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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 가운데 함께하신 예수님! (막4:35-41)

본문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풍랑가운데 함께하시는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유대인들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바다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셨지만 갈릴리 바다를 하나님께서는 가장 아름답게 지으셨다”라고들 자랑합니다. 성지 순례를 갔다가 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갈릴리 바다는 참으로 아릅답습니다.! 길이가 약30리 넓이가 약20리의 바다라기 보다는 작은 호수로써 주위에는 산이 둘러있고,물은 맑고 푸릅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면 마치 자주빛 비단에 청옥을 떨어뜨려 놓은 듯이 아릅답습니다. 특히 이 갈릴리바다는 예수님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바닷가에서 전도하셨고, 제자들을 부르셨고,많은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바닷가에서 씨뿌리는 비유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천국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시고 날이 저물 때에 아마 좀 쉬기 위하여 배를 저어 건너편으로 가시면서 예수님은 배에서 곤히 잠을 이루셨습니다. 얼마쯤 주무시는데 잠잠하던 바다가 갑자기 큰 광풍이 일고 구름이 하늘을 덮고 물결이 높이 일어 배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이 황급히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서서 바다를 향하여“잠잠하라”고요하라“고 꾸짖고 제자들에게”왜두려워 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바다와 바람은 고요하고 잠잠해 졌습니다. 우리는 이장면에서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이때 제자들의 가슴에 깊은 의문이 생겼습니다.
41절에 보면,“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도데체 저분이 누구시기에.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도 예수님을 향해 이같은 의문이 생겨야 합니다. 저가 뉘기에.도데체 이분이 누구시기에.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누리는고.하는 의문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알아가는 것이 참된 신앙 생활의 본질이라 할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가운데 함께하시며,어떤 역사를 이루시며 도우시는 분이신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전도하는 가운데 천주교를 믿는 한분을 만났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천국은 갈수없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신의 삶이 변화되거나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그분의 말씀대로라면“저 위에 계신 그분이 너무 믿는 분이 많고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자기삶의 문제까지 도우실 여유가 없으신가 보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심각한 것은 우리 기독교를 믿는 성도들 가운데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전도훈련 받는 가운데 노방전도를 통하여 기독교 신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소위 성도라고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모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받는 구원의 확신이 없을 뿐만 아니라,자신의 현실적인 삶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았습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분이실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르게 깨닫고 알게 되는 그것이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세상을 흔히 고해와 같다고 합니다. 어떤 왕이 역사가들에게 인류의 역사를 기록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록해온 것을 보니 너무방대하고 길어서 다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짧게 줄여서 기록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학자들이 몇권의 책으로 줄여왔습니다.그러나 여전히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더 짧게 해 달라고 요청했더니 한 지혜로운 학자가 한글자로 줄여왔는데 그 글자는 괴로울 “고”자 였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광풍이 일어났듯이 우리들의 인생 항로에도 광풍이 일어납니다. 광풍은 역경이요 고난입니다.지금 우리 성도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고난중에 계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풍랑이 있습니다.큰 전쟁,불경기의 풍파가 일어납니다. 가정이나 혹 개인적인경험에서도 질병,사업실패 실직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는 광풍이 일어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심중에도 광풍이 일어납니다. 도마의 의심이나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번민과 고통과 같은 우리에게도 의심과 회의 심리적인 갈등등의 광풍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같은 삶가운데 풍랑을 만날때 깨닫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열심히 노젖는 열두제자들이 있습니다. 이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는 곳마다 정중하게 따르고 매일 그분의 사역에 시중들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귀울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매일 세상가운데 증인이 되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그들은 예수님을 의지해서 살았고,예수님을 사랑했으며,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바로 이제자들이 폭풍우로 인하여 몹시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물에 빠져 버릴것 같은 위험속에 고난 당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같은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예수님이 함께하신 배에도 풍랑이 찾아온다! 우리가 언듯 이해하기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데 어찌하여 이같은 풍랑을 만나는가.신앙생활 잘하고 예수잘 믿고 교회에 봉사 많이하는데 어떻게 고난이 찾아올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찌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과 마찬 가지로 질병,손실,고난등을 당할수 있다는 것입니다.이런 풍랑을 생소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환란도 주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환란중에 격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환란과 풍파를 통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시고 그것이 없이는 결코 깨닫지 못하는 놀라운 비밀을 보여주십니다. 환란을 통해,주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무지함과 연약함을 깨닫게해 주시고 우리를 은혜의 보좌로 이끄시며 우리를 이세상에 만족치 않고 천국을 열망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젠가“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백하게 하십니다.
둘째 풍랑가운데 우리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함께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폭풍우가 시작되고 물결이 배에 부딪칠때 예수님은 배의 고물에서 “주무시고”계셨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자신과 꼭같이 배고프고,목마르고,고통을 느끼고,피곤하고,휴식을 필요로 하는 육체를 가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때 주님의 육체가 쉬고 있었다는 것을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하루종일 아버지의 일을 부지런히 하셨습니다. 또한 야외에서 큰 무리들에게 설교하셨습니다. “날이 저물어서야”주님은 사역을 마치시고 주무신 것입니다. 이 주무시는 모습은 예수님의 완전하신 인간이심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교훈은 우리가 믿는 주님은 그분이 하나님이신것과 같이 또한 실제로 완전한 인간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시련을 아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것들을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육체적 연약함을 아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도와 달라고 할때 주님은 우리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십니다. 주님은 심신이 피곤하고,육체의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수 있는지 잘 아십니다. 피곤하고 지친 사람에게 진정한 위로와 회복을 주실수 있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히 4: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째 풍랑중의 함께하시는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불가능하다고 흔히 생각하는 그 일을 행하시는 주님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바람에게 말씀하시자 바람이 그의 말씀에 순종했고 그분이 물결에게 말씀하시자 물결이 그의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주님의 몇마디 말씀“즉 잔잔하라”“고요하라”라는 말씀으로 거센 폭풍우를 잔잔하게 가라 않히셨습니다. 왜요그 말씀이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셨던 그 분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람을 보내셨던 분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다를 지으신 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풍랑은 그들의 주인의 음성을 알아들었고 복종하는 종처럼 일시에 고요해 졌습니다. 우리 주님에게 불가능이란 도무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강한 폭풍우라도 그분은 그것을 제어하실 수 있고 아무리 거칠고 격렬한 기질일찌라도 주님은 그것을 변화시킬수 있습니다. 아무리 불안케 하는 양심일찌라도 주님은 그것에게 잠잠하라고 말씀하시면 평온케 하실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풍랑앞에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의 교만을 꺽어신다면 누구든지 겸손한 죄인으로 주님 앞에 나올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같은 사람들의 마음에 기적을 행하실수 있습니다. 누구든 그 영혼을 일단 그리스도께 맡기기만 하면 그 여행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을 전혀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모든 위험을 견디어 내게 하실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원수들을 사랑으로 정복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친척들이 반대하고 우리의 이웃들이 비웃는다고 해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또한 우리의 처지가 어려울찌라도 상관 없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곁에 계시고,우리가 주님과 한 배에 탄다면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염려케 하는 그모든 것들보다 더 위하시고 계신 예수님이 더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환란의 때에 제자들은 곧 예수님을 깨우며 예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 환란의 때에 예수님께서 같이 그 배에 계신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만일 그런 때에 예수님께서 안계셨다면 얼마나 불행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이 풍랑 높은 세상에 일협편주와 같은 우리의 일생의 배에 예수님을 모시지 못한 분이 많이 있습니다. 저들은 광풍이 일어나도 의지할 일도 없고 부르짖을 주님도 없습니다. 다만 허공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풍랑에 빠져드는 외로운 영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심령의 배에 함께계시는 주님을 깨우십시다. 우리 가정의 배에 예수님을 선장으로 온전히 모십시다. 남편의 심령에 주님을 깨워야하며,자녀들의 심령에서 주무시는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젊고,몸건강하고,그저 평안할 때는 누구든지 자신 만만 합니다.그러나 광풍이 일어나고 환란이 덮칠 때,자신의 인생관,철학관이 그 사상이 자신을 능히 건질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는 우주의 고아입니다. 풍랑을 헤치고 인생의 항로를 바로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환란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50:15)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분명한 사실은 인생의 풍랑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시는 때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쓸수 없는 풍랑의 때에 주님께 부르짖으면 주님의 능력의 손길이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거친 바다라도 잔잔케 하실수 있습니다. 이를 믿는 믿음을 갖춘다면 우리는 신앙의 일대 도약을 하는 때임을 알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인생의 풍랑의 때야 말로 큰 은혜를 받을 만한 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을 한 마르틴 루터는 친구와 길을 가다가 갑자기 소낙비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비를 피해 큰 나무밑으로 들어가 있다가 그만 벼락으로 옆에 있던 친구가 급사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두려운 맘이든 루터는 법학연구를 그만두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파스칼과 같은 이도 말을 타고 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떨어져 중상을 입고 치료하던중에 깊은 신앙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생의 풍랑을 만나 불안과 근심중에 계시는 분 있습니까 이 때야 말로 큰 은혜를 받을 때인 것을 기억하고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기회임을 기억하십시다. 마지막으로 풍랑가운데 함께하신 우리 주님은 그의 백성들을 대우함에 잇어서 지극한 인내심과 자비하심이 많으신 분이시다 라는 것을 알수 잇습니다. 우리는 이경우에서 제자들의 믿음이 매우 부족했음을 보게됩니다. 지나치게 두려움에 뜨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모든 기적적인 역사는 잃어버리고 또한 지난날에 그들을 보호해 주셨던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오로지 현재의 위기만을 생각햇습니다. 그래서 성급히 주님을 깨우며 “우리의 죽게된 것을 안돌아 봅니까” 부르짖는 이 모습은 절망감과 동시에 원망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혀 그들을 거칠게 대하시거나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고 믿어야 할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드럽고 자상하신 모습을 볼수있습니다. 시103:13“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과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주님은 성도들을 죄에 따라서 대우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불법을 따라서 보복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그들의 나약함을 아시고 결점을 알고 계시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용기의 부족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계속 참아주시고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처럼 주님의 인내도 온전하십니다. 예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여전히 전능하시며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주님의 마음은 여전히 그가 갈릴리 바다를 가로질러 폭풍우를 잠잠케 햇을 때의 바로 그 당시와 같은 마음이십니다. 결혼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 인생의 항해에 풍랑을 만난 때가 있습니다. 이 풍랑을 축복의 때로 전환할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바로 깨닫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풍랑가운데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깨닫고“저가 뉘기에”도데체 누구신기에.라는 감탄의 체험을 나오도록 하시고야 마시는 분이심을 깨달으면 그것이 풍랑이 아니라 축복이요 은혜받는 때입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 같은 분이십니다.택하신 백성들과 함께 삶을 나누며 살아가는 분이십니다.주님을 깨우는 심령의 역사가 우리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부르짖음이 일어나야 합니다.“우리의 죽게된 것을 안돌아봅니까”외칠때 비로소 주님이 어떤 분인줄 체험하고 그 축복을 누리는 기회가 되어집니다. 풍랑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을 깨닫게 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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