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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아 들으라 (신6:1-9)

본문

이스라엘아 들으라


말씀:신명기 6:1-9


 


신명기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광야 40년을 지난 후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출애굽 2세대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신명기 5장 말씀을 통해 십계명을 다시 선포 하시고 언약을 갱신하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오늘부터 살펴볼 6장 말씀은 5장에서 선포한 십계명의 말씀을 계속해서 배우고, 또 그것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칠 것을 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 말씀은 5장에서 선포한 십계명의 말씀을 계속해서 배울 것을 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봤습니다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율법을 주실 때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 떨었습니다.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엄위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대신 듣고 자신들에게 말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면 자신들이 다 듣고 준행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대신 듣고 백성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명령과 규례와 법도는 출애굽 2세대들이 요단강을 건너가서 얻을 약속의 땅에서 행할 것이었습니다(1-2).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두려운 모습으로 시내산에 임하신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이기도 하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신 5:29).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고 순종하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신 5:27). 그런데 그 말씀은 그들 자기들만이 아니라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네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대대손손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게 하시기 위해서 불꽃 가운데 곧 엄위하신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엄위하신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주시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날이 장구케 하시기 위함입니다(2).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대대손손 지켜 행하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부담이 됩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유롭게 자기 생각대로 살고 싶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의 허리에서 난 우리 인생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는 것은 우리를 얽어매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얽어매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길이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다시 보면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는 것이 그들의 날이 장구하는 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얻고 하나님께서 열조에게 약속하신 땅에서 그들의 수효가 심히 번성케 되는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온전히 받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감당 하는 비결입니다.


 


오늘 본문 4-9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히브리 원문으로 보면 ‘들으라’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그러므로 원문으로 보면 “쉐마 이스라엘(laer;c]yI [m'v;)”입니다. 곧 “들으라. 이스라엘아”입니다. 이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신명기 6:4-9절 말씀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라고 합니다.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언제 어디서나 곧 집에 앉았을 대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고 합니다.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며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서 표를 삼으라고 합니다.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문자대로 실천한다고 해서 아예 통째로 외울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옷 술에 매달기도 하고 눈썹과 눈썹사이 곧 미간에 이 말씀을 넣은 작은 상자를 메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듯이 그들이 아무리 말씀을 손목에 매고 이마에 붙이고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한다고 하여도 그들이 오직 하나인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온갖 우상숭배를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우상숭배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한 증거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참된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는데 오직 하나인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까? 먼저 이스라엘을 향해서 오직 하나인 여호와를 섬기라고 하신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에 그가 살던 곳이 우상숭배의 자리였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의 하류 사이에 있는 곳으로 아주 비옥한 땅으로 우상숭배가 만연하였습니다. 여호수아서 24:2-3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서 다른 신을 섬겼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비가 우상숭배자라면 그이 아들 아브라함도 그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아브라함을 거기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우상숭배의 자리에서 이끌어 내신 것은 여호와가 어떤 분이심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 내려가서도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을 다시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만 섬기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호수아서 24:14-15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도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강 건너 편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도 강 건너편이라고 합니다. 즉 이 말은 우상숭배의 자리에서 건너 온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곧 우상숭배와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지 않겠다고 여호수아 앞에서 언약을 새롭게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호수아서 24:19-20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합니다. 그들이 증인이 되겠다고 하면서 언약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아무리 이렇게 다짐을 했지만 여호수아가 죽고 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사시대에 보면 온통 넘쳐난 것이 우상숭배였습니다.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께서 치셔서 고통 받으면 그때서야 다시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부르짖으면 다시 사사를 보내어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사가 죽고 나면 또다시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이런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사시대만 이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왕들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열왕기서 공부를 통해서 이미 봤듯이 그렇게 지혜로운 솔로몬 왕도 얼마나 우상을 많이 섬겼는지 온갖 이방의 신들을 위하여 신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라고 그렇게 율법을 주셨지만 이들이 우상숭배에 빠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의 문제였습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다시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기초해 보면 결국 우상숭배의 문제는 사랑의 문제인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 사랑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른 것이란 결국 자기 사랑인 것입니다. 자기 사랑이 가득하게 들어와 있었기에 아브라함의 살던 곳도 우상숭배의 자리이며,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던 그곳도 우상숭배의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셔서 그들을 그 곳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언약과 사랑으로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서 구원하여 내시고서는 약속에 땅에 들어가서 모든 우상숭배자들을 몰아내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마음에 새기라고 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자기 사랑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속성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끄집어내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끄집어내어도 이들의 마음에는 자기 사랑만 가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선지자들이 외쳐도 이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할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더 큰 문제는 외형적으로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하는 외식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준행한다고 하면서 율법을 손목에다 매달고 이마에다 매달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온갖 탐심으로 가득하였던 것입니다. 곧 그들은 외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3:1-7절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경문을 크게 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기도를 드릴 때에 긴 가죽 끈으로 이마와 왼쪽 팔에 가죽 상자를 단단히 매달았는데, 그 안에 성경 말씀을 적은 양피지 띠를 보관해 두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경건한 사람들은 온종일 이 경문을 차고 있었습니다. 겉옷의 옷 술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위한 표식인데 이들은 크게 만들어 자기들이 경건한 사람임을 보이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선이며, 외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기를 사랑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자들이었습니다(마 23:23-24).


 


이제 구약의 선지자를 보내신 분이 사람이 되셔서 이들에게 오셔서 그들로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을 귀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4:9절을 보면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누구입니까? 율법을 지키지도 못하였고, 지킬 수도 없었던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드디어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특징은 거저 주시는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신명기 6:10-13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을 거저주신 것입니다. 건축하지 아니한 성읍을 얻고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고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고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인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겨야 할 텐데 오히려 그들은 거저 주시는 은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먹고 배부르게 되니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이라는 강을 건넌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강을 건너고 이스라엘 백성이 강을 건넜듯이 우리도 이 세상이라는 강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주님보다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1-4절을 보면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했습니다. 우상숭배자들은 들을 귀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사욕을 따르는 자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오늘날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참조. 계 2-3장). 이런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거저 주시는 은혜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죄인이며 무능하였으면 예수님의 공로를 거저 받아야만 되는지를 아는 가난한 심령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의 의가 있고 자기 자랑이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화만 날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다음으로 우리는 이 말씀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대로 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허락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부지런히 배우며 그 말씀을 따라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로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 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사랑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멸망의 자식들이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영원히 받아 누리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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