곱째 날에는 성을 일곱 번 돕니다.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수6:10) 성을 도는 동안은 기침 소리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 침묵을 유지해야 했지요. 또 성을 돌 때의 격식은 까다로왔습니다. 맨 앞 에는 무장 군사들이 앞서고 본 대의 맨 앞에는 일곱 제사장이 일곱 양각 나팔을 불며 나갑니다. 그 뒤에는 법궤가 따르고, 맨 뒤에 이스라엘 백성이 따릅니다. 이렇게 격식을 차린 수 십만 군 중이 절대 침묵을 유지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칠 일 동안 쓸데없는 짓 같아 보이는 이 어려운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 사이 불평도 싹트고, 원망도 싹트고 한 숨도 싹텄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부정적인 의식이 날을 더해 갈수록 더 커졌을 것 입니다. 일곱 째 날이 가장 위기의 순간이었겠지요. 금방 중간에 서 '이 무슨 짓거리야! 나는 도저히 못해 먹겠다! 이런 어린 애 같은 장난으로 난공불락의 성이 함락 되는 줄 아쇼 때려치웁시 다" 이렇게 고함을 치며 대열을 이탈할 사람이 금방 생길 것 같 은 숨막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부정의식이 폭발할 것 같은 인간의 한계 지점인 일곱째 날에는 하나님은 일 곱 바퀴를 돌라고 합니다. 평소처럼 한 바퀴도 아니요 줄여서 반 바퀴도 아닌, 일곱 배나 더 돌라고 합니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 어요!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가 슴 깊이에서 끝내 부정의식을 극복하고 깊은 여호와 신뢰를 하느냐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성을 돈다고 무조건 성이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 신뢰가 여리고 성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해요. 부정의식을 깨부수고 바위처럼 굳은 신뢰와 긍 정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적을 낳습니다. 부정적인 의식, 불평 과 원망, 절망과 투쟁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신뢰, 절대 낙관, 절대 긍정, 절대 희망, 여기에서 기적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의 아 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이 불쌍한 아들은 귀 신이 들려 발작을 하면 불에도 뛰어들고 물에도 뛰어듭니다. 그 자리에 넘어지면 거품을 품고 뒹굽니다. 아주 어릴적 부터 그렇 게 되어 이제 제법 장성했지만 차도가 없습니다. 아주 오랜 세 월 이 아들로 인해 가족들은 숨 한번 제대로 쉬어 보지 못했습니다. 한숨과 고통의 세월이었습니다. 특히 이 아버지는 가슴에 큰 못을 밖아 놓은 것처럼 응어리진 아픔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처 음에는 제자들이 고치려고 시도를 했지만 실패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더 부정적이 생각 이 늘어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 옵소서"(22절) 헬라어로는 ei ti du,nh입니다. "만약에"입니다. 부정적인 냄새 가 강합니다. 물론 제자들에게서 한 번 실망하고난 뒤끝이니 당 연하겠지요. 그래도 수로보니게 여인에 비하면 이 아버지는 너무 나 부정적인 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수모를 무릎 쓰고 아들 을 용감하게 끌고 온 것까지는 잘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부정적 인 의식을 떨쳐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끝까지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끝 까지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낙관은 마지막까지 밀고 가야 합니다. 한 두 번에 실망하고, 한 두 번에 불신하고, 한 두 번에 주저앉고, 한 두 번에 철회하고, 한 두 번에 회의하는 것, 이건 믿음이 아닙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상황이 악화 될수록, 부정적인 의식은 커집니다. 그럴수록 신뢰와 낙관, 긍정과 희망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럴수록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신뢰를 자신 에게 먼저 선포해야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고백이 보잘 것 없어요. 아주 초라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 옵소서"(22절)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 바로 눈앞에 있는 데, 도와주려고 와 계시는 데, '만약에'라고 말합니다. '못하시 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하실 수 있으시면' 이런 뜻입니다. 할 수 있다는 쪽이 아니라 못하시겠지만 쪽입니다. 이미 말에서부터 기적을 담을 자세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선포하는 말 자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꾸 부정적인 말을 선포하면 자꾸 부정적이 됩니다. '아 피곤하다'하면 더 피곤 해 집니다. '아 죽겠다'하면 진짜 죽고 싶어집니다. '나는 안돼. 구제불능이야' 이러면, 정말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인간이 되는 겁니다. 자꾸 절망적인 말을 하면 더 절망적이 됩니다. 자꾸 악한 말을 하면 더 악해 집니다. 자꾸 쾌락적인 말을 하면 더 쾌락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니 말의 선포가 참으로 중요해요. 돌이켜 자신에게 이런 선포를 해야 합니다.'나는 하나님의 자녀 야! 주님이 다 아셔! 주님이 나를 지원하고 있어! 내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야! 창조의 능력이 지금 나와 함께 하고 있어! 나는 할 수 있어!" 이렇게 선포하면 진짜 그렇게 고백한대로 되는 것 입니다. 예수님이 이 아버지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할 수 있거 든이 무슨 말이냐"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이 부정적인 언사가 귀에 거슬렸으면 그 말을 한 번 그대로 되씹어 보시는 것일까요 "벌써 낙관과 신뢰를 포기하느냐" 이런 말씀 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23절) 모든 것이 가능한 데(All things are possible), 왜 부정적인 의식 에만 머물러 있느냐 이런 책망입니다. 이 책망을 들은 아이의 아버지는 곧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23절) 여기서 '곧' 이 라는 말은 황급히 라는 말로 번역을 해도 좋습니다. 아주 급하게 황급히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의식을 아주 격정적으 로 돌이키는 순간입니다. 마치 영화의 자동차 추격 장면에서 앞 을 향해 달리고 있던 차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고 유턴해서 갑자기 돌아서듯이 말이지요. 그래서 이 아버지는 위대했습니다. 긍정과 신뢰의 전환점을 마 련한 것입니다. 이래야 합니다. 부정적인 의식은 급브레이크를 밟 고 턴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와처럼 됩니다. 부정적인 의식은 금새 싹터 무성한 나무가 될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부정적인 의식은 끝내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일으켜, 전 이스라엘을 집단적 불평과 원망에 빠뜨릴 것입니다. 부정적인 의식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의기소침과 자기 연민을 낳습니다. 그 대상에 대해서는 원망과 분노를 낳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불신을 낳습니다. 반면에 낙관과 긍정의식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용기와 용납을 낳습니다. 그 대상에 대해 서는 신뢰와 도전의식을 낳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신 앙을 낳습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의식은 자꾸 사람을 부정적으로 만들고, 자꾸 비관적으로 만듭니다. 비판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부정의식이 나 쁜 것입니다. 비판은 건설과 긍정이 될 수도 있지만 부정의식은 파멸과 파괴가 됩니다. 긍정은 긍정을 싹 틔우고 부정은 부정을 싹 틔웁니다. 때문에 가장 멋있는 사람은 "지독한 낙관주의자"입니다. 비판은 칼 같이 하면서도 지독한 낙관주의자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래에 대해, 인간에 대해, 역사에 대해, 특히 하나님 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에 대해서는 지독한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언자들 잘 보세요. 예언자들은 비판 전문가이긴 하지만 희망 과 낙관을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예언서의 구조를 잘 살펴보면 전부 끝에 가서는 희망의 멧세지입니다. "하나님을 거 역한 이스라엘 부정 부패한 너희들은 이렇게 망할 것이다"하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재앙을 선포하지만, 끝에 가서는 항상 하나님 께로 돌아오면 이런 희망의 무지개가 있다고 힘주어 선포합니다. 이것이 진짜 예언자들입니다. 사회운동을 하시는 분들, 비판적 실 천을 하시는 분들, 이것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정의 출발은 긍정이어야 합니다. 부정의 종착점도 긍정이어야 합니다. 세속의 철학으로 따져봐도 이래야 변증법적 발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한 발짝 더 나아가지요. 비판을 하는 우리는 지독한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자체가 희망이요, 낙 관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정죄하고 고소하는 것이 전문이지만, 우리 주님은 속죄하고 용서하고 생명 주는 것이 전문입니다. 용 서, 사랑, 속죄, 생명, 소망 이것 전부 긍정과 낙관의 이미지입니다. 그런 까닭에 복음 자체가 긍정이요, 낙관입니다. 이것 깊이 깨달아야해요. 그렇지 않으면 진짜 골수로 부정적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신앙색깔도 회색빛으로 칙칙해요. 부정에서 시작해서 부 정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기독교인들, 이 긍정과 하나님에 대한 낙관 이 싸구려가 됐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데나 막 능력을 동 원합니다. 무조건 가능성의 신학입니다. 그러다 보니 고난은 패배 요, 희생은 죄악처럼 취급됩니다. 안될 말입니다. 그런의미에서 바울의 빌립보서 4장의 고백은 우리에게 참 많은 도전을 줍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3)하나님의 능력은 물론 축복을 주는 능력이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고난을 견디는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 이 빌4:13에서 말하는 긍정은 고난에 대한 긍정입니다. 감방 생활을 자족하는 낙관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그러나 너희가 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 하였도다"(빌4:10-14) 일체의 비결입니다. 비천이나 존귀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궁핍 이나 부요나 다 일체로 초월하는 힘입니다. 견디는 힘, 자족케 하는 힘입니다. '괴로움에 참여케 하는 능력'입니다. 고난에의 능 력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싸구려가 아닌 고상한 능력이 되는 것 입니다. 바울처럼 이 정도가 되면 부정의식을 완전히 극복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부정의식 그 자체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상황을 초 월한 것이 아니라, 부정 의식 그 자체를 초월하게 되요. 초막에서 도 하나님을 긍정합니다. 비천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감방 에서도 하나님을 낙관합니다. 배고픔에 떨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희망의 무지개를 잃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단은 대책이 안 서는 것입니다. 사단은 공격의 목표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서 나 어느 때에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자 보세요!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 함이 없느니라" 이것 어느 회사 구호 아닙니다. 이것 어느 수험 생의 책상 앞 구호가 아닙니다. 이것 군대 구호가 아닙니다. "칠 전팔기! 불가능은 없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뭐 이런 류의 구호 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의 낙관과 긍정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의 긍정과 도전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긍정 자체인 기쁜 소식 복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 주님이 말씀 하셨기 때문입니다.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막 9:23) 우리의 낙관의 근거는 바로 이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곧 소 리를 질러야 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이 말씀으로 다시 도전하십시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 으셨는데 우리가 스스로 포기할 수는 없지요. 우리의 무한하신 능력이요, 우리의 지성이요, 우리의 미래 계획이신 주님이 계시는 데 우리가 주저앉을 수는 없지요. 우리 스스로 부정의식과 연민 에 빠질 수는 없지요. 주님이 말씀 하셨으니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강하게 도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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