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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도 선으로 이용하라 (막22:23-33)

본문

I. 우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성공한 것은 모든 조건이 다 좋아서 성공했 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이 예수님이 가 시는 길에는 언제나 좋은 일만 주셔서 성공했던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온 자연과 천군천사들이 다 예수님을 도와서 예수님이 성공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는 수 많은 시련과 역경이 있었읍니다. 수 많은 반대와 배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는 참으 로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는 그 반대 세력 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마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성공한 것은 예수님은 예수님 앞에 다가오는 모든 것 들을, 언제나 유익하게 이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 쁜 것이든 예수님은 가리지 않고 다 유익하게 이용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공의 비결이며,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이 배워야할 삶의 자세 입니다. 이러한 삶을 산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기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하여 의논을 하고는 좋은 꾀를 발견하고는, 예수님이 자기 말의 올무에 걸리면 그 자리에서 체포하기 위하여 훌륭한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가이사에게 세(稅)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아니면 불가하니이까 "하고 질문하게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라고 하면 유대민족을 배반하는 것 이 됩니다. 이것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할 때 목사가 다니며 교인들 에게 일본 사람들에게 세를 바치고 일본을 섬기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바치라고 하면 예수님은 유대인들로 부터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고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에 반항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구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로마의 반역자가 되어 로마에 체포를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꼼짝없이 만드는 그런 무서운 음모가 시련으로 예수님 께 다가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악한 음모를 유익하게 이용하셨 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보고 세를 내는 돈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돈에 있는 그림과 글이 누구의 것이야고 물었습니다. 그 돈 에는 가이사의 얼굴 모습이 있었고, 라틴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드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라"고 말씀하셨읍니다.(마22:15-22) 이렇게 예수님은 예수님을 망하게 하려는 음모를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는 방법인지 모릅니다. 또한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의 말을 책잡으려고 와서는 예수님께 물었읍니다. 예수님이 부활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 엘 백성들에게 정하여 주신 율법에 의하면 형이 장가들어 살다가 자식이 없 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형수에게 장가를 가서 형수에게 자식을 낳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그럼 7형제가 있었는데, 형이 장가 들었다가 자식이 없 이 죽어서 그 다음 동생이 그 형수와 살고, 그도 죽어서 그 다음이 그 형 수와 살고 이렇게 7 형제가 한 여자와 살다가 죽었는데, 그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부활의 때가 되면 이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부활이 있다고 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가 지고 책잡아서 예수님을 망신을 주고, 예수님의 명성을 떨어뜨리려고 한 음 모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나쁜 음모를 이용해서 그들에게 부활에 대하여 가 르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때에는 우리가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가니, 하늘의 천사와 같을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나쁜 것도 좋은 기회로 사용하셨습니다. 자기를 죽 이려는 음모를 가지고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자 기를 망하게 하려는 음모를 가지고도 자기의 사상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읍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의 방법이였으며, 예수님의 능력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우리가 지금 배워야 할 삶의 방법입니다. 1833년 진화론을 생각해낸 영국의다윈은 자기 이론을 증명해 보이겠다 고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 상태를 찾아나섰습니다. 남양군도에 가서 다 윈은 대단히 미개한 식인종 무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거의 짐승에 가까울 정도로 원시적이었습니다. 다윈은 이런 인종은 결코 개화 되거나 발전될 수 없는 부류의 인종이라고 확신하고, 이들이야말로 자기의 진화론의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믿으며 돌와왔습니다. 그후 34년이 지난 후 다윈은 다시 예전의 그 남양군도의 섬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윈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리둥절한 다윈이 보 니, 섬엔 여기저기에 교회들이 서 있고, 학교가 있고, 짐승 같던 야만의 식 인종들이 이제는 집을 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30여전 전의 식인종들이 이제는 옷을 입고 다니며 모여서 함께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 던 것입니다. 다윈에게는 매우 기가막힌 일이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 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패톤이라고 하는 선교사가 하나님의 복음 을 전하며 그 섬에서 한 사역을 통하여 그런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너무나 감명을 받은 다윈은 패톤 선교사를 보낸 영국의 런던 선교회에 거액 의 헌금을 나중에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이렇게 식인종들이 사는 섬도 34년 만에 아름다운 섬으 로 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바른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과 같이, 패튼 선교사 와 같이 나쁜 것도 좋은 것으로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 인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신체마비 속에서도 예술을 통하여 열심히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 조니 에 어렉슨(Joni Eareckson)의 생애가 책으로 출판되고, 또 영화화 되어서 미국 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청소년기에 신체에 마비가 왔다. 그러나 예술을 통하여 유익하고 생산적인 목회자의 삶을 살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의 투쟁은 실로 놀라운 것이였다. 그래서 그 영화가 많은 사람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조 니의 책의 서문에 조니 에러렉슨은 이렇게 썼다. "하나 하나 나눠진 분(minute)은 본래 그 자체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시간을 축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한 시간에는 60분이 있고, 하루에는
1,440분이 있다. 내 나이 이제 17살이니 벌써 900만 분이 지나갔다. 그러나 우주적인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는 수 많은 분들 중에 이 1 분이 특별히 구분되어 있었다. 60초로 되어있는 이 1분 속에 지금까지 내가 살아 왔던 900만분 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함축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구별한 그 특별한 1분 속에 많은 행동들과 감동들과 생각들과 감정들이 몰려들어 왔다. 내가 그것들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내가 어떻게 그들을 잘 정리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나의 삶을 영원히 변화시킨 그 운명의 1분속에 들어 있는 몇초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 어떤 경고나 예감 같은 것이 없었다. 1967년 7월 30일에 나는 내가 경험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눠 야 한다는 강한 충동이 일어 났다.
왜냐하면 나는 배워서 알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그것이 신체마비 상태에 있던 나의 삶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는 전환점이였다. 나는 영국의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쓴 글을 알고있는데, 그는 "이 세상에는 오직2개의 비극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그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In this world there are two tragedies. One is not getting what one wants, and the other is getting it.)라고 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글을 다시 말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 세상 에는 오직 2개의 기쁨이 있을뿐이다. 하나는 우리의 모든 기도에 응답 해 주시는 하나님을 가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 받지 못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믿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이 나 보다 훨씬 더 잘 내가 필요로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 의 삶의 상황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든지 하나님은 전적으로 믿을만 하다 시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의 죄와 허물에 따라 다루시지 않는 다는 것을 들었다. 나의 사고는 결코 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 벌이 아니다. 비록 내가 그 벌을 받을 만한 죄를 범했던 안했던 상관 없 이 나의 이 마비를 가져온 사고는 결코 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결 코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왜 내가 이렇게 신체마비가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아마도 하나님은 나에게 신체마비가 옴으로 내가 하나님을 훨씬 더 행복하게 섬기게 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을 것이다. 만약 내가 지금 내 발로 서서 걸어다닐 수 있다면, 나는 지금 나의 형편 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다. 나는 아마도 불만족스럽고 환멸 을 느끼는 결혼, 이혼 같은 것으로 나의 삶을 허송세월 했을 것이다. 나는 이미 고등학생 시절에 나의 삶을 이기적으로 살고 있었고, 결코 영원한 하늘 나라의 가치에 따라 인생을 살지 않아다. 나는 단순하게 매일 매일 을 살았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며 나의 원하는 쾌락을 추구 했을 것이다." 죠니 에어렉슨은 사고로 신체 마비가 되었을때, 그것을 가지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헌신하고 봉사하는 기회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앙인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지금도 경제위기를 축복의 기 회로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아픔과 슬픔과 실패와 낙망도 축복의 기회 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를 대적하는 것들도 축복의 기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렇게 나에게 나쁜 것도 좋게 사용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3가지로 생각해 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II. 본 론
1. 영의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을 다 유익하게 이용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의 사람이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다 육의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이 되면 영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영의 사람이 되면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다 영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12:33)에서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 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나무에 따라 맺는 열매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사과 나무는 사과 열매를 맺습니다. 배 나무는 배 열매를 맺습니다. 똑 같은 거름과 똑 같은 햇볕을 받지만, 배 나무는 배의 열매를 맺고, 사과 나무는 사과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영의 사람과 육의 사람이 똑같은 일을 당해 도 영의 사람은 영의 열매를 맺고, 육의 사람은 육의 열매를 맺습니다. 육의 사람은 영의 일을 만나도 육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 은 육의 일을 만나도 영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육의 열매는 모두가 다 더려운 것입니다. 나쁜 것입니다. (갈 5:19-21) 말씀을 보면 육의 열매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 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이라고 했습니다. 육의 사람은 무순 일 을 하든지 이런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일을 가지고도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육의 사람은 돈을 가지고도 죄를 짓고,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가는데 사용을 합니다. 그러나 영의 열매는 매우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갈5:22-23) 말씀을 보면 영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 과 온유과 절제"입니다. 영의 사람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결국 이러한 열매를 맺습니다.
나쁜 일을 가지고도 이런 열매를 맺습니다. 감옥에 서도 이런 열매를 맺습니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이런 열매를 맺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인 사람이 되기 전에는 육적인 사람이였습니다. 사 도 바울이 육적인 사람으로 있을때, 육적으로 볼때 그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였습니다. 육적으로 아무런 흠이 없던 자였습니다. 그는 난지 8일 만에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중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였습니다. 유대인 중에 끝까지 유대인의 피의 혈통을 지킨 지파가 두 지파가 있는데 그것이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 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였습니다. 율법으로는 가 정 철저한 바리새인이였습니다.(빌3:5) 또한 당시 최고의 권위자였던 가 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자였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육적으로 아무 런 흠이 없는 훌륭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러나 육의 사람이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육적으로 처리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도 그것이 마땅하다고 생각을 했 습니다.(행8:1)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스데반은 그를 돌로 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죽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도 사도 바울은 구원 받는 기회로 삼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마 땅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에 있는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올터이니 공무서를 써 달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의 사람이였기 때문의 영의 일을 만났어도 육의 열매를 맺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영의 사람 이 되었습니다. 영의 사람이 된 후에는 모든 것을 다 유익하게 이용했읍니다. 감옥에 갇혔어도 그 일로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사용했습니다. 더러 운 귀신 들린 자를 만나도 그것으로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사용했습니다. 핍박하고 때리는 자를 만나도 그것으로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사용했읍니다.
왜냐하면 그가 영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에는 언제나 좋은 기회만 찾아 오지 않습니다. 좋 은 기회 나쁜 기회를 다 만나며 가야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앞길에 좋 은 기회만 찾아 오기만을 바라지 말고, 먼저 여러분 자신이 영의 사람이 되 시기를 바랍니다. 영의 사람이 되면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다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먼저 영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령님의 불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요즘 TV에서 자주 백성들이 정성들여 낸 금부치들을 다시 녹여서 금덩어리를 만드는 것을 봅니다. 여러가지 모양의 금부치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오래 되어서 낡은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금부치들이 뜨거운 불속에 들어가면 네모반듯한 직육면체의 새금덩어리로 바뀌어 나옵니다. 이것은 불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불이 없으면 그런 금부치를 그렇 게 아름답게 새롭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금을 제련하는 제련소에 불이 꺼지면 여러가지 모양의 금을 정해진 모양으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낡 은 금을 새롭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속에 성령님의 불이 타오르지 않으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가지 시련들을 우리에게 유익하게 만들 수가 없읍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거장인 찰스 코닉(Chalrles Connick)은 어느날 젊 은 미술 학도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선생님의 화구를 며칠만 빌려 주십 시오. 제가 찰스 코닉이 된 기분으로 스테인드글라스 하나를 그려볼까 합니다." 며칠 후 코닉은 그 학생을 방문했다. 학생의 말이 코닉의 화구를 써도 역시 작품은 잘 안 된다는 것었다. 그 때 코닉은 이렇게 말했다. "스승의 도구가 자네를 변화 시킬 수 없네. 스승의 불을 받아가야 하 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스승의 도구와 재료를 똑같이 써도, 그 스승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없으면 그런 작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불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기회를 만나도 그것을 유익하게 이용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은 다 그 일로 큰 축복을 받 고 은혜를 받아도, 성령님의 불이 없는 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서 성령님의 불이 타오르면 여러가지 모양의 일들이 다 우리 속에서 아름다운 유익을 주는 일들로 변화됩니다. 나
쁜 기회도 좋은 기회가 됩니다. 나쁜 음도도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마음속에서 성령님의 불이 활화산처럼 타오르자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고 말씀했습니다. 성령님의 불이 그의 속에서 타오르기 때문에 어떤 일을 만나든지 그 모든 일이 다 그에게는 유익이 되는 것으로 변화 되었 습니다. 가난도 궁핍도 배고픔도 다 성령님의 불이 타오르고 있는 사도 바울에게는 유익한 것들로 변화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 일들을 다 유익하게 사용하는 자 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성령님의 불이 타올라야 합니다. 성령님의 불이 타오르면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합니다.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 을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이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다 유익하게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 성령님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 릴리에서요단강에 와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때, 하 늘이 갈라지고 예수님께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임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속에는 성령님의 불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닥쳐오든지 예수님을 그 일들을 다 유익하게 이용하실 수가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도 다 성령님충만 받아서 무슨 일이든지 다 유익하게 이 용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생명력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력이 있는 것은 다른 것을 변화 시킬 수가 있습니다. 나쁜 것도 좋은 것으로 변화 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력이 없으면 변화시 킬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나무라야 더러운 걸음을 가지고도 아름답고 맛있는 사과를 만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나무는 천년 만년 가도 그런 변화 를 시킬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물고기는 완전히 더러운 물을 먹고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물고기는 그런 변화를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물 고기는 더러운 물을 맑은 물로 바꾸면 살아 갑니다. 그러나 죽은 물고기는 더러운 물속에 들어가면 자기 자신이 썩어 버리고 맙니다. 살아 있는 나무 식물의 뿌리는 더러운 진흙탕속에 들어가도, 그 진흙탕 속에서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식물의 뿌 리는 썩어 버리고 맙니다. 사람도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자는 어떤 일을 만나던지 그것을 다 유익 하게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 나를 핍박하는 것도 유익하게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 나를 넘어 뜨리려는 것도 유익하게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 경제위기도 축복으로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 오직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자만 이 이러 역사를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1988년 미국은 위대한 신학자 하나를 잃었다. 예일대학 교수 바바라 하그로브(Barbara Hargrove) 박사이다. 그녀는 콜로라도의 농촌에서 태 어나 농부와 결혼하여 네 자녀를 두고는 과부가 되었다. 먹고 살기도 어 려운 처지의 30세였던 그녀는 대학에 들어가고, 대학 4년 후 신학교 3년을 마치고 다시 석사 과정을 이수하고, 그 후에 박사 과정을 완수하여 52세에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예일 신학부와 일리프 신학교의 교수로 제직하다 가 64세에 뇌종양으로별세하였다. '크리스찬 센츄리'지는 하그로브 교수를 위한 조문에 이렇게 썼다. "가장 약했던 한 여자, 빨리 과부가 되고 어린 네 아이의 짐을 졌던 여 자, 육신도 약하고 정신도 고달프고 악조건이란 악조건은 다 짊어진 38세에 대학에 입학한 크리스찬이 많은 교훈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살아 있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그로브는 30세에 과부가 되고, 4 자 식들을 길러야 하고, 몸음 약해도, 그런 모든 악조건을 아름다운 신학자가 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로 살다가 갔습니다. 믿음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런 삶을 살 수가 있읍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믿음을 산 믿음과 죽은 믿음으로 나눴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나눈 산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은 행 함이 없는 믿습니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하면, 산 믿음은 우리들의 악조건도 유익하게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믿음은 아무런 변화를 이르킬 수가 없읍니다. 산 믿음을 소유하셔서, 나쁜 것도 좋게 사용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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