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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옮기는 믿음 (막11:12-14)

본문

무화과나무 이야기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11장 22절부터 24절 말씀을 좋아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읽기만 해도 금방 눈앞에 있는 큰산이 없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입니다. 얼마나 말씀이 힘있고 그 말씀이 현실감으로 다가오는지 읽을 때마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도 무릎 꿇고 "주님, 나에게도 이와 같은 믿음 주옵소서"하는 기도가 절로 나올 정도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러리라고 봅니다. 불가능을 모르는 박력 있는 인생 한번 살아보고 싶습니까 정말 불가능을 모르는 능력 있는 삶을 한번 살아보고 싶습니까 산을 옮기는 믿음을 한번 가져 보십시오. 이런 믿음을 가지면 남이 살지 못하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좋아하여 즐겨 암송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고 봅니다.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읽기만 해도 신이 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이 산"은 감람산을 가리킵니다. 그 당시 주님은 감람산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바다"는 사해바다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감람산아 그 자리에서 들려 사해로 날라 갈지어다" 하고 명령을 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될 줄로 믿으면 높이가 903m요 그 등성이 길이가 4km나 되는 감람산이 훌쩍 들려서 예루살렘으로부터 30km 떨어져 있는 사해바다로 날라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거짓말같이 들리십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시겠어요 하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어떤 면에서 절대 거짓말을 안 하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니까 우리가 더 벙벙해 지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 말씀대로 믿음을 가지고 산을 날려버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자신도 산을 날린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게다가 24절에 보면 더 강력한 말씀을 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산이 날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만사형통이라는 말을 여기에 담을 정도로 강력한 어조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해할 소지가 다분히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느낍니다. 왜 특별히 이 말씀을 오해할 수밖에 없느냐 이 말씀을 하게 된 배경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며칠 후면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와 계십니다. 낮에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또 여러 가지 하실 일을 다 하신 다음에 해가 지면 예루살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아니한 베다니라고 하는 조그마한 마을로 가서 거기서 자기가 사랑하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의 집에 가서 유숙하시고 아침이 되면 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시는 이런 일과를 며칠 동안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입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 나오실 때 아침을 잡숫지 못하고 나오신 것 같습니다. 배가 몹시 고팠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다 보니 감람산에 무화과나무가 큰 것이 하나 서있었습니다. 나무 잎이 무성하고 그 녹음이 짙은 것이 굉장히 매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열매가 많이 맺혀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괜찮아 보이는 나무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나무 밑으로 다가가 먹을 것이 없나 하고 가지 사이를 보셨는데 유감스럽게도 먹을 만한 무화과 열매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지만 아무리 봐도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면 돌아서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엄숙한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다시는 열매 맺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저주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베드로가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 일입니까 그 나무가 하루 사이에 바짝 말라 버렸던 것입니다. '야, 예수님이 저주하시더니 저렇게 말랐구나.' 그리고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저것 보십시오. 나무가 저렇게 바짝 말랐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곁에 서서 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너희들도 나처럼 믿음으로 말만 하면 당장 이렇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다른 성경에 보면 무화과나무가 마르는 정도가 아니라 뽕나무보고 뽑혀서 날라 가라고 해도 날라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눅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그리고 지금 눈앞에 보고 있는 이 감람산도 믿음을 가지고 "감람산아 들려서 사해로 날라 가라"고 하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야, 기분 나쁠 때는 믿음을 가지고 명령만 하면 다 되는 구나. 배가 고픈데 먹을 것 안 주면 저주가 임하는구나' 하는 식으로 오해할 수 있는 충분한 여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보고 저주하신 이 이야기를 가리켜 성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본문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앞 뒤 배경을 잘 살펴보면 그렇게까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화가 나서 그러신 것도 아니고,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신경질을 부린 것도 아니며, 자기가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나무를 무조건 저주하신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분명히 예수님의 행동 하나 하나에는 뜻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자기 능력을 사용하신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40일을 금식하신 뒤 배가 너무 고플 때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었음에도, 조그마한 떡 한 조각을 가지고 5천명 이상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에도 그는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돌로 떡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그렇게 공포의 고통에 시달리는 순간에도 자기를 위해서 하늘에 있는 열두 용이나 되는 천사를 소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잠깐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고 해서 무화과를 무작정 저주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신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거기에는 분명 어떤 특별한 뜻이나 계획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계획이 숨어 있었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무화과나무는 유대민족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구약에 보면 무화과나무는 언제나 유대 민족을 상징합니다. 무화과가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것을 주님이 탓하시고 저주하실 때에는 이스라엘 나라 백성, 유대나라 사람들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나라 사람들은 상식만 가지고 있지 속이 없었습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했지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조금 더 뒤에 가면 읽을 수 있는 바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양을 끌고 와서 제사를 드리기도 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기도도 하지만 모두가 위선자들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선과 영적 타락을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런 위선자들을 저주하시고 심판하실 것이라는 경고를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행동을 오해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렇게 하실 수 있나 열매가 없다고 저렇게 저주할 수 있나 게다가 믿음만 가지고 명령만 하면 산도 날라 간다니 무슨 의도로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하고 상당히 궁금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비슷한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겸손하게 마음에 담고 묵상하면서 성령님의 인도함을 기다려야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를 쓴다고 깨달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설교를 하는 저 역시 이 본문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십분의 일이나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성령님께서 저에게 깨우쳐 주시는 정도만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날 아침에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그릇에 담아 오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제가 깨닫고 은혜 받은 그것만 들고 나왔습니다. 그 다음엔 잘 몰라요. 오늘 우리가 말씀 앞에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이 시간 귀중한 정곡만이라도 우리 모두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의심이 없는 믿음 제가 볼 때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23-4절)는 주님의 말씀에는 세 가지 중요한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의심치 않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과 기도하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 소망하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 이 세 가지가 본문 말씀의 중요한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믿음은 의심치 않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이며, 바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 세 가지를 이 시간에 다 다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것만 말씀하려고 합니다. 믿음은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렇다면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의심의 관계에 대해서 이 시간 조금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23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여기서 핵심은 마음에 의심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심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24절의 핵심 역시 의심치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은 곧 '그대로 된다고 믿고 의심하지 말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문맥 속에서 의심이 우리 믿음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믿음의 배후에 그 능력을 제한할 수 있는 독소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아무리 무한한 능력을 가진 믿음이라도 이 독소가 남아 있으면 이 능력은 무한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독소란 무엇입니까 의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의심이 한 점도 섞이지 않은 믿음이 가능합니까 전혀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 가능합니까 제가 생각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그분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게된다는 복음에 관한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별로 의심하지 않습니다. 만일 누가 저에게 "당신의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저는 그것에 대해 100분의 1도 의심하지 않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나요 아니면 다시 살아나셨나요 100번을 따지고 물어도 제 대답은 똑같습니다. 내 죄가 용서받은 사실도.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주 예수 믿음으로 영원히 산다는 것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이나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가운데 행여나 아직도 그런 문제를 가지고 의심하는 분이 계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믿음이 아직 어려서 그래요. 어려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어린것은 만년이 아닙니다. 금방 지나가는 과정입니다. 조금만 지나가면 그런 의심은 다 불순물이 없어지듯이 사라집니다. 믿습니까 의심이 있을 때 죽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또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청소년들과 머리로 따지고 재고 달아보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청소년기는 사람은 자라는 과정에서 거쳐야 되는 하나의 과정인데 이와 같이 청소년 때에는 의심도 많이 하고 자주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것도 과정입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면 요지부동의, 의심치 않는 믿음을 주신다고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니까 철 들기 전에 죽지 않도록 기도하라 그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복음에 대해서나 영적인 것에 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의 믿음이나 큰산과 같은 난제가 가로막고 있을 때의 믿음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는 믿음이라 할 지라도 의심이 섞이면 안 됩니다. 의심이 안 섞인 믿음이면 산을 날릴 수가 있지만 똑같은 믿음이라도 의심이 섞이면 산을 날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는 믿음에도 의심 없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옮겨야될 산이 무엇입니까 가난입니까 실패입니까 아니면 마음에 있는 죄의식입니까 그 산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 산을 하나님이 옮겨 주시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의심치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현실적인 문제를 놓고 의심하지 않는, 요지부동의 믿음을 가지는 것이 가능할까요 사실 저도 어떤 때는 여기에 대해서 자신이 없습니다. 복음이라든지 영적인 문제는 "주여, 믿습니다." 하면 그것으로 끝나 버리는 문제지만, 내 앞에 있는 어떤 큰 문제를 놓고는 "아멘, 나는 절대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는 그런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음에서 이러한 사실을 매우 솔직하게 인정하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그대로 될텐데 그 정도의 믿음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의심하지 않는 순수한 믿음을 가지기란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못 가지면 손해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질까요 제가 깨달은 대로 여러분에게 몇 가지를 제시하겠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는 믿음에서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 정도는 실천해야 됩니다. 우선 먼저,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제 말에 대해 아마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지 모릅니다.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하지 우리가 당연히 하나님을 믿지 누굴 믿나'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의심을 하지 않으려면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으라." 주님은 믿으면 산도 날라 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믿으라고 못박으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강조하시고자 하는 믿음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어야만 의심을 배제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누가복음 18장 27절을 보십시오.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무엇이든지 인간이 못하는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그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실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시편 89편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하나님은 성실하셔서 절대 거짓말을 안 하십니다. 한번 약속하신 것은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혜보다 훨씬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우리의 문제를 다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다 이해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문제와 씨름할 때도 하나님은 그 문제의 처음과 끝을 다 내다보고 계십니다. 그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믿어야 우리 마음에서 의심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자기의 믿음을 믿는 믿음하고 다릅니다. 여러분 무슨 말씀인지 귀에 들어옵니까 믿음 중에는 자기 믿음을 믿는 고약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믿음과 자기 믿음을 믿는 믿음은 겉으로 보면 둘 다 굉장한 믿음인 것 같아도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자기 믿음을 믿는 믿음이란 자기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으니까 반드시 될 것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자기 생각에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오니까 믿는다고 소리치는 믿음입니다. 믿는 구석이 바로 자기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응답을 얻으면 그 믿음이 어느새 공로로 둔갑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믿음이 이만하니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주신다고 하는 자기 중심적인 믿음입니다. '내가 이만큼 철저하게 믿으니까 하나님도 안 주시고 못 배기실 거야.' 라며 자기 믿음을 공로처럼 들고 나갑니다. 자기가 믿는다는 그것을 굉장히 중요시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듣기에는 대단한 것 같지만 상당히 위험한 구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보다 자기 믿음을 믿는 믿음은 겉으로는 잘 표가 나지 않지만 따지고 들어가 보면 자주자주 의심에 휘말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는다고 소리치는 자기자신마저 믿기 어렵다는 것을 본성적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의심하지 않으려고 무던 애를 씁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의심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의심이 생겨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한두 번쯤 사진을 찍어보셨을 것입니다. 산으로 들로 다니다가 찍고 싶은 꽃을 발견하거나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그 광경을 사진 속에 담으려고 셔터를 누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날이 너무 늦어 빛이 어두워 아무리 조심해서 찍는다 해도 흔들릴 위험성이 크다고 해 봅시다. 그럴 때는 삼각대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날 따라 공교롭게도 삼각대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해 봅시다. 무언가 기대고 찍으려고 해도 사방에 기댈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아름다운 풍경을 놓치고 가고 싶지는 않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손으로 찍습니다. 카메라를 흔들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씁니다. 카메라에 필름을 한 장 먹이고는 숨을 죽인 채 흔들지 않고 찍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어떻게 됩니까 긴장하면 할수록 더 흔들려버리는 것입니다. 집에 가서 보면 전부 흐릿하게 나옵니다. 전혀 쓸모가 없는 사진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어야지.'하고 아무리 마음속으로 다짐에 다짐을 한다 해도 안됩니다. 그럴수록 의심은 자꾸 더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의심을 쫓아내기 위해 온갖 수단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암 환자는 오랫동안 기도를 했는데, 이제 살 가망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도 많이 하셨다는 분이 찾아와서는 "3주만 내가 와서 기도해주면 낫습니다. 3주면 낫습니다. 믿으십시오."하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3주면 낫는다니 환자나 가족들로서는 이 얼마나 흥분되는 일입니까 마치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기뻤을 것입니다. 그는 매일 환자를 찾아와서는 "주여 믿습니다. 고쳐주옵소서. 믿습니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환자를 보고는 "믿으세요. 의심하면 안됩니다. 믿으세요."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면 환자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주여, 믿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3주가 가까워져도 병은 호전되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되기만 합니다. 그럴 때면 그런 사람들이 상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왜 낫지 않는지 압니까 당신이 의심을 하기 때문에 낫지를 않아요.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안 믿는 거예요. 당신이 안낫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 당신 책임입니다. 당신의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그냥 훌훌 털고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따져 보십시다. 안수하는 사람은 도대체 뭘 믿고 있는 것입니까 3주만에 낫는다 하는 자기 말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자보고 믿으라고 할 때 뭘 믿으라는 것입니까 3주면 낫는다고 한 자기 말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이 사실을 절대적인 것으로 의심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겉으로 볼 때는 예수 이름을 들먹이며 야단법석을 떠니까 참 믿음이 대단한 것 같아도 참 위험하기 짝이 없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믿는 믿음입니다. 사람의 믿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오늘날 한국에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자기 스스로를 믿도록 강요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믿도록 하실 때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선하시고 전능하시고 지혜로우시고 성실하신 하나님을 얼마나 가까이 하느냐, 얼마나 더 많이 아느냐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두터워지는 것이지, 애를 쓰고 결심을 곱 백 번 한다고 해서 강해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기적을 낳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만 믿는 것입니다. 자기 믿음도 믿지 마세요. 하나님만 믿는 것입니다. 응답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으라
둘째로, 우리가 의심 없는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응답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의심을 배제할 수 있습니다. 응답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할 때 우리는 의심이라는 불순물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고 구하는 것에 대해서 싸울 때는 항상 응답을 놓고 싸우지 않습니까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느냐를 가지고 우리는 의심을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합니다. '정말 산이 옮겨질까' '정말 내 앞에 하나님이 살길을 새로 열어 주실까' '정말 병이 나을까' 그 결과를 가지고 항상 의심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믿음을 의지하는 사람은 늘 결과에 대해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그 결과 의심에 빠질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응답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응답 때문에 의심하지 않습니다. 내가 믿는다고 산이 날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는 것을 하나님이 동의하실 때 산이 날라 가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아무리 내가 믿고 구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면 절대로 응답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점에 대해서 확신을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 사실을 내가 믿고 기도하면 그 때에야 비로소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내가 일방적으로 철저하게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면 거기에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다윗의 기도)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응답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내가 믿고 구하는 것은 그대로 되지만 내가 아무리 믿고 구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때는 절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 믿음입니다. 오늘도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가 믿을 때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을 통해서 무언가 하시기를 원한다면 그 때는 산도 날라 갑니다. 그 때는 바다 물도 순식간에 말라버립니다. 홍해처럼 바다도 나누어집니다.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그러한 일들은 오늘도 가능한 것입니다. 마음에 책망할 것이 없게 하라
셋째로, 우리가 의심이 없는 믿음을 가지려면 25절 말씀대로 마음속에 가책을 일으키는 모든 죄를 버려야 합니다. 25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서서 기도할 때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기도하면 그대로 되리라 해 놓고는 왜 갑자기 기도하면서 용서하라는 말씀을 주십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죄가 있을 때 의심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양심에 가책을 자꾸 받다보면 믿음이 약해집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적에 내 마음에 가책 받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이 이 기도를 들어 주실까 안 들어주실 거야.'하는 자책감이 자꾸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심이 없는 기도를 하기 원하신다면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용서하지 못합니까 용서하십시오. 증오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를 사랑하십시오. 누군가와 다투고 있습니까 다툼을 중지하십시오. 원수를 맺고 있습니까 원수를 푸십시오. 다른 사람과 갈등을 일으키고 다투는 욕심이 내 속에 계속 남아 있습니까 그것을 싹싹 쓸어버리십시오. 그럴 때 비로소 의심하지 않고 믿고 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기도가 능력을 나타냅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우리 마음에 자책 받을 것이 없으면 무엇이든지 기도하는 대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자책 받을 것을 남겨 놓으면 기도할 때도 담대하게 구할 수도 없고 믿으려고 해도 자꾸 의심이 생깁니다. 그러다 보면 구하는 것도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언제든지 마음이 평안합니다.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뢰한다. 응답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항상 믿는다. 그리고 내 마음에 있는 모든 잘못된 것들, 기도를 방해할 수 있고 믿음에 의심을 심어 놓을 수 있는 것들은 미리미리 회개하고 깨끗이 씻는다.' 하는 이와 같은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산을 앞에 놓고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당장 그 산이 날라 가지 않아도 기쁨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앞에는 전도할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 사람을 전도해야 되겠다' '내 남편이나 내 자식, 내 친구를 구해야 되겠다' 하고 마음에 소원을 품을 때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 형제에 대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어떤 믿음입니까 의심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무엇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그 형제를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꼭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형제가 지금 당장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는다고 할 지라고 주님은 반드시 그 형제를 구원하신다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산이 무엇입니까 안 믿는 형제자매입니까 여러분의 산이 무엇입니까 당장 집안에 일어난 어려운 문제입니까 여러분의 산이 무엇입니까 이제는 고칠 길도 까마득한 질병입니까 무엇이든지 좋습니다.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믿음을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에 의심이 들어올 때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다시 한번 23-4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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