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할 수 없는가 (눅9:37-45)
본문
산 위에서 일어나는 일과 산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은 영 딴판입니다. 산 위는 영광과 환희의 장소이지만 산 아래는 혼돈과 불행과 고통의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산 아래로 다시 내려오셨는데 이것은 성육신의 축소된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이나 산 위의 영광을 버리시고 산 아래로 내려오신 것이나 그 목적은 똑 같습니다.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한 것입니다. 산 아래에는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귀신 들림으로 인한 간질 증세를 보이고 있는 외아들을 고쳐 달라고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앞서 부탁했지만 그들이 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귀신을 좇아내시고 그 아들을 온전케 하셨습니다. 그 일이 있고난 후 제자들은 “우리는 어찌하여 좇아내지 못하였나이까” 하고 질문했습니다(마17:19). 이것은 우리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앞서 그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눅9:9). 그리고 그들은 그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귀신을 좇아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제자들이 귀신을 좇아내지 못했습니까
첫째로, 그들은 온전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무능에 대한 이유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적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 씨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제자들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데는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이 믿은 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거룩하실 뿐만 아니라 사랑 많으신 분이시며, 기꺼이 그들의 도움과 방패가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종 어려움에 직면하여 이런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상태는 몹시 심각했습니다. 귀신이 그를 불 속에도 쓰러뜨리고 물 속에도 쓰러뜨렸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제자들이 그의 상태가 너무 심각하므로 과연 고쳐질 수 있을까 의심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적은 믿음입니다. 제자들은 문제에 압도된 나머지 나머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는데 우리도 종종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것 저것 따져보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문제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골리앗을 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다윗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골리앗을 보고 자신들을 보았기 때문에 낙담했습니다. 싸울 용기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을 보고 자신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때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반대는 불신이라지만 의심 또한 믿음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불신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 할 수 있다 하신 주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의심 말라 하시고 물결 위 걸어라 하시네 할 수 있다 하신 주 할 수 있다 하신 주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둘째로, 그들은 기도를 소홀히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실 때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특별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지목해서 데리고 올라가셨던 듯합니다. 앞서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도 12제자가 다 함께 있었지만 위의 세 사람만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던 전례가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 줍니다(눅8:51). 그러나 이것이 기도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핑게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동안도 예수님은 기도가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여러 차례에 걸쳐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기도와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따로 남아 있게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더욱 기도에 힘써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귀신을 좇아내지 못한 또 다른 이유로 기도가 배제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9:29)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마17:21) 기도는 능력을 받을 수 있는 통로입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기도와 관련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Much prayer, much power. Little prayer, little power. No prayer, no power. 우리 말로 옮기면 “많이 기도하면 많은 능력을 받고, 적게 기도하면 적은 능력을 받으며, 기도를 조금도 하지 않으면 능력을 조금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6:3,4)” 이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은 죠지뮬러였다. 그 결과로 전세계를 놀라게 한 기도의 능력 이야기가 탄생되었다. 실제적인 사업가의 정신을 지닌 독일인 뮬러씨는 그 당시 집없는 어린이들을 위한 시설이 별로 없었던 19세기 영국에서 고아원을 설립해야 하겠다는 확신에 사로잡혔다. 특히 그의 사업가적인 배경에서 볼때 놀라운 것은 그가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 돈을 모으겠다고 결심한 방법이었다. 그 방법이란 은밀한 기도였다. 그의 동역자들은 그가 몇가지 구체적인 것을 밝혔을 때 간담이 서늘해졌다.
어떤 자금도 직접 달라고 해서는 않된다. 헌금을 받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 기도이다. 어떤 일군도 구체적인 필요에 관한 정보를 외부에 말할 수 없다. 헌금한 사람의 명단도 역시 비밀에 붙인다. 그들에게는 개인적인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이 기관을 선정하기 위해 어떤 유명한 사람의 이름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 가망 없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빚은 조금도 지지 않는다. 모든 거래는 반드시 현금으로 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매일 기도하기 위해 한 시간씩 따로 마련해 두었다. 스위스 시계처럼 정확하게 죠지는 정해진 시간에 자기 방으로 물러 갔다.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자기 일과 고아들의 필요를 위해 자기의 소원과 소망과 꿈을 하나님께 쏟아 놓으며 주님과의 만남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그는 그의 모든 동역자들과 기도회를 가졌다. 그것도 역시 잠겨진 문 뒤에서 가졌다. 뮬러가 취한 공식에는 도저히 저항할 수없는 도전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토록 공개하기 싫어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소식은 널리 퍼져 나갔고 주머니들이 열심히 열려졌다. 전세집 하나와 일군 두명 그리고 43명의 어린이로 시작했는데 얼마 뒤에는 다섯개의 새로운 건물과 110명의 일군과
2,050명의 고아원으로 불어났다. 그의 생전에 모두 121,000명의 고아들이 침식을 제공받았고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500만 파운드의 돈(약 18억원)이 관리되었다. (뮬러는 모든 거래를 조심스렵게 기록해 두었다.) 그 일은 믿음의 기념비로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심장부에는 은밀한 기도가 있다. 어느날 고아원에 식량이 모두 떨어졌다. 사원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보고를 했다. 뮬러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항상하던 대로 식기를 테이블 위에 놓아두십시요.” 점심시간 20분 전이 되어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5분 후에 사원이 달려와서 보고를 하였다. “괜찮아요. 식량을 만드시는 하나님께 기도드려 놨으니까요.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겠지요.” 조금 후에 사원이 달려와서 또 보고하기를 “목사님 식사 시간 5분 전입니다.” 그때 마차 몇 대가 식량을 산더미처럼 싣고 들어왔습니다. 뮬러 목사는 사원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15분간을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그런 사람하고는 같이 일을 할 수가 없군요.” 기도만이 기도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그런데 왜 이번에는 제자들이 귀신을 좇아내지 못했습니까
첫째로, 그들은 온전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무능에 대한 이유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적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 씨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제자들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데는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이 믿은 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거룩하실 뿐만 아니라 사랑 많으신 분이시며, 기꺼이 그들의 도움과 방패가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종 어려움에 직면하여 이런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상태는 몹시 심각했습니다. 귀신이 그를 불 속에도 쓰러뜨리고 물 속에도 쓰러뜨렸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제자들이 그의 상태가 너무 심각하므로 과연 고쳐질 수 있을까 의심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적은 믿음입니다. 제자들은 문제에 압도된 나머지 나머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는데 우리도 종종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것 저것 따져보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문제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골리앗을 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다윗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골리앗을 보고 자신들을 보았기 때문에 낙담했습니다. 싸울 용기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을 보고 자신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때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반대는 불신이라지만 의심 또한 믿음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불신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 할 수 있다 하신 주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의심 말라 하시고 물결 위 걸어라 하시네 할 수 있다 하신 주 할 수 있다 하신 주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둘째로, 그들은 기도를 소홀히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실 때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특별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지목해서 데리고 올라가셨던 듯합니다. 앞서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도 12제자가 다 함께 있었지만 위의 세 사람만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던 전례가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 줍니다(눅8:51). 그러나 이것이 기도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핑게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동안도 예수님은 기도가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여러 차례에 걸쳐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기도와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따로 남아 있게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더욱 기도에 힘써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귀신을 좇아내지 못한 또 다른 이유로 기도가 배제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9:29)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마17:21) 기도는 능력을 받을 수 있는 통로입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기도와 관련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Much prayer, much power. Little prayer, little power. No prayer, no power. 우리 말로 옮기면 “많이 기도하면 많은 능력을 받고, 적게 기도하면 적은 능력을 받으며, 기도를 조금도 하지 않으면 능력을 조금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6:3,4)” 이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은 죠지뮬러였다. 그 결과로 전세계를 놀라게 한 기도의 능력 이야기가 탄생되었다. 실제적인 사업가의 정신을 지닌 독일인 뮬러씨는 그 당시 집없는 어린이들을 위한 시설이 별로 없었던 19세기 영국에서 고아원을 설립해야 하겠다는 확신에 사로잡혔다. 특히 그의 사업가적인 배경에서 볼때 놀라운 것은 그가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 돈을 모으겠다고 결심한 방법이었다. 그 방법이란 은밀한 기도였다. 그의 동역자들은 그가 몇가지 구체적인 것을 밝혔을 때 간담이 서늘해졌다.
어떤 자금도 직접 달라고 해서는 않된다. 헌금을 받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 기도이다. 어떤 일군도 구체적인 필요에 관한 정보를 외부에 말할 수 없다. 헌금한 사람의 명단도 역시 비밀에 붙인다. 그들에게는 개인적인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이 기관을 선정하기 위해 어떤 유명한 사람의 이름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 가망 없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빚은 조금도 지지 않는다. 모든 거래는 반드시 현금으로 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매일 기도하기 위해 한 시간씩 따로 마련해 두었다. 스위스 시계처럼 정확하게 죠지는 정해진 시간에 자기 방으로 물러 갔다.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자기 일과 고아들의 필요를 위해 자기의 소원과 소망과 꿈을 하나님께 쏟아 놓으며 주님과의 만남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그는 그의 모든 동역자들과 기도회를 가졌다. 그것도 역시 잠겨진 문 뒤에서 가졌다. 뮬러가 취한 공식에는 도저히 저항할 수없는 도전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토록 공개하기 싫어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소식은 널리 퍼져 나갔고 주머니들이 열심히 열려졌다. 전세집 하나와 일군 두명 그리고 43명의 어린이로 시작했는데 얼마 뒤에는 다섯개의 새로운 건물과 110명의 일군과
2,050명의 고아원으로 불어났다. 그의 생전에 모두 121,000명의 고아들이 침식을 제공받았고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500만 파운드의 돈(약 18억원)이 관리되었다. (뮬러는 모든 거래를 조심스렵게 기록해 두었다.) 그 일은 믿음의 기념비로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심장부에는 은밀한 기도가 있다. 어느날 고아원에 식량이 모두 떨어졌다. 사원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보고를 했다. 뮬러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항상하던 대로 식기를 테이블 위에 놓아두십시요.” 점심시간 20분 전이 되어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5분 후에 사원이 달려와서 보고를 하였다. “괜찮아요. 식량을 만드시는 하나님께 기도드려 놨으니까요.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겠지요.” 조금 후에 사원이 달려와서 또 보고하기를 “목사님 식사 시간 5분 전입니다.” 그때 마차 몇 대가 식량을 산더미처럼 싣고 들어왔습니다. 뮬러 목사는 사원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15분간을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그런 사람하고는 같이 일을 할 수가 없군요.” 기도만이 기도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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