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수난 예고 (막10:32-45)
본문
오늘은 종려주일이며 고난주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과 함께 출발하셔서 예루살렘까지 오셔서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하신 것입니다. 빌립보에서 출발하실 때 예수님은 자기가 고난 당하실 일을 예고하신 이후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 번에 걸쳐 고난 당하실 일을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의 본문은 세 번째 수난 예고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수난 예고와 관련하여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두 번째 예고와 관련하여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제자 되는 조건 세 번째 수난 예고와 관련해서 앞뒤로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앞에는 부자 청년이 찾아와 영생을 물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시자 울상을 지으며 떠나갔습니다. 그후에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시면서,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은 이 시험은 통과한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나사렛 청년의 부름을 듣고 사실상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입니다. 제자 됨의 기본 요건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속하였던 삶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예수님은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 부인을 요청하셨습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각이나 욕심이나 소원을 모두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란 선생에게서 배우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기에 자기의 편견이나 고집을 내세우는 사람은 합당치 않은 사람입니다. 열 두 제자들은 아직 이 고비를 극복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두 번째 수난 예고에서는 기도할 것과 어린아이처럼 될 것을 요청 받았습니다. 완전히 가난한 심령으로 돌아갈 때 능력 있는 제자가 될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수난 예고에 앞서 이제까지 안주하였던 삶의 둥우리를 완전히 버리고 떠나 그야말로 완전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제자가 될 것을 요청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을 물은 청년은 현재 자기가 안주하고 있는 모든 삶의 여건을 그대로 가지고 거기다가 영생을 더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그리고 현재 누리고 있는 지위나 명예까지도 다 버리고 따르라고 요청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까지 인간이 구축하여 온 삶의 틀을 약간 수정하여서 그 위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되는 나라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주하던 삶의 모든 조건들을 다 떠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에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었기에 울상을 짓고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를 본받는 것이요 그에게서 배우는 제자가 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가 하늘의 영광을 모두 비우시고 오신 것처럼, 우리가 이제까지 정착하였던 삶의 터전을 모두 떠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갔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의 고향을 떠나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도덕이나 윤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도덕이나 윤리는 지금의 삶을 보다 선하게 발전시키자는 것입니다. 기존의 삶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것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향상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기존의 틀을 완전하게 깨트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어려움은 바로 틀을 깨는 어려움입니다. 부자 청년이 울상을 짓고 슬퍼하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요청이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볼 때 과연 모든 틀을 다 벗어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버리기는커녕 오늘 우리의 신앙은 아직도 부자 청년처럼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하고 좀더 건강하게 하기를 추구하는데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예수 믿는 일을 쉽게 생각함은 잃어버리는 것 없이 가진 것을 더 풍요롭게 하는 생활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잘못 믿는 우리를 향하여 예수님은 오늘도 자기의 수난을 말씀해 주시면서 "나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라"고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내가 가진 이 땅의 삶에다 영생을 더하려 했던 생각을 버리고, 먼저 나의 둥우리를 과감하게 벗어나서 예수님을 따르도록 결단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어렵지만 이 결단이 없이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앞서 가시면서 그의 수난을 계속 예고하신 것처럼,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 앞에서 그의 수난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교훈을 깨닫고 과감하게 따르기를 주님은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자 다시 한번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으시고 예루살렘에서 자기에게 닥칠 일들을 다시 한 번 일러 주셨습니다. 고난 당하실 것을 알면 그것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실 수도 있는데, 이제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을 위하여 오히려 그곳을 향해 나아가신 예수님을 보면서 놀라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수난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반드시 사흘만에 살아난다는 단서가 붙어 있음을 유의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영광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마귀의 권세가 깨어지고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난과 죽음을 통과한 사흘 후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수난 없이, 죽음 없이는 결단코 부활에 이를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수난은 필수적인 것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영광은 수난을 통해서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행진은 궁극적으로는 영광을 위한 행진이오, 부활을 향한 행진이지만, 거기에는 필수적으로 고난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머리에는 메시아가 고난 당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불가사의한 말씀으로만 생각되었고, 따라서 수난은 생략되고 언제나 메시아의 영광만이 그들의 머리 속에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세 번째 수난예고 직후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특청을 드렸습니다.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이들이 이해한 주의 영광은 이 땅에서의 정치적인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예루살렘 상경(上京)이 곧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일과 직결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거기에 입성하기 전에 미리 부탁을 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기회를 포착하고 어처구니없는 청탁을 한 것입니다. 이들의 청탁에는 예수님의 수난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수난은 어떤 영적인 사실로 해석하면서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수난이 있다하여도 그것은 예수님의 몫이고 자기들과는 상관이 없는 일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그런 상황에 부딪쳐 당황하고 도망간 것을 보면, 분명 그들은 수난 예고를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일로 생각했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생각이 바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의 몫이고, 우리는 그 영광에만 참여하겠다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기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때에는 침묵을 지키거나 피하여 숨어 있다가 영광의 때에는 가장 앞서 나와 마치 자기가 모든 것을 한 것처럼 떠들어대며 좌우의 영광을 독차지하려는 사람이 바로 기회주의자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런 정치가들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에 그런 사람들을 경멸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정치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고난에 참여하여야 할 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영광의 때에 가장 먼저 나서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짐을 져야 할 때 짐을지지 않고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고 대접을 받는 자리에 자기가 끼기를 바라는 마음은 없는지요 편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바뀌어야 비로소 신앙인이 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되어가는 모든 일은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가며 교회의 문제는 항상 영광을 얻으려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을 우리는 봅니다. 기관이나 행사에서 말없이 짐을 지는 성도를 통하여서 교회는 세워져가는 것입니다. 내가 가질 것은 모두 가지면서 거기에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총까지 덧붙여 갖겠다는 그리스도인들로 오늘 교회는 가득차 있는 것이 아닐까요 땅투기 해서 번 돈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면서 더 열심히 땅 투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없을까요 무엇을 해서든지 돈 많이 벌고 건강하면 그것이 다 하나님의 축복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든지, 영광을 얻기 위해서 고난은 필수적인 것이라고 하신다면, 과연 그래도 그들이 예수를 믿을까요 고난을 외면해 가는 한국교회는 그리고 성도는 병들어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가 지실 십자가와 죽음을 뜻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광 이전에 고난의 잔, 죽음의 세례를 먼저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은 영광스러운 보좌가 아닌 십자가임을 마가복음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에 두 개의 십자가가 함께 선 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좌우에 앉고 싶거든 먼저 그의 좌우에 있는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는 강한 암시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은 후에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고난의 잔을 마시고 죽음의 세례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특히 야고보는 사도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고난의 잔은 마시지 않은 채 너무 영광의 열매만을 따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오늘의 열매도 우리 선조들의 고난을 통해서 얻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고난은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외부로부터 올 수도 있고, 자신의 내적 결단에 따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치적인 상황이 악화되었을 때는 거기에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상황이 호전되었을 때는 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정치적 권력을 이용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과 같이 기독교적 정권이 들어섰을 때야말로 교회는 위기에 직면하여 있는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때에 버리기보다는 얻으려 하고, 고난 당하기보다는 영광을 누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유혹을 경계하셨습니다. "너희는 섬기는 사람이 되고, 너희는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 기득권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력을 행사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상 유대인이나 로마 총독에 의해 박해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십자가의 고난은 외부로부터 그에게 메워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수난의 어려움은 십자가의 고통이나 아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어 종이 되는 결단에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왕이 될 수 있는데도 자기를 낮추어 종이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섬김을 받는 자리에 있을 수 있는데도 스스로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난의 참뜻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종이 되어 고난을 받으셨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사실상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에 스스로 낮아져서 종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국교회가 참으로 살 수 있습니다. 결코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잠언 말씀에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잠3:34)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낮아져서 가난한 자, 겸손한 자, 섬기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은 우리 한국교회에 은혜를 계속 내려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는 우리로 하여금 안주하던 삶의 모든 틀을 박차고 나와 그리스도를 따를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주의 영광을 바라보되 그것을 위해서는 가난해지고 섬기는 자 되는 고난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더 얻으려고 간구하는 대신에 내가 가진 것을 버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고난은 외면한 채 영광만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였던 우리의 신앙을 회개하고, 자신을 비워 고난의 자리에, 섬김의 자리에 내려가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예루살렘을 향한 행진은 궁극적으로는 영광을 향한 행진, 부활을 향한 행진입니다만, 그러나 반드시 종으로 낮아지는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안되는 행진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섬기는 자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해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자 되는 조건 세 번째 수난 예고와 관련해서 앞뒤로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앞에는 부자 청년이 찾아와 영생을 물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시자 울상을 지으며 떠나갔습니다. 그후에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시면서,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은 이 시험은 통과한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나사렛 청년의 부름을 듣고 사실상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입니다. 제자 됨의 기본 요건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속하였던 삶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예수님은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 부인을 요청하셨습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각이나 욕심이나 소원을 모두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란 선생에게서 배우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기에 자기의 편견이나 고집을 내세우는 사람은 합당치 않은 사람입니다. 열 두 제자들은 아직 이 고비를 극복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두 번째 수난 예고에서는 기도할 것과 어린아이처럼 될 것을 요청 받았습니다. 완전히 가난한 심령으로 돌아갈 때 능력 있는 제자가 될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수난 예고에 앞서 이제까지 안주하였던 삶의 둥우리를 완전히 버리고 떠나 그야말로 완전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제자가 될 것을 요청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을 물은 청년은 현재 자기가 안주하고 있는 모든 삶의 여건을 그대로 가지고 거기다가 영생을 더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그리고 현재 누리고 있는 지위나 명예까지도 다 버리고 따르라고 요청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까지 인간이 구축하여 온 삶의 틀을 약간 수정하여서 그 위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되는 나라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주하던 삶의 모든 조건들을 다 떠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에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었기에 울상을 짓고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를 본받는 것이요 그에게서 배우는 제자가 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가 하늘의 영광을 모두 비우시고 오신 것처럼, 우리가 이제까지 정착하였던 삶의 터전을 모두 떠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갔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의 고향을 떠나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도덕이나 윤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도덕이나 윤리는 지금의 삶을 보다 선하게 발전시키자는 것입니다. 기존의 삶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것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향상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기존의 틀을 완전하게 깨트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어려움은 바로 틀을 깨는 어려움입니다. 부자 청년이 울상을 짓고 슬퍼하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요청이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볼 때 과연 모든 틀을 다 벗어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버리기는커녕 오늘 우리의 신앙은 아직도 부자 청년처럼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하고 좀더 건강하게 하기를 추구하는데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예수 믿는 일을 쉽게 생각함은 잃어버리는 것 없이 가진 것을 더 풍요롭게 하는 생활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잘못 믿는 우리를 향하여 예수님은 오늘도 자기의 수난을 말씀해 주시면서 "나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라"고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내가 가진 이 땅의 삶에다 영생을 더하려 했던 생각을 버리고, 먼저 나의 둥우리를 과감하게 벗어나서 예수님을 따르도록 결단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어렵지만 이 결단이 없이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앞서 가시면서 그의 수난을 계속 예고하신 것처럼,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 앞에서 그의 수난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교훈을 깨닫고 과감하게 따르기를 주님은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자 다시 한번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으시고 예루살렘에서 자기에게 닥칠 일들을 다시 한 번 일러 주셨습니다. 고난 당하실 것을 알면 그것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실 수도 있는데, 이제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을 위하여 오히려 그곳을 향해 나아가신 예수님을 보면서 놀라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수난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반드시 사흘만에 살아난다는 단서가 붙어 있음을 유의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영광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마귀의 권세가 깨어지고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난과 죽음을 통과한 사흘 후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수난 없이, 죽음 없이는 결단코 부활에 이를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수난은 필수적인 것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영광은 수난을 통해서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행진은 궁극적으로는 영광을 위한 행진이오, 부활을 향한 행진이지만, 거기에는 필수적으로 고난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머리에는 메시아가 고난 당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불가사의한 말씀으로만 생각되었고, 따라서 수난은 생략되고 언제나 메시아의 영광만이 그들의 머리 속에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세 번째 수난예고 직후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특청을 드렸습니다.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이들이 이해한 주의 영광은 이 땅에서의 정치적인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예루살렘 상경(上京)이 곧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일과 직결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거기에 입성하기 전에 미리 부탁을 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기회를 포착하고 어처구니없는 청탁을 한 것입니다. 이들의 청탁에는 예수님의 수난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수난은 어떤 영적인 사실로 해석하면서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수난이 있다하여도 그것은 예수님의 몫이고 자기들과는 상관이 없는 일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그런 상황에 부딪쳐 당황하고 도망간 것을 보면, 분명 그들은 수난 예고를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일로 생각했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생각이 바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의 몫이고, 우리는 그 영광에만 참여하겠다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기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때에는 침묵을 지키거나 피하여 숨어 있다가 영광의 때에는 가장 앞서 나와 마치 자기가 모든 것을 한 것처럼 떠들어대며 좌우의 영광을 독차지하려는 사람이 바로 기회주의자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런 정치가들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에 그런 사람들을 경멸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정치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고난에 참여하여야 할 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영광의 때에 가장 먼저 나서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짐을 져야 할 때 짐을지지 않고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고 대접을 받는 자리에 자기가 끼기를 바라는 마음은 없는지요 편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바뀌어야 비로소 신앙인이 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되어가는 모든 일은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가며 교회의 문제는 항상 영광을 얻으려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을 우리는 봅니다. 기관이나 행사에서 말없이 짐을 지는 성도를 통하여서 교회는 세워져가는 것입니다. 내가 가질 것은 모두 가지면서 거기에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총까지 덧붙여 갖겠다는 그리스도인들로 오늘 교회는 가득차 있는 것이 아닐까요 땅투기 해서 번 돈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면서 더 열심히 땅 투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없을까요 무엇을 해서든지 돈 많이 벌고 건강하면 그것이 다 하나님의 축복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든지, 영광을 얻기 위해서 고난은 필수적인 것이라고 하신다면, 과연 그래도 그들이 예수를 믿을까요 고난을 외면해 가는 한국교회는 그리고 성도는 병들어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가 지실 십자가와 죽음을 뜻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광 이전에 고난의 잔, 죽음의 세례를 먼저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은 영광스러운 보좌가 아닌 십자가임을 마가복음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에 두 개의 십자가가 함께 선 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좌우에 앉고 싶거든 먼저 그의 좌우에 있는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는 강한 암시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은 후에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고난의 잔을 마시고 죽음의 세례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특히 야고보는 사도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고난의 잔은 마시지 않은 채 너무 영광의 열매만을 따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오늘의 열매도 우리 선조들의 고난을 통해서 얻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고난은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외부로부터 올 수도 있고, 자신의 내적 결단에 따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치적인 상황이 악화되었을 때는 거기에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상황이 호전되었을 때는 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정치적 권력을 이용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과 같이 기독교적 정권이 들어섰을 때야말로 교회는 위기에 직면하여 있는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때에 버리기보다는 얻으려 하고, 고난 당하기보다는 영광을 누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유혹을 경계하셨습니다. "너희는 섬기는 사람이 되고, 너희는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 기득권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력을 행사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상 유대인이나 로마 총독에 의해 박해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십자가의 고난은 외부로부터 그에게 메워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수난의 어려움은 십자가의 고통이나 아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어 종이 되는 결단에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왕이 될 수 있는데도 자기를 낮추어 종이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섬김을 받는 자리에 있을 수 있는데도 스스로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난의 참뜻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종이 되어 고난을 받으셨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사실상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에 스스로 낮아져서 종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국교회가 참으로 살 수 있습니다. 결코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잠언 말씀에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잠3:34)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낮아져서 가난한 자, 겸손한 자, 섬기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은 우리 한국교회에 은혜를 계속 내려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는 우리로 하여금 안주하던 삶의 모든 틀을 박차고 나와 그리스도를 따를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주의 영광을 바라보되 그것을 위해서는 가난해지고 섬기는 자 되는 고난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더 얻으려고 간구하는 대신에 내가 가진 것을 버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고난은 외면한 채 영광만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였던 우리의 신앙을 회개하고, 자신을 비워 고난의 자리에, 섬김의 자리에 내려가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예루살렘을 향한 행진은 궁극적으로는 영광을 향한 행진, 부활을 향한 행진입니다만, 그러나 반드시 종으로 낮아지는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안되는 행진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섬기는 자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해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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