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갈에서 할례를 명하신 하나님 (수5:2-9)
본문
길갈에서 할례를 명하신 하나님
여호수아 5:2-9
오늘 본문은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동편 길갈에서 할례를 행한 사건입니다.
이 할례의 사건은 인간적인 상식으로 볼 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사방이 적들로 둘러싸여 있고 전쟁을 앞에 둔 상황에서 이들의 행동 하나 하나가 감시 대상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살 행위와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남자들의 양피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면 상처가 아물고 회복될 때까지 적어도 일주일은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합니다.
창 34장에 보면, 히위 족속 추장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하고 아내로 달라고 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이때, 야곱의 아들들은 거짓으로 그들에게 할례를 요구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할례를 행하여 그들이 가장 고통 중에 있을 3일째 디나의 오빠들이 기습을 해가지고 모든 남자들을 몰살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을 생각한다면 적들을 앞에 놓고 할례를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행하고 누워있을 때 가나안 군대가 습격한다면 그들은 전멸할 수도 있었습니다.
남자가 절반이라면 100만 명 정도 되는데, 그 많은 사람에게 할례를 행할 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는데, 이는 위생적이지도 않고 무딘 돌칼로 그 예민한 부분을 벤다면 얼마나 아팠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이성적으로 너무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차라리 할례를 행할 계획이 있었다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하는 것이 합당했습니다.
요단강 건너편이라면 넘실대는 강물 때문에 그래도 안전합니다.
쇠를 녹여 칼을 만들 시간도 충분히 있고, 할례를 행하고 충분히 회복한 다음에 강을 건너면 됩니다.
근데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건넌 후에 예상치 않은 때에, 예상치 않은 장소에서 할례를 명합니다.
길갈에서 할례를 명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일의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서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때와 다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의 때와 하나님의 때가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아들을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가 100세에 이삭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모인 제자들이 "주여, 주께서 이스라엘을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이때입니까?" 묻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서 내 증인이 되리라."
우리는 매사에 하나님의 때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발을 맞춰야 합니다.
내 생각과 다르고 내 뜻과 다를지라도 주님의 말씀이 가장 좋고 합당하다는 믿음을 갖고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가고 멈춰서라 하시면 멈춰서야 합니다.
내 생각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님에게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둘째, 사람은 일과 성취를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할례의 뜻이 무엇입니까?
창 17:10,11절에서 하나님이 할례를 처음 제정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는 쌍방 계약에 도장을 찍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고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며, 아브라함 편에서는 이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겠다는 것을 약속 하는 것입니다.
이 쌍방 계약을 맺는 증거로서 하나님은 모든 남자들의 성기에 상처를 내는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전부 광야에서 태어나 할례를 받지 못한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바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얻는 것보다도 먼저 그들과 언약을 맺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언약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기를 원하셨습니다.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얻는 것을 중요시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들과의 관계를 중요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네가 실수한 것도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고, 네가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너를 다시 제자로 회복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지 못한다면 그 수많은 제물과 희생이 아무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보다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하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을 늘 묻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신경 쓰지 않고 무엇을 얻기에만 급급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을 늘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데 우리는 ‘그런 것은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밥 먹여 줍니까? 그저 내가 원하는 것 해주시면 됩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신분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어떤 신분으로 들어가는가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길갈에서 그들을 준비시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다.’
어디에서 사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셋째로, 할례는 불신과 불순종의 죄악을 잘라버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4-7절에서, 여호수아는 출애굽 세대가 왜 광야에서 다 죽었는가를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민 14장에 기록된 바란 광야 가데스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의 보고를 듣지 않고 나머지 10명의 부정적인 말을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제히 통곡을 하면서 신성모독적인 말들을 내뱉었습니다.
‘어찌하여 여호와가(그 사람이, 그자가 이런 뜻입니다.)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느냐?’
이때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그들 중에 아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정탐했던 하루를 1년으로 쳐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는 동안에 그들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가 가나안 땅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땅에 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조상들의 불순종과 불신앙의 죄악을 완전히 잘라버리고 믿음의 백성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할례를 명하신 것인데 그런 면에서 이 할례는 민족적 회개의 역사를 의미했습니다.
불순종하여 광야생활을 했던 불신앙과 불순종을 회개하고 잘라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 상황에서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살행위와 같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할례를 행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유를 대지 않고 온전히 순종합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믿음의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여호수아에게 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셨다"
할례를 행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을 때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면 수치를 당하게 되지만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 수치는 떠나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들이 당했던 애굽의 수치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애굽에서 종노릇한 것이 애굽의 수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 때 그들에게는 기본적인 인권이나 자유가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할 신앙의 자유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바로의 종이었습니다.
바로가 시키는 대로 중노동을 해야 하는, 인간이 아니라 단지 노동의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애굽의 노예로 살았던 세월이 바로 애굽의 수치였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했던 탕자는 급기야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살기 위하여 이방사람에게 고용되어 돼지를 치게 됩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하나 그것마저도 마음껏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 민족에게 돼지는 불결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을 뿐 아니라 돼지를 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둘째 아들이 돼지를 치었다는 것은 유대인의 치욕이요 수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세상 풍습대로 사는 것은 절대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수치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에게 종노릇하고 마귀에게 매여 사는 것에 불과함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광야에서 생활한 40년이 애굽의 수치였습니다.
광야생활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생활한 은혜의 40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40년을 살았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러나 한 편 생각해보면 광야 40년은 그들의 불신앙으로 자초한 세월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했습니다.
광야 40년은 애굽에서 나온 불신앙의 백성들이 죽기를 기다린 세월이었습니다.
광야 40년의 세월은 제대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헤매는 세월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는, 그들 마음속에 담겨있던 노예근성입니다.
430년이라는 오랜 세월 대를 이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인격 속에 형성된 노예근성이 애굽의 수치였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보여준 모습은 조그만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과거로 회귀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종노릇을 하더라도 애굽에서 먹고사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미래의 비전을 바라보지 못하고 늘 과거로 돌아가려는 노예근성이 애굽의 수치였습니다.
이런 애굽의 수치를 하나님은 길갈에서 굴러가게 하셨습니다.
길갈은 하나님이 주시고자 들어간 가나안의 첫 번째 땅이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애굽의 노예라는 이름도 떼어 버리고 자유인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코도 납작하게 만들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가지면서 더 이상 노예근성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길갈에서 애굽의 수치는 완전히 물러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의 수치를 물러가게 한 길갈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죄악의 수치를 물러가게 한 갈보리 십자가 언덕이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본래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져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죄에 빠져 타락하고 멸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온갖 죄의 노예상태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서 신분을 완전히 회복하셨습니다.
우리를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임명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수치를 물러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애굽의 수치를 심기 위해서 얼마나 우리를 유혹하는지 모릅니다.
‘네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고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그래서 네가 얻은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너를 축복해주신 것이 무엇이냐?’
‘오히려 너를 광야와 같은 인생길로 몰아넣지 않았느냐?’
그런 유혹에 빠지면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에, 자기 정죄감에 빠집니다.
‘나는 어쩔 수 없다’ 하는 운명주의에 빠집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애굽의 수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이 애굽의 수치를 달고 가나안으로 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이 수치를 굴러가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속에 낮은 자존감이 있습니까? 운명적인 생각이 있습니까?,
열등의식이 있습니까? 불신과 두려움이 있습니까? 세상의 정죄로 말미암아 수치감이 있습니까?
갈보리 십자가 언덕에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에게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을 믿고 그 주님을 영접할 때 우리의 모든 수치는 굴러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만난 여인은 수치를 달고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그의 수치는 남편이 다섯 명이나 되었고 지금 살고 있는 남편도 자기 남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남편을 수시로 바꿨는지 아니면 남자들에 의해 쫓겨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째든 이 여자에게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큰 수치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오지 않는 대낮에 뜨거움을 무릎 쓰고 물을 길으러왔습니다.
그 여자를 주님께서 만나셔서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을 때 그 여자는 그 분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동네로 들어가 자기가 지금까지 피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내가 그리스도 메시아를 만났다고 사람들을 초정합니다.
이 순간 그에게는 수치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메시야를 만났다는 기쁨과 자신감으로 충만했습니다.
메시야 되시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모든 수치는 굴러가게 되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는 수치심 가득한 모습으로 예수님에게 끌려왔지만 예수님은 그를 용서하심으로 수치심을 제거해주셨습니다.
탕자의 수치는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 굴러가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수치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 굴러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시는 주님에게 돌아와서 죄 된 수치를 굴러가게 하고 기쁨과 자신감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2019. 03. 31)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