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 데려가자 (막2:1-12)
본문
I. 예수님 당시 가버나움에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4 명의 사람이 있 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중풍병든 자가 한 사람있었습니다. 그는 심한 중풍병에 걸려서 움직이지를 못했습니다. 그 중풍병자 한 사람 때문에 4 사람이 언제나 고생을 했습니다. 이렇게 무거운 짐이 되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 동네에 찾아와서 천국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가지 가지 하늘의 양식들이 모인 사람들에게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지 가지 아름다운 천국잔치의 음식들을 맛보며 기뻐하고 또 기뻐합니다.
그런데 이 4 사람들만큼은 그 중풍병자 때문에 그 축복의 자리에 갈 수 없었습니다. 집에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데, 어 떻게 그 자리엘 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들 중에도 이 중풍병자와 같은 사람이나 혹은 그와 같은 문제가 있어서 무거운 짐을 지고 인생을 살아야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교회도 마음대로 못오고, 은혜의 자리에도 마음대로 못가고, 자유도 없이 사는 그러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 문제 때문에 온 식구들 이 고통을 다하는 가정도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다 이 무거운 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인생을 (고후5:4)에서 "이 장막에 있는 우리는 다 짐 진 자와 같이 탄식을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장막 즉 육신을 입 고 사는 한 우리들은 다 짐진 자와 같이 탄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씨족 중 한 씨족은 다음과 같은 금언(Motto)을 가지고 있다. "수브 폰데르 크레스코"(Sub Pondere Cresco) 이 말은 "나는 무거운 짐 아래서 자란다"(I grow under the burden)는 뜻이다.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나라 사람들은 특별히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 하는 어려운 시절을 만났습니다. 요즘은 모든 사람들이 너 나할 것 없이 무거 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신문을 보니까, 지난해 9월에 건설업을 하던 아버지가 부도 를 내자, 등록금을 낼 수 없어서, 서울여대 4학년에 다니고, 성신여대 2 년 에 다니는 권양 자매가, 등록금을 낼 수 없어 휴학을 하고, 고 3 되는 남 동생을 위하여 강남에 있는 피자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가장이 부도가 나자, 가정의 경제가 중풍병에 걸려서, 두 딸, 본인, 아 내, 아들까지 5 식구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에는 나라의 경 제가 중풍이 걸려서, 회사도, 사업자도, 학교도 가정도 모두가 다 같이 고 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중풍병 걸린 경제 때문에 다같이 고통 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런 인생에 무거운 짐을 진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 떻게 하면 이런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릴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같이 생각하며 은혜를 받 으려고 합니다.
II. 본 론
1. 예수님께 데려가자. 중풍병과 같이 불치의 병이 들고, 씻을 수 없는 죄악으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은 다 죽어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야 삽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죽고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죽어갈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살아 있는한 우리들에게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들 때문에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예수님께로 데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들 에게 사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며, 또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벗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은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이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다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불치의 병, 난치의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38년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날때 고침을 받았습니다. 12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재산을 다 허비하고, 병이 더 중하여져서 죽어갈때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받았습니다. 어려서 부터 더러운 귀신이 들려서 귀신이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파리하여 가는 그런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아들이 무거운 짐 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나오자 완전히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의 무거운 짐을 해결해 줄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가 지고 있는 죄악의 무거운짐까지도 다 해결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중풍병자도 예수님 앞에 나와서는 병고침 받기 전에 무거운 죄짐을 먼저 벗 어 버렸습니다. 무거운 죄짐을 벗어 버린 것은 중풍병이 나은 것 보다도 더 귀한 축복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날때 이 무거운 짐을 벗어 버렸 습니다. 다섯번이나 시집을 가도 벗어 버릴 수 없었던 무거운 죄악의 짐을 진 사 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을때, 그의 무거운 죄악의 짐을 다 벗어 버렸습니다. 평생을 뜨거운 뙤약볕에 물을 길러 다녀야 하는 그 무거운 부끄러움과 죄악의 짐을 다 벗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모든 인류의 무거운 짐을 다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 러기 때문에 고통을 가져다 주는 문제들을 이 예수님께로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중풍걸린 이 나라의 경제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나와야 됩니다. 요한 선교단박종면 목사님은 술을 끊을 수가 없는 무서운 알콜중독자 였습니다.
술만 마시면 인사불성이 되고, 수 많은 사고를 저질렀습니다. 알콜중독이 되어 경련까지 이르키는 간질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술을 끊 을려고 애를써도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현대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이 였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고칠 수 없는 무서운 병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앞에 나와서 끊을 수 없는 술을 끊고, 그 모든 무서운 죄짐과 병을 다 고침받았습니다. 우리 예수님께는 이러한 능력이 있습니다. 스탠리탐이라는 사람은 앞서 4 사람이나 망한 프라스틱회사를 모두 말리는데도 인수해서, 경영을 했으나 역시 파산하고 말았다.
그런데 엎드려 기도하는 중 주의 음성이 들리는데, "다시 한번 해 봐라. 이번에는 주님 을 사장으로 모시고 해봐라"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예수님을 사장으로 모시기 위하여 변호사를 찾아가서 법적으로 예수님께 51 %의 주를 드리기로 하고 사사건건 주님께 물어 경영한 결과, 5 번이나 망했던 공장이 매년 순이익이 200만불이 된다고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다섯번이나 망한 회사도흑자의 회사로 바꿀 수 있는 전능한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육신의 질병의 문제, 마귀 사단의 문제, 죄악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지혜 의 문제, 남녀간의 문제 모든 문제를 우리 주님은 다 해결해 주실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무거운 짐이 되는 사람이나 문제들을 다 예수님 께로 데려와야 합니다. 나의 문제는 내가 직접 예수님께로 가져와야 합니다. 사람은 들것에 들고라도 와야 합니다. 무거운 짐은 그 무거운 짐 을 지고 예수님 앞으로 나와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앞에 데리고 나와야 한다는 것과 예수님 앞으로 가 지고 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나가기 위해서는 희생하고 고생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 데리고 가는 것은 쉬 운 일이 아닙니다. 힘든 일입니다. 이 사람들이 4명이 들것에 들고 온 것을 보면 먼 길을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까운 거리라면 2 명이 들고 왔을 것입니다. 그 먼길을 이 무거운 사람을 들고 가야 합니다. 또한 길을 가는 동안 그 중풍병자는 자기를 어디로 데려 간다고 얼마나 화를 냈겠습니까 이런 화를 내는 소리를 다 참아야 예수님께 데리고 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무거운 짐이 되는 자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데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을 쉽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결코 쉬 운 일이 아닙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고생을 해야 합니다. 이 고생을 하면서도 그 무거운 짐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없으면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데리고 갔다가 고침을 받지 못하면 다시 메고와야 하니, 갑 절의 고생을 해야하는데, 이 고생을 하면 반드시 이 무거운 문제가 해결 된 다는 확신이 없고서야, 누가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나에게 고통만을 주는 사람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나갔다가 그가 고침을 받지 못하면, 더 박해가 심하고, 괴롭힘이 심할 터인데, 누가 그런 위험한 도박을 하겠습니까 오직 확실한 믿음이 있는 자만이 그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그를 주님 앞에 데리고 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가지고 나간자들만이 그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4 사람이 지고 다녀야 할 무거운 짐을 해결해 준 것은 바로 그들이 예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고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어거스틴은 "믿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며, 그 믿음의 보상은 우리가 믿은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 믿음은 지금 은 내가 만지지 못하며, 보지는 못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이 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대한 결과는 그 믿음을 눈으로 보고, 만지게 되며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1:6) 말씀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자들에 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 믿음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이 주의 종에게도 부족하고,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다 부족합니다. 예수님 앞에 나가면 반 드시 고침을 받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믿지 못해서, 괜히 데리고 갔다 가 고생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 앞으로 데 리고 가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누구든지, 무슨 문제든지 예수님 앞에 나가면 다 고침받고, 해결 된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시고, 고통과 고생을 가져다 주는 모든 무거운 짐을 다 주님께 데리고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지붕을 뜯어라. 문제와 고통을 가져다 주는 무거운 짐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가서 예수님 만 만나게 하면 되지만, 그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들이 그 무거운 짐을 들고 예수님 앞으로 왔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 아서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가는 길은 축복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수 많 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그 길에 장애물들이 많은 것은 그 길이 나쁜 길이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축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서울대에 들어가는 것은 축복의 길입니다. 그러나 서울대에 들어가는 데에도 수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언제나 이렇게 축복의 길을 가는데에는 수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어떤 장애물은 외부에서 옵니다. 어떤 장에물은 내 속에 있습니다. 이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 장애물을 극복하지 않고는 축복의 장소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 장애물을 극복하지 않고는 축복을맛볼수가 없습니다. 이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Look up) 그때에 하늘로 부터 해결의 실마리가 내려옵니다. 그러나 장애물을 만났을때, 눈을 내려 땅을 내려다 보면 해결의 실마리 를 발견할 수 없고, 포기하게 됩니다. 실망하고 맙니다. 이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있는 수 많은 사람들만 보았다면 그들은 실망 하고 다시 그 무거운 짐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때, 지붕을 뜯으면 되겠다는 해결의 실 마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바라볼때는 실 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 볼때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장소로 가다가 장애물을 만나면 하늘을 바라봐야 합니다.
삭개오도 예수님 앞으로 나가려고 갔으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을 바라봤으면 그도 실망하고 돌아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하늘을 볼때, 뽕나무를 발견하고 그 위에 올라가 서 예수님을 만나고 가정이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늘을 볼때 실마리 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가다가 장애물을 만나면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또한 많은 비용이 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지붕을 뜯어내야하는데, 남의 지붕을 뜯어 내기 위해서는 얼마난 많은 비용이 들겠습니까 그 지붕을 다시 고치는 비용을 지불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손해보는 것 때문에 포기를 합니다. 다시 지 붕고쳐 주는 비용이 아까와서 무거운 짐을 다시 들고 돌아가는 자들이 있읍니다. 이것은 믿음 없는 행동이며, 나약한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나가기 위해서는 이 대가를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희생 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 대가를 지불할 각오로 일을 하면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되며, 그 댓가는 내가 손해 본 것의 수십배의 축복이 되어 우리에게 다시 돌아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손해보는 것만 생각하고 포기를 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면서, 정말로 예수님을 따라 오려거든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희생하라고 하셨습니다. 집, 재산, 부모형 제, 세상의 즐거움 이 모든 것을 다 희생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희생이 있어야만 기적을 맛볼 수 있습니다. "계란을 깨지 않고서는 오무렛을 만들 수는 없다"(You can not make an omlet without breaking eggs)는 서양 격언이 있다. 희생이 없이는 새로운 아름다운 삶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1902년 아펜젤라는 목포 근해에서 선박충돌사고가 났을 때 이화학당 학생 2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는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44세라는 장래가 창창한 나이에 사랑의 제물이 되었다. 이런 희생의 각 오가 있어야 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을 요 구합니다. 많은 희생을 해야합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우리들의 영적인 축복의 삶은 점점 더 풍부해집니다. 믿음으로 이 축복의 세계를 바라보는 자들만이 희생을 각오할 수가 있습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부다페스트에서 살면서도 신앙을 지킨 한 나이든 노 인에게 공산주의 치하에서 박해를 받고,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신앙생활한 결과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자 그 노인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그것은 마치 깊이 그리고 빠르게 흐르는 다뉴브 강과 같다. 그 깊고 급하게 흘러가는 물로 인하여 부다페스트에 있는 다뉴브 강뚝은 점점도 좁 아지고 있다. 그러나 그 급하고 깊은 물로 인하여 다뉴브 강과 강바닥은 점점더 깊어져 가고있다." 박해와 제한 속에서 신앙생활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제한 받기도하고, 정 치적인 선택권에 제한을 받기고 하고, 많은 손해를 본다. 그러나 이 땅 에서의 삶은 점점더 줄어들지만, 그러나 그로 인하여 우리의 신앙의 삶은 점점더 깊어지고 넓어지게 된다. 어떤 장애물이 우리의 무거운 짐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 로 막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희생을 각오하고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쥬리어스 씨저(Julius Caesar)가 그의 로마 군대를 이끌고 영국 해안에 상륙했을 때, 그는 그 원정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대단하고 과단성 있는 조 치를 취했다. 그는 그의 군대를 도버 해안의 카파른 벼랑 끝에 주둔 시켰다. 그리고는 그들로 벼랑 아래를 내려다 보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 밑에서는 그들이 타고 해협을 건너온 그들의 배들이 불길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놀랐다. 씨저는 의도적으로 후퇴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다 차단해 버렸다. 이제 그의 병사들은 다시 돌아 갈 수 없게 되었다. 오직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앞으로 전진하여 그 땅을 정복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들은 영국을 정복하고 말았습니다. 한번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으면, 후퇴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다 차 단하고, 오직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예수님 앞 으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3. 무거운 들것이 빈 들것이 되리라. 무슨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예수님만 만나면 우리의 무거운 짐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이 짐은 그 중풍병자를 그가 죽을 때가지 돌봐야하는 무거운 짐이였읍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4 사람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 한 사람으로 온 집안이 무거운 짐을 졌습니다.
그런데 그를 예수님께도 데리고 가자 그 무거운 짐을 벗을 수가 있었읍니다. 그 짐을 완전히 벗어 버렸습니다. 그 중풍병자가 나아서 그가 들려서 온 그 들것을 들고 갔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완전히 그 짐에서 벗어났습니다. 들고온 빈들것도 들고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모든 무거운 짐이 다 벗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 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고생하지 말고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말로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예수님을 만난 자들은 그들의 무거운 짐을 다 벗어 버렸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려서 간질하고 물에도 들어가고 불에도 들어가서 잠시도 그를 혼자 둘 수 없는 아들 때문에 고통을 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그 아들을 깨끗하게 고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무거운 짐을 완전히 벗어 버렸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죽이려고 하여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가게 되었읍니다. 그에게는 수 많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의 벌은 어떻게 받을 것인가 다시 고향에 돌아 갈 수는 있을 것인가 앞으 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두렵고 두려운 밤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그의 모든 무거운 짐 이 일순간에 다 사라져 버리고 마음에는 놀라운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무거운 짐이 인생의 길에 친구가 되었습니다. 갈때에는 무 거운 짐이였던 그가 나음을 입자 같이 길을 가는 믿음의 친구가 되었읍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 무거운 짐들이 놀라운 축복이 됩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교에는 전에 미국의 캘리포니아의 주지사가 세운 대학이 있다. 그 대학은 나중에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서 대학 이름을 졌다. 그 대학이 미국의 최고의 명문 대학 중 하나인 르랜드 스탠포드 대 학(Leland Stanford University)이다. 스팬포드는 캘리포니아의 주지사이며 미국 상원의원이였다. 그는 캘리 포니아 대학을 세우고 후에 1885년에는 그의 아들 이름을 따서 스탠포드 대 학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그에게는 자녀라고는 외아들 하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부부는 그 아들에게 최고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 부부는 그 아들에게 삶에 대한 시 야를 넓혀주기 위하여 그가 매우 어린 나이에 그를 데리고 이태리로 갔다. 그 아들은 부모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견디다 못하고 그곳에서 9 살에 죽었다. 오늘 날에도 이 스탠포드와 같이 너무나 많은 무거운 짐을 부모들이 지 어주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잘되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죽이는 길입니다. 스탠포드와 그의 아내는 몹씨 아픈 마음을 가지고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 아 왔다. 비록 그들에게 백만달러 짜리 저택과 돈이 많이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들의 외아들이 죽고난 후에 그 들은 더이상 살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날 밤에 스탠포드에게 죽은 아들 스탠포드가 나타났다. 그 리고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결코 다시는 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아버지 인류를 위하여 사세요. 다른집 자녀들을 위하여 사세 요"하고 말을 했다. 스탠포드는 즉시 아내를 깨웠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아들이 꿈에 나타 난 것을 말하며 "우리가 이제 해야할 오직 유일한 일은 캘리포니아의 모든 자녀들을 우리의 자녀로 만드는 것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다른 많 은 젊은 이들이 공부할 수있도록 대학을 짓고는 그 대학 이름을 아들의 이름을 따서 르랜드 스탠포드 대학이라고 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죽고 싶은 무거운 짐진 자 들도 이렇게 놀랍게 변화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여러분의 모든 집을 다 가지고 나와 완전히 벗어 버리시기 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 4 사람들만큼은 그 중풍병자 때문에 그 축복의 자리에 갈 수 없었습니다. 집에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데, 어 떻게 그 자리엘 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들 중에도 이 중풍병자와 같은 사람이나 혹은 그와 같은 문제가 있어서 무거운 짐을 지고 인생을 살아야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교회도 마음대로 못오고, 은혜의 자리에도 마음대로 못가고, 자유도 없이 사는 그러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 문제 때문에 온 식구들 이 고통을 다하는 가정도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다 이 무거운 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인생을 (고후5:4)에서 "이 장막에 있는 우리는 다 짐 진 자와 같이 탄식을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장막 즉 육신을 입 고 사는 한 우리들은 다 짐진 자와 같이 탄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씨족 중 한 씨족은 다음과 같은 금언(Motto)을 가지고 있다. "수브 폰데르 크레스코"(Sub Pondere Cresco) 이 말은 "나는 무거운 짐 아래서 자란다"(I grow under the burden)는 뜻이다.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나라 사람들은 특별히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 하는 어려운 시절을 만났습니다. 요즘은 모든 사람들이 너 나할 것 없이 무거 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신문을 보니까, 지난해 9월에 건설업을 하던 아버지가 부도 를 내자, 등록금을 낼 수 없어서, 서울여대 4학년에 다니고, 성신여대 2 년 에 다니는 권양 자매가, 등록금을 낼 수 없어 휴학을 하고, 고 3 되는 남 동생을 위하여 강남에 있는 피자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가장이 부도가 나자, 가정의 경제가 중풍병에 걸려서, 두 딸, 본인, 아 내, 아들까지 5 식구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에는 나라의 경 제가 중풍이 걸려서, 회사도, 사업자도, 학교도 가정도 모두가 다 같이 고 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중풍병 걸린 경제 때문에 다같이 고통 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런 인생에 무거운 짐을 진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 떻게 하면 이런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릴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같이 생각하며 은혜를 받 으려고 합니다.
II. 본 론
1. 예수님께 데려가자. 중풍병과 같이 불치의 병이 들고, 씻을 수 없는 죄악으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은 다 죽어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야 삽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죽고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죽어갈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살아 있는한 우리들에게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들 때문에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예수님께로 데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들 에게 사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며, 또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벗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은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이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다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불치의 병, 난치의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38년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날때 고침을 받았습니다. 12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재산을 다 허비하고, 병이 더 중하여져서 죽어갈때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받았습니다. 어려서 부터 더러운 귀신이 들려서 귀신이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파리하여 가는 그런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아들이 무거운 짐 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나오자 완전히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의 무거운 짐을 해결해 줄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가 지고 있는 죄악의 무거운짐까지도 다 해결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중풍병자도 예수님 앞에 나와서는 병고침 받기 전에 무거운 죄짐을 먼저 벗 어 버렸습니다. 무거운 죄짐을 벗어 버린 것은 중풍병이 나은 것 보다도 더 귀한 축복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날때 이 무거운 짐을 벗어 버렸 습니다. 다섯번이나 시집을 가도 벗어 버릴 수 없었던 무거운 죄악의 짐을 진 사 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을때, 그의 무거운 죄악의 짐을 다 벗어 버렸습니다. 평생을 뜨거운 뙤약볕에 물을 길러 다녀야 하는 그 무거운 부끄러움과 죄악의 짐을 다 벗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모든 인류의 무거운 짐을 다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 러기 때문에 고통을 가져다 주는 문제들을 이 예수님께로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중풍걸린 이 나라의 경제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나와야 됩니다. 요한 선교단박종면 목사님은 술을 끊을 수가 없는 무서운 알콜중독자 였습니다.
술만 마시면 인사불성이 되고, 수 많은 사고를 저질렀습니다. 알콜중독이 되어 경련까지 이르키는 간질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술을 끊 을려고 애를써도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현대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이 였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고칠 수 없는 무서운 병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앞에 나와서 끊을 수 없는 술을 끊고, 그 모든 무서운 죄짐과 병을 다 고침받았습니다. 우리 예수님께는 이러한 능력이 있습니다. 스탠리탐이라는 사람은 앞서 4 사람이나 망한 프라스틱회사를 모두 말리는데도 인수해서, 경영을 했으나 역시 파산하고 말았다.
그런데 엎드려 기도하는 중 주의 음성이 들리는데, "다시 한번 해 봐라. 이번에는 주님 을 사장으로 모시고 해봐라"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예수님을 사장으로 모시기 위하여 변호사를 찾아가서 법적으로 예수님께 51 %의 주를 드리기로 하고 사사건건 주님께 물어 경영한 결과, 5 번이나 망했던 공장이 매년 순이익이 200만불이 된다고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다섯번이나 망한 회사도흑자의 회사로 바꿀 수 있는 전능한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육신의 질병의 문제, 마귀 사단의 문제, 죄악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지혜 의 문제, 남녀간의 문제 모든 문제를 우리 주님은 다 해결해 주실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무거운 짐이 되는 사람이나 문제들을 다 예수님 께로 데려와야 합니다. 나의 문제는 내가 직접 예수님께로 가져와야 합니다. 사람은 들것에 들고라도 와야 합니다. 무거운 짐은 그 무거운 짐 을 지고 예수님 앞으로 나와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앞에 데리고 나와야 한다는 것과 예수님 앞으로 가 지고 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나가기 위해서는 희생하고 고생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 데리고 가는 것은 쉬 운 일이 아닙니다. 힘든 일입니다. 이 사람들이 4명이 들것에 들고 온 것을 보면 먼 길을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까운 거리라면 2 명이 들고 왔을 것입니다. 그 먼길을 이 무거운 사람을 들고 가야 합니다. 또한 길을 가는 동안 그 중풍병자는 자기를 어디로 데려 간다고 얼마나 화를 냈겠습니까 이런 화를 내는 소리를 다 참아야 예수님께 데리고 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무거운 짐이 되는 자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데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을 쉽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결코 쉬 운 일이 아닙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고생을 해야 합니다. 이 고생을 하면서도 그 무거운 짐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없으면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데리고 갔다가 고침을 받지 못하면 다시 메고와야 하니, 갑 절의 고생을 해야하는데, 이 고생을 하면 반드시 이 무거운 문제가 해결 된 다는 확신이 없고서야, 누가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나에게 고통만을 주는 사람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나갔다가 그가 고침을 받지 못하면, 더 박해가 심하고, 괴롭힘이 심할 터인데, 누가 그런 위험한 도박을 하겠습니까 오직 확실한 믿음이 있는 자만이 그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그를 주님 앞에 데리고 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가지고 나간자들만이 그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4 사람이 지고 다녀야 할 무거운 짐을 해결해 준 것은 바로 그들이 예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고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어거스틴은 "믿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며, 그 믿음의 보상은 우리가 믿은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 믿음은 지금 은 내가 만지지 못하며, 보지는 못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이 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대한 결과는 그 믿음을 눈으로 보고, 만지게 되며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1:6) 말씀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자들에 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 믿음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이 주의 종에게도 부족하고,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다 부족합니다. 예수님 앞에 나가면 반 드시 고침을 받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믿지 못해서, 괜히 데리고 갔다 가 고생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 앞으로 데 리고 가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누구든지, 무슨 문제든지 예수님 앞에 나가면 다 고침받고, 해결 된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시고, 고통과 고생을 가져다 주는 모든 무거운 짐을 다 주님께 데리고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지붕을 뜯어라. 문제와 고통을 가져다 주는 무거운 짐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가서 예수님 만 만나게 하면 되지만, 그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들이 그 무거운 짐을 들고 예수님 앞으로 왔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 아서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가는 길은 축복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수 많 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그 길에 장애물들이 많은 것은 그 길이 나쁜 길이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축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서울대에 들어가는 것은 축복의 길입니다. 그러나 서울대에 들어가는 데에도 수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언제나 이렇게 축복의 길을 가는데에는 수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어떤 장애물은 외부에서 옵니다. 어떤 장에물은 내 속에 있습니다. 이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 장애물을 극복하지 않고는 축복의 장소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 장애물을 극복하지 않고는 축복을맛볼수가 없습니다. 이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Look up) 그때에 하늘로 부터 해결의 실마리가 내려옵니다. 그러나 장애물을 만났을때, 눈을 내려 땅을 내려다 보면 해결의 실마리 를 발견할 수 없고, 포기하게 됩니다. 실망하고 맙니다. 이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있는 수 많은 사람들만 보았다면 그들은 실망 하고 다시 그 무거운 짐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때, 지붕을 뜯으면 되겠다는 해결의 실 마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바라볼때는 실 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 볼때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장소로 가다가 장애물을 만나면 하늘을 바라봐야 합니다.
삭개오도 예수님 앞으로 나가려고 갔으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을 바라봤으면 그도 실망하고 돌아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하늘을 볼때, 뽕나무를 발견하고 그 위에 올라가 서 예수님을 만나고 가정이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늘을 볼때 실마리 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가다가 장애물을 만나면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또한 많은 비용이 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지붕을 뜯어내야하는데, 남의 지붕을 뜯어 내기 위해서는 얼마난 많은 비용이 들겠습니까 그 지붕을 다시 고치는 비용을 지불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손해보는 것 때문에 포기를 합니다. 다시 지 붕고쳐 주는 비용이 아까와서 무거운 짐을 다시 들고 돌아가는 자들이 있읍니다. 이것은 믿음 없는 행동이며, 나약한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나가기 위해서는 이 대가를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희생 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 대가를 지불할 각오로 일을 하면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되며, 그 댓가는 내가 손해 본 것의 수십배의 축복이 되어 우리에게 다시 돌아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손해보는 것만 생각하고 포기를 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면서, 정말로 예수님을 따라 오려거든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희생하라고 하셨습니다. 집, 재산, 부모형 제, 세상의 즐거움 이 모든 것을 다 희생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희생이 있어야만 기적을 맛볼 수 있습니다. "계란을 깨지 않고서는 오무렛을 만들 수는 없다"(You can not make an omlet without breaking eggs)는 서양 격언이 있다. 희생이 없이는 새로운 아름다운 삶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1902년 아펜젤라는 목포 근해에서 선박충돌사고가 났을 때 이화학당 학생 2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는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44세라는 장래가 창창한 나이에 사랑의 제물이 되었다. 이런 희생의 각 오가 있어야 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을 요 구합니다. 많은 희생을 해야합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우리들의 영적인 축복의 삶은 점점 더 풍부해집니다. 믿음으로 이 축복의 세계를 바라보는 자들만이 희생을 각오할 수가 있습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부다페스트에서 살면서도 신앙을 지킨 한 나이든 노 인에게 공산주의 치하에서 박해를 받고,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신앙생활한 결과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자 그 노인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그것은 마치 깊이 그리고 빠르게 흐르는 다뉴브 강과 같다. 그 깊고 급하게 흘러가는 물로 인하여 부다페스트에 있는 다뉴브 강뚝은 점점도 좁 아지고 있다. 그러나 그 급하고 깊은 물로 인하여 다뉴브 강과 강바닥은 점점더 깊어져 가고있다." 박해와 제한 속에서 신앙생활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제한 받기도하고, 정 치적인 선택권에 제한을 받기고 하고, 많은 손해를 본다. 그러나 이 땅 에서의 삶은 점점더 줄어들지만, 그러나 그로 인하여 우리의 신앙의 삶은 점점더 깊어지고 넓어지게 된다. 어떤 장애물이 우리의 무거운 짐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 로 막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희생을 각오하고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쥬리어스 씨저(Julius Caesar)가 그의 로마 군대를 이끌고 영국 해안에 상륙했을 때, 그는 그 원정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대단하고 과단성 있는 조 치를 취했다. 그는 그의 군대를 도버 해안의 카파른 벼랑 끝에 주둔 시켰다. 그리고는 그들로 벼랑 아래를 내려다 보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 밑에서는 그들이 타고 해협을 건너온 그들의 배들이 불길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놀랐다. 씨저는 의도적으로 후퇴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다 차단해 버렸다. 이제 그의 병사들은 다시 돌아 갈 수 없게 되었다. 오직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앞으로 전진하여 그 땅을 정복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들은 영국을 정복하고 말았습니다. 한번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으면, 후퇴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다 차 단하고, 오직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예수님 앞 으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3. 무거운 들것이 빈 들것이 되리라. 무슨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예수님만 만나면 우리의 무거운 짐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이 짐은 그 중풍병자를 그가 죽을 때가지 돌봐야하는 무거운 짐이였읍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4 사람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 한 사람으로 온 집안이 무거운 짐을 졌습니다.
그런데 그를 예수님께도 데리고 가자 그 무거운 짐을 벗을 수가 있었읍니다. 그 짐을 완전히 벗어 버렸습니다. 그 중풍병자가 나아서 그가 들려서 온 그 들것을 들고 갔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완전히 그 짐에서 벗어났습니다. 들고온 빈들것도 들고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모든 무거운 짐이 다 벗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 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고생하지 말고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말로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예수님을 만난 자들은 그들의 무거운 짐을 다 벗어 버렸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려서 간질하고 물에도 들어가고 불에도 들어가서 잠시도 그를 혼자 둘 수 없는 아들 때문에 고통을 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그 아들을 깨끗하게 고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무거운 짐을 완전히 벗어 버렸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죽이려고 하여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가게 되었읍니다. 그에게는 수 많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의 벌은 어떻게 받을 것인가 다시 고향에 돌아 갈 수는 있을 것인가 앞으 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두렵고 두려운 밤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그의 모든 무거운 짐 이 일순간에 다 사라져 버리고 마음에는 놀라운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무거운 짐이 인생의 길에 친구가 되었습니다. 갈때에는 무 거운 짐이였던 그가 나음을 입자 같이 길을 가는 믿음의 친구가 되었읍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 무거운 짐들이 놀라운 축복이 됩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교에는 전에 미국의 캘리포니아의 주지사가 세운 대학이 있다. 그 대학은 나중에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서 대학 이름을 졌다. 그 대학이 미국의 최고의 명문 대학 중 하나인 르랜드 스탠포드 대 학(Leland Stanford University)이다. 스팬포드는 캘리포니아의 주지사이며 미국 상원의원이였다. 그는 캘리 포니아 대학을 세우고 후에 1885년에는 그의 아들 이름을 따서 스탠포드 대 학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그에게는 자녀라고는 외아들 하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부부는 그 아들에게 최고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 부부는 그 아들에게 삶에 대한 시 야를 넓혀주기 위하여 그가 매우 어린 나이에 그를 데리고 이태리로 갔다. 그 아들은 부모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견디다 못하고 그곳에서 9 살에 죽었다. 오늘 날에도 이 스탠포드와 같이 너무나 많은 무거운 짐을 부모들이 지 어주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잘되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죽이는 길입니다. 스탠포드와 그의 아내는 몹씨 아픈 마음을 가지고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 아 왔다. 비록 그들에게 백만달러 짜리 저택과 돈이 많이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들의 외아들이 죽고난 후에 그 들은 더이상 살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날 밤에 스탠포드에게 죽은 아들 스탠포드가 나타났다. 그 리고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결코 다시는 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아버지 인류를 위하여 사세요. 다른집 자녀들을 위하여 사세 요"하고 말을 했다. 스탠포드는 즉시 아내를 깨웠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아들이 꿈에 나타 난 것을 말하며 "우리가 이제 해야할 오직 유일한 일은 캘리포니아의 모든 자녀들을 우리의 자녀로 만드는 것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다른 많 은 젊은 이들이 공부할 수있도록 대학을 짓고는 그 대학 이름을 아들의 이름을 따서 르랜드 스탠포드 대학이라고 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죽고 싶은 무거운 짐진 자 들도 이렇게 놀랍게 변화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여러분의 모든 집을 다 가지고 나와 완전히 벗어 버리시기 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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