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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없는 사회를 위하여 (마5:21-26)

본문

살인 없는 사회를 위하여(마5:21-26)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21절부터 마지막 48절까지는 주님께서 여러 가지 계명에 대하여 새롭게 해석하시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서부터 간음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중요한 계명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씀의 형식을 보면, ‘이런, 이런 내용을 너희가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른다.’고 하면서 새로운 내용을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당시에 사람들이 계명의 본 뜻을 망각하고 형식적으로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하여 그들은 육체적으로 간음을 하지 않으면 잘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은 온갖 음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요즘 모습으로 더 이야기하면 각종 음란물을 보면서 입으로는 음담패설을 지껄이면서 나는 육체적으로 간음을 하지 않았기에 이 계명을 잘 지켰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잘 지키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하나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더 높은 수준의 삶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5장 20절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계명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정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너희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살지 말고 계명의 본 뜻을 따라 더 올바르게 더 철저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첫 번째 내용으로서 살인하지 말라는 6번째 계명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에서 6번째 계명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의 시대에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에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말이 덧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이 말이 물론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르지만 문제는 이렇게 다른 내용이 덧붙여지면 계명의 본 뜻이 흐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인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셨는데 다른 내용이 덧붙여지면서 심판에 대하여 초점이 옮겨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심판에 초점이 맞추어지니까 어떻게 하면 심판을 덜 받게 될까?


그것을 생각하게 되고 심판을 덜 받기 위해서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부각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에 대하여 주님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초점을 옮겨가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살인에 대하여 철저하게 해석을 하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제 6계명을 잘 지킨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여러분, 육체적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잘 지킨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육체적인 살인뿐 아니라 분노하고 바보 같은 놈이라고 욕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것 까지 다 살인으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살인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실상 살인이 분노하고 화내고 인격을 멸시하는데서 시작된다고 보면 이것도 살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접 살인이라고 할 수 있고요, 살인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함께 살던 친누나를 죽이고 농수로에 시체를 유기했던 사건이 있었는데요,


남동생이 이런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이유가 늦게 들어오는 자기를 심하게 꾸짖어 화가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말 한 마디가 살인은 아니지만 이미 그 속에 사람을 죽이는 독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하고 화를 내고 분노를 내는 일에도 조심해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이 6번째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하여,


 


먼저, 말씀 그대로 살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는 살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고 대다수가 이 계명은 잘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살인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을 조금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티비를 보면서 가끔 영화를 보는데요, 영화의 거의 7,80%는 다 전쟁영화 아니면 살인영화라는 생각이 들어갑니다.


영화의 주제가 거의 다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이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옛날 영화는 칼로 창으로 사람을 죽이고 요즘 영화는 총으로, 폭탄으로 사람을 죽이고 모두가 다 죽이는 영화입니다.


영화뿐 아니라 각종 오락게임도 다 폭력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는, 이런 일에 결코 협조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살인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원수가 원수를 죽이는 것 뿐 아니라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이 죽이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살인을 미화하는 어떠한 영화나 환경이나 분위기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살인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명심하면서 살인을 부추기고 살인을 조장하고 살인을 미화시키는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거나 빠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살인을 부추기고 살인을 미화시키는 영화나 게임이나 어떤 오락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다고, 오락이고 영화이기에 괜찮다고 쉽게 변명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살인의 분위기에 빠지게 되고 그것을 가볍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든지 이 사회에서 살인이 없어지도록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언어로 살인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언어의 살인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22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세 가지는 말로 하는 폭력이요 언어로 하는 살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얼마나 무겁게 여기고 있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 그 다음의 내용입니다.


그런 자들이 심판을 받게 되고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살인’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말씀입니다.


심리학자이며 상담가인 미국의 헨리 브란트 박사는 그가 상담한 사람의 문제의 80-90%가 분노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현대로 갈수록 이 분노의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져가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분노는 사람을 망치는 가장 큰 흉기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느 부부가 말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잔소리에 대들며 말대답을 하는 아내를 향해 남편이 화가 나서 큰 소리를 지릅니다.


‘당장 입 닥치지 못해!’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내는 입을 닥친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저 고개를 움직이거나 눈짓으로 뜻을 표현할 뿐이었습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남편이 빌며 사과를 했지만 아내는 끝내 입을 열지 못한 채 무려 30년을 살다가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 언어폭력이 점점 심각해져가고 있습니다.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리고 자기감정을 그대로 쏟아버립니다.


나이가 많고 적고를 가리지 않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화를 표출합니다.


부부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향한 부모의 언어폭력도 심각한 수준입니다.


상당수 어린이들이 부모의 언어폭력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세 명 중 한 명은 폭언을 퍼붓는 부모가 싫어서 가출 혹은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서 가장 자주 듣는 폭언으로는 ‘집안의 골칫덩이’, ‘너만 없으면 속이 편하겠다.’, ‘괜히 낳았다’, ‘내다 버렸으면 좋겠다.’, ‘나가 죽어라’, ‘정 떨어진다’, ‘너 때문에 내가 못 산다’ 등이라고 합니다.


화가 난다고 그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다면 가족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엉망으로 일그러져 싸움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인격을 모독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살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적인 살인은 물론이거니와 언어의 살인도 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에도 정말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2장 8절에서 남자 성도들을 향해 이런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당시 남자들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를 내고 분노하고 다른 사람들과 다투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이것이 남자다움이라고 생각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걸핏하면 화를 내고 자기주장이 옳다고 다투며 살았습니다.


이런 남자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기도는 남자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저 화를 내고 큰소리치며 싸우는 것이 남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그 시대를 향해 분노하지 말고 다투지 말고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귀한 권면의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주님은 전혀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하면 왜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잘못한 것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십자가에 못 박힐 일은 1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모욕과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어찌 화가 나지 않겠으며 분노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화를 내지 않고 하나님께 원수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가장 힘없고 가장 어리석고 가장 바보 같은 모습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주님은 그 모습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여러분, 분노가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나에게도 가장 무서운 적이고 상대방에게도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분노하고 화를 내고 인격을 모독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입니다.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어서 주님의 계명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 번째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화해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언어의 살인을 말씀하신 주님은 이어서 화해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인에게 있어서 예물을 드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예배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화목하고 화해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왜 화목하고 화해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화해하고 화목하면 살인을 방지할 수 있고 너도 살고 나도 살기 때문입니다.


 


‘인격의학’의 창시자인 폴 투르니에 글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악성빈혈로 고생하는 한 직장 여성을 반년 이상 치료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회사에 병가를 내고 입원해 집중치료를 받도록 권했는데,


일주일 후에 다시 온 여인은 아주 건강한 모습이었습니다.


검사를 해 보니 악성빈혈 증세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놀란 의사가 “지난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죽도록 미워하던 한 사람을 용서했어요.


바로 그때부터 기분이 좋아지더니, 삶에 희망이 생기고 이렇게 행복해졌어요.”


여인에게 만성적 악성빈혈이 발병한 원인은 미움과 분노였고, 특효약은 ‘용서’였던 것입니다.


저명한 문화비평가인 마셜 맥루한은 ‘의학과 성서’라는 책에서 말했습니다.


“사람이 마음속에 분노를 품으면 각종 질병이 생기고, 기꺼이 용서할 때 이런 질병들이 치유된다.”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 채 계속 미워하는 사람은 살인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일 뿐 아니라 내 자신도 서서히 죽이는 것이 됩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뿐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도 기꺼이 용서하고 화목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살인하지 말라는 제 6계명이 우리와는 상관없는 말씀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해석을 보면 제6계명도 우리와 가까운 말씀이요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살인이 범람하고 살인을 미화하고 살인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회 속에서 육체적인 살인,


정신적인 살인, 언어적인 살인까지 조심하여


이 사회를 아름다운 사회로 만들어가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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