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것 (눅9:21-27)
본문
다이야몬드가 귀중한 것이지만 돈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친구간의 우정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것이지만 그 우정보다도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도 구할 수 없고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밝혀 주십니다.
첫째로, 육신의 생명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20세의 젊은 나이에 암살된 부왕의 뒤를 이어 마케도니아 왕이 되었습니다. 그후 세계 정복에 나서 그리이스와 이집트와 페르시아와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질병에 걸리게 되었고 33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많은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고 그토록 차지하고자 했던 그 모든 영토는 더 이상 그에게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국도 머지 않아 그의 휘하 장군 네 사람에 의하여 분할 통치됨으로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에게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삶이 아무리 고난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살아 있기에 사랑할 수도 있고, 살아 있기에 즐거움을 맛볼 수도 있고, 살아 있기에 스릴 넘치는 모험을 할 수도 있으며, 살아 있기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은 자신에게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선물인데 그것을 쓰레기처럼 버린 것이기 때문에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끊는 행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명을 끊는 행위도 포함하여 금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청년이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고 질문했을 때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여기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비춰 보면 진정한 이웃 사랑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때만 가능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땅보다도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돈보다도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십수 년 전 베티 그린이라는 미국 할머니가 자그마치 9천 5백만 달러의 재산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평생 찬 물과 찬 오트밀을 먹고 살았다던데, 그 이유인즉 데우면 연료비가 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사고로 다리를 다쳤는데도 밤을 세워가며 무료병원을 찾아다녔다고 하니 얼마나 노랭이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돈으로 8백억 원이나 되는 그 유산 목록과 유언이 담겨진 그릇도 녹슨 통조림 깡통이었다고 합니다. 이 할머니가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겠습니까
둘째로, 영원한 생명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합니다. 육신의 생명은 이처럼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위운 점이 있다면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해줍니다(시90:10). 수학에 무한대를 표시하는 기호가 있습니다. 아무리 큰 수라 하더라도 무한대에 비하면 0과 같습니다. 아무리 큰 수라 하더라도 무한대로 나누면 0입니다. 시간의 단위에서 무한대는 영원입니다. 따라서 70년이든 80년이든 영원에 비하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일시적인 육신의 생명도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귀한데 영원한 생명의 가치는 얼마나 더 귀하겠습니까 사람은 죄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그 결과 성경적인 의미에서 영생(영원히 지속되는 천국에서의 복된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영생)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죄인임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 모두에게 값 없이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3:16)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1-13)
셋째로, 하늘의 상급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말도록 당부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에 대해서 장차 하늘 영광으로 오실 때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는 주님을 부끄러워하고 주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할 일이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문제는 불신 사회에서 불신자들과 함께 있을 때입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지 않고 그들과 하나 되고자 할 때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를 주저하게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사상이나 가치 기준과 정반대 되는 하나님 말씀을 말하기를 주저하게 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그것은 우리가 결코 양립될 수 없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사람에게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인정받고자 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은 소외감을 느끼며 열등감을 가지게 됩니다. 설령 세상에서 신앙 때문에 소외받게 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나를 인정해 주시고 받아주신다면 그것이 더 큰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준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나를 부끄러워하신다면 그것이 얼마나 더 큰 상실감으로 내 마음을 짖누르겠습니까 주님의 인정을 받는 쪽을 선택하십시오. 주님께서 약속하시는 상급을 바라보십시오. 하늘의 상급은 우리가 행한 것에 대한 인정이요 보상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죄 사함 받고 구원받는 데 필요한 요건들을 제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하늘의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상급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나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며 행하는 생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 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 하늘의 상급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헌신 때문에 핍박 받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얻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 가 아니요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요15:19,20)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 김 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헌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과정에서 재산의 불이익을 당하고 감금되기도 했습니다. 집권세력이 워낙 민주 세력을 탄압하는 군사독재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는 모두 중요 요직에 기용되었습니다.
첫째로, 육신의 생명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20세의 젊은 나이에 암살된 부왕의 뒤를 이어 마케도니아 왕이 되었습니다. 그후 세계 정복에 나서 그리이스와 이집트와 페르시아와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질병에 걸리게 되었고 33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많은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고 그토록 차지하고자 했던 그 모든 영토는 더 이상 그에게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국도 머지 않아 그의 휘하 장군 네 사람에 의하여 분할 통치됨으로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에게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삶이 아무리 고난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살아 있기에 사랑할 수도 있고, 살아 있기에 즐거움을 맛볼 수도 있고, 살아 있기에 스릴 넘치는 모험을 할 수도 있으며, 살아 있기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은 자신에게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선물인데 그것을 쓰레기처럼 버린 것이기 때문에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끊는 행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명을 끊는 행위도 포함하여 금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청년이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고 질문했을 때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여기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비춰 보면 진정한 이웃 사랑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때만 가능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땅보다도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돈보다도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십수 년 전 베티 그린이라는 미국 할머니가 자그마치 9천 5백만 달러의 재산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평생 찬 물과 찬 오트밀을 먹고 살았다던데, 그 이유인즉 데우면 연료비가 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사고로 다리를 다쳤는데도 밤을 세워가며 무료병원을 찾아다녔다고 하니 얼마나 노랭이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돈으로 8백억 원이나 되는 그 유산 목록과 유언이 담겨진 그릇도 녹슨 통조림 깡통이었다고 합니다. 이 할머니가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겠습니까
둘째로, 영원한 생명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합니다. 육신의 생명은 이처럼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위운 점이 있다면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해줍니다(시90:10). 수학에 무한대를 표시하는 기호가 있습니다. 아무리 큰 수라 하더라도 무한대에 비하면 0과 같습니다. 아무리 큰 수라 하더라도 무한대로 나누면 0입니다. 시간의 단위에서 무한대는 영원입니다. 따라서 70년이든 80년이든 영원에 비하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일시적인 육신의 생명도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귀한데 영원한 생명의 가치는 얼마나 더 귀하겠습니까 사람은 죄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그 결과 성경적인 의미에서 영생(영원히 지속되는 천국에서의 복된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영생)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죄인임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 모두에게 값 없이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3:16)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1-13)
셋째로, 하늘의 상급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말도록 당부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에 대해서 장차 하늘 영광으로 오실 때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는 주님을 부끄러워하고 주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할 일이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문제는 불신 사회에서 불신자들과 함께 있을 때입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지 않고 그들과 하나 되고자 할 때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를 주저하게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사상이나 가치 기준과 정반대 되는 하나님 말씀을 말하기를 주저하게 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그것은 우리가 결코 양립될 수 없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사람에게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인정받고자 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은 소외감을 느끼며 열등감을 가지게 됩니다. 설령 세상에서 신앙 때문에 소외받게 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나를 인정해 주시고 받아주신다면 그것이 더 큰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준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나를 부끄러워하신다면 그것이 얼마나 더 큰 상실감으로 내 마음을 짖누르겠습니까 주님의 인정을 받는 쪽을 선택하십시오. 주님께서 약속하시는 상급을 바라보십시오. 하늘의 상급은 우리가 행한 것에 대한 인정이요 보상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죄 사함 받고 구원받는 데 필요한 요건들을 제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하늘의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상급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나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며 행하는 생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 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 하늘의 상급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헌신 때문에 핍박 받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얻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 가 아니요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요15:19,20)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 김 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헌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과정에서 재산의 불이익을 당하고 감금되기도 했습니다. 집권세력이 워낙 민주 세력을 탄압하는 군사독재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는 모두 중요 요직에 기용되었습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