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라 (눅7:11-17)
본문
기쁨으로 환호하는 무리와 슬픔으로 통곡하는 무리가 한 곳에서 만났습니다. 기뻐하는 무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었고 슬퍼하는 무리는 독자를 잃은 과부를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이 상황에서 슬픔이 기쁨을 압도한 것이 아니라 기쁨이 슬픔을 압도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과부를 보셨습니다(13절). 우리는 종종 매스콤을 통해서 공무원들의 탁상 행정을 질타하는 말을 듣습니다. 새로운 도로를 계획하면서 현지 답사도 없이 도면상으로 처리하여 많은 민원을 야기시키기도 하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교통대책을 발표하다 보니 서민의 처지를 배려하지 못하게 됩니다. 시민을 위한 행정을 펴려면 현장을 발로 뛰며 눈으로 둘러보아 불편한 점, 어려운 점을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유교의 경전 중 하나인 '맹자'에 제(齊)나라 선왕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왕이 하루는 제사용으로 끌려가는 소를 보았는데 그 소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선왕은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 소를 풀어주고 대신 양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양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다면 똑같이 불쌍히 여겼을 것입니다. 여기서 견우미견양(見牛未見羊)이라는 고사가 생겼습니다. 불쌍히 여기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는 결국 그 대상을 보았느냐 보지 않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나인성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아니하시더라도 그 과부의 처지를 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과부를 찾아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에게 우연한 사건이란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은 과부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육신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신 목적 가운데에는 사람의 처지를 보고 직접 경험하기 위한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위로는 불쌍히 여기고 “울지 말라”는 말 한 마디 하는 것으로 그쳐질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과부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근본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두려워 말라”(사41:10)고 하십니다. 근심하고 염려하는 자들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14:1), “너희 염려를 다 내게 맡기라”(벧전5:7)고 하십니다. 우는 자들에게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과부에게 그랬던 것 같이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 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4-16)
둘째로, 예수님은 죽어 있는 청년 가까이 오셨습니다(14절). 주님께로 나올 수 없는 죽어 있는 청년을 위하여 주님께서 친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들을 수 없는 청년에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태초에 그분의 말씀은 완전한 흑암을 몰아내고 빛을 만들어 냈습니다. 죽어 있는 대지 위에 생명체가 나타나게 했습니다. 바로 그 동일한 말씀이 죽은 청년을 회생시켰습니다. 주님께서 “일어나라”고 명하실 때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죽은 과부의 아들은 그 음성을 듣는 즉시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한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 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 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5:25-29) 지금도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이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새생명을 얻게 됩니다. 훗날 그분의 음성이 한번 더 하늘과 땅을 뒤흔들 것입니다. 그 때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빠짐 없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여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 으리라“(살전4:16-17) 또 어떤 사람은 심판의 부활에 참여하여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 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20:13-14) 예수님의 말씀에 권능이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생명을 줄 수도 있고 심판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그리하면 장례식과 같은 인생의 고난 중에도 주님의 은혜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과부의 아들은 살아났고 슬픔의 행렬은 기쁨의 행렬이 되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과부를 보셨습니다(13절). 우리는 종종 매스콤을 통해서 공무원들의 탁상 행정을 질타하는 말을 듣습니다. 새로운 도로를 계획하면서 현지 답사도 없이 도면상으로 처리하여 많은 민원을 야기시키기도 하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교통대책을 발표하다 보니 서민의 처지를 배려하지 못하게 됩니다. 시민을 위한 행정을 펴려면 현장을 발로 뛰며 눈으로 둘러보아 불편한 점, 어려운 점을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유교의 경전 중 하나인 '맹자'에 제(齊)나라 선왕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왕이 하루는 제사용으로 끌려가는 소를 보았는데 그 소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선왕은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 소를 풀어주고 대신 양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양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다면 똑같이 불쌍히 여겼을 것입니다. 여기서 견우미견양(見牛未見羊)이라는 고사가 생겼습니다. 불쌍히 여기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는 결국 그 대상을 보았느냐 보지 않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나인성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아니하시더라도 그 과부의 처지를 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과부를 찾아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에게 우연한 사건이란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은 과부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육신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신 목적 가운데에는 사람의 처지를 보고 직접 경험하기 위한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위로는 불쌍히 여기고 “울지 말라”는 말 한 마디 하는 것으로 그쳐질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과부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근본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두려워 말라”(사41:10)고 하십니다. 근심하고 염려하는 자들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14:1), “너희 염려를 다 내게 맡기라”(벧전5:7)고 하십니다. 우는 자들에게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과부에게 그랬던 것 같이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 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4-16)
둘째로, 예수님은 죽어 있는 청년 가까이 오셨습니다(14절). 주님께로 나올 수 없는 죽어 있는 청년을 위하여 주님께서 친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들을 수 없는 청년에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태초에 그분의 말씀은 완전한 흑암을 몰아내고 빛을 만들어 냈습니다. 죽어 있는 대지 위에 생명체가 나타나게 했습니다. 바로 그 동일한 말씀이 죽은 청년을 회생시켰습니다. 주님께서 “일어나라”고 명하실 때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죽은 과부의 아들은 그 음성을 듣는 즉시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한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 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 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5:25-29) 지금도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이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새생명을 얻게 됩니다. 훗날 그분의 음성이 한번 더 하늘과 땅을 뒤흔들 것입니다. 그 때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빠짐 없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여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 으리라“(살전4:16-17) 또 어떤 사람은 심판의 부활에 참여하여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 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20:13-14) 예수님의 말씀에 권능이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생명을 줄 수도 있고 심판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그리하면 장례식과 같은 인생의 고난 중에도 주님의 은혜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과부의 아들은 살아났고 슬픔의 행렬은 기쁨의 행렬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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