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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가족 (막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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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목회를 시작한 젊은 목회자가 한 평생 목회의 길을 걸어온 노 목회자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여쭈었습니다. "목사님 누가 훌륭한 목회자입니까" 노 목회자가 물었습니다. "목사 아들과 그 교회 집사 아들이 물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졌다고 해 보세. 자네라면 누구를 먼저 구할 건가 자기 아들보다 집사 아들을 먼저 구할 수 있는 목사가 훌륭한 목사이네" 젊은 목회자가 다시 여쭈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훌륭한 교인입니까" 노 목회자가 대답했습니다. "목사 아들과 장로 아들이 둘 다 대학에 입학했네.
그런데 목사는 돈이 전혀 없고 장로는 겨우 한 아이 등록금밖에 없었네. 그 때 자기 아들보다 목사 아들 등록금을 대 줄 수 있는 장로가 훌륭한 교인이네" 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내 아들보다 교인의 아들을 먼저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자기 아이보다 목사 아이의 등록금을 대줄 교인이 얼마나 있을까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네 가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째가 자기 자신이고,
둘째가 가족이고,
셋째가 이웃이고, 그리고
넷째가 원수입니다.
이런 사랑의 대상을 따라 사람들을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가 자기만 사랑하며 사는 단계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악당들은 자기밖에는 사랑할 줄 모릅니다.
둘째가 자기와 자기 가족들만 사랑하며 사는 단계입니다. 보통사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마 6:47에 보면 이방인들도 이렇게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셋째가 자기와 자기 가족들과 이웃들까지 사랑하며 사는 단계입니다. 마22:39에 보면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아가야 할 단계입니다.
넷째가 자기, 가족, 이웃, 나아가 원수까지 사랑하며 사는 단계입니다. 눅 6:27을 보면 원수를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나아가야 할 단계입니다. 십자가를 지며 사는 사람들이 나아가야 할 단계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와 가족들만을 사랑하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여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이웃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연세대학의 박 영신 교수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 성숙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가족주의라고 분석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도 혈연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 기독교인들은 기도할 때 대부분의 시간과 정열을 가족들에게 할애합니다. 이웃을 위한 기도,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심지어 교회를 위한 기도도 부수적입니다. 이점이 우리 신앙 성숙을 가로막습니다. 가족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내 가족만 생각하는 신앙생활을 청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잘못 생각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씀입니다. 찾아온 가족들을 예수님께서 모른 채 하셨기 때문입니다. 잘못하면 예수님께서 가족을 거부하신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보다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31절에 보면 "때에"라고 되어있습니다. 막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고향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 바닷가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막 2장에 보면 서기관을 비롯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옵니다. 급기야 막 3장에 보면 예수님을 적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3장 6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고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본격적으로 모의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3장 21절을 보면 이들이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헛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파견 나온 서기관이 예수를 만나 본 뒤에 바알세불을 지폈다 즉 귀신들렸다고 판정을 내렸습니다.
당시에 이들이 종교적 판정을 내리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아들 예수, 형 오빠 예수가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다는 소문, 심지어 귀신들려 추방당하게 됐다는 소문을 듣게 되자 21절에 보면 가족들이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왔습니다. 31절에 보면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마리아와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 걱정에 먼길을 달려왔습니다. 수소문 끝에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창 제자들과 모여든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계셨습니다. 사람을 시켜서 예수님을 불러내려 했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데리고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왜 가버나움에 오셨는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몰랐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 자기들이 하려는 일이 어떤 결과를 낳을 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아들 예수, 형 오빠 예수 예수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과 염려뿐입니다. 혈연의 정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위대한 공생애 사역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걸림돌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족주의의 문제입니다. 자기 가족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게 됩니다. 32-33절에 보면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라고 하자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족들의 부름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자는 그들의 제의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이 제의는 사생애로 돌아가자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은 다시 사생애로 돌아갈 수는 없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해석하기 나름으로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을 인정하지 않으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존의 가족 관계를, 혈연 관계를 부정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혈연관계, 가족관계를 부정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막 7장 10-11에 보면 부모를 공경하라고 강도 높게 가르치셨습니다. 특히 형식적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요 19:26-7에 보면 십자가에 달려 고통스럽게 운명하시면서도 어머니 마리아를 염려하셨습니다. 어머니를 찾으셨고,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의 앞날을 부탁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가족 사랑과 하나님 사랑 또는 가족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 1장 8절에 보면 "오직 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가 확산되어 갈 경로가 예언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펼쳐 갈 전도 사역의 경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입니다. 문법적으로 네 가지 대상은 등위 접속사 ".과" 영어로 ".and"로 연결되어있습니다. 등위 접속사란 같은 수준, 같은 위치이 것을 대등하게 연결할 때 쓰는 문법적 용례입니다. 즉 네 가지가 다 같이 중요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보다 쉽게 설명해서 예루살렘을 전도할 만큼 다 하고, 유다에 가서 전도할 만큼 다 하고, 그 다음 사마리아로 가서 전도할 만큼 다 하고, 그리고 나서 땅 끝으로 갈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랑을 다 쏟고, 다음에 유다에 가서 사랑을 다 쏟고, 다음으로 사마리아에 가서 사랑을 다 쏟고, 그리고 나서 땅 끝에 가서 사랑을 쏟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집안도 다 전도 못하고 어디 선교사로 가는가 자기 집안부터 다 전도한 다음에 가야할 것 아닌가 또 어떤 분들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도 아직 전도하지 못한 곳이 많은데 해외 선교는 무슨 해외 선교인가 국내 전도부터 다 하고 나서 해야 할 것 아닌가 아닙니다. 이 분이 잘못 아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복음사역이 한참 진행되는 중에 바울은 이방 지역으로 갔습니다. 아직 유다 지방에 복음이 다 전해지기도 전에 이미 복음은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가족 먼저 사랑하고, 남은 힘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가족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가족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도 사랑해야 합니다. 단 가족 사랑과 이웃 사랑이 충돌될 때는 하나님께서 우선 순위를 정해주십니다. 그 때 그 순서를 따르면 됩니다. 어떤 때는 가족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러나 또 어떤 때는 가족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은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인도해 주십니다. 34절에 보면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모여든 무리들을 보시고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새로운 가족들을 얻으신 것입니다. 사생애 때 혈연 중심으로 맺어진 가족과는 다른 개념의 가족관입니다. 엡 2:19를 보면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믿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께서 큰 형님이 되시고, 우리 모두는 다 같은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우리는 서로 모르는 남남이었지만 예수 믿고난 후에 우리는 믿음의 식구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믿기 전에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들밖에는 없었지만 예수 믿고난 후에 믿음으로 맺어진 수많은 가족들을 얻게 된 것입니다. 지난 14일 골수이식으로 미국과 국내에 화재가 되었던 성덕 바우만 군이 골수를 기증한 서한국씨를 만나기 위해 21년만에 모국을 방문했습니다. 양아버지 스티브 바우만씨 양 누나 베키 바우만 씨와 함께 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통역을 위해 함께 온 사람의 소개로 친어머니를 만나게 됐습니다. 친어머니 신씨는 유부남과 사이에 미혼모로 성덕 군을 낳게 됐습니다. 자기의 인생을 위해 아이를 포기하고 입양기관에 맡겼습니다. 지금도 결혼한 남편과 사춘기의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까봐 숨어서 몰래 아들 성덕 군을 만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양아버지와 양 누나가 함께 있었고, 두 모자 상봉을 보며 함께 울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가 궁금했고, 또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가족을 생각해서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는 처지, 가족들 때문에 숨어서 만나야 했고, 또 드러내 놓고 왕래할 수도 없는 상황이 그들에게 어떻게 비쳐질 지 안타까웠습니다. 성덕 군은 자기 가족만 생각하는 한국의 가족주의의 희생자였습니다. 우리는 보다 넓은 의미의 가족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다 내 형제요, 내 친척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믿음의 형제요, 믿음의 가족들입니다. 피를 나눈 가족들만 가족이 아닙니다. 믿음을 나눈 가족들도 중요한 가족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5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의 가족이란 누구인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믿음의 가족이란 그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함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엡 4:4을 보면 "몸이 하나이요 성령님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피를 나눈 것도 아니고, 같은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고향이 같은 것도 아니고, 직업이 같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취미가 같은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서로가 마음에 드는 사람들끼리 모인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 다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셨고, 여러분을 부르셔서 이렇게 모여들었습니다. 그 부르심에 순종해서 이렇게 만나게 됐습니다. 제가 선택한 것도 여러분이 선택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셨고,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서로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신 사람,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사람이란 생각에서 서로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믿음의 가족들은 이렇게 서로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요 17:11에 보면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가족들은 서로 하나를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독창보다는 중창을 좋아합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호흡을 맞춰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내고, 마음을 하나로 해서 하모니를 만들어 낼 때 독창에서 전혀 맛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멋진 중창을 들어보면 이 사람들이 오래 연습을 했고, 오래 함께 노래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를 맞추고, 서로 돌아보면서 자기 소리가 튀어나지 않도록 또 자기 소리가 너무 죽지 않도록 소리 강약을 조절합니다. 진정한 중창의 멋은 하나됨에서 나옵니다. 주님도 우리가 하나되기를 바라십니다. 성도들이 서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은 함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믿음의 가족들은 이렇게 서로 하나를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로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고전 12장은 은사 장이라 불립니다. 여기서 성령님께서 성도들 각 사람에게 저마다의 은사를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몸의 지체가 여럿인데 저마다 제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몸이 정상적인 삶을 이루게 하는 것처럼 성도들도 저마다의 은사로 봉사하고 섬김으로서 주의 몸 된 교회가 제 역할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일을, 아내는 아내로서의 일을, 자식들은 자기의 맡은 일을 담당함으로써 가정이 유지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가족들도 저마다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을 담당할 때 교회가 든든히 서가게 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교회답게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저마다 받은 은사로 함께 일해야 합니다. 자기가 받은 은사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사를 주의 일을 위해 쓰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가족들은 이렇게 받은 바 은사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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