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拒絶)의 은혜 (막7:24-30)
본문
우리는 때때로 여호와 하나님이 왜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느냐 왜 내 요구를 거절하느냐 그래서 낙심하고, 원망하고, 돌아서는 일까지 생 깁니다. 교회를 등진 사람들, 중도에 믿다가 낙심하고 세상으로 다시 나간 사람 들을 보면 모두 위와 같은 내용들입니다. 내 요구를 거절하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내가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서 지금도 방황하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는 많다고 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참 신앙이란 [거절의 은혜]를 깨달을 때 비로소 성립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몇 가지 거절의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주님의 무덤을 찾아가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한 주님을 보고 너 무나 감격스럽고 반가워서 만지려고 할 때, 예수님은 "나를 만지지 말라"고 거 절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건은 인간이 접촉할 수 있는 영역(領域)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었습니다.
2 둘째로 모세가 떨기나무에 불을 보고 접근해 갈 때 가까이 오지 말라고 거절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속된 인간이 직접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 신을 벗어 들 라"고 하였습니다. 속된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셋째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구를 거절하였습니다. '자녀의 손에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믿음의 가치를 한층 더 높이게 하려고 시험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 신앙>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겠는가를 살필 수 있습니다. 즉 <참 신앙>이란 하나님만이 지배하는 절대 주권의 사건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절대 주권의 영역을 인간의 손으로 더듬어 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성(理性)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 보고 이러쿵 저러쿵하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절대 주권의 세계를 인간의 감각 세계에서 만나려고 하는 데서 문제는 생깁니다. 대부분의 경우 신앙의 세계의 것을 현실의 감각 세계에 서 확인하려다가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보면 더 열심히 믿어보려고 하다가 곁길로, 이단으로 떨어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절 대적 주권의 세계의 것을 자기의 감각 세계에서 만져보고 느껴보려고 하다가 실 족하는 경우들이기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6.25 직후 피난생활중에 대구에 머물러서 얼마동안 동촌 비행장에 일일 노무자로 일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비행장을 확장하고 보수하는 일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도시락을 들고 나가면 일단 일을 하겠다고 신청을 합니다. 그러면 얼 마 있으면 호명을 합니다. 아무개 아무개라고 부르면 호명된 사람들은 따로 모 이게 됩니다. 몇 명이 모이게 하는 것은 그날의 계획에 따라 합니다. 다 모여지 면 그 다음은 일터가 배당됩니다. 돌산! 하면 돌을 떠서 잘게 빻아서 활주로에 까는 일로 돌산으로 가야 합니다. 골탄! 하면 골탄을 녹여서 차에 실어서 보내는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돌산 아니면 골탄으로 배치를 받습니다. 어쩌다 다른 일에 뽑히는 날이면 그날은 횡재한 날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노동 자들이 하는 말들 중에 교회에 대한 예수 믿는 일에 대한 말이 나오면 으례이 하는 말이 "누가 천당엘 가본 사람이 있어하나님 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고 그래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지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다는 말인가" 등등 별별 조롱하는 말들을 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아마 이것은 마찬가 지일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능력의 세계의 것을 인간의 감각 세계에서 확인하려고 하는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의 것은 그가 보여주는 계시(啓示)의 범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것의 좋은 대표적인 경우가 도마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못자국의 손을 만져 보라고 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너는 본고라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라고 하였습니다.(요20:29) 보지 못하고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감각 세계의 것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세계를 확인하지 않고서도 믿는 그것 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거절의 내용이 무엇이든 거기에 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가 안 이루어지고 소원이 성취되지 않으며, 원치 않는 사고와 사건이 일 어날 때, 하나님이 나의 호소를 거절하는 것과 같이 느껴질 때, 도리어 믿음은 필요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나, 모세에게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수로보니게 여자에게 나, 공통적인 것은 <거절은 곧 수락>이라는 사실입니다. 거절을 통하여 깊이 있는 부르심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일들은 하나님의 거절이 아니 라 또 다른 부르심이란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대로 거절을 통하여 그 여인의 믿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 거절은 사랑에 넘친 신앙의 훈련의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음이 있다고 교만해질 때가 사실은 믿음이 가장 약할 때입니다. 믿음은 내가 구축하는 재능이 아닙니다.
또는 기득권처럼 들고 다니는 것 이 아니라 주님이 "네 믿음"이라고 인정해 주는 것이라야 참 믿음입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개(犬)라는 말을 들었다면 다 돌아섰을 것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줄 수 없다"고 했을 때 "뭐 이따위가 있어!당신이 메시아야사랑을 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비난했 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주님의 거절을 도리어 은혜로 받아들였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개들도 주인의 상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믿음으로 수납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이 여자의 믿음을 보시고 "네 믿음이 크도 다"라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이 무엇입니까 참 믿음은 거절을 통하여 내 간구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거절되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또 다른 수용(accept)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먼저 하나님은 고향을 거절토록 하였고, 옛 일가친척, 아비집 을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나이 75세 때에 고향을 떠나라는 것은 일종의 거절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은 일대 모험입니다. 더욱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은 최대의 거절입니다. 이렇게 신앙은 먼저 거절의 과정을 거쳐서 수용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성(Reason)은 하나님이 우리에 준 좋은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성으로만 가치와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살려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 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 이 아닙니다. 신앙의 세계를 아직도 이렇게 자신의 머리 속에 넣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앙은 맡기는 일입니다. 신앙은 위임입니다. 신앙은 순종입니다. 노아가 뭇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오랜 세월에 걸쳐 방주를 지은 것은 결코 이성적인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한 노아와 그 가족은 구원 받았고 스스로 이성적이었다고 생각한 다른 사람들은 멸망하였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장차 애굽의 왕권을 잡을 그가 그 영화를 뿌 리치고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할 고난의 길을 택한 것은 결코 이성적 판단은 아니 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하였더니 위대한 역사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목동이었던 다윗이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향해 나갔던 일은 결코 이성적인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바보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믿음으로 행하였기 때문에 엄청난 대 승리를 하였습니다. 세관에 앉아서 돈을 잘 벌던 마태가 예수의 부름을 듣고 그 돈 방석을 훌쩍 던져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은 결코 이성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하였기에 역사에 영원히 기록된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는 예수님을 뵙고 자기도 물위를 걷게 해 달라고 한 것은 결코 이성적인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하였기에 바다를 걸을 수 있는 기적을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12년간이나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낫겠다 고 생각한 것은 이성적으로는 얼토당토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행하였기에 소원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많은 사건들,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서 우리는 믿음의 행위들을 봅니다. 이성의 세계에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믿음의 세계에서는 이루어 졌습니다. 오늘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다 포기했던 사람이 멀쩡하게 다시 회복하였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육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역의 세계를 감각적 세계에서 이해하려 합니다. 그럴 때는 거절당합니다. 아직도 내 생각이 앞서고, 내 판단이 위주가 되고, 내 주장이 지배하는 동 안, 하나님은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그 거절이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신앙의 세계로 부르는 부름입니다.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그물을 내렸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그물을 <말씀에 의지하여> 내린 것은 이성적 행위가 아니라 신앙의 행위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행위입니다. 거절을 통하여 터득한 신앙의 행위가 필요한 때입니다. 미국의 제이 씨 페니(J.
C.Penney) 백화점은 대중적이면서도 곳곳에 존재하고 있는 백화점입니다. 백화점 사업의 대 성공한 페니는 나이 40세때에 수백만 장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929년의 경제 공황이 전 미국을 휩쓸 때 그는 무일푼 으로 파산했습니다. 페니는 실망과 패배감에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 나 입원 비마저 제대로 낼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얼마전 까지도 수백만 장자였 던 그가 치료비를 걱정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그의 심적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 까 페니는 자기가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부인과 자녀들에 게 유언장과 같은 고별의 편지를 써놓고 잠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눈을 떠 보니 죽지않고 살았습니다. 더욱이 기분이 많이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 때에 병 원 복도의 저 끝에서 잘 알려진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 리" 페니는 자기도 모르게 병실을 나와 그 찬송이 들려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 겨갔습니다. 복도 끝에 작은 예배실까지 간 그는 맨 뒷자리의 빈 의자에 몸을 의지했습니다. 페니는 진심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님,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습니다. 주님, 이 사정을 돌아보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고백하기를 이 기도 후에 자기의 마음을 누르던 무거운 짐이 다 떠나버렸다고 했습니다. 그가 예배실을 나올 때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 때부터 페니는 매사에 그리스도를 섬기는 믿음으로 사는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이 씨 페니의 사업은 다시 회복되기 시 작하였고, 그는 파산 전에는 소유하지 못했던 하늘의 영생을 감사드리며 이 땅 에서도 장수의 복을 누린 성공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신앙은 이렇게 거절을 통한 수락의 체험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야 튼튼하게 서 있게 됩니다. 그래야 어떤 경우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거절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특별히 요즘처럼 어려운 시절에 하나님을 바로 만날수 있는 체험적 신앙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첫째로 주님의 무덤을 찾아가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한 주님을 보고 너 무나 감격스럽고 반가워서 만지려고 할 때, 예수님은 "나를 만지지 말라"고 거 절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건은 인간이 접촉할 수 있는 영역(領域)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었습니다.
2 둘째로 모세가 떨기나무에 불을 보고 접근해 갈 때 가까이 오지 말라고 거절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속된 인간이 직접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 신을 벗어 들 라"고 하였습니다. 속된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셋째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구를 거절하였습니다. '자녀의 손에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믿음의 가치를 한층 더 높이게 하려고 시험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 신앙>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겠는가를 살필 수 있습니다. 즉 <참 신앙>이란 하나님만이 지배하는 절대 주권의 사건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절대 주권의 영역을 인간의 손으로 더듬어 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성(理性)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 보고 이러쿵 저러쿵하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절대 주권의 세계를 인간의 감각 세계에서 만나려고 하는 데서 문제는 생깁니다. 대부분의 경우 신앙의 세계의 것을 현실의 감각 세계에 서 확인하려다가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보면 더 열심히 믿어보려고 하다가 곁길로, 이단으로 떨어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절 대적 주권의 세계의 것을 자기의 감각 세계에서 만져보고 느껴보려고 하다가 실 족하는 경우들이기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6.25 직후 피난생활중에 대구에 머물러서 얼마동안 동촌 비행장에 일일 노무자로 일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비행장을 확장하고 보수하는 일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도시락을 들고 나가면 일단 일을 하겠다고 신청을 합니다. 그러면 얼 마 있으면 호명을 합니다. 아무개 아무개라고 부르면 호명된 사람들은 따로 모 이게 됩니다. 몇 명이 모이게 하는 것은 그날의 계획에 따라 합니다. 다 모여지 면 그 다음은 일터가 배당됩니다. 돌산! 하면 돌을 떠서 잘게 빻아서 활주로에 까는 일로 돌산으로 가야 합니다. 골탄! 하면 골탄을 녹여서 차에 실어서 보내는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돌산 아니면 골탄으로 배치를 받습니다. 어쩌다 다른 일에 뽑히는 날이면 그날은 횡재한 날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노동 자들이 하는 말들 중에 교회에 대한 예수 믿는 일에 대한 말이 나오면 으례이 하는 말이 "누가 천당엘 가본 사람이 있어하나님 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고 그래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지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다는 말인가" 등등 별별 조롱하는 말들을 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아마 이것은 마찬가 지일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능력의 세계의 것을 인간의 감각 세계에서 확인하려고 하는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의 것은 그가 보여주는 계시(啓示)의 범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것의 좋은 대표적인 경우가 도마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못자국의 손을 만져 보라고 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너는 본고라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라고 하였습니다.(요20:29) 보지 못하고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감각 세계의 것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세계를 확인하지 않고서도 믿는 그것 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거절의 내용이 무엇이든 거기에 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가 안 이루어지고 소원이 성취되지 않으며, 원치 않는 사고와 사건이 일 어날 때, 하나님이 나의 호소를 거절하는 것과 같이 느껴질 때, 도리어 믿음은 필요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나, 모세에게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수로보니게 여자에게 나, 공통적인 것은 <거절은 곧 수락>이라는 사실입니다. 거절을 통하여 깊이 있는 부르심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일들은 하나님의 거절이 아니 라 또 다른 부르심이란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대로 거절을 통하여 그 여인의 믿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 거절은 사랑에 넘친 신앙의 훈련의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음이 있다고 교만해질 때가 사실은 믿음이 가장 약할 때입니다. 믿음은 내가 구축하는 재능이 아닙니다.
또는 기득권처럼 들고 다니는 것 이 아니라 주님이 "네 믿음"이라고 인정해 주는 것이라야 참 믿음입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개(犬)라는 말을 들었다면 다 돌아섰을 것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줄 수 없다"고 했을 때 "뭐 이따위가 있어!당신이 메시아야사랑을 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비난했 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주님의 거절을 도리어 은혜로 받아들였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개들도 주인의 상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믿음으로 수납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이 여자의 믿음을 보시고 "네 믿음이 크도 다"라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이 무엇입니까 참 믿음은 거절을 통하여 내 간구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거절되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또 다른 수용(accept)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먼저 하나님은 고향을 거절토록 하였고, 옛 일가친척, 아비집 을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나이 75세 때에 고향을 떠나라는 것은 일종의 거절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은 일대 모험입니다. 더욱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은 최대의 거절입니다. 이렇게 신앙은 먼저 거절의 과정을 거쳐서 수용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성(Reason)은 하나님이 우리에 준 좋은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성으로만 가치와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살려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 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 이 아닙니다. 신앙의 세계를 아직도 이렇게 자신의 머리 속에 넣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앙은 맡기는 일입니다. 신앙은 위임입니다. 신앙은 순종입니다. 노아가 뭇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오랜 세월에 걸쳐 방주를 지은 것은 결코 이성적인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한 노아와 그 가족은 구원 받았고 스스로 이성적이었다고 생각한 다른 사람들은 멸망하였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장차 애굽의 왕권을 잡을 그가 그 영화를 뿌 리치고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할 고난의 길을 택한 것은 결코 이성적 판단은 아니 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하였더니 위대한 역사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목동이었던 다윗이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향해 나갔던 일은 결코 이성적인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바보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믿음으로 행하였기 때문에 엄청난 대 승리를 하였습니다. 세관에 앉아서 돈을 잘 벌던 마태가 예수의 부름을 듣고 그 돈 방석을 훌쩍 던져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은 결코 이성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하였기에 역사에 영원히 기록된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는 예수님을 뵙고 자기도 물위를 걷게 해 달라고 한 것은 결코 이성적인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하였기에 바다를 걸을 수 있는 기적을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12년간이나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낫겠다 고 생각한 것은 이성적으로는 얼토당토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행하였기에 소원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많은 사건들,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서 우리는 믿음의 행위들을 봅니다. 이성의 세계에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믿음의 세계에서는 이루어 졌습니다. 오늘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다 포기했던 사람이 멀쩡하게 다시 회복하였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육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역의 세계를 감각적 세계에서 이해하려 합니다. 그럴 때는 거절당합니다. 아직도 내 생각이 앞서고, 내 판단이 위주가 되고, 내 주장이 지배하는 동 안, 하나님은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그 거절이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신앙의 세계로 부르는 부름입니다.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그물을 내렸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그물을 <말씀에 의지하여> 내린 것은 이성적 행위가 아니라 신앙의 행위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행위입니다. 거절을 통하여 터득한 신앙의 행위가 필요한 때입니다. 미국의 제이 씨 페니(J.
C.Penney) 백화점은 대중적이면서도 곳곳에 존재하고 있는 백화점입니다. 백화점 사업의 대 성공한 페니는 나이 40세때에 수백만 장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929년의 경제 공황이 전 미국을 휩쓸 때 그는 무일푼 으로 파산했습니다. 페니는 실망과 패배감에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 나 입원 비마저 제대로 낼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얼마전 까지도 수백만 장자였 던 그가 치료비를 걱정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그의 심적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 까 페니는 자기가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부인과 자녀들에 게 유언장과 같은 고별의 편지를 써놓고 잠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눈을 떠 보니 죽지않고 살았습니다. 더욱이 기분이 많이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 때에 병 원 복도의 저 끝에서 잘 알려진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 리" 페니는 자기도 모르게 병실을 나와 그 찬송이 들려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 겨갔습니다. 복도 끝에 작은 예배실까지 간 그는 맨 뒷자리의 빈 의자에 몸을 의지했습니다. 페니는 진심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님,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습니다. 주님, 이 사정을 돌아보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고백하기를 이 기도 후에 자기의 마음을 누르던 무거운 짐이 다 떠나버렸다고 했습니다. 그가 예배실을 나올 때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 때부터 페니는 매사에 그리스도를 섬기는 믿음으로 사는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이 씨 페니의 사업은 다시 회복되기 시 작하였고, 그는 파산 전에는 소유하지 못했던 하늘의 영생을 감사드리며 이 땅 에서도 장수의 복을 누린 성공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신앙은 이렇게 거절을 통한 수락의 체험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야 튼튼하게 서 있게 됩니다. 그래야 어떤 경우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거절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특별히 요즘처럼 어려운 시절에 하나님을 바로 만날수 있는 체험적 신앙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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