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눅7:18-23)
본문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누가복음 7장 18-23절)
6월 달에는 성경말씀 중에서 “복”을 중심으로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세례 요한,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이 이야기의 중심 인물입니다. 예수님에게 12제자가 있었는데, 이보다 먼저 세례 요한에게도 제자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세례요한의 제자였다가, 나중에 예수님의 12제자가 된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였고(요 1:41), 또 한 사람은 세베대의 두 아들 중 (큰)야고보의 형제인 ‘요한’입니다.
광야에서 지내면서 열심히 사역하던 세례요한에게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세례요한은, 당시 갈릴리 지역과 베뢰아 지역을 다스리던 유대 분봉왕(분할된 지역을 다스리는 왕에 버금가는 지배자)이었던, 헤롯 안디바에 의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한이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는, 헤롯 안디바가 자신의 친 동생인 헤롯 빌립의 아내, 즉 제수씨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는 부도덕한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이러한 부도덕함을 신랄하게 공격하자 괘씸죄에 걸려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구원자)라면 나를 감옥에서 구원해 주시겠지, 예수님이 빠른 시기에 로마인들을 몰아내고, 이 나라가 독립하도록 회복시켜 주시겠지, 예수님이 다윗과 같은 지도자가 되면 내 명예도 회복되겠지”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감옥에서 풀려나기는커녕, 곧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이 밖에서 무슨 일들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18절에,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라고 했는데, 요한의 제자들은 그 동안 예수님이 하셨던 일들을 감옥에 있는 세례 요한에게 세세하게 전해 주었습니다. 제자들이 전한 말들은,
① 나병환자, 중풍환자, 손 마른자, 눈먼 자, 모든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들려 주시더라,
② 백부장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환자를 만나보지도 않고 원거리에서 말씀만 하셨는데, 그 종이 고침을 받았더라,
③ 나인 이라는 성에 사는 과부의 아들이 죽었는데, 예수님이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일어나라” 하시니, 죽은 아들이 살아나더라, 이렇게 자신들이 직접 보고 들었던 이야기들을 요한에게 세세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제자들의 말을 듣고서, 예수님은 정말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특별한 구원자가 맞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참에 예수님에게 직접 대답을 듣고 싶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불러서, 너희들이 예수님에게 직접 가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요 7:18) 라고 묻고, 대답을 듣고 오라고 부탁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질문하고 대답을 듣는 장면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 두명이 예수님을 찾아가서,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요 7:19)라고 예수님에게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반응은, “그래 내가 오겠다고 약속한 그 메시아다, 구원자가 맞다, 내가 바로 그리스도다”라고 딱 부러지게 말씀해 주시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우리 다 함게 22, 23절을 읽겠습니다.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아멘
22절 말미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니 전파된다 하라”고 대답하신 것이,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핵심 의도입니다. 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전파 된다고 했는데, “가난한 자”는 지난 팔복 설교에서 설명 드린 것과 같이, ① 오직 100% 하나님만 신뢰하도록 극한의 상황에 다다른 사람, 그리고 ② 진실되게 참회하고 통회하여 죄 사함의 은혜가 허락된 사람을 뜻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님께 고침 받은 모든 병자들은 은혜로 고침 받은 것은 명백하지만, 그들 스스로의 내면에서는, 구원자(전능자)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를 베풀고, 따르는 자들은 진실로 믿어지는 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수 많은 기적들이 나타났습니다. 마치 작용과 반작용과 같이 은혜와 믿음이 잘 어울어진 현장에서는 언제라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실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보통사람이 아니라, 전능하신 신적 존재라는 사실이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열리고, 구원해 주시는 생명의 복음이 강력하게 전파되었습니다. 복음 자체이신 예수님이 구원자로서 이미 공개적으로 알려지고, 깨달아지고, 믿어지고 있는 현장이 바로 예수님의 사역 현장 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직선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이렇게 확실하게 능력과 권위와 영광을 무수히 보여 주는데도, 너희들은 어찌하여 믿지 못하고 의심하느냐”는 반문하시는 겁니다. 이미 다 보여주지 않았느냐, 뭘 더 보여 달라는 것이냐, 의심 때문에 믿음을 취하지 못하는 구나, 라는 뜻으로 대답 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를 했을 겁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 하시고 난 후,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질문에 대답해 주시는 진짜 의도는 이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 바른 성경은, “나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영어 성경에서는, “나로 인해 절대로 화가나거나(감정이 상하거나, 불쾌해 하거나)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KJV)고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반대 단어는 의심, 혹은 불신이 됩니다. 의심이 마음에 들어와서 점점 커지게되면, 결국에는 신앙에서도, 생활에서도, 실족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실족하다(헬-스칸달리스대, 영-fall away)’는 단어의 의미는, 길 가운데에 걸려 넘어질 수 있는 장애물을 놓는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그 장애물 때문에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잡고 있던 줄을 놓아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 줄은 보통 줄이 아니라, 벼랑 끝에 매달린 채 잡고 있는 생명줄과 같습니다. 줄을 잡고 있어봐야 어차피 죽을 텐데, 난 그만 포기하겠어, 이렇게 생각하고 줄을 놓아 버리는 것이 실족하는 것입니다.
실족은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 조차도 자신의 안위가 어려워지자, 실족할 수 있는 위기 상황이 왔습니다. 세례 요한에게도 ‘의심’이라는 장애물이 생겼고,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자, 생명의 줄을 그만 놓아야 될 것 같아서 마음에 혼란이 가득한 상황이 되었습다. 실족하게 되는 원인의 시작점이, 그 어느 것도 아니라 바로 예수님 이라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 예수 믿습니까?” 라고 누가 물어 보면, “죄 용서 받고, 죽어서 천국 가려구요, 거기서 영원히 살려구요, 살면서 복 많이 받으려구요” 당연하게 이렇게 대답을 하실 겁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고 걸려 넘어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의심의 장애물 때문에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생명과도 같은 줄을 너무 쉽게 놓아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실제 제가 보고 겪었던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① 어느 집안은 가족들이 전부 서울대 출신입니다. 그 가족 중 한 명의 수험생 자녀도 성적이 좋아서 당연히 서울대 갈 줄 알았는데, 그만 서울대가 아닌 다른 명문대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 부모님은 자기의 아들이 서울대를 가지 못한 것이, 예수님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아서 그렇게 됐다고, 담임 목사님이 자기 아들을 위해 축복해 주시지 않아서 그렇게 됐다고 원망하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서울대합격이면 복 받은 것이고, 불합격이면 창피를 당한 것이라 생각하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② 어느 교회의 부부 집사님이 그렇게 교회를 열심히 섬기셨습니다. 예배 생활은 물론이고, 봉사면 봉사, 재정 후원이면 후원, 교회의 모든 구석 구석을 자신의 집보다 훨씬 더 반짝반짝 빛나게 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자 선거에서 두 분 집사님은, 장로와 권사로 피택이 되어 임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상황이 180도 바뀝니다. 장로는 감독하고 관리하는 직분이라고 하면서 모든 봉사활동은 중단했습니다. 권사는 권면을 하는 자리라고 하면서, 사사건건 다른 집사님들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당회나 제직회를 하면, “내가 이 교회에 얼마나 헌금 했는데, 나만 큼 예배 열심 한 사람, 봉사 열심히 한 사람 나와 보라고 해, 예수님도 나를 인정해 주셔서 장로, 권사로 세워 주셨는데, 감히 나를 이렇게 대우해” 라고 분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분들은 은혜로 주어지는 직분을 자기 과시와 성취물로 여기려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③ 어느 교회의 권사님 한 분이 담임 목사님 부부를 찾아와서 큰 소리로 따집니다. “목사님이, 예수님께 기도하면 다 이루어 주신다고 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열심히 기도했는데, 왜 우리 큰 아들은 나이 40이 넘어서도 장가를 못가나요, 왜 우리 작은 아들은 저번에 사고나서 다친데도 잘 낫지 않았는데, 또 이번에 사고나서 저 모양이 됐나요, 왜 우리 남편 술 좀 그만 먹게 해달라고 기도를 30년 했는데 여전히 술독에 빠져 지내나요, 왜 우리 손자는 착하기 착한기만 한데 학교에서 맨날 다른 애들을 때렸다고 연락 오나요, 왜 내 딸들은 하나 같이 가난한 집에 시집을 가서 지지리도 고생만 하고 었나요, 기도해도 다 소용 없어요. 목사님이 책임지세요, 예수님이 우리 집만 미워 하시는 게 분명해요, 내일 부너 저 교회 안 나옵니다” 이 권사님은, 기도 응답 안 되고 집안 잘 안풀리는 것을 예수님 탓으로 돌리고, 주신 것은 생각 하지 않고, 주시지 않은 것만 원망하는 전형적인 기복신앙의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세 가지 이야기의 주인공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언제든지, 실족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세례 요한 같이 목숨이 담보 되지 않는 극히 위험한 상황에 도달하면, 실족하게 하려는 의심이 믿음의 뿌리를 뽑아 낼 듯이 강하게 흔들어서, 걸려넘어지게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복을 받고, 누리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신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너희들이 어떤 상황에서든지, 나를 불신하고, 나를 떠나려는 선택을 결코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복 받고 못 받고는 나중 문제입니다. 실족의 문제는, 특별히 그것이 예수님 때문이라면, 그로인해 완전한 패망과 멸망에 이를 수 있는 무섭고도 심각한 분기점이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실족하는 세 가지 큰 이유가 있습니다. 돈 때문에, 사람 때문에, 건강 때문에 대부분 실족합니다. 돈이 없고, 사람 관계가 어그러지고, 건강이 어려워지면 이런 것들이 굉장히 고달프고 낙심의 상처로 다가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위기의 상황속에서도 예수님 때문에 신앙적으로 실족하는 경우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지 않고 이겨낼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에는 복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의 동행과, 위로와, 회복과, 능력과, 충만함의 미래가 얼마든지 열려져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결코 절망이나 멸망이 스며들지 못합니다.
지난 마태복음 팔복 내용 설교시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100%복, 함께 하시지 않으면 0%복, 하나님은 복 받는 것의 “All or Nothing”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실족과 복을 연결시킨 것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으면 100%복, 실족하면 0%의 복, “All or Nothing”이 똑 같이 적용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실족하게 되는 상황에 부닥치게되면, 무조건 참고, 견뎌라, / 의심이되고 불안하더라도 무조건 믿고 기다려라, / 실패와 낙심이 있어도 무조건 나만 붙잡아라, / 실족하면 복 달아난다, 복 받고 싶으면 무조건, 무조건이다, 알겠지.... 이렇게 일방적으로 강요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실족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실족의 장애물(의심, 불신, 섭섭함 등)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것도 다 아십니다. 사탄이 자꾸 미혹해서 우리의 여린 심기를 건드리는 것도 다 아십니다. 쉽게 걸려지는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럼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다루어 가시는 분이십니까? “너희들에게는 복이 있느니라” 라는 말씀속에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오해하기 쉬운 것은, 너희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은 어떤 상황이나, 문제를 다 해결해 줄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항상 좋은 결과물이 나와야만 우리가 복 받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학습되어져온 고정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팔복의 모든 원어의 구절들은 “복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온유한 자들은... 이런식의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도, “복이 있도다. 나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항상 복이 먼저 나옵니다. 예수님이 실족 당할 위기에 있는 자들에게, ”너희들에게 복이 있도다“ 하신 것도, 복을 앞세우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앞세우신 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복의 근원이신 예수님 자신을 말씀 하는 것입니다
실족을 보지 말고, 실족 앞에 서 있는 나를 보아라, 가난을 보지 말고 나를 보아라, 애통을 보지 말고 나를 보아라, 불쌍함을 보지 말고 나를 보아라, 핍박과 고통을 보지 말고 나를 보아라, 예수님의 복의 개념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어떤 문제도, 상황도, 결과도 바라보지 말고, 문제보다 크신 예수님, 상황보다 크신 예수님, 결과를 이루어 다 이루저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라, 복의 근원인 나를 바라보는 것이 너희들이 가장 좋은 복을 받는 유일한 길이다, 이런 깨우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서울대 가고, 직분 받고, 가정이 화목하고, 자녀 손들이 믿음 안에서 잘 지내게 하고 싶으면, 먼저 복이신 예수님을 찾으세요, 만나세요, 그 분을 떠나지 마세요, 항상 가까이 하세요, 그러면 다른 모든 것들은 알아서 다 잘 됩니다. 기대하지 않은 것까지 줄줄이 다 이루어 집니다. 이것이 복을 누리는 단순하고도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복 받았다고 하는 모든 결과물들은, 먼저 복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 것이 선행 될 때 나오는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이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라는 말은 세례요한 같은 인물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평가하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크게 평가 받은 인물조차도 누구든지 실족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자신의 믿음에 자만하지 마시고, 방심해서도, 안일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실족의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는 험난한 통과의례일수도 있습니다. 이 단계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내 인생에 어떠한 폭풍이 휘몰아 친다 하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복이 있도다”, 말씀 하시는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항상 복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태산 보다도 높이, 바다 보다도 넓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 곁에 항상 함께하고 계심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실족에 관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깨우침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언젠가 제가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고, 유석경 전도사님을 기억하시는지요. 유 전도사님은,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사법고시 2차 시험을 앞두고 누구보다도 친밀했던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여 죄절과 낙심의 시간, 그리고 회복의 시간을 거쳐 미국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한국의 지구촌 교회에서 인턴 전도사로 사역하던 중, 말기암 선고를 받고 시한부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야 말로 크나큰 실족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 때 유 전도사님은, 복의 결과(치료해 주시거나 생명을 연장 시켜 주시는)를 보지 않고, 복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까지 복음 사역을 위해 헌신하시다가 소천하셨습니다
유 전도사님이 남기신 『당신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라는 책의 내용 중에서, “왜 나의 삶이 힘든가? 그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문제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해하는 대상이 아니라 신뢰의 대상입니다. 여러분에게 닥친 문제와 상황을 보지 마시고, 그 문제와 상황 보다 훨씬 크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는 길입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유언입니다.
실족의 순간은 “누구든지”에 해당 됩니다. 저도, 여러분들도 피 할 수 없는 실족 상황을 늘 경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극한의 상황인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조차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이 복의 근원 이며, 생명의 주관자 이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족이라는 문제를 바라보면,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복의 결과물들만을 바라보면,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반응 했는지의 기록은 없습니다. 감옥에 있다가 죽음을 맞이 했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세례 요한은 죽음 보다 크신 예수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강력한 믿음의 응답으로 반응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실족하게 되는 조건, 문제, 상황들이 무수히 놓여있는 지뢰밭이, 우리의 험난한 인생의 길입니다. 오늘 하루 괜찮다가 내일 당당 실족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매일 “너희에게는 복이 있도다” 말씀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들려야 합니다. 가슴에서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00교회 모든 성도의 남은 인생에서는, 복의 근원 되시는 우리 주님만이 영원히 친구가 되시고, 인생의 동반자가 되셔서, 하늘 천국의 복을 이땅에서 풍성하게 누리며, 평안과 소망 속에 살아가시는 복된 나날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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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어떤 문제와 위기의 상황이 찾아 온다 하여도, 오직 복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 함으로, 모든 실족의 순간들을 담대하게 이겨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인생의 영원한 복이 되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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