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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금식하지 않는가 (눅5: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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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남을 칭찬하는 데 인색한 경향이 있습니다.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먼저 비판부터 합니다. 격려하기보다는 낙담케하고 허물을 덮어주기보다는 들춰내고 감싸주기보다 두들겨줍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상대방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보면서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일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으시게 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자기들과 같이 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분을 비난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님께서는 이 비판적인 질문을 계기로 금식에 관한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첫째로, 금식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입니다. 침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당연히 금식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누가복음 18:12에 의하면 바리새인은 일 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탈무드는 그들이 금식한 날이 둘째 날과 다섯째 날이라고 밝혀줍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으려고 시내산에 올라간 날이 다섯째 날이었고 내려온 날이 둘째 날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신랑으로,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으로 비유하여 혼인 잔치에 참여한 자들이 슬퍼하며 금식하는 경우가 없으며 슬퍼할 이유가 있을 때에는 강제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금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금식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셨습니다. 금식은 의무 사항이 아닌 것입니다. 사실 구약성경에서 금식을 명한 때는 일 년에 한 차례 속죄일에 한정되어 있습니다(레16:29). 신약성경에서도 기도하라는 명령은 수 없이 발견되지만 금식하라는 명령은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에서 금식한 사람들의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민족적인 재난이나 개인적인 재앙을 겪게 되었을 때 그리고 죄에 대한 회개의 표시로 자발적으로 금식했습니다. 금식은 이처럼 음식을 단절할 정도로 애통해 할 이유가 있을 때에 하는 것이지 아무 때에나 의무감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금식은 경건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은 금식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경건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금식의 동기보다 금식의 횟수와 날수가 더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경건한 사람들이 아니라 경망스러운 사람들로 비춰졌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무엇 때문에 금식했습니까 금식이 경건의 표시라면 금식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영성을 쌓은 사람이 오히려 비판적이 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경건한 삶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듯이 그분은 자주 금식하지 않으셨습니다. 최근 기도원을 찾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보니 기도원도 전국적으로 많이 생겼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기도원을 찾아 기도하고 금식하는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옛날 바리새인처럼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을 영성이 없는 사람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 잔치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신랑으로, 그분을 좇는 유대인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사람과 그들의 모임인 교회를 신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금식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이 신랑 되신 주님과 함께 있을 때 금식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금식하게 된다는 신랑을 빼앗길 때는 언제입니까 요한복음 16:16-24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줍니다. 16절에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0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는 말씀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령님의 내주(內住)와 관련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될 때 제자들이 곡하고 애통하며 금식하게 되겠지만 “조금 있으면”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성령님께서 신자 안에 내주하시므로 그들의 마음이 기쁘게 될 것이고 그들의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22절). 따라서 오늘날은 주님께서 성령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기뻐하며 잔치할 때이지 슬퍼하며 금식할 때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성 영성은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것인데 그 열매 중에는 “희락(즐거움)”이 있습니다. 물론 죄에 대한 통회하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희락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를 진정 원하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혼 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 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디모데전서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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