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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평화의 왕 (막11:1-10)

본문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 렘 성 가까이에 도착하셨을 때 벳바게란 동네에 제자를 보내어 아직 사람이 탄 적이 없는 순진한 어린 나귀 한 마리를 빌려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자 제자들은 겉옷을 그 앞에 깔았으며, 사람들은 손에 종려나물가지를 들고나와서 흔들며 환영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요12:13),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 을 나라여!"(막 11:10), "하늘에는 평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눅19:38). 이 렇게 사람들은 외쳤습니다. 예수께서는 왜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는 것입니까 예수가 호산나를 외치며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는 유월절, 즉 해방절이었습니다. 이 절기는 출 애굽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유다의 삼대 절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절 기입니다. 더욱이 시대적으로 로마의 식민지 상황이었기 때문에 해방을 기 념하는 유다민족의 축제라는 것은 가장 정치적 긴장감이 도는 시기였습니다. 이들 축제 때에는 유다교를 신봉하는 많은 순례객들이 팔레스틴 내에서는 물론이고, 해외 각 지역에서 성전을 향하여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대사 제들과 율법학자들도 예수를 죽이려고 해도 "유월절 축제기간만은 피하자" 라고 마가복음 14장 2절에 기록되어 있다. "왜 유월절 기간만은 피하자"라 고 했을까 당시 로마는 이 시기에 예루살렘의 치안이 극도로 불안해진다는 사실 을 잘 알고있었습니다. 매년 이 때가 되면 민족감정이 고조되고 때로 격렬 한 저항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래서 점령군 당국은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초긴장 상태에 대비해만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1개 대대가 '안또니아 요 새'에 항상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도 1세기 전후 유다 역사를 보면, 대축제 때에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여러차례 소요가 일어난 것이 보도된다. 그리고 그때마다 자신을 메시아로 자처하던 민중적 지도자가 개입되어있었습니다. 이런 민중의 격앙된 감정과 지배자들의 긴장 속에서 갈릴리에서 예수 를 따르던 무리들이 수많은 순례자들의 합세를 받아 구호를 외치며 당당하 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이들은 "다윗의 나라가 온다!"고 외쳤는데, 로마 치하에서 유다민족의 왕권, 로마가 임명하지 않은 유다인을 왕으로 환호한다는 것은 로마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또, 군중이 예수를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는데.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와 평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주로 개선장군이나 임금을 환영하고 찬양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또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예수가 가는 길 앞에 옷을 벗어서 깔았는데. 이 역시 의미 깊은 행동입니다. 이스라 엘의 폭군 아합 왕 때. 예후가 혁명을 일으켰을 때, 그의 동료들은 겉옷을 벗어서 계단에 깔고 "예후가 왕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결국 겉옷을 길 앞에 까는 것은 새 왕의 즉위를 상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왕의 등극은 자세히 보면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나타 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타고 오는 것은 건장한 말이 아니라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고 오는 것이었습니다.하지만 이것도 스가랴서를 9장 9절에서 10 절을 읽어 이 내용이 나오게 되는데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메시야로 오시는 "새 왕은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는 에브 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신다"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군마"는 왕들의 행차 때 사용되던 것으로 이스라엘 북왕국과 남왕국의 왕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로 오는 메시아는 이런 것들을 없애버리고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한다고 합니다.이것은 발전된 군사기술, 즉 기마대와 전차를 갖춘 집업 군대가 생기 기 이전 지파시대 지도자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가나안 평등시대의 지도자들은 나귀를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사사기 5, 10;10, 4;12,14). 이것이야 말로 백성 위에 군림하지 않는 왕이 '백성의 종이 되어 백성을 섬기는 왕'(열상 12,7), '겸손의 왕', '평화의 왕', 진정한 왕의 등 극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그들이 소망하고 있는 하늘의 평화를 이루실 분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평화의 왕 메시아가 되셨습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높은 산에서도 호산나! 자손이여" 이렇게 군중들 이 외쳤을 때 어떤 바리새인이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고 누가복음 19장 39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볼 때 이러한 행위는 군중을 선동하는 행위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랬들 때 예수님은 말하 기를 "만일 이들이 외치지 않으면 돌들이 외칠 것이다"라고 누가복음19장 41절에서 이야기 있습니다. 이는 당신을 평화의 왕, 메시아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로마의 군인들은 어떠했습니까 승리한 로마의 장군은 화려한 갑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보무도 당당하게 수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입성합니다. 또한 그는 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내세우면서 자기의 승리를 과시합니다. 그러면 구름떼 같이 모여든 구경꾼들은 열광적으로 이 승리한 장군을 환영합니다. 이렇게 로마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많은 식민지와 민족을 지배하여 소 위 '로마의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이 평화는 무자비한 정복과 탄압으로 점 철된 피비린내 나는 것이었습니다. 무자비한 힘으로 내리 누르고 식민지 백성들이 주눅들어서 아무런 저항을 못하는 것을 그들은 평화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화는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겸손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하 셨습니다(요14:27). 예수님의 평화는 요한이 잡힌 뒤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라고 마가복음 1장15절의 선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은 세레 요한이 체포됨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세례 요한이 갈릴의 영주 안티파스에게 체포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 그러한 정치적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예수는 비로소 행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는 그 소식을 듣고 어디로 갔는가 하면, 예루살렘도 아니고 어떤 다른 곳도 아닌 갈리리로 갔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체포한 장본인 이 지배하는 지역인 '갈릴리'로 간것입니다. 말하자면 "사건의 현장으로!"직 행했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평화는 긴장과 갈들의 극복한 상태에서의 평화이였기에 긴장과 갈등의 현장인 갈릴리로 간 것입니다. 사건의 현장이 갈릴리로 와서 예수는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했는가 그 것은 다름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였 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당시 식민지하의 유대인 집권자들, 즉 사두개인과 바 리새인들에게 이 회개의 복음을 강력하게 외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의 무리들로서 무자비한 로마 정권에 복종하는 대 가로 불상한 자기 백성을 지배하는 특권을 차지 했습니다. 그들은 불의한 권력의 꼭두가시였습니다. 그들은 참평화를 바라기 보다 권력을 이용하여 세속적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뜻을 번 거롭게 형식만 차려서 까다롭게 만든 예식 문서속에 가두었습니다. 그들은 길가나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으나 깊은 골방에서 참된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야채나 박하의 십일조는 드렸으나 보다 큰 수입의 십일조는 드리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백성들에 실천만 을 강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하고 외치셨 습니다. 참 평화는 회개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회개는 자기 마음 속에서 악을 물리치고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회개 야말로 평화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평화의 바탕입니다. 회개 없이는 평화가 이루지지 않습니다. 그러데 우리들은 회개를 합니까 회개를 통 한 평화를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회개도 않하면서 상대방을 그냥 내리 누르 려고 합니다. 이러니 평화가 존재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의 평화는 이웃에 대한 섬김과 사랑, 그리고 이들에 대한 봉사에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이웃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하셨습니다. 특별히 아프고 병든 사람을 위해 많은 섬김과 봉사를 하셨습니다.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여러 모양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아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비통해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두 번이나 비통해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아픔의 사람 이 위대한 소생의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의 원수 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마 5:44)고 하셨습니다. 이 원수 사랑의 정신은 십자가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하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심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복수의 악순환의 고 리를 끊어 버리셨습니다. 참 평화는 원수 사랑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죽음이 인생의 종착역이라면 분명히 예수님의 목적이자 평화인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와 함께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인생 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죽음 너머 영원의 세계가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는 실패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라고 했 습니까 오히려 "다 이루었다"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평화는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는 40일간 지상 에 계시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샬롬"(평화)이라고 인사하셨습니다. 샬롬은 유대인의 일상적인 인사법이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샬롬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는, 참평화는 죽지 않고 거짓 평화를 이긴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는 로마의 칼을 녹이고 유대인의 거 짓 평화를 녹였습니다. 최후의 승리는 예수님의 평화가 차지했습니다. 참평 화는 이제 이 승리를 통하여 하나 하나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종려주일에 참평화의 예수님을 다시 한 번 우리 심령 속에 모셔들입시다. 아무리 불의와 부정부패가 이 세대속에서 난 무하고, 전쟁분위기와 패권주의의 서슬퍼렇게 우리주변과 세계 도처에서 번 쩍거리더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맙시다. 낙심한다면 이미 거기에는 희망의 약속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그것들은 갈수록 시들고 말것입니다. 반면에 주님의 평화는 희망의 약속입니다. 힘들더라도 이 참 평화를 이 땅위에 깊 이 심어 나가는 성도와 우리교회가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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