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것이 옳으냐 (막3:1-6)
본문
"호랑이 죽이기"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한말에만 해도 호랑이가 북악산 타고 경복궁까지 곧잘 침범했었다. 태종 때 일이다. 김덕생이라는 공신이요 명사수가 있어 임금의 경호를 맡 고 있었다. 어느 날 태종이 후원을 거니는데 맹호가 발소리를 죽이며 접 근해 가는 것을 보았다. 김덕생이 단 한발로 적중시켜 위기일발에서 임금 을 구하였다. 두 번 공신이 될 뻔한 김덕생이 오히려 이 호랑이 사살로 대역죄에 몰렸다. 아무리 임금이 위기에 처했더라도 임금을 행해 활을 쏜 다는 것은 시해 행위에 해당된다는 조정의 법리론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그는 호랑이 그림을 도처에 놓게 하여 백발백중 일실도 없음을 입증하였 으나 끝내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실리보다 도리에 비중을 더 두었던 시 대의 호랑이 사살사건이다. 엊그제 진주 동물원 우리를 뛰어넘어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벵골산 암 호랑이를 긴급 출동한 20명의 무장경찰이 여섯 발이나 쏘아 사살했다던 데 이건 실리도 못 구하고 도리도 못 구한 처사가 되고 말았다. 인도 벵골지방의 밀림에서 두 아기가 놀고 있는 곳에 호랑이가 나타난 것을 앨런이라는 동물학자가 목격했다. 무서운 맹수인줄 모르고 놀고있는 이두 아기와 어울려 엎치락뒤치락 놀던 호랑이 앞발에 밀려 한 아기가 울자 다른 아기가 작은 막대기 하나를 주워 호랑이 머리를 탁 치자 힐금 힐금 돌아보며 밀림으로 들어가더라 했다. 이 사례를 들고 1천 마리 호랑 이 가운데 사람을 해치는 식인호랑이는 3마리 꼴에 불과하다 했다. 우리 를 뛰어넘은 진주의 벵골 호랑이 가 1천 마리 중의 3마리에 속한다 하더 라도 사살 아닌 마취나 망을 쳐서 생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노력도 없이 날뛰거나 질주하는 것도 아닌 놈을 그렇게 집중 사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태종 때 사호(死虎) 사건이 도리의 과잉이라는 교훈을 남겼다 면 진주의 사호 사건은 생명 파괴의 과잉이요 저 편할대로 행동하고 보는 이기주의의 과잉이라는 교훈을 남겼다….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것이 오늘 본문 의 제목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날 회당에서 한 쪽 손이 불구가 된 자를 고쳐 준 것이 문제가 되어서 논쟁을 벌인 사건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이를 "지키면 너희는 내 소유가 되겠고,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언약을 하셨습니다. "(출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 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 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그 언약을 맺은 것이 바로 모세가 받은 십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 명들을 어긴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계약관계를 파괴하는 행위였습니다.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과 언약이 파괴된다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은 물론 모든 축복마저 상실하는 것이었습니다. "(신7:11) 그런즉 너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신7:12)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 실 것이라 (신7:13)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 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케 하시리니." 그래서 주어진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고자 율법을 구체화시켰던 것 입니다. 그 여러 율법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 제4 계명입니다. "(출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20: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출20:10)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 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출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 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에는 모든 일이 금지되어 있었으며, 그리고 병을 고친다는 것은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의 율법은 이 일에 대하여 아주 명확하게 또는 상세하게 정하였습니다. 의학적인 배려는 생명이 위험했을 때에만 주어졌 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만일 벽이 사람 위에 무너졌다면, 그 사람 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알아볼 정도만큼 벽을 치워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만일에 그 사람이 살아 있었다면 구원함을 받았으나 만일에 죽었다면 그의 시체는 다음날까지 그곳에 방치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골절은 치료받지 못했습니다. 수족이 삔 곳에 찬물을 붓지 못하였습니다. 손가락 벤 상처에는 고약을 바르지 않고 붕대를 감을 수 있었다.
즉 대개의 상처는 그것이 악화되기를 방지할 수는 있었으나 좋아지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엄격한 정통파의 안식일에 대한 견해를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엄격 한 유대인은 안식일에는 자기의 생명마저도 지키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카비(Maccabees)전쟁에서 방위전에 패했을 때, 유대의 반란군 몇 사람이 동굴 속으로 도망쳤습니다. 수리아 병사들이 그들을 추격했고, 그들 은 유대인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었으나 유대인들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그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유대인들과 싸웠다. 그들은 동굴 속에 있는 유대인 들을 불태워 죽였다. 유대인들은 동굴의 입구를 막으려 들지도 않고 저항 도 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그 날에는 자신들을 지키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위기에 처해 있어서도 안식일이 지니고 있는 명예를 깨뜨릴 마음은 없었다. 우리의 율법은 우리에게 그 날에는 쉬어라고 요구 한다." 로마의 장군 폼페이(Pompey)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을 때, 방어자들은 성전의 경내에 피난하였습니다. 폼페이 장군은 그보다 높은 작은 산을 구 축하여 그 위에서 공격하토록 공사를 진행시켰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신앙을 알고 있었으므로 안식일에 그것을 구축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들의 안식일의 무활동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죽음의 허가증에 서명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들을 지키기 위하여 손을 들려고 하지도 않았고, 적군이 작은 산을 구축하는 일을 방지하려고도 아니하였습니다. 로마인들 은 징병제도를 채용하고 있었으나, 나중에 가서는 유대인들을 병역에서 면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엄격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싸우려 하지 않 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철저하고 엄격한 율법준수 관념은 안식일 자체를 절대 화시키거나 신화화(神化化이)시키는 것으로 예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 되는 것입니다. "(막2: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 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보다 귀한 것이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생명을 죽이 기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는가 여부를 눈여겨 보았지만 예수께서는 한 편 손 마른 불쌍한 사람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옳으냐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옳으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법보다 중요 한 것이 생명이기 까닭에 손 마른 사람을 한가운데 일어서게 하시고 그 들에게 묻기를 "(막3:4).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 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안식일일지라도 병든 사람을 내버려 두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을 함으로 법리론을 내세워 '도리'에 비중을 두지 않고, 안식일 에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으로 법리보다는 '실리'에 더 무 게를 두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반문은 굳이 안식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전반에 적용되는 물음이었습니다. 사실상 예수는 이 물음으로써 다른 날 과 안식일을 구분하려는 전통적인 관념을 철폐해 버렸습니다. 더 이상 거 룩한 날 거룩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의 이 반문은 안식일을 상대화하고 비신화화하고 있습니다. 이 날만 지키 면 특별한 복이 있다거나 이를 지키지 않으면 특별한 화가 있으리라는 사고는 안식일을 신화화한 것입니다. 유대교의 한 랍비는 안식일을 두 번 만 철저히 지켜라 그리하면 네 구원이 보장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안 식일을 신화화하고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 반문은 안식 일뿐만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그 어느 날에나 다 해당되는 질문 인 동시에 해 아래 그 무엇도 절대가 될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날만 거룩해야 된다면 다른 날에는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가 안식일의 특수성을 철폐해 버린 것은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그날의 의미를 모든 날에, 삶 전체에 확대시 킨 것이 됩니다. 흔히 우리는 다른 날에 비해 주일이 거룩하고 다른 직업 에 비해 목회하는 직업이 거룩하다고 해서 성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런 이원론적인 사고가 자칫하면 우리의 인격과 생활에 분열 일으켜서 우리의 삶을 병들게 할 수 있다는데 그 위험성이 있고 실제로 우리가 그런 위기에 빠져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주일이 거룩하다.'는 사실에만 집착 하고 그것만 강조하면 쉽게 주일에만 성스러우면 되고 다른 날에는 개판 쳐도 좋다는 사고방식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든 아니든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은 어느 때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거룩하며 옳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것은 거룩한 것이며 옳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도하 기 위해서 올려진 성직자의 손이 거룩하다면 삽 자루를 쥔 노동자의 손 이나 연필을 쥔 학생이 손이나 걸레질하는 주부의 손이 생명이 되신 예수와 복음을 위한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거룩한 것입니다. 얼마 전 전국 트럭 운송협회 운전자들 50여 명이 경주 톨게이트에 모 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시위방법으로 경주에서 부터 서울까지 고속도로를 교통법규가 허용하는 최저 속도로 일제히 운 행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경찰당국은 경찰 50명을 동원, 트럭마다 동승하여 트럭 운전자들에게 "평상시대로 달리라."고 말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통법규가 허용하는 고속도로 최저 운행속도로 (60km/h) 50여대의 트럭이 일제히 운행한다면 경부고속도로가 완전히 마 비된다는 것은 뻔한 것입니다. 그래서 속도를 위반해도 괜찮으니까(최고 속도인 80km/h를 위반해서) 평상시대로 달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통법 규는 교통의 원활한 소통을 통해 인간의 삶에 편리를 도모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미국의 교통경찰은 원활한 차량 소통을 위해 있지만, 한국 교통경찰은 단속을 그 목적으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막3:4).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예수께서는 법 이전의 차원에서 그들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법보다 중 요한 것은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나 성전 등 날이나 장소를 절대화시키거나 신격화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생 명을 오히려 절대화시켜 그 생명의 존엄성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주 일 성수해야 구원받는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교회당 건물 을 특별히 성전이라고 불러 다른 교회당과 구분한다고 그곳에만 하나님 이 계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안식일이나 성전이 아니라 "우리"(사람)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2. 아무튼 안식일에 대한 그런 물음과 불구자를 고친 행위는 결국 유 대 종교지도자들의 분노를 샀는데 본문 6절을 보면 이로써 유대인들이 헤롯당과 더불어 예수를 처치하기 위한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한 바대로 우리는 그들의 분노를 선의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의 행위가 공적인 질서를 깨뜨렸다는데 대한 의분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중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 예수의 행위가 분명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행위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의 그 행위가 기존질서를 유린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범법은 사랑의 행위라는 것으로 써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안식일법의 궁극적인 의미를 물었던 예수의 반문은 실로 타당했으며 그런 면에서 당시 그 안식일법은 반드시 변혁되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변혁되어야 한다는 전제로써 현행법의 파괴에 대한 책임은 안져도 좋은가 비록 현행법이 잘못된 면 이 있다하더라도 만약 그것을 파괴해버리면 그 질서에 의존하여 세워진 다른 많은 선한 것들이 본의 아니게 희생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의 희생과 책임은 누가 질 것이냐는 것입니다. 자 이런 문제들을 제 기해 놓고 보면 예수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서 사랑을 결행했다는 것은 실로 그것이 비장한 결단이 아닐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사랑에로의 결단이 부득이 다른 하나를 유린할 수 밖에 없다는 현실과 또 그것에 따르는 모든 책임을 스스로 각오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을 빤히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유대인들은 예수의 이 행위를 보고 그를 죽일 음모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실제로 죽을 각오마저도 했어야 했습니다. 무책임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책임질 각오가 없는 사랑은 감상일 뿐 사랑일 수 없습니다. 사랑마 저도 다른 것을 희생할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불 다른 것을 희생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마땅히 그 희생에 대해 책임질 각오를 해야합니다. 사실 사랑의 행위란 희생이나 수난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며, 사랑하려고 하면 이내 그것에 대립되는 또 하나의 이질적인 현실에 직면 하게 됩니다. 이 다른 현실을 모르고 덤비는 사랑은 언제나 위험합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도 바로 이 사랑에 대한 책임의식이 박약 해서입니다. 내가 내 민족과 내 나라를 사랑한다고 했을 적에도, 내가 가 난한 소외자를 사랑한다고 했을 적에도, 수난에 대한 각오와 투철한 책임 의식이 없으면 괜히 감상에 사로잡혀 날뛰다가 예상치 않았던 다른 현실 을 만나면 또 그렇게도 허무하게 변절해 버리고 맙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신앙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만 생각했지 수난의 각오라든지 책임의 식 같은 것은 아예 염두에도 없기 때문에 갑자기 어려운 십자가의 현실 이 닥치면 줄행랑을 치는 것이 당연한 처세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만 일 그 불구자를 살리기 위해 안식일법을 범했을 때 그 결과 죽음에까지 도 이를 수 있다는 각오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한갖 무책임한 행위에 불과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로서는 당시 예수가 그런 결단을 하 면서 실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 은 예수의 그 행위가 바로 그의 죽음의 이유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분명 히 밝히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그 행위를 숨어서 한 것이 아니라 마치 거기에 따르는 모든 책임을 흘로 짊어지려는 듯 백일하에 드러내놓고 했 습니다. 사랑을 내세우면 무언가가 희생될 것을 보고 그 희생에 따르는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에게 있어서 종교는 의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규칙, 법칙, 그리고 규율을 복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는 이런 규율을 깨뜨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악인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들은 종교란 교회에 출석하는 것, 성서를 읽는 것, 식사 때 감사하는 것 가정예배를 드 리는 것, 그리고 종교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외면적인 행위를 실행하는 것만으로 알았을 뿐이고, 그들의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이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고, 동정도, 희생할 의사도 없고 엄정한 정통주의 에 빠져, 사랑의 호소에 대하여는 귀먹어리가 되고, 세계의 눈물에 대하 여는 장님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 거니와 (요10:12)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10: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 이나 (요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 이 (요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 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 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10:18) 이 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 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 았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보여주신 종교는 봉사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었습니다. 의식과 행동을 수반하는 사랑과는 아주 방면이 다 른 것으로 비교됩니다. 나의 친구, 나의 형제, 나의 주여, 당신의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이름도 형식도 그리고 의식적인 언어도 아닙니다. 오직 당신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의 정확한 실천이 아니라, 인간 요구의 부르짖음에 대한 자발적 응답으로서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파기하려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책임을 지 시고 십자가에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이웃에 대해 무책임한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그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며 책임질 줄 아는 사랑의 봉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완벽한 율법주의자가 되려고 하지 말 고 서툴러도 하나님 사랑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습니까 생명을 구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옳은 것입니다. 소자 하나라도 업신여기거나 소흘 히 하지 않고 귀하게 여겨 그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교회는 주일 성수하고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구하고자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정죄하고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 적인 사랑의 봉사를 통해 세상을 구하고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화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목표하고 있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화해야 할 것입니다. "(마18: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 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그런 노력도 없이 날뛰거나 질주하는 것도 아닌 놈을 그렇게 집중 사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태종 때 사호(死虎) 사건이 도리의 과잉이라는 교훈을 남겼다 면 진주의 사호 사건은 생명 파괴의 과잉이요 저 편할대로 행동하고 보는 이기주의의 과잉이라는 교훈을 남겼다….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것이 오늘 본문 의 제목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날 회당에서 한 쪽 손이 불구가 된 자를 고쳐 준 것이 문제가 되어서 논쟁을 벌인 사건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이를 "지키면 너희는 내 소유가 되겠고,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언약을 하셨습니다. "(출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 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 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그 언약을 맺은 것이 바로 모세가 받은 십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 명들을 어긴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계약관계를 파괴하는 행위였습니다.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과 언약이 파괴된다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은 물론 모든 축복마저 상실하는 것이었습니다. "(신7:11) 그런즉 너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신7:12)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 실 것이라 (신7:13)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 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케 하시리니." 그래서 주어진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고자 율법을 구체화시켰던 것 입니다. 그 여러 율법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 제4 계명입니다. "(출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20: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출20:10)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 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출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 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에는 모든 일이 금지되어 있었으며, 그리고 병을 고친다는 것은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의 율법은 이 일에 대하여 아주 명확하게 또는 상세하게 정하였습니다. 의학적인 배려는 생명이 위험했을 때에만 주어졌 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만일 벽이 사람 위에 무너졌다면, 그 사람 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알아볼 정도만큼 벽을 치워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만일에 그 사람이 살아 있었다면 구원함을 받았으나 만일에 죽었다면 그의 시체는 다음날까지 그곳에 방치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골절은 치료받지 못했습니다. 수족이 삔 곳에 찬물을 붓지 못하였습니다. 손가락 벤 상처에는 고약을 바르지 않고 붕대를 감을 수 있었다.
즉 대개의 상처는 그것이 악화되기를 방지할 수는 있었으나 좋아지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엄격한 정통파의 안식일에 대한 견해를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엄격 한 유대인은 안식일에는 자기의 생명마저도 지키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카비(Maccabees)전쟁에서 방위전에 패했을 때, 유대의 반란군 몇 사람이 동굴 속으로 도망쳤습니다. 수리아 병사들이 그들을 추격했고, 그들 은 유대인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었으나 유대인들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그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유대인들과 싸웠다. 그들은 동굴 속에 있는 유대인 들을 불태워 죽였다. 유대인들은 동굴의 입구를 막으려 들지도 않고 저항 도 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그 날에는 자신들을 지키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위기에 처해 있어서도 안식일이 지니고 있는 명예를 깨뜨릴 마음은 없었다. 우리의 율법은 우리에게 그 날에는 쉬어라고 요구 한다." 로마의 장군 폼페이(Pompey)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을 때, 방어자들은 성전의 경내에 피난하였습니다. 폼페이 장군은 그보다 높은 작은 산을 구 축하여 그 위에서 공격하토록 공사를 진행시켰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신앙을 알고 있었으므로 안식일에 그것을 구축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들의 안식일의 무활동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죽음의 허가증에 서명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들을 지키기 위하여 손을 들려고 하지도 않았고, 적군이 작은 산을 구축하는 일을 방지하려고도 아니하였습니다. 로마인들 은 징병제도를 채용하고 있었으나, 나중에 가서는 유대인들을 병역에서 면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엄격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싸우려 하지 않 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철저하고 엄격한 율법준수 관념은 안식일 자체를 절대 화시키거나 신화화(神化化이)시키는 것으로 예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 되는 것입니다. "(막2: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 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보다 귀한 것이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생명을 죽이 기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는가 여부를 눈여겨 보았지만 예수께서는 한 편 손 마른 불쌍한 사람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옳으냐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옳으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법보다 중요 한 것이 생명이기 까닭에 손 마른 사람을 한가운데 일어서게 하시고 그 들에게 묻기를 "(막3:4).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 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안식일일지라도 병든 사람을 내버려 두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을 함으로 법리론을 내세워 '도리'에 비중을 두지 않고, 안식일 에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으로 법리보다는 '실리'에 더 무 게를 두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반문은 굳이 안식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전반에 적용되는 물음이었습니다. 사실상 예수는 이 물음으로써 다른 날 과 안식일을 구분하려는 전통적인 관념을 철폐해 버렸습니다. 더 이상 거 룩한 날 거룩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의 이 반문은 안식일을 상대화하고 비신화화하고 있습니다. 이 날만 지키 면 특별한 복이 있다거나 이를 지키지 않으면 특별한 화가 있으리라는 사고는 안식일을 신화화한 것입니다. 유대교의 한 랍비는 안식일을 두 번 만 철저히 지켜라 그리하면 네 구원이 보장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안 식일을 신화화하고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 반문은 안식 일뿐만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그 어느 날에나 다 해당되는 질문 인 동시에 해 아래 그 무엇도 절대가 될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날만 거룩해야 된다면 다른 날에는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가 안식일의 특수성을 철폐해 버린 것은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그날의 의미를 모든 날에, 삶 전체에 확대시 킨 것이 됩니다. 흔히 우리는 다른 날에 비해 주일이 거룩하고 다른 직업 에 비해 목회하는 직업이 거룩하다고 해서 성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런 이원론적인 사고가 자칫하면 우리의 인격과 생활에 분열 일으켜서 우리의 삶을 병들게 할 수 있다는데 그 위험성이 있고 실제로 우리가 그런 위기에 빠져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주일이 거룩하다.'는 사실에만 집착 하고 그것만 강조하면 쉽게 주일에만 성스러우면 되고 다른 날에는 개판 쳐도 좋다는 사고방식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든 아니든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은 어느 때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거룩하며 옳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것은 거룩한 것이며 옳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도하 기 위해서 올려진 성직자의 손이 거룩하다면 삽 자루를 쥔 노동자의 손 이나 연필을 쥔 학생이 손이나 걸레질하는 주부의 손이 생명이 되신 예수와 복음을 위한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거룩한 것입니다. 얼마 전 전국 트럭 운송협회 운전자들 50여 명이 경주 톨게이트에 모 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시위방법으로 경주에서 부터 서울까지 고속도로를 교통법규가 허용하는 최저 속도로 일제히 운 행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경찰당국은 경찰 50명을 동원, 트럭마다 동승하여 트럭 운전자들에게 "평상시대로 달리라."고 말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통법규가 허용하는 고속도로 최저 운행속도로 (60km/h) 50여대의 트럭이 일제히 운행한다면 경부고속도로가 완전히 마 비된다는 것은 뻔한 것입니다. 그래서 속도를 위반해도 괜찮으니까(최고 속도인 80km/h를 위반해서) 평상시대로 달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통법 규는 교통의 원활한 소통을 통해 인간의 삶에 편리를 도모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미국의 교통경찰은 원활한 차량 소통을 위해 있지만, 한국 교통경찰은 단속을 그 목적으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막3:4).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예수께서는 법 이전의 차원에서 그들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법보다 중 요한 것은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나 성전 등 날이나 장소를 절대화시키거나 신격화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생 명을 오히려 절대화시켜 그 생명의 존엄성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주 일 성수해야 구원받는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교회당 건물 을 특별히 성전이라고 불러 다른 교회당과 구분한다고 그곳에만 하나님 이 계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안식일이나 성전이 아니라 "우리"(사람)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2. 아무튼 안식일에 대한 그런 물음과 불구자를 고친 행위는 결국 유 대 종교지도자들의 분노를 샀는데 본문 6절을 보면 이로써 유대인들이 헤롯당과 더불어 예수를 처치하기 위한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한 바대로 우리는 그들의 분노를 선의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의 행위가 공적인 질서를 깨뜨렸다는데 대한 의분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중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 예수의 행위가 분명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행위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의 그 행위가 기존질서를 유린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범법은 사랑의 행위라는 것으로 써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안식일법의 궁극적인 의미를 물었던 예수의 반문은 실로 타당했으며 그런 면에서 당시 그 안식일법은 반드시 변혁되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변혁되어야 한다는 전제로써 현행법의 파괴에 대한 책임은 안져도 좋은가 비록 현행법이 잘못된 면 이 있다하더라도 만약 그것을 파괴해버리면 그 질서에 의존하여 세워진 다른 많은 선한 것들이 본의 아니게 희생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의 희생과 책임은 누가 질 것이냐는 것입니다. 자 이런 문제들을 제 기해 놓고 보면 예수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서 사랑을 결행했다는 것은 실로 그것이 비장한 결단이 아닐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사랑에로의 결단이 부득이 다른 하나를 유린할 수 밖에 없다는 현실과 또 그것에 따르는 모든 책임을 스스로 각오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을 빤히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유대인들은 예수의 이 행위를 보고 그를 죽일 음모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실제로 죽을 각오마저도 했어야 했습니다. 무책임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책임질 각오가 없는 사랑은 감상일 뿐 사랑일 수 없습니다. 사랑마 저도 다른 것을 희생할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불 다른 것을 희생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마땅히 그 희생에 대해 책임질 각오를 해야합니다. 사실 사랑의 행위란 희생이나 수난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며, 사랑하려고 하면 이내 그것에 대립되는 또 하나의 이질적인 현실에 직면 하게 됩니다. 이 다른 현실을 모르고 덤비는 사랑은 언제나 위험합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도 바로 이 사랑에 대한 책임의식이 박약 해서입니다. 내가 내 민족과 내 나라를 사랑한다고 했을 적에도, 내가 가 난한 소외자를 사랑한다고 했을 적에도, 수난에 대한 각오와 투철한 책임 의식이 없으면 괜히 감상에 사로잡혀 날뛰다가 예상치 않았던 다른 현실 을 만나면 또 그렇게도 허무하게 변절해 버리고 맙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신앙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만 생각했지 수난의 각오라든지 책임의 식 같은 것은 아예 염두에도 없기 때문에 갑자기 어려운 십자가의 현실 이 닥치면 줄행랑을 치는 것이 당연한 처세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만 일 그 불구자를 살리기 위해 안식일법을 범했을 때 그 결과 죽음에까지 도 이를 수 있다는 각오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한갖 무책임한 행위에 불과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로서는 당시 예수가 그런 결단을 하 면서 실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 은 예수의 그 행위가 바로 그의 죽음의 이유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분명 히 밝히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그 행위를 숨어서 한 것이 아니라 마치 거기에 따르는 모든 책임을 흘로 짊어지려는 듯 백일하에 드러내놓고 했 습니다. 사랑을 내세우면 무언가가 희생될 것을 보고 그 희생에 따르는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에게 있어서 종교는 의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규칙, 법칙, 그리고 규율을 복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는 이런 규율을 깨뜨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악인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들은 종교란 교회에 출석하는 것, 성서를 읽는 것, 식사 때 감사하는 것 가정예배를 드 리는 것, 그리고 종교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외면적인 행위를 실행하는 것만으로 알았을 뿐이고, 그들의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이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고, 동정도, 희생할 의사도 없고 엄정한 정통주의 에 빠져, 사랑의 호소에 대하여는 귀먹어리가 되고, 세계의 눈물에 대하 여는 장님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 거니와 (요10:12)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10: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 이나 (요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 이 (요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 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 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10:18) 이 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 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 았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보여주신 종교는 봉사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었습니다. 의식과 행동을 수반하는 사랑과는 아주 방면이 다 른 것으로 비교됩니다. 나의 친구, 나의 형제, 나의 주여, 당신의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이름도 형식도 그리고 의식적인 언어도 아닙니다. 오직 당신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의 정확한 실천이 아니라, 인간 요구의 부르짖음에 대한 자발적 응답으로서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파기하려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책임을 지 시고 십자가에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이웃에 대해 무책임한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그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며 책임질 줄 아는 사랑의 봉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완벽한 율법주의자가 되려고 하지 말 고 서툴러도 하나님 사랑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습니까 생명을 구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옳은 것입니다. 소자 하나라도 업신여기거나 소흘 히 하지 않고 귀하게 여겨 그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교회는 주일 성수하고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구하고자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정죄하고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 적인 사랑의 봉사를 통해 세상을 구하고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화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목표하고 있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화해야 할 것입니다. "(마18: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 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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