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간의 교제를 귀히 여기자 (눅8:16-21)
본문
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에 군 수뇌부 간에 오간 통화 내용이 보안사에 의해서 도청되었다는 사실이 16년만에 알려져서 물의를 빚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비밀이 없습니다. 한 동안은 비밀로 남아 있을 수는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비밀로 남아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신앙 행위도 물론 하나님 앞에 밝히 드러납니다.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 주님의 행동을 배우고 본받아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결코 부모 형제를 경시하시지 않았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12:48에는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 들은 예수님이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라고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하나님만 있다고 생각하며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본문에 언급된 것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독교를 공격할 호재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 관계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이유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는 같습니다. 그 이유란 낳아주시고 사랑으로 길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경배와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은 당연히 자식된 자에게 부모를 공경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2-3) 성경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에 관해서는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지만 육신의 아버지 요셉에 대해서는 한 차례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과부였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즐겨하셨으며 다 행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다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디모데전서 5:4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처럼 집안에서 어머니에게 효를 행하는 면에도 추호도 소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어머니를 생각하시며 제자 중 한 사람에게 어머니를 돌보아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는 말씀을 주신 분도 다름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본문에 언급된 예수님의 말씀이 부모 형제를 경시하는 말씀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혈연 관계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도록 허용치 않으셨습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한창 무리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을 개별적으로 만나 이야기하려는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즉시로 만나주시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활이 얼마나 짜임새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어느 일을 먼저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말씀을 마치신 후에는 가족들을 만났을 것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일과 중요치 않은 일, 긴급한 일과 긴급을 요하지 않는 일을 구분하지 않고 무계획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긴급한 일이 반드시 중요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도 종종 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녁에 그 날 하루를 돌아보면서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 후회하게 되고 그 다음 날은 전날 하지 못한 일까지 떠맡아 부담을 느끼며 맞아하게 됩니다. 내가 나의 시간을 미리 계획하고 통제하지 못하면 다른 누군가가 나의 시간을 통제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부모 형제와 담소하며 혈육의 정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렇지만 말씀을 선포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을 제쳐두면서까지 그렇게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분을 본받아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을 혈육들로 인하여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보다 부모 형제를 더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신자들을 친밀하게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친과 동생들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에게 혈육과 같은 정을 느끼고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 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48-50) 우리는 가끔 20대에 박사학위를 딸 정도로 수재인 자식을 둔 부모를 부러워합니다. 이 율곡과 같은 자식을 둔 부모를 부러워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아들을 둔 마리아를 부러워합니다. 이런 우리의 심정을 대변하듯 한 여인이 예수님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답변하셨습니다(눅11:28). 복이 있는 사람은 그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듣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고 있는 이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열매를 나눠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혈육간의 정 못지 않는 정을 성도 간에 나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도를 귀히 여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모이기를 힘쓰며 지체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여 전체에 유익을 끼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결코 부모 형제를 경시하시지 않았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12:48에는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 들은 예수님이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라고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하나님만 있다고 생각하며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본문에 언급된 것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독교를 공격할 호재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 관계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이유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는 같습니다. 그 이유란 낳아주시고 사랑으로 길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경배와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은 당연히 자식된 자에게 부모를 공경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2-3) 성경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에 관해서는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지만 육신의 아버지 요셉에 대해서는 한 차례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과부였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즐겨하셨으며 다 행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다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디모데전서 5:4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처럼 집안에서 어머니에게 효를 행하는 면에도 추호도 소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어머니를 생각하시며 제자 중 한 사람에게 어머니를 돌보아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는 말씀을 주신 분도 다름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본문에 언급된 예수님의 말씀이 부모 형제를 경시하는 말씀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혈연 관계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도록 허용치 않으셨습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한창 무리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을 개별적으로 만나 이야기하려는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즉시로 만나주시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활이 얼마나 짜임새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어느 일을 먼저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말씀을 마치신 후에는 가족들을 만났을 것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일과 중요치 않은 일, 긴급한 일과 긴급을 요하지 않는 일을 구분하지 않고 무계획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긴급한 일이 반드시 중요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도 종종 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녁에 그 날 하루를 돌아보면서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 후회하게 되고 그 다음 날은 전날 하지 못한 일까지 떠맡아 부담을 느끼며 맞아하게 됩니다. 내가 나의 시간을 미리 계획하고 통제하지 못하면 다른 누군가가 나의 시간을 통제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부모 형제와 담소하며 혈육의 정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렇지만 말씀을 선포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을 제쳐두면서까지 그렇게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분을 본받아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을 혈육들로 인하여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보다 부모 형제를 더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신자들을 친밀하게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친과 동생들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에게 혈육과 같은 정을 느끼고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 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48-50) 우리는 가끔 20대에 박사학위를 딸 정도로 수재인 자식을 둔 부모를 부러워합니다. 이 율곡과 같은 자식을 둔 부모를 부러워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아들을 둔 마리아를 부러워합니다. 이런 우리의 심정을 대변하듯 한 여인이 예수님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답변하셨습니다(눅11:28). 복이 있는 사람은 그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듣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고 있는 이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열매를 나눠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혈육간의 정 못지 않는 정을 성도 간에 나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도를 귀히 여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모이기를 힘쓰며 지체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여 전체에 유익을 끼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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