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감(會意感) (눅7:19-23)
본문
1. 신앙에 대한 회의감 성도에게 가장 흔하게 찾아오는 현상이 있다. 그것은 신앙의 회의감이다.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결단하고 가졌던 선입관에 대한 소망이 점차로 흐려지고 신앙에 대한 기대감이 하나 둘씩 무너져 내릴 때 강한 회의감을 품게 된다. 사람들은 처음 예수를 믿기 시작할 때 어떤 속박에서 자유를 꿈꾸며 시도한다. 굶주림 속에서 막연하나마 먹을 것을 기대하며 예수를 믿기 시작한다. 극한 아픔과 고통을 조금이나마 면해보기 위해서 병든 육신이지만 기대를 가지고 예수 를 믿기 시작한다. 시련속에서 어떤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라보며 예수앞에 모여 든다. 마치 치료비 얼마를 들고서 의사를 찾는 자와같은 심정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선하 고 악하고하는 문제를 떠나서 치료비를 지불하고 의사앞에 앉으면 당연히 치료해 준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감은 거의가 그 기대감 자체에 대한 심한 회의감을 느끼게 할 뿐 별다른 차이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때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방황한다. 왜 내가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지 않는 것일까 왜 내 질병이 치료되지 않는 것일까 왜 남편문제나 아내문제나 자녀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어가는 것일까 왜 내 사업이 힘있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왜 직장이 없을까 왜 나는 아이를 갖지 못할까 왜 우리 아이는 좀더 착하지 못할까 하는 등등 수많은 회의감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간다. 사람들은 처음 예수를 찾을 때는 상당히 큰 기대감으로 마음이 부풀게 된다. 그 기대감은 그 사람을 에배 중심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도 하고 교회를 위해 열심으 로 봉사하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는 어떤 사람은 그 기대감 때문에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나 주의 종들이 위대 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점점 그 기대감은 무너지고 초조해 지기 시작한다. 지금쯤이면 무엇인가 획기 적인 일이 일어나도 일어나야 하는데 전혀 그럴 기미는 보이질 않고 오히려 이전 상황 보다 지금의 상황이 더 나빠졌을 뿐이다. 그러면 당연히 강한 회의감에 빠지고,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바로 세례요한이 오늘 본문에서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그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첫째로, 세례요한의 회의적인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본문 19절에서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이렇게 질문을 하고 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오늘 우리는 메시야에 대해서 강한 기대감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했던 세례요한이 강한 회의감에 젖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복음을 전파하다가 옥에 갇혔고, 그가 이제 기대하기를 이제는 무엇인 가 획기적인 일이 일어나야 하는데 아무런 기미도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자신을 구출 해 주는 사람도 없고, 또한 자신을 구출하기 위한 비밀스런 조짐도 보이질 을으니 담 담한 것은 이제 요한이다. 예수가 메시야라면 왜 악한 자들을 속히 심판하시지 않는 것일까 예수가 메시야라면 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는 것일까 진정한 메시야라면 수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찬사를 받아야 함은 물론이고 억압된 백성들의 삶을 먼저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내가 잘못 믿은 것이 아닐까 잘못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믿고 기대하는 분이 과연 메시야일까 혹시 아닐지도 모른다는 강한 의심이 고개 를 들고 일어났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예외가 아닌 문제다. 신앙 생활을 많이 한 사람들 중에서도 이러한 회의감때문에 불안해 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믿고자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엔 믿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이제 여호와 하나님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어려움을 당하고 급한 상황에 처할 때 과연 하나님이 때를 맞추어 나를 도와 주시겠느냐하는 회의감이 더 많기 때문 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믿음의 대상을 선정하고 살아간다. 요즘 현대인들의 믿음에 대해서 잘 풍자한 얘기가 하나 있다. 어느 한 가족이 해수욕장엘 놀러 가게됐다고 한다. 어린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이 아 들은 수영하면서 파도와 노는 재미를 붙혀 자꾸 자꾸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를 좋아했다. 그러자 불안을 느낀 엄마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아들을 불러 심하게 꾸중을 했다. 그랬더니 아들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왜 아빠는 깊은 곳에 들어가도 말리지 않으면서 나만 갖고 그러느냐 고 항변을 하는 것이었다. 그
때 엄마가 뭐라고 그랬겠는가 아빠는 생명 보험에 들었단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빠가 사고로 죽어도 쬐끔 슬프겠지만 그래도 믿을 만 하다는 것은 그 일로 돈을 받 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황금 만능주의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대변하는 말이다. 보험회사 다니는 성도님들이 날 욕하실지 모르지만 서로 의좋게 믿으며 살고 싶거든 남편이나 아내나 누구도 생명보험에 들지 마시길 바란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돈이 쪼들릴 때 마다 서로 사랑이 깊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 면야 은근히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않아 있을 것이기 때문인데 얼마나 불행한 관 계인가 근거가 있는 얘긴데 어떤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돈을 모아 차를 한대 샀는데 집에 들어갈 때마다 남들이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로 그집 부인이 길가에서 조금만 늦어도 목을 빼고 서방을 기다리더라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기다리느냐고 물으면 차를 몰고 나갔는데 조금만 늦으면 불안해서 도무지 집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옆집에 마침 살고 있던 보험회사 직원이 그 불안한 심리를 이용해 생명보험 하 나를 들도록 권유를 한 것이었다. 여러 설명을 듣고 보니 참 좋은 것 같다는 생각에 그날 남편에게 허락을 받아 보험에 딱 들었겠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몰라도 거짓말 같이 그 다음날 부터 밖에 나가 남편을 기 다리는 그 부인의 모습을 별로 보질 못했다는 것이다. 부부간에 이간질을 시킨 것 같아 죄송하지만 현대인의 믿음의 방식이나 그 대상이 그 런식으로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설명하고자 함이다. 올바른 믿음을 갖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신앙에 대한 강한 회의감이 올바른 믿음을 갖지 못하도록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신앙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 믿는 마음을 온전히 드리지 못하고 반만 드리고 반은 물질이나 세상의 권세나 다른 어떤 세상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된다. 즉,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앉아 계신 성도님들 중에도 반쪽 믿음을 갖고 사는 불들이 상당히 많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나름대로의 회의감 때문에 그렇다. 그러한 회의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처방외에는 별로 뾰족한 수가 없는데 그것은 직접 체험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세례요한은 자기가 직접 갈 수 없는 옥에 갇힌 몸이었기 때문에 대신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야인지를 직접 묻도록 한 것이다. 그것은 간접 적이지만 요한은 체험을 통해 자신의 회의적인 메시야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의심을 인하여 확실한 믿음을 갖고자 했던 것인데. 예수님의 제자였던 도마는 처음 부활하신 주님과 직접적인 만남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므로 도마는 깊은 회의감에서 아직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기대했던 메 시야대한 소망이 깨어진 후 깊은 회의감에 빠져 방황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의심에서 믿음으로 변화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도마가 직면했던 문제이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주님을 믿는 신앙을 향해 나가는 단계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믿음을 향해 나가는 단계
(1) 의심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러 오셨을 때 도마만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직접 자신이 확인하므로 의심을 풀겠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다. 믿음을 갖기 위하여 생기는 의심은 신앙의 발전을 위해 중요하다. 보다 더 확실한 증 거를 갖기 위해 의심하는 것은 신앙의 단계에서 필요하다. 확실하게 믿기 위해서 의심 하는 도마에게 주님은 증거를 보이심으로 그로하여금 믿도록 도우시는데
(2) 증명의 단계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나타나 그의 상처를 보여주신 것이다. 의심하는 제자에게 믿음을 갖게 하시 기 위한 주님의 사랑으로 도마는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나타나 증명하신다. 그랬을 때 비로소 확실한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심을 인정해야 한다. 세례 요한은 인간의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믿음없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어떤 사람들은 의심하는 것은 신앙이 없기 때문이라는 두려움이 앞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심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강한 믿음이 있는 사람인 양 자신을 위장하고 숨긴다. 또 어떤 이는 의심을 가진 것 때문에 죄책을 느끼기까지 한다. 우리는 도마와 같은 신 앙의 단계가 필요하다. 의심은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 확신 을 찾아 나서는 발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의심이야말로 믿음을 향한 첫 걸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 처럼 자신의 의심을 인정해야 하고 도마처럼 정직해야 한다. 보고 만지기 전에는 믿지 못하는 자신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믿음이 오질 않는데도 신앙적 체면 때문에 대단한 믿음이 있는 것처럼 행세해서는 않된다. 믿음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뜨겁게 체험하는데 있다. 요한은 자신에게 닥쳐온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메시야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는 것이라고 여겼다. 때문에 그는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믿음에 대한 회의감을 고 백하고 자신의 회의적인 믿음에 대해서 확신을 주실 것을 예수께 도움을 요청한 것이 었다. 여러분에게 세례요한과 같은 회의감이 밀려올 때 주님에게 솔직히 고백하시기 바란다. 나의 신앙의 선압관을 인하여 내가 깊은 회의감에 빠졌사오니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고 나로 인하여 이루어질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제
둘째로, 요한의 회의적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생각해 보자 마침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께서는 병든 자, 악귀들린자를 고치시 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계셨는데 세례요한의 질문을 전해 들으신 예수께서는 이렇 게 대답을 하셨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 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 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성경에서 예언된 대로 메시야의 사역을 감당하고 계심을 그들에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이 성경에 나오는 메시야 대한 예언의 말씀을 모를리가 없었다. 사35:5-6에서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 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 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61:1에서도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 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한 예언의 말씀들을 상기시키시면서 이렇게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는 이 예언들을 기억하고 있는가 이 예언들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면 나의 행하는 것을 보고도 내가 메시야임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예수님의 사역은 현실만을 위한 사역이 아니셨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그 죄인들의 눈을 여는 일이 주님의 사역이셨다. 또한 죄로 인하여 우둔해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죄인들의 귀를 열어 주심으 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게 하시는 데 있었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기뻐 뛰게 될 것이다.
마치 소경이 눈을 뜨고 밝은 세상을 보듯이,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던 귀머거리가 아 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음으로 기뻐하듯이 뛸 것이요 또한 죄로 인하여 결코 하나님 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입이 열리고 하나님을 부 르며 찬양과 감사로 예배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사람에게 과연 현실 때문에 우는 눈물이 있을까 현실에 매달려 회의감을 품고 예수를 바라볼 수 있겠는가 진정 메시야의 사역이 무엇인지 알고 믿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세례요한이나 그의 제자들이 품고 있었던 회의적인 감정은 적어도 현실의 상황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메시야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요한이 옥에 갇혔는데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것에서 꺼내줄 생각은 아니하고 다른 사역에만 열중하고 있으니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게 됐던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현실적인 것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는 여러분의 세상적 현실보다는 하나님을 향하여 막혀버린 눈을 여는 것이고, 귀를 여는 것이고 입을 여는 것이다. 또한 여러분의 마음을 열여 죄가 자리잡고 앉아 여러분을 조종하던 그 자리에 주님이 앉으셔서 염려와 근심에 뼈가 녹지 아니하고, 불안과 두려움으로 어둠속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빛 가운데로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러한 예수님의 사역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현실에 치우친 믿음으 로 변질시키기 쉬운데 그렇게 되면 우리도 요한과 그의 제자들처럼 강한 회의감에 빠 지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봉사를 열심히 잘하면 내 사업이 잘 될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말라. 봉사는 그에 대한 보수가 필요없는 자발적인 것이어야 함을 잊지 말라. 또한 내가 물질을 많이 드리면 내가 물질의 복을 많이 받을 수 있다고만 생각하지 말라. 물 론 하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필요를 채워주시지만 그러나 물질을 드리는 것은 물질의 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시임을 잊지 말라. 사랑하기 때문에 소비하는 그 무엇에 대해서 그에 상당한 댓가를 바라는 것은 정상적 인 것이 아니지 않는가 내가 예배를 빼지 않고 잘 드렸으니 이제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나 보자 하고서 현실적 인 것만 꿈을 꾸고 있다면 그 사람은 곧 회의적인 감정에 빠질 위험이 큰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품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그것이 결코 잘못된 신앙이 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주 목적이 되면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잘못된 반응이기 때문에 실망을 얻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믿기 시작한지는 꽤 오래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귀찮으면 예배 빠지고, 힘들면 예배 빠지고, 바쁘면 예배 빠지고 하다보니 하달 이면 한 번이나 두 번 겨우 예배에 참석할 정도로 신앙에 성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름모를 병에 덜컥 걸린 것이다. 그 때부터 이 사람은 열정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한다. 금요 기도회도 나오고 주 중 에배, 무슨 기도회까지 부지런히 찾아 다닌다. 얼마를 그렇게 했는데도 병의 차도가 없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그만큰 예배를 드렸으면 이제 무슨 소식이 올 때가 됐는데 하고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마냥 한가지라. 그래서 생각하기를 내가 정성이 좀 부족했나 하고서 또 부지런히 쫓아 다녔는데 한달도 못돼서 소식이 뚝 끊어진 것이다. 그래서 왜 소식이 없는가 하고 알아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그렇게 예배를 드렸는데도 병이 차도가 없으니 예수도 소용없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전화를 하면 신경질을 부리고 짜증을 내고 하는데 자신의 아쉬움을 채울 수 없는 하나님이라면 설령 그분이 살아 계신다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어떤 병 뿐만 아니라 죽은지 사흘이나 되었던 나사로도 불러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한 동기를 보신다. 그 첫째는 구원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과 신뢰하는 믿음이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을 확실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구할 때 마다 병을 고치시고, 물질을 쏟아 주시고한다면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을 때 마다, 즉, 그러한 자신의 기대가 이루어 지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배 척하는 악순환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필요가 충분할 때는 까맣게 잊고 살다가 아쉬울 때만 보따리 사들고 가서 이것 드릴 테니 내 아들 대학 보내 주시오, 이것 바칠 테니 집하나 장만하게 해 주시 오. 이것 먹고 내병 고쳐 주시오 하는 썩어질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과 같은 신앙으로 전락해 버리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답하시는 가운데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온갖 우상과 같은 존재로 취급한데서야 말이 되겠는 가 예수님은 그냥 우리들의 배나 채워주시고, 병들었을 때 고치시고, 담담한 일을 만났을 때 그 일을 해결해 주는 마치 카센타 정비공 쯤으로 여기고 있다면 어찌 온전한 신앙 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마10:32-33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인정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인정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인간의 생과 사를 주장하시고, 인간의 화복을 주관하시며, 복의 근원이 되신다. 하나님은 우주의 질서를 통솔하시는 분이시고, 세상의 권세를 세우시는 분이시고, 온 땅의 은과 금의 소유주가 되시는 분이시다. 나의 기대가 무너졌다고 해서 나에게 배척을 받으실만한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오해하고 나 스스로 실족한다면 나에게 화가 있을 뿐이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고 헌신적으로 그를 증거했다. 그러나 그 결 과는 옥에 갇히는 것이었다.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은 메시야 예수에 대한 회의감을 품게 되었다. 요한이 증거한 에 수가 과연 메시야가 맞는 것일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요한이 옥에 갇힌 것을 보고도 왜 무관심하게 있는 것일까 예수님이 참으로 메시야라면 의로운 자를 구해내야 할 것이요 악한 자를 벌해야 하지 않겠는가 왜 세상의 불의에 대하여 대항하여 싸우지 않는 것일까 우리들도 그와 같은 회의에 빠질 수도 있다. 왜 예수님께서 이 나라의 처지를 헤아지 않으시고 통일을 자꾸 미루시는가 또 이 땅 에서 불의하고 악한자들이 활개를 치도록 왜 그냥 두고 보시기만 하시는가 저 가난하고 학대 받는 수많은 사람들, 오늘도 양식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억 울함을 당하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 그들을 속히 구원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왜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데도 병이 그대로 있고, 가난은 물러 갈 줄 모르고, 어려운 사업은 호전되지 않고, 부부간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게속되고, 별로 즐겁지 못한 일들이 왜 이렇게 늘어만 가는 것일까 그래서 그러한 회의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잘못된 메시야관 때문이다. 나의 꿈과 소망은 어디에 근거를 하고 있는가를 점검헤 봐야 한다. 세상의 사상과 찰학에 근거한 것인가 나 자신의 형편과 사회의 현실적 필요에만 근거 하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들은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삼풍 백화점 건물 더미에 깔려 죽어야 되느냐고 하나님께 항변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죽은 사람이 기독교인임이 밝혀지면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염주를 들고 구사일생으로 구출되어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하나님은 꼭 저렇게 하셔야만 하느냐고 원망을 털어 놓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회의감은 어디에 기초를 두고 있는가 바로 하나님은 내 뜻에 의해서 움직여 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과 그의 제자들의 불만은 메시야 예수님이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고 있 다는 데서 출발을 한다.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즉, 우리의 뜻대로 움직여 주는 메시야. 신나게 악한자를 쳐 부수는 메시야. 옥에 갇히 요한을 구출해 주는 메시야가 올때 까지 기다디릴까요 하는 뜻이다. 그러니 지금이라 도 자신들의 뜻대로 예수님이 움직여 주기를 바란다는 메세지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현실적이기만한 메시야, 정치적인 메시야, 그러한 메시야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얼마 못가서 자신의 믿음에 회 의를 느끼고 방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뜻에 맞추어 일하시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 일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 구원의 계획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뜻대로 일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생각과 여러분의 생각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그 방 법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아갈 때 확신을 주시고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힘을 공급하여 주시는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소원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여러분의 죄로 인하여 막혀진 눈이 열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요, 여러분의 귀가 열려 하나님의 복된 음성을 듣는 것이요 여러분의 입이 열려 나를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고 피와 물을 쏟으신 에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사랑을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활짝 열려지므로 주께서 그 마음의 중심에 좌정하시고 여러분을 이끄시기를 원하신다. 다시 말씀 드리면 옥에 갇힌 육신의 자유보다는 죄로인하여 어둠에 갇혀버린 여러분의 영혼이 빛을 인하여 자유로와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내 영혼이 잘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속에는 그것을 동기로 하여 육신의 억압과 가난과 질병을 더불어 내 쫓아 주시기를 원하신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 라] 여러분의 현실문제 때문에 신앙에 회의감이 찾아온다면 그때 여러분은 주 안에서 확신 을 얻기 위해 여러분의 의심하는 마음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고백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간절히 소망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주의 뜻을 알고 순종하여 나아갈 때 진정한 기쁨이 여러분을 찾게 될 것이요, 삶의 보람이 넘치고 주를 위한 복된 삶으로 변화될 줄 믿는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입술에서 이렇게 놀라운 바울의 고백이 터져 나오기를 바란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 확실한 구원의 기쁨을 소유한 자로서 그것이 겨자씨 만한 믿음 일지라도 그 위력은 산을 옮길만한 막강한 힘이 되고도 남음이 있음을 믿으시고 회의 적인 감정과 불안한 마음으로 살지 않고 항상 확신에 넘치는 분명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감은 거의가 그 기대감 자체에 대한 심한 회의감을 느끼게 할 뿐 별다른 차이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때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방황한다. 왜 내가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지 않는 것일까 왜 내 질병이 치료되지 않는 것일까 왜 남편문제나 아내문제나 자녀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어가는 것일까 왜 내 사업이 힘있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왜 직장이 없을까 왜 나는 아이를 갖지 못할까 왜 우리 아이는 좀더 착하지 못할까 하는 등등 수많은 회의감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간다. 사람들은 처음 예수를 찾을 때는 상당히 큰 기대감으로 마음이 부풀게 된다. 그 기대감은 그 사람을 에배 중심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도 하고 교회를 위해 열심으 로 봉사하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는 어떤 사람은 그 기대감 때문에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나 주의 종들이 위대 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점점 그 기대감은 무너지고 초조해 지기 시작한다. 지금쯤이면 무엇인가 획기 적인 일이 일어나도 일어나야 하는데 전혀 그럴 기미는 보이질 않고 오히려 이전 상황 보다 지금의 상황이 더 나빠졌을 뿐이다. 그러면 당연히 강한 회의감에 빠지고,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바로 세례요한이 오늘 본문에서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그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첫째로, 세례요한의 회의적인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본문 19절에서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이렇게 질문을 하고 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오늘 우리는 메시야에 대해서 강한 기대감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했던 세례요한이 강한 회의감에 젖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복음을 전파하다가 옥에 갇혔고, 그가 이제 기대하기를 이제는 무엇인 가 획기적인 일이 일어나야 하는데 아무런 기미도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자신을 구출 해 주는 사람도 없고, 또한 자신을 구출하기 위한 비밀스런 조짐도 보이질 을으니 담 담한 것은 이제 요한이다. 예수가 메시야라면 왜 악한 자들을 속히 심판하시지 않는 것일까 예수가 메시야라면 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는 것일까 진정한 메시야라면 수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찬사를 받아야 함은 물론이고 억압된 백성들의 삶을 먼저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내가 잘못 믿은 것이 아닐까 잘못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믿고 기대하는 분이 과연 메시야일까 혹시 아닐지도 모른다는 강한 의심이 고개 를 들고 일어났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예외가 아닌 문제다. 신앙 생활을 많이 한 사람들 중에서도 이러한 회의감때문에 불안해 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믿고자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엔 믿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이제 여호와 하나님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어려움을 당하고 급한 상황에 처할 때 과연 하나님이 때를 맞추어 나를 도와 주시겠느냐하는 회의감이 더 많기 때문 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믿음의 대상을 선정하고 살아간다. 요즘 현대인들의 믿음에 대해서 잘 풍자한 얘기가 하나 있다. 어느 한 가족이 해수욕장엘 놀러 가게됐다고 한다. 어린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이 아 들은 수영하면서 파도와 노는 재미를 붙혀 자꾸 자꾸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를 좋아했다. 그러자 불안을 느낀 엄마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아들을 불러 심하게 꾸중을 했다. 그랬더니 아들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왜 아빠는 깊은 곳에 들어가도 말리지 않으면서 나만 갖고 그러느냐 고 항변을 하는 것이었다. 그
때 엄마가 뭐라고 그랬겠는가 아빠는 생명 보험에 들었단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빠가 사고로 죽어도 쬐끔 슬프겠지만 그래도 믿을 만 하다는 것은 그 일로 돈을 받 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황금 만능주의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대변하는 말이다. 보험회사 다니는 성도님들이 날 욕하실지 모르지만 서로 의좋게 믿으며 살고 싶거든 남편이나 아내나 누구도 생명보험에 들지 마시길 바란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돈이 쪼들릴 때 마다 서로 사랑이 깊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 면야 은근히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않아 있을 것이기 때문인데 얼마나 불행한 관 계인가 근거가 있는 얘긴데 어떤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돈을 모아 차를 한대 샀는데 집에 들어갈 때마다 남들이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로 그집 부인이 길가에서 조금만 늦어도 목을 빼고 서방을 기다리더라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기다리느냐고 물으면 차를 몰고 나갔는데 조금만 늦으면 불안해서 도무지 집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옆집에 마침 살고 있던 보험회사 직원이 그 불안한 심리를 이용해 생명보험 하 나를 들도록 권유를 한 것이었다. 여러 설명을 듣고 보니 참 좋은 것 같다는 생각에 그날 남편에게 허락을 받아 보험에 딱 들었겠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몰라도 거짓말 같이 그 다음날 부터 밖에 나가 남편을 기 다리는 그 부인의 모습을 별로 보질 못했다는 것이다. 부부간에 이간질을 시킨 것 같아 죄송하지만 현대인의 믿음의 방식이나 그 대상이 그 런식으로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설명하고자 함이다. 올바른 믿음을 갖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신앙에 대한 강한 회의감이 올바른 믿음을 갖지 못하도록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신앙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 믿는 마음을 온전히 드리지 못하고 반만 드리고 반은 물질이나 세상의 권세나 다른 어떤 세상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된다. 즉,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앉아 계신 성도님들 중에도 반쪽 믿음을 갖고 사는 불들이 상당히 많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나름대로의 회의감 때문에 그렇다. 그러한 회의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처방외에는 별로 뾰족한 수가 없는데 그것은 직접 체험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세례요한은 자기가 직접 갈 수 없는 옥에 갇힌 몸이었기 때문에 대신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야인지를 직접 묻도록 한 것이다. 그것은 간접 적이지만 요한은 체험을 통해 자신의 회의적인 메시야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의심을 인하여 확실한 믿음을 갖고자 했던 것인데. 예수님의 제자였던 도마는 처음 부활하신 주님과 직접적인 만남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므로 도마는 깊은 회의감에서 아직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기대했던 메 시야대한 소망이 깨어진 후 깊은 회의감에 빠져 방황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의심에서 믿음으로 변화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도마가 직면했던 문제이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주님을 믿는 신앙을 향해 나가는 단계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믿음을 향해 나가는 단계
(1) 의심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러 오셨을 때 도마만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직접 자신이 확인하므로 의심을 풀겠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다. 믿음을 갖기 위하여 생기는 의심은 신앙의 발전을 위해 중요하다. 보다 더 확실한 증 거를 갖기 위해 의심하는 것은 신앙의 단계에서 필요하다. 확실하게 믿기 위해서 의심 하는 도마에게 주님은 증거를 보이심으로 그로하여금 믿도록 도우시는데
(2) 증명의 단계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나타나 그의 상처를 보여주신 것이다. 의심하는 제자에게 믿음을 갖게 하시 기 위한 주님의 사랑으로 도마는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나타나 증명하신다. 그랬을 때 비로소 확실한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심을 인정해야 한다. 세례 요한은 인간의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믿음없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어떤 사람들은 의심하는 것은 신앙이 없기 때문이라는 두려움이 앞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심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강한 믿음이 있는 사람인 양 자신을 위장하고 숨긴다. 또 어떤 이는 의심을 가진 것 때문에 죄책을 느끼기까지 한다. 우리는 도마와 같은 신 앙의 단계가 필요하다. 의심은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 확신 을 찾아 나서는 발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의심이야말로 믿음을 향한 첫 걸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 처럼 자신의 의심을 인정해야 하고 도마처럼 정직해야 한다. 보고 만지기 전에는 믿지 못하는 자신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믿음이 오질 않는데도 신앙적 체면 때문에 대단한 믿음이 있는 것처럼 행세해서는 않된다. 믿음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뜨겁게 체험하는데 있다. 요한은 자신에게 닥쳐온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메시야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는 것이라고 여겼다. 때문에 그는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믿음에 대한 회의감을 고 백하고 자신의 회의적인 믿음에 대해서 확신을 주실 것을 예수께 도움을 요청한 것이 었다. 여러분에게 세례요한과 같은 회의감이 밀려올 때 주님에게 솔직히 고백하시기 바란다. 나의 신앙의 선압관을 인하여 내가 깊은 회의감에 빠졌사오니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고 나로 인하여 이루어질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제
둘째로, 요한의 회의적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생각해 보자 마침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께서는 병든 자, 악귀들린자를 고치시 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계셨는데 세례요한의 질문을 전해 들으신 예수께서는 이렇 게 대답을 하셨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 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 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성경에서 예언된 대로 메시야의 사역을 감당하고 계심을 그들에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이 성경에 나오는 메시야 대한 예언의 말씀을 모를리가 없었다. 사35:5-6에서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 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 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61:1에서도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 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한 예언의 말씀들을 상기시키시면서 이렇게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는 이 예언들을 기억하고 있는가 이 예언들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면 나의 행하는 것을 보고도 내가 메시야임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예수님의 사역은 현실만을 위한 사역이 아니셨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그 죄인들의 눈을 여는 일이 주님의 사역이셨다. 또한 죄로 인하여 우둔해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죄인들의 귀를 열어 주심으 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게 하시는 데 있었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기뻐 뛰게 될 것이다.
마치 소경이 눈을 뜨고 밝은 세상을 보듯이,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던 귀머거리가 아 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음으로 기뻐하듯이 뛸 것이요 또한 죄로 인하여 결코 하나님 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입이 열리고 하나님을 부 르며 찬양과 감사로 예배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사람에게 과연 현실 때문에 우는 눈물이 있을까 현실에 매달려 회의감을 품고 예수를 바라볼 수 있겠는가 진정 메시야의 사역이 무엇인지 알고 믿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세례요한이나 그의 제자들이 품고 있었던 회의적인 감정은 적어도 현실의 상황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메시야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요한이 옥에 갇혔는데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것에서 꺼내줄 생각은 아니하고 다른 사역에만 열중하고 있으니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게 됐던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현실적인 것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는 여러분의 세상적 현실보다는 하나님을 향하여 막혀버린 눈을 여는 것이고, 귀를 여는 것이고 입을 여는 것이다. 또한 여러분의 마음을 열여 죄가 자리잡고 앉아 여러분을 조종하던 그 자리에 주님이 앉으셔서 염려와 근심에 뼈가 녹지 아니하고, 불안과 두려움으로 어둠속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빛 가운데로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러한 예수님의 사역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현실에 치우친 믿음으 로 변질시키기 쉬운데 그렇게 되면 우리도 요한과 그의 제자들처럼 강한 회의감에 빠 지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봉사를 열심히 잘하면 내 사업이 잘 될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말라. 봉사는 그에 대한 보수가 필요없는 자발적인 것이어야 함을 잊지 말라. 또한 내가 물질을 많이 드리면 내가 물질의 복을 많이 받을 수 있다고만 생각하지 말라. 물 론 하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필요를 채워주시지만 그러나 물질을 드리는 것은 물질의 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시임을 잊지 말라. 사랑하기 때문에 소비하는 그 무엇에 대해서 그에 상당한 댓가를 바라는 것은 정상적 인 것이 아니지 않는가 내가 예배를 빼지 않고 잘 드렸으니 이제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나 보자 하고서 현실적 인 것만 꿈을 꾸고 있다면 그 사람은 곧 회의적인 감정에 빠질 위험이 큰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품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그것이 결코 잘못된 신앙이 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주 목적이 되면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잘못된 반응이기 때문에 실망을 얻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믿기 시작한지는 꽤 오래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귀찮으면 예배 빠지고, 힘들면 예배 빠지고, 바쁘면 예배 빠지고 하다보니 하달 이면 한 번이나 두 번 겨우 예배에 참석할 정도로 신앙에 성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름모를 병에 덜컥 걸린 것이다. 그 때부터 이 사람은 열정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한다. 금요 기도회도 나오고 주 중 에배, 무슨 기도회까지 부지런히 찾아 다닌다. 얼마를 그렇게 했는데도 병의 차도가 없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그만큰 예배를 드렸으면 이제 무슨 소식이 올 때가 됐는데 하고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마냥 한가지라. 그래서 생각하기를 내가 정성이 좀 부족했나 하고서 또 부지런히 쫓아 다녔는데 한달도 못돼서 소식이 뚝 끊어진 것이다. 그래서 왜 소식이 없는가 하고 알아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그렇게 예배를 드렸는데도 병이 차도가 없으니 예수도 소용없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전화를 하면 신경질을 부리고 짜증을 내고 하는데 자신의 아쉬움을 채울 수 없는 하나님이라면 설령 그분이 살아 계신다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어떤 병 뿐만 아니라 죽은지 사흘이나 되었던 나사로도 불러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한 동기를 보신다. 그 첫째는 구원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과 신뢰하는 믿음이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을 확실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구할 때 마다 병을 고치시고, 물질을 쏟아 주시고한다면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을 때 마다, 즉, 그러한 자신의 기대가 이루어 지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배 척하는 악순환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필요가 충분할 때는 까맣게 잊고 살다가 아쉬울 때만 보따리 사들고 가서 이것 드릴 테니 내 아들 대학 보내 주시오, 이것 바칠 테니 집하나 장만하게 해 주시 오. 이것 먹고 내병 고쳐 주시오 하는 썩어질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과 같은 신앙으로 전락해 버리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답하시는 가운데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온갖 우상과 같은 존재로 취급한데서야 말이 되겠는 가 예수님은 그냥 우리들의 배나 채워주시고, 병들었을 때 고치시고, 담담한 일을 만났을 때 그 일을 해결해 주는 마치 카센타 정비공 쯤으로 여기고 있다면 어찌 온전한 신앙 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마10:32-33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인정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인정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인간의 생과 사를 주장하시고, 인간의 화복을 주관하시며, 복의 근원이 되신다. 하나님은 우주의 질서를 통솔하시는 분이시고, 세상의 권세를 세우시는 분이시고, 온 땅의 은과 금의 소유주가 되시는 분이시다. 나의 기대가 무너졌다고 해서 나에게 배척을 받으실만한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오해하고 나 스스로 실족한다면 나에게 화가 있을 뿐이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고 헌신적으로 그를 증거했다. 그러나 그 결 과는 옥에 갇히는 것이었다.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은 메시야 예수에 대한 회의감을 품게 되었다. 요한이 증거한 에 수가 과연 메시야가 맞는 것일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요한이 옥에 갇힌 것을 보고도 왜 무관심하게 있는 것일까 예수님이 참으로 메시야라면 의로운 자를 구해내야 할 것이요 악한 자를 벌해야 하지 않겠는가 왜 세상의 불의에 대하여 대항하여 싸우지 않는 것일까 우리들도 그와 같은 회의에 빠질 수도 있다. 왜 예수님께서 이 나라의 처지를 헤아지 않으시고 통일을 자꾸 미루시는가 또 이 땅 에서 불의하고 악한자들이 활개를 치도록 왜 그냥 두고 보시기만 하시는가 저 가난하고 학대 받는 수많은 사람들, 오늘도 양식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억 울함을 당하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 그들을 속히 구원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왜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데도 병이 그대로 있고, 가난은 물러 갈 줄 모르고, 어려운 사업은 호전되지 않고, 부부간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게속되고, 별로 즐겁지 못한 일들이 왜 이렇게 늘어만 가는 것일까 그래서 그러한 회의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잘못된 메시야관 때문이다. 나의 꿈과 소망은 어디에 근거를 하고 있는가를 점검헤 봐야 한다. 세상의 사상과 찰학에 근거한 것인가 나 자신의 형편과 사회의 현실적 필요에만 근거 하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들은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삼풍 백화점 건물 더미에 깔려 죽어야 되느냐고 하나님께 항변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죽은 사람이 기독교인임이 밝혀지면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염주를 들고 구사일생으로 구출되어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하나님은 꼭 저렇게 하셔야만 하느냐고 원망을 털어 놓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회의감은 어디에 기초를 두고 있는가 바로 하나님은 내 뜻에 의해서 움직여 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과 그의 제자들의 불만은 메시야 예수님이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고 있 다는 데서 출발을 한다.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즉, 우리의 뜻대로 움직여 주는 메시야. 신나게 악한자를 쳐 부수는 메시야. 옥에 갇히 요한을 구출해 주는 메시야가 올때 까지 기다디릴까요 하는 뜻이다. 그러니 지금이라 도 자신들의 뜻대로 예수님이 움직여 주기를 바란다는 메세지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현실적이기만한 메시야, 정치적인 메시야, 그러한 메시야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얼마 못가서 자신의 믿음에 회 의를 느끼고 방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뜻에 맞추어 일하시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 일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 구원의 계획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뜻대로 일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생각과 여러분의 생각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그 방 법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아갈 때 확신을 주시고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힘을 공급하여 주시는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소원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여러분의 죄로 인하여 막혀진 눈이 열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요, 여러분의 귀가 열려 하나님의 복된 음성을 듣는 것이요 여러분의 입이 열려 나를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고 피와 물을 쏟으신 에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사랑을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활짝 열려지므로 주께서 그 마음의 중심에 좌정하시고 여러분을 이끄시기를 원하신다. 다시 말씀 드리면 옥에 갇힌 육신의 자유보다는 죄로인하여 어둠에 갇혀버린 여러분의 영혼이 빛을 인하여 자유로와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내 영혼이 잘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속에는 그것을 동기로 하여 육신의 억압과 가난과 질병을 더불어 내 쫓아 주시기를 원하신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 라] 여러분의 현실문제 때문에 신앙에 회의감이 찾아온다면 그때 여러분은 주 안에서 확신 을 얻기 위해 여러분의 의심하는 마음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고백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간절히 소망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주의 뜻을 알고 순종하여 나아갈 때 진정한 기쁨이 여러분을 찾게 될 것이요, 삶의 보람이 넘치고 주를 위한 복된 삶으로 변화될 줄 믿는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입술에서 이렇게 놀라운 바울의 고백이 터져 나오기를 바란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 확실한 구원의 기쁨을 소유한 자로서 그것이 겨자씨 만한 믿음 일지라도 그 위력은 산을 옮길만한 막강한 힘이 되고도 남음이 있음을 믿으시고 회의 적인 감정과 불안한 마음으로 살지 않고 항상 확신에 넘치는 분명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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