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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지의 무리들 (눅7:17-19)

본문

예수께서 산에서 밤이 맞도록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밝은 날 아침에 열 두 제자들을 택하사 사도라 칭했습니다(7:12-13). 그리고 헷틴산에서 내려오시던 어느 지점 중턱의 평평한 곳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리들에게 설교하였습니다. 그래서 흔히 이 부분을 마태복음 5장에 나타난 산상설교(수훈)와 구분하여, 평지 설교(수훈)라고 부르고 있으나, 그렇게 나눌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장소와 청중과 교훈 하시는 선생님과, 그 교훈의 내용이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께서 우리에게 예수께서 내려오시던 산중턱의 어느 평지에 모여든 군중(무리)들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저 무리들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함께 조명해 보라고 하십니다. 평지의 무리들!
I. 저들은 실로 많은 무리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7장 17절에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 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라고 한 말씀을 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주로 세 가지 부류의 무리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한 무리들은 바로, 그 날 아침 거기로부터 조금 높은 장소에서 예수의 사도로 택하심을 받은 무리들입니다(7:13). 저들은 하나님의 나라 왕국 복음을 위하여 선택된 자들로써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무리는 예수의 말씀(교훈)에 매혹되어 그를 좇던 일반 제자들이었습니다(2:17). 권세 있는 예수의 새 교훈에 영들이 충격을 받고, 좇아온 무리들입니다. 세 번째 무리는 예수께서 하시는 신유의 능력에 병고침을 받기 위하여 따르던 무리들이었습니다(2:17-18). 본문 속에서 보여 주는 중대한 내용은 많은 무리, 많은 백성, 여러 류의 인생들이 예수에게 모여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지닌 영의 매력이요, 생명의 매력입니다. 예수께서 계시는 곳에는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바닷가에 계시면 바닷가에 인파를 이루고, 들에 행하실 때는 들판이 인파를 이루고, 산에 오르시면 산상이 인파를 이루고, 회당에 가시면 회당이 인파로 덮이고, 집에 들어가시면 예수께서 계시는 집이 온통 사람으로 꽉 차 버렸습니다. 그 분은 저렇게도 사람을 이끄는 혼의 매력이 있었습니다. 그 분에게는 사람을 이끄는 이상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에 출생하시고 나사렛에서 사시고, 갈릴리에서 사역하시고 예루살렘에서 그 분이 죽으셨는데, 지금도 그 분이 사신 팔레스틴에는 이 천년 세월이 지나도록 그 분이 살던 땅을 찾아,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어 질줄 모릅니다. 그래서 그 분이 살던 곳이 성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 그 분이 살던 성지에는 그 분의 모습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분을 영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사랑하고 따르고 맹세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땅끝에서 여러 세기를 반복하는 역사의 공간에는 그 분, 예수를 사랑하고 따르는 무리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무리 중에 저도, 여러분도 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 앞에 놀랄 줄 알아야 됩니다.
Ⅱ. 저들은 여러 곳에서 온 무리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7절 중에 유다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유다 사방과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남부 지역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로와 시돈의 해안’은 북쪽에 있는 이방인의 땅으로, 베니게 항구의 도시들이 포함됩니다. 마가복음의 경우에는 갈리리와 이두매, 요단강 건너편에서도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전 이스라엘 지역에서 모두 모여들었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땅으로 약속된 전 가나안 경내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말이 됩니다. 당시의 교통 수단은 그 대부분의 경우가 도보였습니다. 걷고, 또 걸어서 사방에서 모여 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말, 이 평지에 모여든 무리들의 행렬은 예수 당시 그 곳에서만 끝나 버릴 무리들이고, 행렬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작이었습니다. 출발이었습니다. 나중에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에서 사람들이 예수에게 모여 올 시발이었습니다. 보십시오! 나사렛 사람 예수 사건은 십자가의 처형으로 끝이 난 것처럼 역사는 기록하였습니다. 당시 빌라도 총독은 이 사실을 로마 황제에게 보고하므로 예수 사건은 일단락이 나 버리고 만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예수에게로 사람들이 모여 오는 인파의 행로는 역사의 한가운데 줄을 잇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 천년 기독교 역사를 이루고 말았습니다. 생명을 받아 이 지구를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 삶의 방향을 바꾸어 예수에게로 예수에게로 향하던 무리들이 여러 나라, 여러 지역에서 끊일 줄 모르고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들로부터 이루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예수, 예수, 예수에게로 인생의 향방을 정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무리들의 마지막 모임과 만남을 가리켜서 요한계시록 7장 9절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횐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선다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4절로 26절에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 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고 들어온다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오직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하였습니다(계21:27). 멋지고, 멋진 교훈은 여러 지역, 여러 나라들에서 많은 백성들이 예수에게로 모여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본질적이요, 궁극적인 이유는 그는 영원한 인류의 구세주요, 황제이기 때문입니다.
Ⅲ. 열심 있는 믿음의 무리들이었습니다. 많은 무리가 여러 지역에서 모여 오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첫째로 저들은 열심을 내어 예수에게로 왔다는 사실입니다(2:17-18). 남자와 여자, 아이와 어른 남쪽 사람과 북쪽 사람 도시 사람과 농촌 사람들이 누구에게로 왔던가 저들 향방의 목적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너무나도 확실합니다. 예수에게로 왔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대합니다. ‘예수’는 그 이름이 구원입니다. 우리 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는 정치가가 아닙니다. 사회학자나, 심리학자나, 교육가가 아닙니다. 더욱이 경제가도 아니고, 사상가도 아닙니다. 민족주의자도 아니고 혁명가도 아닙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 가운데서 구원할 구원의 메시아로 세상에 오셨습니다(마1:21).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막10:4
5). 우리는 예수께로 옵니다. 구원의 주를 믿고 그에게로 나아 와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믿음의 주가 되십니다(히12:2).
둘째, 열심을 내어 말씀을 듣기 원했습니다. 우리 본문 7장 17절 중에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라고 하였습니다. 저 평지에 모인 무리들의 대부분은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저들은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저들의 인생을 움직이는 이상한 신비의 힘이 작동하고 있음을 맛보았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저 헷틴 산 어느 중턱에 모인 무리는
(1) 분명히 예수의 영을 받는 즐거움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고 배운다고 함은 바로 예수의 영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의 말씀은 영입니다. 육이 아니고, 육신의 말씀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 그 자체가 영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으로 기록되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성경 말씀이 영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듣는다고 하는 것은 곧 그의 영 성령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뜻이 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영의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딤후3:16, 벧후1:20-21). 그래서 에베소서 6장 17절에 성령님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들음이 곧 주의 영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 역사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충만히 받는 제일 빠른 요소 중에 정확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깨닫는 것입니다.
(2) 분명한 믿음을 얻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님이 역사 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영의 역사인데 그것은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쉬지 않고 선포되어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오늘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여러 기회들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주일 낮밤, 수요밤, 새벽 기도회, 구역 기도회, 여러 류의 집회, 또한 설교를 녹음한 테이프 T.V, 라디오, 설교집, 기타 기독교 문서 등을 통하여 정말 무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바로 하늘에서 이슬같이 쏟아지는 은혜입니다. 정말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원하는 자에게 값없이 거저 쏟아 주시는 축복의 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죄 많은 때, 죄 많은 곳에 은혜도 풍성하다고 할 것입니다.
(3) 주의 말씀을 들음이 좋은 편을 택한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마리아가 주의 무릎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을 가리켜, 저가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눅10:38-42). 은혜의 지름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기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그 말씀 속에 구원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딤후3:15).
셋째로, 인생고를 해결 받기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7장 18절로 19절에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 지라.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귀신에게 붙잡혀 특수한 고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일반적인 육체의 질병으로(모든 사람들)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예수에게 결사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지려고까지 덤벼들 정도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에게 있는 능력이 사람을 귀신에게서 고쳐 주고 또 모든 일반 질병까지 낫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께로 힘써 나오고, 모이고 말씀을 듣고, 병고침을 받으려고 하였습니다. 정말 예수의 말씀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 평지에 모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 헷틴산 중턱 어느 평평한 장소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로 인파를 이루었습니다. 그 군중 속에는 예수님이 서서 계셨습니다. 저들은 실로 많은 무리들이었습니다. 동서남북에서 모여든 군중들이었습니다. 정말 열심 있는 믿음의 무리들이었습니다. 저들이 모인 목적과 대상은 분명히 예수 그 자신이었습니다. 저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열심을 내었습니다. 여러 질병과 사탄의 압제에서 인생고의 해방을 받기 위하여 결사적인 열심을 내었습니다. 바로 이 평지의 무리들은 다름 아닌 오늘 우리들의 모임 곧 교회 운동입니다. 교회는 역사의 한 가운데 여러 류의 무리들로 이룩됩니다. 정말 여러 곳에서 모인 무리들로 구성됩니다. 열심 있는 믿음의 무리들로 이룩됩니다. 우리는 예수께로 와야 합니다. 그 말씀을 들으러 나아 와야 합니다. 그 결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게 됩니다. 이 평지의 무리는 마침내 하늘나라에 이르기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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