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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부흥 (누가복음9:12-17)

본문


1. 광야는 한적한 곳입니다. 거기는 사람도 살지 않고 인가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여기에 많은 무리가 모였다고 말합니다. 왜 사람들이 아무 볼 것도 없는 광야에 모였을까요 그들은 바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찾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광야에서 일어난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알아봄으로 우리들 자신의 신앙의 부흥은 물론이고 나아가 우리교회의 부흥을 이루는 원동력으로 삼고자 합니다.
2. 본론
(1) 많은 무리가 모였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의 수십만이나 되는 적군을 물리칠 때 이스라엘 군인은 단지 삼백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삼백 명의 용사가 삼만 이천 명의 무리 가운데 엄선된 정예병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삼만 이천 명이나 모였기에 그 중에서 삼백 명을 엄격히 구별해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또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백 이십 문도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이지만 사실 유대인의 가옥 구조 상 다락방에 일백 이십 명의 사람이 들어가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러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방에 사람들이 가득히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령님께서 비로소 이 세계에 임하시는 놀라운 은혜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사건은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교회사의 쾌거였습니다. 세계 선교 사상 영국의 스펄젼 목사가 인도했던 교회만큼 단 기간에 부흥된 교회는 없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스펄젼 목사의 탁월한 목회방법과 능력도 있었을 것이고 배후의 후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특별한 하나는 온 성도가 예배 후에도 돌아가지 않고 기도실에서 기도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기도실을 스펄젼 목사는 ‘우리교회의 용광로’라고 했습니다. 그 기도실에서 쉼없는 기도의 불이 피어 있어 성령님은 항상 그 교회에 뜨겁게 역사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맞습니다. 사실 교회의 부흥의 뒤에는 성도님들의 뜨거운 기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교회는 어떻습니까 용광로입니까 아니면 냉장고 입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혹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온장고는 아닙니까 모여야 합니다. 예배에 모여야 합니다. 구역모임에 모여야 합니다. 기도회에 모여야 합니다. 새벽에 모여야 합니다. 그리고 기관이 모여야 합니다. 이렇게 모이기에 열심을 낼 때 광야의 부흥이 바로 우리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2) 배고픔이 있었습니다. 자녀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인사를 마치고 바로 이어지는 말이 “엄마 배고파.”입니다. 또는 안스러워 하는 어머니가 먼저 “배고프지”하고 묻습니다. 그리고는 하다못해 음료수라고 내놓는 것이 어머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비가 제 아무리 악할 지라도 자식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줄 자 없으며, 고기가 먹고 싶다는데 전갈을 줄 자가 없느니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너희가 구하는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리고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원하는 만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군중은 의에 주리고 목이 말라 있었습니다. 여기에 모인 군중들은 이렇게 모인 동기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동기가 아름답고 목적이 선해야 합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찾아 왔으며, 주님의 말씀이 계시기에 그 말씀에 갈급하여 모였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게 하리라.”(요4:15) 그렇습니다. 군중들이 광야에 모인 까닭은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떡, 생명의 물을 받아 마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영원한 생명의 떡 만나와 영원히 갈하지 않는 생명수를 받아 마시므로 영적 심령의 부흥이 이미 일어났습니다. 다만 이제 육적인 부흥만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에 임하시기 전 40주야를 금식한 후 시장하실 때에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육적인 양식의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에서도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린 자에게 주시고 갈급한 자에게 베푸시는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한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갈급한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간절하게 사모하십시오. 사흘이상을 굶은 배고픈 자가 음식을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는 배고픈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배고파 우는 어린 아기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주린 심령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3)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들의 모습에서 세 종류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여기는 빈들이니까’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신앙입니다.
둘째는 동네에 들어가서 사먹든지 얻어먹든지 해결하고자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자급자족의 신앙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주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그 분께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으니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신앙입니다. 오병이어로는 이만명의 사람들을 먹이기에는 어림도 없지만 ‘주님께서 어떻게 좀 해보십시요’의 신앙입니다. 사실 오병이어는 어른 한 사람의 도시락도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속수무책 부정적인 신앙인가요 아니면 인간의 방법으로 해결하다가 안되면 불평으로 끝내고마는 인간적인 신앙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면 이룰 수 있다는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신앙인가요 우리는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며 문제를 그분께 가져가는 믿음의 모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부흥에 있어서 한가지 빼 놓을 수 없는 요소는 헌신입니다. 광야의 부흥은 어린 아이의 전적인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부흥의 운동은 초대교회 이후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만약에 성공의 사례를 들고 그 원인을 세 가지만 지적하라면 그것은
첫째도 헌신이요,
둘째도 헌신이요,
셋째도 헌신일 것입니다. 광야의 기적은 한 끼니의 도시락을 예수님께 드린 어린아이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렙다 지방의 과부 가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복은 한 조각의 떡을 엘리야에게 전적으로 드림으로 얻어진 결과였습니다. 마리아의 옥합은 깨뜨려졌을 때 값이 인정되었고 만세에 빛나는 헌금과 헌신이 되었습니다. 만일에 드림과 헌신이 없다면 광야의 부흥은 실패했을 것입니다.
3.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부흥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모이기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부흥에대해 간절한 열망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기적을 믿음으로 기대하십시오. 이제는 마지막으로 전적인 헌신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기관과 구역과 교회에 부흥의 기적을 바라시나요 전적으로 희생의 제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알의 밀알은 썩어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거두는 법입니다. 죽어야 사는 축복, 죽어야 얻어지는 부흥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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