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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구할 것인가? 죽일 것인가? (막3:1-6)

본문

한 40대 초반의 그리스도인 자매님이 건강체크 과정에서 암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암이 오랫동안 진행되었기 때문에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행한 선고를 받게 되셨습니다. 이 분에게는 중학교 다니는 아들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이 자매님에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첫째는 고통스럽지만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조금이라도 이 땅에서 더 오래 생존을 유지하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어차피 이것은 고칠 수가 없는 병이기 때문에 집에서 편안히 요양을 하면서 덜 고통스럽게 죽음을 대비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 받았습니다. 이 분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면서 내가 엄마로서 무엇이 최선일까 아내로서, 엄마로서 내가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방사선 치료를 받기로 결심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치료 받기로 결단을 하고 나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매우 감동적인 편지를 썼습니다. 이것이 가정 사역 전문 잡지에 난 것을 제가 읽어 봤는데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엄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나에게는 죽음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미련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방사선 치료를 받기로 선택했다. 그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너희들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너희들이 틴 에너지의 시절, 사춘기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지나가고 있는 너희들에게 엄마를 필요로 할 때 내가 너희들 곁에 있어 주기 위해서다. 어떤 대가를 치루어서라도 나는 너희들이 정말 필요했던 시간에 엄마가 너희들 곁에 있었다는 그 기억을 위해서 나는 이 질병과 더불어 투병하기로 결심했다.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이 분은 자기 자녀들에게 축복이 되는 인생 그리고 자녀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통을 선택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 땅에는 이웃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단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내가 살기 위해서 이웃들을 죽이기로 결심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대조적인 두 가지의 선택의 사례, 이 두 가지 대조적인 선택의 케이스가 본문 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도전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의 4절을 같이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것이 옳으냐,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 어느 것이 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하느냐 이것이 주님의 질문이셨습니다. 저는 먼저 생명을 죽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생명을 죽이는 사람들의 이야기, 본문에 이런 사람들이 등장하지요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본문의 6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그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결심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종교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입니다. 아주 대표적인 종교인들입니다. 본래 이 바리새인들은 구약과 신약시대의 중간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400년 동안의 중간 시대에 민족을 보호하고 자기 나라를 외적을로부터 다시 빼앗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자랑스런 종교적 전통과 하나님의 율법, 모세의 율법, 토라, 그 율법의 전통을 수호하기 위해서 일어났던 사람들 소위 하시딤이라고 불리워졌던 경건한 사람들의 후예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 좋은 사람들, 훌륭한 사람들이 어느 날 잘못된 발상, 잘못된 의식구조를 그들의 생각안에 수용하기 시작한 그 어떤 때부터 그들은 사람을, 이웃을 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을 죽이는 사람들로 변신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인 여러분과 저도 어느날 잘못된 우리의 의식구조를 우리 안에 갖기 시작할 때 이 바리새인들과 꼭 마찬가지로 이웃들을 죽이는 살인의 행렬에 우리도 가담할 수가 있다. 우리는 이 경고를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을 실제로 죽이는 것만 살인이 아니에요. 정신적 살인, 종교 살인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두 가지 이유를 본문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의 완악함 때문입니다. 5절을 보시면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저희들의 마음이 완악했다.-본래 이 '완악하다'란 단어를 연구해 보시면 이 단어의 본래의 뜻이 뭐냐 하면 자기 밖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이웃들을 생각할 여지가 없는 자기만의 생각으로 굳어진 상태, 이 철저한 이기적인 생각으로 견고하게 굳어져 버린 마음의 상태를 가리켜서 성경은 '완악하다'라고 말합니다. 전혀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우리 사회가 아주 불유쾌한 사회, 이웃을 전혀 생각할 여지가 없는 사람, 철저한 이기주의, 죄성, 인간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이 본질적인 부패성-이것이 이기주의입니다. 죄악의 뿌리가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이것 때문에 살 맛 나지 않고 직장에 가도, 가정에 와도 우리의 삶이, 환경이 불유쾌한 그러한 일들이 얼마나 많아요 가장 사소한 일에서부터 우리가 이웃들을 헤아린다. 이것이 우리 안에 깨어나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변화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어떤 형제가 저한테 와서 제가 조크를 좋아하니까 저한테 유우머 하나를 전해 주었는데 아주 재미있는 조크예요. 아침부터 화장실 얘기를 해서 참 죄송한데요, 어떤 대학교 화장실안에 딱 들어가니까 그런 낙서가 써 있더래요. "기억하라! 당신이 사색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밖에 있는 사람은 사색이 되어 있다." 무슨 소린가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우리 이런 작은 이기심에서부터 시작해서 결정적으로 한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그런 바이러스 같은 무서운 이기심의 정체도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안에도 종교적 이기심이 있을 수 있어요. 이런 마음의 완악함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그런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살인자로 내몰고 있었던 또 하나의 원인은 독단적 신앙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단주의, 소위 dogmatism 이라는 것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특별한 신앙체험을 했어요. 신앙체험하는 것은 좋은 일이예요. 저는 여러분도 다 신앙체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내 신앙체험을 절대화시키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똑같이 체험을 해야돼요. 체험을 절대화 시키는 것이예요. 혹은 나에게 편리한 어떤 종교의식, 자기가 좋아하는, 선호하는 종교의식을 절대화 시키는 것, 여러분 기독교 신앙에서 복음이외에는 아무 것도 절대화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체험을 절대화한다든지, 종교의식을 절대화한다든지, 혹은 기독교의 많은 교리적 강조점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어떤 부분을, 중요하지 않은 어떤 한 부분을 절대화시킬 때, 그 때 우리는 독단주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독단주의를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케이스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금식에 대한 생각, 둘째는 그들의 안식일에 대한 사고가 바리새인의 독단주의를 대표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금식에 대한 생각, 마가복음 2장 18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금식 가지고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 배경은 우리가 세리 마태가 주님 앞에 돌아와서 구원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주님은 너무 기뻐 이 마태의 집에서 잔치를 여셨죠. 15절 마가 복음2장 15절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잔치를 열면서 즐거움에 막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 광경을 가만히 보던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거는 거예요. 아마 저희들만 먹는 것이 아니 꼬웠는지. 우리들은 금식하는데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째서 당신들은 먹고만 있습니까 금식, 필요한 겁니다. 좋은 겁니다. 저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금식의 좋은 교훈도 배웠으면 좋겠어요.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 나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루 세끼씩 먹고 살아 왔다, 그건 자랑 아니 예요. 때때로는 굶어도 보셔야 합니다. 어저께는 기아 체험 같은 운동도 벌어지는데 좋은 겁니다.
때로는 금식도 좀 해 봐야 돼요. 깊이, 그 시간을 아껴 가며 기도에 몰두하는 것, 이것도 좀 해 보셔야 해요. 문제는 어디 있느냐면 자기의 금식에 대한 선호성을 절대화 시켜서 금식하지 않는 이웃들을 정죄하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교적 금식은 1년에 한차례 하는 것입니다. 1년에 한차례 속죄제일에 그들은 금식을 했습니다. 물론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금식하기도 했습니다마는 종교적인 규례로서의 금식은 1년에 한번씩 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누군가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1년에 한번만 해서야 되겠느냐 한 달에 한번은 해야지, 그 다음에 일주일에 한번은 하자.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1주일에 한번 가지고 되겠느냐 경건한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은 해야지.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어요. 가만히 보니까 예수님 제자들이 금식 안하는 것 같거든요. '왜 당신들은 금식을 왜 안 하는가' 그것 가지고 시비를 걸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대답이 뭡니까 마가복음 2장 19절 보세요.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20절 까지 '그러나 신강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이 금식을 부인하지 않았어요. 금식은 좋은 것이다.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금식의 때가 아니란 말이죠. 지금, 마태가 돌아왔습니다. 죄인 마태가 회개하고 돌아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축제의 시간, 지금은 잔치를 벌려야 할 시간 , 지금은 즐거워야 할 시간 이예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에 와서 금식 왜 안 하느냐고 시비를 건단 말이죠. 이것이 독단주의예요. 또 하나는 안식일의 케이스입니다. 마가복음 2장 23절을 보세요. 같이 읽겠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안식일 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삭 잘라 먹은 거예요. 그러면 좇아가서 '참 그 동안 시장하셨던 가 보죠' 그러면 얼마나 좋아요 바리새인들의 반응, 어떤 반응이었습니까
그 다음 절 마가복음 2장 24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겨우 하는 소리가 안식 날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하고 시비 걸었어요. 시비 잘 거는 사람은 바리새인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안식일, 왜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셨습니까 안식의 핵심은 안식일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셨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인간을 위해서, 사람을 위해서 .우리의 축복,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안식일이라는 종교의식이나 전통을 절대화 시키는 것, 그러면서 안식일 안 지킨다고 돌아다니며 정죄하고 다녀요.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세요. 마지막 절에 보면 27절, 28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내가 안식의 주인이다. 내가 안식일을 너희에게 주었다. 왜 주었느냐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안식일이 우리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셨다.
그런데 생각 안 한다 말이죠.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성경은 단순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그렇게만 말씀하는데 이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몇 개나 만들었느냐 39개를 만들었어요. 안식일에 하지말일 서른 아홉 개 39계명, 거기다가 계명마다 다시 세칙 여섯 개씩. 하나마다 6개씩 그러니까 서른 아홉 개 곱하기 여섯. 얼마나 많아요. 그러니까 안식일 날 조금만 잘 못하면 이것 걸리나 안 걸리나 안식일 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가 되요.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 우리의 안식, 우리의 휴식, 우리의 새로운 창조,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셨건만 이것을 지키냐, 안 지키느냐 그것 가지고 사람을 얽어 매고 있었어요. 이제 안식일은 축복이 아니고 무거운 종교적 부담이 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 가지고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어요.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죽이느냐 두 가지로 죽일 수 있었습니다.
첫째 말로, 이것 가지고 시비하면서 정죄하면서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주고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로. 여기 마가복음 2장에 나타난 바리새인들의 언어, 그들의 날카로운 말, 사람들을 파헤치고 사람들을 죽이고 사람들을 찌르고 있었던 그들의 부정적 언어의 정체를 헤아려 보세요. 마가복음 2장 16절에 보시면 '바리새인들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 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평범하게 하는 말이 아니 예요. 뭐라고 말했습니까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좀 잔치를 열었으면 '무슨 일이예요 좋은 일이 생기신 모양이죠' 그리고 좀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아요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십니까' 자, 이 바리새인들의 의식구조를, 일관성 있는 그들의 의식구조를 살펴 보세요. 그 다음에 24절 또 읽어 보세요. 마가복음 2장 24절 '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오죽하면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었겠어요 '아, 참 안됐구나!' 저는 이땅의 율법주의자들이 나중에 북한에 가서 이렇게 종교를 선전할까 걱정이 예요. 배고파서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안식일 날 아무 것도 먹지 말라고 돌아 다닐까 봐 걱정이 예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거예요. '보시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말이 예요. 그들은 이 말로 얼마나 그들을 정죄했어요, 이웃들을 상처주고. 신앙 좋은 사람들이 이런 독단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새벽기도 얼마나 축복입니까 저는 우리 교인들이 새벽기도 했으면 좋겠어요. 철야기도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 축복이 되었다 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정죄하고 돌아다니면 안된 단 말이죠. '당신은 어찌하여 새벽기도회도 안하시고' 이러시면 안 된단 말이 예요. 그 다음부터 남 정죄가 시작한단 말이죠. 큐티 얼마나 좋은 축복입니까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큐티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큐티하는 사람이 큐니 안 하는 사람 정죄하지 마세요. '크리스챤 즘 되 갔고 큐티도 안하고 당신이 인간이냐고' 그것은 자기 신앙으로 남들을 정죄하는 거란 말이죠. 어떤 사람이 주일 빠졌는데 '당신 집사가 되어 가지고 주일 성수도 안하고 당신이 집사야, 잡사야' 주일날 안 보이면 '집사님 아프지 않았어요 무슨 일 계셨어요' 그러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이웃들을 생각하지 않는 가시도친 언어, 날카로운 칼날처럼 날카로운 언어로 우리가 이웃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이웃들을 허는 일들이 얼마나 많아요. 언어 조심해야 되요. 오죽하면 시편기자가 '하나님 내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주소서' 잠언에 보면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지혜로운 말, 선한 말, 아름다운 말, 이웃을 세우고, 이웃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말 대신에 우리가 생각 지 않은 말, 종교적인 독설로 우리가 이웃들에게 상처 준 말들이 얼마나 많아요. 말로 우리는 이웃들을 죽이는 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편파적 행동으로 이웃들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편파적 행동, 선택적 교제. 여기보면 예수님 보고 어떻게 당신이 죄인과 세리들과 먹을 수 있느냐 제가 어떤 아주 교회 중직에게 이런 도전을 받은 적이 있어요. 목사님, 어떻게 그런 사람들과 목사님은 같이 다닙니까 제가 그랬습니다. '저라도 같이 교제하지 않으면 누가 교제하겠어요 그 사람' 이 선택적인 교제, 물론 사람이 더 좋아하는 사람, 덜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죠. 그러나 선택적 교제에 익숙해져 보면 나는 늘 교제하는 사람과 교제하고 어떤 사람, 일단의 사람들, 하나님이 사랑하는 그 많은 사람들을 무시하기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노골적으로 이웃들을 헐지 않아도, 이웃들을 무시함으로 이웃들을 죽일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 집에서 화초 길러 봐도 그 화초에 관심 주지 않고 그 화초를 무시해 보세요. 며칠 지나면 시들시들해져요. 남편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아내들 보세요. 남편의 따뜻한 손길, 눈길, 손길 받지 못하는 아내들 보세요. 시름시름 해요. 이웃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무시하는 것 이것처럼 이웃을 죽일 수 있는 독소가 없습니다.
이웃들을 살리려면 자꾸 봐야 되요. 그리고 자꾸 괜히 만져야 되요. 좀 봐요. 옆에 사람 보세요 좀. 째려 보지 마시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좀 봐 주시고. 우리의 눈길, 우리의 손길 이것이 이웃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웃들을 무시하기 시작할 때 이웃들이 죽어 가기 시작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거예요. 얼마나 이 바리새인들의 독사 같은 시선 때문에 오죽하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독사 같은 자들이라 했겠어요. 죽어 가고 있었던 수 많은 이웃들. 자, 이제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이야기를 해보십시다.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 누구였습니까 대표적인 사람. 예수님이시죠. 자, 본문에 어떻게 시작이 됩니까 마가복음 3장 1절에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안식일이었을 것입니다. 가버나움 회당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회당에 들어가신 그날. 그냥 가서 예배만 드린 것이 아니예요. 거기서 좀 봤습니다. 손 마른 사람이 있더라구요. 예배를 드리는 자 가운데 손 마른 사람. 예수님은 그를 보셨습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그 말할 수 없는 그 불쌍히 여기는 심정과 그 특유의 자비를 가지고 손 마른 사람을 보셨을 것입니다. 손을 쓸 수가 없는 사람. 손을 쓸 수가 없는 사람. 본문을 해석하는 어떤 유대인 고전에 보니까 이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전설일 수도 있지만 이 사람이 석수장이였답니다. 석수공. 돌을 깎아서 일하는 사람. 그가 손이 말랐다. 이건 치명적인 일입니다. 더 이상 직업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폐인이다. 이제. 얼마나 이 사람이 인생에 대한 좌절과 낙망에 빠졌겠어요 주께서 이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봤습니까 이 사람을. 자, 2절 보세요. 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3장 2절 시작.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이사람 고치나 안 고치나 보자.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관심이예요. 이 불쌍한 사람. 내가 어떻게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을까 이런 사고가 전혀 없다 말이죠. 복음적 사고가 없어요. 복음적 사고. 복음적 의식구조가 없습니다.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복음을 받아들인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 안에도 복음적 사고나 복음적 생활 양식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이 마가복음 2장을 우리가 깊이 시간 있으면 연구해보시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 금식논쟁. 하다가 예수님이 이 얘기를 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로운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 한다.낡은 가죽 부대에 넣어선 안된다." 무슨 얘기인 줄 아세요 새로운 시대가 왔어요. 예수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생활 양식, 의식구조가 없어요. 이건 정확히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도 가능한 얘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받아들이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술을 받아들였지만 우리의 생활양식, 우리의 의식구조는 아직도 비복음적이예요. 여전히 우리는 율법주의적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을 수가 있어요. 율법주의적 의식구조. 이웃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그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내 삶이 이웃들에게 복음이 아니예요. 내 삶이 이웃들에게 Good-news가 아니예요.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이웃들에게 복음이 될 수 있는 우리 인생을 살 수가 있을까요 두 가지가 필요해요. 사람들을 중요시 여겨야 합니다.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리고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진지하게 모색하는 삶의 태도. 두가집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사람을 소중해 여겨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특별히 약한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한 구약학자는 구약 성경을 읽다가 깜짝 놀랬어요. 구약성경을 계속 읽고 있다 보니까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편견을 갖고 계시다. 편애하신다. 누구를 편견 하시는가 구약을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이 특별히 고아, 과부, 나그네얘기가 구약에 그렇게 많이 나오거든요. 하나님은 이들을 편애하신다. 맞는 얘깁니다. 맞는 얘기. 우리가 약한 사람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그들을 어떻게 다루는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가 말이죠 여기서부터 우리의 복음적 삶의 모습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 그 다음에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실제로 도와야 합니다. 자, 예수님이 어떻게 도우셨어요 세리에게. 세리의 문제는 세리에게는 돈은 있어요. 세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도 상대해 주는 사람이 없어요. 인간쓰레기. 사람들이 버리고 소외된 인생. 그래서 예수님이 세리를 도울 때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그를 상대해 주셨어요. 그리고 그와 더불어 앉아서 잔치를 열고 계십니다. 그것이 뻔히 그 사회에 문제가 될 것을 알았어요. 아니, 예수가 저 죄인들과 함께 앉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리를 공개적으로 상대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그의 필요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필요를 도와주었습니다. 손 마른 사람에게는 어떤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까 손을 펴는 일입니다. 그가 필요했던 그 도움은 바로 그 도움이죠. 우리가 할 수 없는 것까지 이웃들을 도울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일들은 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일. 그 분은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예수님은 "네 손을 펴라" 5절에 보니까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가 회복되었더라' 저는 손만 회복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순간 그 사람 좌절과 낙심 속에 미래를 포기했던 이사람. 인생에 대한 자존감, 희망이 회복되는 순간. 그의 삶이 회복되는 놀라운 순간 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것만 도우신 것이 아니라 저는 이 사람의 영적 문제도 도우셨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이 마가복음은 특별히 예수님의 행동.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교훈이 많이 생략되어 있어요. 전 그 부분도 도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웃들을 돕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사람을 돕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안식일에 이 사람을 치료했잖아요. "안식일 범한 자여" 그 오해를 받으면서도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이 한 사람을 향한 이 한 인간을 향한 진지한 예수님의 사랑. 아니 그를 사랑하기 위해 마지막에 예수님은 십자가까지 가신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죽이고 이웃을 살렸던 예수님. 이런 마음. 이런 태도로 우리는 이웃들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을까요 저와 여러분이. 우리는 이웃을 죽이는 자들일까요. 살리는 자들일까요. 저는 최근에 아주 감동적인 얘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중학교 선생님의 얘기예요. 중학교 1학년을 가르치고 있는 여선생님, 그리스도인 여선생님의 얘기입니다. 자기 반에 가르치는 학생이 하나 있는데 아주 우수한 학생이었대요. 아주 top. 성적이 아주 제일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왔던 학생이었는데 한 1년 동안에 이 학생이 망가져 가는 거예요 점점 성적이 뚝뚝 떨어집니다. 반항적인 아이가 되가고 불량한 학생이 되어갔습니다. 점차 친구들이 그를 따돌리기 시작합니다. 선생님들도 그를 문제아로 취급하기 시작합니다. 친구가 없어요. 그는. 점점 반항적이 되가고 그는 점점 학교 수업을 거부합니다. 선생님이 '이유가 있겠지.' 이 학생에 대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알아봤습니다. 그랬더니 부모가 별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별거하고 있다는. '그랬구나' 환경조사서를 봤더니 배경이 기독교인이예요. 자기도 기독교인이니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어느날 양쪽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이 선생님이. 아빠에게도 엄마에게도. 걸어보니까 따로따로 있어요. 이미. 같은 집에 있지 않고 따로따로 있었습니다. 아들 성적문제로 의논하고 싶다고 학교에 오실 수 있냐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 양쪽 부모를 학교에 같이 오시게 합니다. 와서 보니 깜짝 놀랐어요. 혼자뿐인 줄 알았는데 자기 아내가 있거든요.자기 남편이 있거든요.
처음엔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고 이 선생님에게 아주 좀 안 좋은 태도로 나오시더래요. 그리고 설명을 드렸대요. "이 아드님의 이 성적을 도울 수가 있는지 그리고 제대로 자기 인생의 페이스를 찾으려면 두분 중의 한분의 도움 가지고는 안되고 두분의 도움이 다 필요하기 때문에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두분을 다 학교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선생님에게 충격이 되었던 이 학생의 시험지 답안지하나를 보여드렸답니다. 이 선생님이 영어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는데 답안지에, 어느날 답안지에 한문제도.답을 하나도 안쓰고 낙서를 해버렸대요. 전체를그의 일종의 반항이었죠.
그런데 이 학생의 휘갈겨 쓴 낙서에 맨 마지막부분에서 이 학생의 마음속에 있었던 진실을 이 선생님이 본 것입니다. 거기다 빨간 줄을 쳐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이걸 좀 보시죠." 휘갈겨 쓴 낙서의 밑바닥에 숨어있었던 이 학생의 진실한 독백이 기록되어있었습니다. "아빠 엄마 난 누구하고 살아 난 누구하고 살아 이혼하면 누구하고 살아 아빠 엄마 난 누구하고 살아 아빠 엄마 난 둘다 필요해. 난 둘다 필요해" 그리고 또한마디 마지막에 맨 구석에 "아빠 엄마 우리를 사랑해 아빠 엄마 우리를 사랑해" 보여준 순간, 순간 아버지가 고개를 떨어뜨립니다. 엄마도 고개를 떨어뜨립니다. 깊은 정적이 지났습니다. "두 분이 기독교 배경을 가지고 있지요 저도 그리스도인 입니다. 기도해 드릴까요" 선생님이 이 아빠 엄마의 손을 잡고 기도하자 순식간에 교무실은 통곡의 장으로 변합니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이 가정의 회복의 전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합쳤어요.이 부부는. 그리고 이 아이는 다시 인생의 길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이 쓴 글을 제가 직접 읽어봤는데 "맨 마지막에 함께 기도하고 교정을 나서는 이 부부. 이 학생의 아버지와 엄마. 교정을 나설 때 나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내 생애에서 이것보다 더 귀한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 이웃을 살리는 축복. 저와 여러분은 이웃을 살리는 자일까요 죽이는 자일까요
기도하십시다.
. 우리가 쏟아내는 말들. 우리의 행동으로 우리는 이웃들을 망가뜨릴 수도 있고 이웃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말, 우리의 행동으로 우리는 우리의 자식들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주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살리는 자. 주께서 나를 살려주시었기에 내 남은 여생을 걸고 이웃들을 구원하고 이웃들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이웃을 세우는 자로 살아가게 도와 주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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