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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첫째 조건 (막3:13-19)

본문

변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살아있다면 변해야 합니다. 싹이 나야하고, 줄기와 잎이 돋아야하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때를 맞추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대로 있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이 변화에는 생명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그 변화를 성장이라고 또는 발전이라고 합니다. 물론 생명을 잃은 것도 변합니다. 육질이 분해되면서 냄새가 나고, 썩은 물이 생기고 벌레가 꼬이고 곰팡이가 납니다. 그러나 이것을 발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변화를 우리는 부패한다고 합니다. 세상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옛말이고, 1년 만에도 강산을 알아볼 수 없도록 바꾸어 놓고 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가 생명을 살리고, 사람으로 사람되게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변화가 아니라, 오히려 삶을 혼란하게 하고 관심이 하늘보다는 땅으로 기울어가고 사람이 사랑의 대상이 아닌 이용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진리로부터 점차 멀어지게되는 변화라면 그것은 발전이 아니라 부패입니다. 우리의 눈엔 우리 나라의 지금까지의 외적인 변화가 발전으로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좀 더 편해지고 좀 더 넉넉해지고 누릴 것이 많아지면 더 나아졌다고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평가가 아닙니다. 버스 타고 다니던 사람이 자가용 탄다해서 발전입니까 빈대떡 먹던 사람들이 피자먹게 되었다고 해서 나아진 겁니까 국민소득이 2배로 뛰었다해서 선진국입니까 버스가 자가용이 되고 자가용이 비행기가 되어도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없으면 발전이 아니요, 부패입니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대학교 졸업장이 되고, 대학교 졸업장이 박사가운이 되어도, 그 안에 예수의 진리가 없으면 선진이 아닌 미개요, 야만인 것입니다. 016이 없으면 원시인입니까 예수가 아니면 원시인입니다. 내가 앉아있는 자리가 자치회에서 국회를 거쳐 청와대로 옮겨졌다해도 그 안에 예수님의 정의가 없으면, 말만이 애국이지 실상은 내 배 두들겨 남의 등 굽게 하는 매국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는 변화가 있습니까 겉모습의 변화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것의 변화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면을 묻는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작년과 올해가 다른 변화가 내 영혼에 있습니까 변화가 없으면 생명이 없고, 생명이 없으면 능력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여러분, 믿음엔 반드시 능력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능력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그 중거가 나의 생활 속에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사람은 날마다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이 땅이 변화되지 못하는 것은 예수의 사람인 내가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화가 없으니 능력이 없고, 능력이 없으니 남도 세상도 변화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이 지역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려면 도대체 몇 명의 그리스도인이 필요하겠습니까 백 명이면 되겠습니까 좀 모자랄까요 그러면 천여 명이면 되겠습니까 주님은 ‘나 닮은 제자라면 전 지구촌을 변화시키는 데도 열둘이면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단 열 둘입니다. 열두 명이면 제대로 된 제자 열 둘이면 세상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지만 주님은 그 중에서 딱 열 둘만을 택하신 것입니다. 우리들 생각엔 제자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유리할 것 같은데 주님은 꼭 열둘만 택하셨습니다. 열둘만 제대로 훈련시키면 세계도 변화시키실 수 있다는 겁니다.
더 필요가 없다는 예수님의 계산입니다. 그럼 이제 역으로 계산해 봅시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12명이 필요했다면 우리 나라를 변화시키는 데는 몇 명의 제자가 필요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이 나라를 보시며 이렇게 탄식하실 것입니다. “하나만 제대로 되어 날 닮았어도.” 지금도 주께서 찾으시는 것은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제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를 세우시는 목적을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14, 15절을 보니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전도도 하면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시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여러분 이 세가지 목적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마음속으로 “물론 복음 전하는 사명인 전도가 우선이지”라고 생각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예, 물론 전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전도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세심하게 보시기 바랍니다. 전도와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 뒤에는 도라는 조사가 붙어 있습니다. 전도도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여기서 도자가 붙어서 의미하는 것은 덤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성경책을 김집사님께 선물한다고 하십시다. 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집사님, 이 성경책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이 성경책뿐 아니라 이 찬송가도 받으시고, 또 이 볼펜도 받으십시오” 이렇게 이야기했다면 주체는 성경책이요, 도자가 뒤에 붙은 찬송가책과 볼펜은 겸하여 드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세우신 가장 큰 목적은 함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되면 그 이후에 겸하여 전도도 되고, 귀신을 내어쫓는 것도 저절로 된다는 말씀입니다. 열왕기하 2장에 가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으로 올리시려고 벧엘로 부르셨습니다.
그 때 엘리야가 제자인 엘리사를 불러 “넌 여기 있으라. 하나님께서 나를 벧엘로 부르신다”고 이릅니다.
그런데 쉽게 떨어질 엘리사인 줄 알았더니 대답은 전혀입니다. “난 선생님이 살아있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한은 선생님을 절대로 떠날 수 없다”는 겁니다. 결국 벧엘로 같이 갔는데 선지자의 생도들이 하나같이 엘리사를 만류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생님을 불러 올리시려는 이 역사적인 판국에 왠 주책이냐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엘리사는 막무가내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 엘리사 때문에 여리고로 변경됩니다. 그러나 여리고까지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면서 엘리사는 고집스럽게 스승인 엘리야를 따라 갔습니다. 목적지가 다시 요단으로 바뀝니다. 또 요단까지 따라 갑니다. 끝까지 따라갑니다. 왜입니까 엘리사가 왜이리 악착같이 따라나섭니까 엘리사가 좀 모자라서 그런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엘리사가 그 정도의 상황파악도 못하는 안하무인의 사람은 아닙니다. 엘리사의 악착같은 추종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엘리야의 제자로 피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엘리야의 제자라 하는데, 아직까지 엘리야만한 능력이, 영감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제자라는 이름 뿐, 빈껍질인데 선생님이 떠나시려하는 판국입니다. 아직은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자신의 능력으로는 선생님이 떠나신 후 민족을 책임질 자신이 서질 않는 겁니다. 그래서 따라가야 했던 겁니다. 땅끝까지라도 따라나서야 했습니다. 능력 받아 제자다운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엘리사에게는 없었습니다. 누가뭐라 해도 끝까지 따라 가야했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건넌 훈에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왕하 2:9상)”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엘리사의 대답이 이미 준비된 대로 터져나옵니다.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왕하 2:9하). 그리고는 그 원대로 되었습니다. 선생님을 떠나보내고 되돌아오는 길에, 마주선 요단강을 스승 엘리야의 겉옷으로 좌우로 갈라 치며 엘리사는 이렇게 외칩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왕하 2”14)“ 그러자 요단강이 이리저리 갈라지면서 엘리사가 건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와 함께 계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너 엘리사와 함께 계심을 능력으로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자란 이렇게 능력까지도 닮아야합니다. 그래야 제자입니다. 갑절은 되지 못한다해도 절반이라도 따라 닮아야 제자입니다. 스승과 닮은 구석이 없는 제자를 누가 제자라 인정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라도 닮아야합니다. 닮기 위해서라면, 능력을 받기 위해서라면 어디까지라도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전 날 밤 겟세마네동산을 기억해 보십시오. 수제자 셋을 데리고 오르신 예수님은 돌 던질 만큼의 거리에 제자들을 떨구어 놓읏고는 흐르는 땀이 피가 되도록 결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런데 한차례 기도하고 제자들에게 오셨더니 제자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래 깨워서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는 다시 또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기도를 끝까지 마치시고 돌아와보니 제자들은 여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또 깨우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실패합니다. 철저히 실패하고 맙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각기 다 흩어져 자신의 삶의 옛 터전으로 돌아갑니다. 사람을 낚으라고 부르셨는데 물고기 잡으러 다시 돌아갑니다. 여러분, 실패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겟세마네에서의 스승이신 주님과 제자들의 거리가 실패의 원인입니다. 제자들은 돌 던질 만큼의 거리도 두지 말고 따라 갔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지 말라하셔도 끝까지 가서 예수님 곁에서 함께 기도했어야 합니다. 주님처럼 땅미 피가 되도록은 못하더라도 선생님과 꼭 붙어서 땀과 눈물이 얼룩지게라도 기도했어야 합니다. 여러분, 떨어져 있으니 졸게되고, 졸게되니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사같은 사람이 주님의 제자로 있었다면, 마지막 그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저에 심기던 교회에서 백씨 성을 가진 할머니 한 분이교회를 나오시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교회에 처음으로 발걸음을 하신 그 주일부터 예수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빠지지를 않으셨습니다. 각종 예배는 기본이고, 주일 낮과 밤, 수요예배는 물론 새벽기도와 구역예배, 여전도회에도 성실하게 참석하시는 겁니다. 그뿐입니까 주보 소식란에 실린 예배마다 다 참석하시는데 결혼예배, 회갑예배, 돌예배, 입주예배 닥치는 대로 참석하시는 겁니다. 가리지를 않습니다. 심지어는 약혼예배까지 참석하시는데, 여러분, 약혼예배는 그래도 좀 가까워야 참석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예배드리러 참석하셨는데 누가 뭐라고나 할 수 있습니까 교육과 회의에도 참석합니다. 구역장이 아닌데도 구역장 교육이나 회의에도, 성가대 모임에도 교사모임에도 참석을 하시는 겁니다. 전도사보다 훨씬 더 열심입니다. 이유를 여쭈었더니 그냥 예수가 계신 곳,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는 것이 그저 좋으시다는 겁니다. 잘 몰라도 열심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때부터 자손들이 잘 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는데 이 분이 기도하시는 대로됩니다. 이 분의 아들은 속된 말로 책가방 끈이 짧아서 동네에서 슈퍼를 해서 먹소사는데, 손자들이 한번도 실패 않고 일류대학의 법학과 의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거쳐야 하는 시험때마다 목회자에게 기도부탁을 하고 당신도 기도하신는데 보는 시험마다 그 어려운 시험을 거뜬히 통과하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줄 아십니까 할머니 자신에게도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젊어서부터 가지고 있던 지병인 당뇨가 아주 좋아졌고, 이런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하니까 아들로부터 자손들 모두가 신앙을 갖게 되어 집안의 불신의 세력이 완전히 물러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가장 좋아하십니다. 함께 있는 것, 그것이
첫째입니다. 전도하는 것도, 악의 세력을 내어쫓는 것도, 그 다음입니다. 여러분, 예수와 함께 있으면 됩니다.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이 기뻐지기 시작하면 내 영혼에 생명의 변화가 오고, 이렇게 내가 변화되면 능력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능려거이 나타나면 전도도 되고 악한 영의 세력도 꼼짝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부터 하십시오. 예수 계신 곳이면 어디든지 가는 것부터 해 보십시다. 이것이 제자로서의 첫째 조건입니다. 이 첫째 조건이 되어지면 둘째 셋째는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와 주님의 거리를 붙여 능력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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