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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믿음이 없느냐 (막4,35-41)

본문

그날이었습니다.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하늘은 맑았습니다. 산은 푸 르렀습니다. 햇살은 반짝이었습니다. 새들은 숲에서 울고 들판은 곡식 을 맺으려는 새싹으로 가득 덮여 있었습니다. 바람이 바다 저편으로부터 불어 옵니다. 그 훈풍은 상기된 볼을 간지렵혀 줍니다. 감미로움이 온 몸 가득히 엄습합니다. 마치 날아갈듯한 기분으로 들뜨는 하루였습니다. 호숫가에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습니다. 잎사귀가 넓은 그 상록수들 은 사뭇 푸르다 못해 검기까지 합니다. 바다 가운데는 물보라를 튕기 며 싱싱한 고기들이 자유로이 노닐고 있습니다. 어부들은 호숫가에서 그물을 깁습니다. 평화로움이 가득차 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행복 한 것들 뿐입니다. 삽살개는 꼬리를 흔들며 주인의 그림자를 밟고 뛰어 다닙니다. 그 조그만 꼬마 주인은 맨발로 온 들판을 누빕니다. 천진하기 짝이 없습니다. 입가에서 부서지는 얇은 웃음이 행복의 껍질처럼 벗겨져 나갑니다. 그 기쁨은 온 누리에 가득 찹니다. 경치가 수려하고 평화가 가득 찬 곳, 삶의 노력이 있고 수고의 댓가 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곳, 줄줄이 사탕처럼 허연 웃음을 뱉어 내는 곳, 저 팔레스타인의 북부 갈릴리 호숫가는 그렇게 종일토록 행복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있었습니다. 바라다 보기만 해도 풍요롭기 짝이 없습니다. 그 맑은 바닷가. 일하는 즐거움이 저절로 흘러 넘치는 그 바닷가에서 우리의 거룩하신 주 님은 의연히 서서 종일토록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설파하고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베드로의 배를 빌려 바다에 띄우시고 각종 비유 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젊은이, 늙은이, 남자, 여자, 청년, 어린이 할것 없이 다양한 계층이 모여 있습니다. 어부, 농부, 대장장 이, 제사장 무리들, 율법을 논쟁하는 학자들 ,상하귀천이 따로 없습니다. 세리와 창기들 심지어는 병들고 수척해진 병자들까지도 서로 자기 의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고 야단들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울렁거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우성은 아닙니다. 함 부로 떠들지도 않습니다. 계층이 다르지만 알력이 없습니다. 오직 고 요가 있습니다. 진지한 정숙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위대한 노력들입니다. 눈은 빛을 발하고 귀는 번쩍 뜨입니다. 컴퓨터의 숫자판처럼 마음의 생각들을 골똘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한마디 한마디의 말씀은 폐부를 찌릅니다. 어느덧 눈가에는 이슬 방울이 맺히지만 입술 끝에는 배시시 웃음이 괴입니다.온갖 상념들이 뇌리에서 맴돌다가 우뢰와 같이 임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거품같이 사 라져 버립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이었습니까. 주님은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음성입니다. 주님은 거룩하다 못해 엄숙하까지합니다. 쏟아도 쏟아도 다 쏟을 수 없는 폭포수같이 주님은 종일토록 그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정지하지 않습니다. 흐르고 흘러 어느덧 날이 저물었 습니다. 꿈같은 하루가 지나간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탔습니다. 갈릴리 바다를 가로질러 저편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고물을 베고 잠이 들었습니다. 항해는 순조로왔습니다. 제자들은 오늘의 일을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서로 토론을 벌렸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배들도 이 배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함께 가 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평화로운 밤이었습니다. 더운 나라의 이른 밤은 그렇게 감미 로울 수가 없습니다. 낭만이 뱃전을 때리며 물보라와 함께 부서져 갑니다. 작은 파도소리는 그대로 오케스트라의 하모니를 이루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우리 주님의 코고는 소리는 묘한 뉘앙스의 화음을 가져 다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평안이 영원하였으면, 이 감미로움이 영 원히 정지해 버린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 배가 바다 한 가운데쯤 왔을 때입니다. 갑자기 갈릴리 호수의 양 쪽 산허리를 감돌고 일진광풍이 일었습니다.
무서웁게 바다로 내리 쳤습니다. 물결이 사나웁게 뱃전을 때립니다. 금방이라도 가라앉아 버릴것만 같습니다. 바다에는 노련한 베드로와 야고보같은 제자들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목숨이 경각간에 있습니다. 두려움이 온 몸을 엄습합니다. 꼭 죽을것만 같습니다. 가슴이 쿵쿵거리고 팔다리가 떨립니다. 손에 제대로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자꾸만 헛손질 헛발길 뿐입니다. 아-절망적입니다. 도저히 살아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때입니다. 한 제자가 아직도 고물을 베고 잠들어 있는 주님을 깨 었습니다. 그 두려움과 아우성 소리에도 마치 신경 감각이 정지해 버 린 귀머거리처럼 주무시고 있는 주님을 깨었습니다. 깨우면서 소리 쳤 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 하시려나이까. 그 음성에는 원망이 묻어 있습니다. 두려움은 어쩌면 주님께 대한 미움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일어 나셨습니다. 즉시로 바다를 향 하여 명령 하셨습니다.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 라 고요하라 하셨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성난 사자 같이 달겨드는 저 파도더러 잠 잠하라 하십니다. 미친 여자 머리카락 휘날리듯 몰아치는 저 바람더러 고요하라 하십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음성을 들은 바람은 뚝 그치고 바다는 잔잔해 졌습니다. 죽을 힘을 다하여 발버등쳐도 도저히 살아날것 같지 않았던 저 바다가 잔잔하여져 버렸습니다. 제자들은 깜 짝 놀랐습니다. 서로 수근 거렸습니다. 심히 두려워 했습니다. 저가 늬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같이 있었습니다. 많은 기사와 이적을 보았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던 일, 열매없이 잎사귀만 무성하던 무화과 나무를 말려 버리시던 일, 오 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던 일, 문둥이를 고치시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시기까지 하시던 주님을 보앗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능력을 일일이 목격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주님 은 분명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이 말씀을 달리 해석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불신 앙을 꾸짖은신게분명합니다.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불신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적을 보 고 놀래면서도 자신은 믿지 못합니다. 그것은 구경하는 신앙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건짐을 받고서도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못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의 불신앙입니다. 이 사실은 먼 이천년 전의 일만이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러한 불신앙의 이유를 본문 말씀은 세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주님이 누구신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앎에서 옵니다. 로마서 17장 17절은 믿기 위해서는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듣는 것은 알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아는 것은 매우 중요 합니다. 주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면 자기 스스로 만든 우상을 믿게 됩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현대 기독교는 우상의 종교라고 했습니다. 교 파들마다 자기들만의 예수를 만들어서 믿습니다. 예수의 예수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이단 입니다. 그래서 예수교와 기독교가 맞붙어서 서로 싸웁니다. 싸우는 것은 불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불신앙은 무지에서 옵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은 어떤 형태인지 생가해 보셔야 합니다.
둘째. 부딕치는 사건의 참된 의미를 몰랐습니다. 광풍 속에서도 저 편으로 건너 가자" 하시는 주님의 평안의 약속이 깃들어 있음을 몰랐 습니다. 예레미야서 29장 11절을 보십시요. 이스라엘이 바벧론으로 잡 혀가서 70년동안 포로생활 한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재앙 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생각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른다면 그래서 고통과 위험이 있더라 도 그것은 재앙이 아닙니다.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한 시련인줄 믿으 셔야 합니다.
셋째. 주님의 침묵의 뜻을 몰랐습니다. 광풍 속에서도 편안히 잠드 신 주님은 주님 자신이 평안이요 그 자체이심을 일깨우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이 계시는 곳에는 평안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7장 27절에서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 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평안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린 고통의 기도에서 얻어 진 것입니다. 주님의 평안은 하나님 말씀 순종의 행위에서 얻어집니다. 주님의 평안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몸을 갈갈이 찢고 방울 방울 피 흘리신 희생에서 얻은 평안 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평안을 얻으셨고 이 평안을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넘 치도록 주십니다. 광풍 속에서 누리시던 주님의 평안이십니다. 그 평 안을 당신 자신이 시험하여 우리에게 확증하신 평안입니다. 이런 평안 가지시기를 힘쓰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요.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을 온전히 알고 믿는 자의 속에서 역사하는 사건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깨달아야 함을 배웁니다. 요동하는 형실 속에서도 주님만을 의지 하므로 염려 없음을 배우게 됩니다. 앞으로 이 시간을 통하여 주님을 온전히 알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야할 것입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빈들에서 설파 하시던 주님 의 말씀들이 여과없이 우리의 심령 속에 전달되어 생생한 주님의 모습 을 우리의 믿음 속에 재생하는 기쁨이 충만해 지시기를 기도해야 하겠 습니다. 그래서 신앙 속에서 불신앙을 척결하고 주님께로부터 믿음의 칭찬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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