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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수난 예고 (막8: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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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이라고 하는 선교사는 남미의 키치와 인디언 전도를 위해서 선교회관을 건축하고 있었습니다. 이 회관에서 키치와 인디언을 위한 병원과 학교 시설을 중심해서 여러 가지 선교를 위한 필수적인 시설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엇 선교사는 이를 위해 일년 이상 일했고 이제 거의 완성단계에 이를 때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큰 홍수가 나서 이 모든 시설이 하루 아침에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엘리엇은 얼마 후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는 그날 아침 나의 모든 수고와 땀과 기도가 들어 있는 선교회관을 휩쓸어가는 홍수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너의 하나님이다. 지금도 너는 나를 신뢰할 수 있느냐' 이제 나의 수고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다시 시작하실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더 좋게 일을 하신 것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고난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신앙생활의 능력을 상실할 우려가 많습니다. 왜나하면 예수를 믿으면서도 어려움을 많이 만나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통하여서 그 때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도하고 삶의 인격이 성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의심하여 믿음에서 떠나버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왜 내가 이런 고생을 해야하나라는 의문을 가지고 씨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채적인 사람들의 생각이 고생은 힘든 것이고 그래서 피해야 할 것이고, 평안은 좋은 것이니 누려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복음을 전할 때 테니스를 치곤 했는데, 땀을 벌뻘 흘리면서 열심히 공을 쫓아 다니는 것을 보고서는 그 때 우리나라 양반 친구가 그런 것은 종을 시키지 왜 고생을 하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고생도 평안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모든 삶의 현장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하며 먹든지 마시든지 다 주를 위하여 해야할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어 드린 마가복음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처음으로 인자가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만에 살아날 것을 가르치신 말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면서 세 번에 걸쳐 인자의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에 걸쳐 수난을 예고하신 것은 제자들이 갖고 있는 환상을 깨고 앞으로 다가올 수난에 대비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인자의 수난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 그리스도의 의미를 밝힌 수난 예고 첫 번째 수난(受難) 예고(豫告)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에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데 대하여 베드로가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에 대한 칭찬이 없고 다만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만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이어 고난과 배척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는 했으나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고,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였으며, 예수님이 누구인지 조차 전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생각한 그리스도는 구원자, 승리자, 영광을 받을 자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과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한 제자들은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훈은 저들이 잘 깨닫지는 못했지만 바리새인들의 것과는 확실히 달랐고, 그가 행하신 기적들은 신기하고 신나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현재 그들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메시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저하지 않고 그리스도라고 대답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단 이 대답을 아주 잘한 대답으로 받아들이고, 마태복음에서는 아주 큰 칭찬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생각한 그리스도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일단은 칭찬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정도로라도 대답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발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 비로소 처음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의 참뜻을 가르치시기 위한 단계로 나아가신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란 고백을 제자들이 하기까지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더욱 어려운 과정은 그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깨닫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능히 모든 세력을 꺾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분이요,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그리스도가 어찌하여 죽임을 당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당하는 것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 고난을 통해서만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왜 죽음을 통과하여야만 구원이 가능한가 죽지 않고도 구원받는 길은 없는가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하지만, 가만히 그 내용을 들추어보면,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임을 알게 됩니다. 영광만 받는 그리스도, 능력으로 나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나를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그리스도가 우리가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에는 바울이 말했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빠져 있기가 일수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서도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을 잃고 맙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요. 우리의 자랑할 유일한 보물도 삽자기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이 주는 축복은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북쪽 바다에서 청어잡이를 하는 어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북해로부터 먼 거리에 있는 런던에까지 청어를 싱싱하게 살려서 가지고 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어부들이 아무리 잘헤도 배가 런던에 도착해보면 청어들은 거의 다 죽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한 어부만은 북해에서 잡은 청어들을 싱싱하게 산 채로 런던에 가지고 와서 큰 재미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동료 어부들은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어부가 고민 끝에 말하기를 "나는 청어를 넣은 통에다 메기를 한 마리씩 집어넣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모든 어부들은 눈이 동그래지면서 "그러면 메기가 청어를 모두 잡아먹지 않소"라고 이구동성으로 물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메기가 청어를 잡아먹지만 두세마리 밖에 못 먹지요. 그러나 그 통에 있는 다른 많은 청어들은 잡혀먹지 않으려고 계속 도망쳐 다니지요. 런던에 올 때까지 모든 청어들은 열심히 헤엄치며 살려고 애를 쓰지요. 그래서 청어들은 싱싱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은 있습니다. 고난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신 의미는 욥에 그 고난의 의미와 이유를 알게 하는데 있지 않았고 오히려 고난중에도 하나님이 여전히 인생의 주인이시며, 인간의 아무런 항의나 요구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고난으로 더욱 생명력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욱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신 것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욥이 고난 후에 이전에 말로만 듣고 생각만 하던 하나님을 눈으로 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서 보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평안이라고 하는 것은 걱정과 어려움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 중에서도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참된 평안은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여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귀한것인데도, 무조건 고난을 회피하는데서 참다운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는 겨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여도 그 내용에 따라서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만 하면 다같은 것인 줄 알고 좇아 다니다 보면, 이단 집단에 빠져들고 맙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신앙고백을 한 단계 더 높여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분명히 고백하고 그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 알고 그 십자가를 향해 담대하게 나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단 신앙에 쉽게 넘어가는 이유가 바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II. 수난의 이유를 묻지 않고 순종하신 그리스도 다음으로, 우리가 이 본문에서 생각할 것은, 수난의 까닭이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은 채 무조건 수난이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왜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어찌해서 그렇게 되는지를 설명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철저하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베드로가 강력하게 이를 제지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그를 꾸짖으시기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셨기 때문에 왜 고난을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한지를 묻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그 뜻을 따르신 것입니다. 강력하게 제지하는 베드로에게 이유도 설명하지 않으시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고난과 죽음을 맞아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 왜 사탄의 짓인지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무조건 고난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강조할 따름이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만 참 그리스도가 되실 수 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고난과 죽음을 피하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강력하게 제지하려 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간적인 욕구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조건을 달지 말고, 이유를 묻지 말고,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무조건 따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왜 져야 하는지도 묻지 말고 무조건 지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의 뜻을 무조건 순종하시어 이 땅에 오셨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도 없고 우리의 본능에 거슬린다 하더라도 무조건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실상 순종이라 하겠습니다. 말씀은 이해되기보다는 순종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중세의 안셀름이라는 스콜라 철학자는 “나는 이해가 되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이해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말씀은 순종을 통하여 이해되는 것이지 이해가 앞서고 뒤에 순종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나는, 주께서 가라고 하시는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주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지켰으며, 주의 모든 법규를 내가 버리지 아니하였다"(삼하 22:22-23) 방금 읽은 사무엘 하서 말씀은 다윗의 시편인데, 다윗은 무조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말씀대로 행하였기 때문에 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무조건 순종한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이나 이해관계를 떠날 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대체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며,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조건 우리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나,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얻으려 하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버리라고 요청하십니다. 우리는 높아지려고 하나 하나님은 낮아지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평안과 안일을 원하나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따르기 어렵고 오히려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이루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는 제자들에게 이제 그들의 생각, 그들의 목숨을 버려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 뜻에 순종할 때 참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상 오늘 우리의 신앙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불순종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믿고 따르는 순종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경험이나 지식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목숨을 버리라는 요청 앞에서 우리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려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경험과 과학적 지식을 절대시 한 나머지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알게 됩니다. 나를 깨트리고 나를 철저하게 겸손하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우리로 철저하게 자기를 비울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가 가시는 길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길, 다시 말해서 자기의 뜻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하신 길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자기를 비우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뜻만을 담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겸손하게 순종할 때 그것은 바로 나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순절은 바로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하는 기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가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는 겸손을 연습하는 때입니다. 이 시대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귀기울여 들으면서 그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기를 힘쓰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정말로 그를 따르려는 제자가 되었는지를 반성하고, 나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가득 담는 회개의 기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가 요청하시는 대로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여러분의 목숨을 보람 있게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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