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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로부터의 혁명 (눅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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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옷이 어때요 제 머리모습 잘 나왔어요 우리 아들 좀 어떻 습니까 우리 남편 평가 좀 해 주세요 제 음식 솜씨 어떻습니 까' 전부 평가를 청하는 말입니다. 그 말 액면 그대로 믿고 신랄 하게 비판을 했다가는 의 상하기 딱 쉽습니다. 칭찬을 바라는 겁니다. 이렇게 비판받기에는 인색하고 못 참아하면서도 비판하기는 좋아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의 모습입니다. 서머셋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비판을 청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오직 칭찬만 바란다." 사람의 마음을 잘 반영한 말입니다. 오늘 성경은 비판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 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 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37절) '비판치 말라'의 비판(크리네테)은 문법적으로 능동테 명령법입니다. 말하자면 능동적으로 비판만 찾아 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습관적인 비판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판 전문가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 '정죄'는 자신이 하나님의 재판관 자리에 앉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특히, 심판과 정죄를 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때문에 불완전한 인간 끼리의 비판은 다분히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비 판의 절대적인 정당성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인간의 비판은 다 상대적으로 옳을 뿐입니다. 죄많은 인간이 허물 많은 인간을 정죄하는 그런 구조입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방탕한 아들의 비유 잘 아시지요
첫째 아들 도 방탕한 둘째 아들을 정죄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매일 문밖 에 서서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를 노심 초사 기다리는 수고를 아 끼지 않던 그 아버지도 끌어 안고 다 용서를 해 주었는 데, 첫째 아들이 무어라고 정죄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 절대 재판관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절대적인 심판의 자리에 앉을 사람은 이 세상 에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나도 그런 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 기 때문입니다. 나도 과거에는 그런 범죄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상대적인 정죄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비판을 할 때에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했 던 그 비판이 나에게로 다시 돌아 온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헤 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38 절) 헤아림을 도로 받는다는 것, 원어에는 '재측량을 받을 것이 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내가 잰 자로 내가 도로 재측량하게 당하 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비판을 내가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래도 오케이면 얼마든지 재어도(헤아려도) 좋습니다. 이게 자기로 부터의 혁명입니다. 재측량에 떳떳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떳떳해도 무조건 남을 측량해서는 안됩니다. 공공의 선과 개인의 구원을 위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 되기 쉽습니다. 비판과 비난은 다릅니다. 비판은 건설이지만, 비난은 파괴이기 때문입니다. 비판은 생명이지만, 피난은 죽임입니다. 비판은 세 움이지만, 비난은 쓰러트림입니다. 비판은 치료의 칼이지만 비난 은 살해의 칼입니다. 치료의 목적 없이 칼을 대서는 안되는 것 이지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울을 가진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두 각기 다른 거울을 가 지고 있었습니다. 한사람은 남만 볼 수 있는 거울을 가졌습니다. 또한 사람은 자기 자신만 볼 수 있는 거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자신과 남을 모두 볼 수 있는 거울을 가지 고 있었습니다. 남만 보는 거울을 가진 사람은 남의 것은 무엇이든지 볼 수 있 었습니다. 신이 났습니다. 아름다운얼굴, 때묻은 얼굴, 추한얼굴, 모난얼굴, 각양 각색의 얼굴들을 볼게 되니 눈도 날카로워지고 안목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정작 자신은 거지꼴에 불결하고 추한 모습이 되어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만 보는 거울을 가진 사람은 늘 자기의 얼굴을 볼 수 있었 습니다. 조금이라도 꺼리끼는 것이 있으면 거울을 보고 즉시 메 무새를 고치고 화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깨끗하고 아름 답게 가꿀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들을 비춰주지 못해 마주치는 사람 마다 때묻고 더러운 얼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사람들 만나기가 싫어지고 점점 고립되어 혼자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쓸쓸하게 홀로 생을 마쳤습니다. 자신도 보고 남들도 볼 수 있는 거울을 가진 사람은 이 둘을 다 할 수 있어서 조화롭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 성경은 '네 눈속의 있는 들보만 빼어라 남의 것은 상관 하지 마 라'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무조건 비판을 봉쇄하는 게 아닙니다. 비판이 악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를 빼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후에.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고 합니다. 내 눈속만 들여다 보아서도 안되고, 형제의 눈속만 들여다 보아도 안됩니다. 내 눈 속과 형제의 눈 속의 균형과 순서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참된 비판, 올바른 비판의 원칙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 원칙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원칙은 '먼저. 그 후에' 원칙입니다. 무엇이 먼저입니까 내 눈속의 대들보입니다. 무엇이 나중입니까 형제 의 눈속의 티끌입니다. 이것을 우선순위의 원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순위의 원칙은 순서가 생명입니다. 순서를 잘 지키지 않으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속옷을 먼저 입고 겉옷 순으로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완전히 순서를 거꾸로 했다고 칩시다. 겉옷을 제일먼저 입 고 차례로 속옷을 입어 제일 속옷을 맨 나중에 입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상상을 해 보세요. 얼마나 꼴불견이겠는가를! 네 눈속의 들보를 먼저 빼라. 형제의 눈속의 티를 비판하고 지 적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내 눈 속의 들보를 뺀 다음에 하 라는 것입니다. 밝히 볼 수 있는 사람이 남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청결을 한 자 만이, 남을 밝히 비쳐 비판할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림이 되고 세움이 되 고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파괴가 되고 죽임이 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먼저 '나부터'입니다. 이웃의 혁명과 역사의 혁명은 나로부터 시작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혁명을 포기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혁명을 중단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나로부터의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간음한 여인을 예수에게로 붙잡아 온 사건 아시지요 간 음한 여인을 몰고온 군중들은 모두 남만 볼 수 있는 거울을 가지 고 의기 양양하게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자기를 보는 거울을 내밀었습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돌로 들어 치 라' 자기의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발견한 군중들은 하나 둘씩 사라졌습니다. 이때까지 보지 못하던 자신의 얼굴을 갑자기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걸 정확히 꿰뚫어 보셨습니다. 또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내 눈이 잘 보여야 형제의 눈속의 티를 꺼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눈속의 들보를 빼지 못하는 사람은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소경이 어떻게 남의 눈속의 티 를 빼내 치료해 줄 수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소경이 소 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39절) 라고 까지 말합니다. 개명(開明)이 아니라 개악(改惡)이 되는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고, 불결한 자가 불결 한자를 깨끗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번 5월에 저희가 남편과 아내에 대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너무 너무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은혜란 것 이, 바로 나의 남편 나의 배우자가 나에게 해 줘야할 것, 나의 상 대방의 결점을 쪽집게 처럼 잘 집어낸 말씀이라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게 소경입니다. 진짜 눈뜬 사람은 내 남편 내 아내 상대 방을 바라보지 않고 나를 바라보는 사림입니다. 이제 눈뜬 믿음 의 사람입니다. 자기를 깨끗게 하는 자가 눈을 뜬 사람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역사에 대해 눈을 뜨고 진리에 대해 눈을 뜨면 자신에게 적용하 기 전에 먼저 남에게 적용하려고 합니다. 가르치려고만 드는 경 우도 같은 이유입니다. 역사에 대해 눈을 뜨면 비판 전문가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육, 선전, 선동부터 하려고 듭니다. 우리나라 지금 경제가 이렇게 무너지게 된 것은 정치가가 어떻고 재벌 이 어떻고, 교육가가 어떻고, 부유층이 어떻고 그러고 끝입니다. 거울을 전부 바깥으로만 비추고 있습니다. 화살표가 다 밖으로만 향하고 있습니다.
존재와 관심의 방향이 전부 밖으로만 향하고 있습니다. 에너지도 다 밖으로만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형제의 눈 속의 들보만 보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성경공부를 할 때 '겉옷을 달라고 할 때 속옷 까지 나눠주라'(눅6:29)는 말씀을 가지고 묵상하고 말씀 나눔을 하기로 했다고 합시다. 역사에 대해 눈 뜬 사람이 이 말씀 구절 을 묵상하고서는 '자본가와 정치권력자와 일부 부유 특권층이 문제예요. 이런 사람들이 먼저 가난한 사람에게 속옷까지 나눠줘야 나라가 바로 서고 민중이 풍요롭게 살 수 있어요. 나눔이 없어 통일까지 안 되는 것입니다.' 하고 결론을 맺었다고 합시다. 그것 도 좋은 묵상이요, 바른 깨달음입니다. 정확한 분석이요 옳은 역 사인식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여기에서 끝이라면 불행한 일입니다. 형제의 눈의 티끌만 본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자본가 보 다 악질적인 요소는 없는지 부자보다 더 탐욕스런 모습은 없는 지 권력자 보다 더 오만한 구석은 없는지 일부 부유계층 보다 더 이기적인 모습은 없는지 처절하고 뼈아프게 울며 눈물흘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라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진실한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말씀 체험입니다. 내 눈속의 들보를 빼는 것입니다. 이게 재대로 눈뜬 사람입니다. 이게 밝은 사람입니다. 이런 자기로 부터의 뼈 아픈 회개를 한자 만이 불의에 대한 정의의 투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비의 눈물을 흘린자 만이 구조악에 대한 진리 의 세움을 진실되게 할 수 있습니다. 동터오는 새역사에 대한 개척을 할 수 있습니다. 눈 감고는 못할 일입니다. 눈을 뜨고서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눈뜨는 작업은 먼저 자신의 들보를 빼 내는 일입니다. 이것이 자기로 부터의 혁명을 시작하여 밖의 혁 명으로 까지 나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 탓이요'운동이 성행을 할 때입니다. 운동권 일부에서는 전부 내탓이요'하고 앉아 있으면 자본가와 부정부패 구조의 악을 온존 시키고 불의를 조장하는 것이니 결국은 '내 탓이요' 그게 악이다' 하고 몰아 부쳤습니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족 한 것이 있습니다. 이런 논리가 만에 하나라도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서서 한점 부끄러움 없도록 갈고 닦고 회개하는 노 력을 평가 절하하는 것이라면 바로 그것이 바로 자신과 역사를 망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들보를 빼지 못하는 소경이, 티를 가진 이웃 소 경을 인도하려하다가는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소 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 하겠느냐 '(39절)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음의 사람은 먼저 자신을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세울일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 회개와 씻김의 일을 우선적으로 할 것입니다. 무슨 비판이든지 먼저 자신에게 먼저 하십시다. 그 리고 나서 그 비판의 대상을 향해 가슴아픈 세움과 살림의 비판 을 합시다. 그러면 이게 구원이 되고, 생명이 되고, 세움이 되고, 살림이 되는 것입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에게 비판하기는 속히 하 고 남을 비판하기는 더디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의 아 들 딸인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먼저 여러분이 성결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믿음 의 자녀인 여러분이 깨끗하시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진리에 바로 서기 원하십니다. 먼저 들보를 빼고 맑은 눈 을 가지시기 원합니다. 왜요 이웃과 역사를 개혁하고 구원하는 주체가 될 사람이 바로 믿음의 아들 딸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들어 쓰기 원하십니다.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고 삶의 현장의 등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고귀한 사 업을 감당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내 눈의 들보를 가지고 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남만 보는 거울을 가지고 자신은 들여다 보지 못해 불결한 몸이 되어서는 하나님의 사역자 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큰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 그릇도 있어서, 어떤 것은 귀하게 쓰이고, 어떤 것은 천하게 쓰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내가 말한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깨끗에 하면. 귀하고 성별된 그릇이 될 것입니다."(딤후2:20-21) 이런 성결과 회개의 영을 가지고 자기로 부터의 혁명에 성공하 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결한 하나님의 도구로 바로 서서, 이 웃과 삶의 현장과 지역사회와 역사를 개혁하는 하나님 나라의 참 일꾼이 도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풍성히 이뤄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문) 주님, 이때까지 자신의 오염된 몸을 살피기 보다, 이웃의 비판에 열중했습니다. 자신을 청결케 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소경이 소 경을 인도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저희가 말하는 비판은 비난이 되어 사람들을 파괴하고 넘어트리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은혜가 많은신 주님, 저희가 진정 깨끗해 지게 저희 눈의 들보를 먼저 빼게 하여 주십시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말씀앞에 겸허히 서 게 하여 주십시오. 그 어떤 것 보다 내 탓임을 온 마음으로 느끼 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저희로 청결한 하나님의 사람, 성결한 하나님의 사람이 먼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청결케 된 자의 참다운 비판이 교우들과 이웃과 역사를 살리는 세움이 되고, 살림이 되 고, 희망과 건설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저희가 정말 들보를 뺀, 하나님 나라의 신선하고 거룩한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저희를 사용하여 주소서. 저희로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저희 의 가정과 일터와 사회가 개혁되고 구원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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