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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길 (눅5:1-11)

본문

본문 말씀을 보면 참 마음이 흐뭇합니다. 이 말씀은 읽어도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고 만족과 흐뭇함을 줍니다. 우선 서로 나누는 대화가 아름답습니다. 얼마나 정답고 부드럽습니까 그 결과도 아주 선합니다. 주님이 도우시고 그 도우심을 받아서 만선의 기쁨을 나누는 어부들의 모습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만족스럽고 행복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앙생활의 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에도 하나의 길이 있고 방법이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것인가”하는 문제로 고민이 될 때가 있는데 본문에 아주 쉬운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를 여섯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말씀 중심입니다. “(눅5: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 시작됩니다. “무리가 모여 말씀을 들을 때” 새 삶이 시작되었고 믿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이 지점에서 인생관이 변하여 전도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읽고 생활에 적용하여 기준 삼고 살아갈 때 그 말씀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경험하게 되고,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갈 때 성령님이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님의 능력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여기 성령님의 능력이라는 말은 성령님의 데모라는 말입니다. 내가 말씀을 읽고 듣고 연구하고 묵상할 때 그 말씀은 그냥 있지 않고 내 속에서 데모를 일으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변화되고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말씀을 들을 새”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2. 순종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순종의 자질”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고 인정이 될 때는 그 일이 내게 좀 벅찬 일이라 할지라도 순종하는 자세를 가진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을 보면 눈을 뜨게 해 달라는 소경에게 예수님은 흙을 이겨서 눈에 발라 줍니다. 그리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고쳐 주실 마음만 있으면 굳이 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고 앞도 보지 못하는 소경에게 실로암까지 가서 씻으라고 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그 소경에게 순종의 믿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순종하지 않고 기분 나쁘다고 그냥 돌아갔으면 그 소경은 영영 눈을 뜨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다 이런 식입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 일행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침이 되자 철수하려고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그때 그곳에 주님께서 오셔서 물으셨습니다. “고기를 많이 잡았느냐”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보라.” 그 말씀에 베드로는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은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아다.” 하고 그물을 들고 나갑니다. 이것은 참 굉장한 순종입니다. 베드로는 고기잡는 데 전문가입니다. 밤새 그물을 던진 사람이 깊은 곳인들 던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던집니다. 지금 심정은 던져서 고기가 잡힌다 해도 만사가 귀찮을 텐데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던집니다. 이것이 순종의 자세입니다. 그러니가 그곳에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 다면 먼저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하고 인정이 될 때는 내 마음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을지라도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믿음입니다. “지금까지는 내 생각 내 방법대로 다 해보았는데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한번 더 던지리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믿음은 그 지점에서 성장하고 자라게 됩니다. 이것이 두 번째 신앙의 법입니다.
3. 체험입니다. 신앙은 철학이 아니고 이론이 아니며 수양이 아닙니다. 신앙은 체험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이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에수를 만나고 내가 믿는 하나님을 내가 직접 만나는 체험이 중요합니다. 예수를 10년 동안 믿었어도 그 예수를 직접 만나지 못했으면 그 신앙은 깊이가 없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0년을 믿고 20년을 믿었어도 그 신앙에 깊이가 없고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못하고 변화되지 못하고 그래서 그 생활에 기쁨이 없고 즐거움이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허기지고 고생스럽고 재미가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다시 한번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러니 그날 주님을 만난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를 만나고 나니까 그렇게 쉽고 즐거운데 만나지를 못하고 있으니 그렇게 세상 살기가 힘들고 고된 것입니다. 그날 베드로가 예수를 만나고 나서 엄청나게 변화되었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서 베드로는 어부 생활을 청산하고 전도자로 변신했습니다. 시골 강가에서 살다가 무명으로 그곳에서 인생을 마쳤을 사람이었는데 십자가를 지고 순교하는 사람으로 변신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고기나 잡아 먹고 살다가 죽을 인생인데 수천 수만 군중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변신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보통 일입니까 사람이 예수를 만난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이 예수를 만나면 이렇게 생각이 바뀌고 신분이 바뀌고 자리가 바뀌고 그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살아가니까 기도를 좀 하려고 하면 그렇게 피곤하고 설교 시간만 되면 그렇게 재미가 없고 헌금 좀 하려고 하면 그렇게 아깝고 전도를 좀 하려고 하면 그렇게 쑥스럽고 부끄럽고 창피하고 그렇습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를 만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밤을 새워 그물을 던졌으니 고기가 잡혔겠습니까 그러니까 언제나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 그렇게 확신이 없고 자신감이 없으니 주일날만 되면 고민이 많아집니다. 그런 신앙에서는 순종의 힘도 용기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체험이 신앙의 법입니다.
4. 협동입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더불어 하는 것입니다. 함께 연합을 이루고 협동을 이루어서 하는 생활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화음이 중요하고 협동이 중요합니다. 이 협동이 잘되고 화음이 잘 이루어지면 신앙생활이 참 재미가 있고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런 가정이 부흥하고 그런 교회가 부흥하고 그런 신앙이 깊이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한 마리도 잡히지 않던 고기들이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그 순간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그 고기들이 모두 자기 것입니다. 자기가 잡은 것입니다. 오늘 횡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기를 처리하는 베드로의 처신을 눈여겨 보십시오.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협동이 무엇인가를 보게 됩니다. 그때 베드로는 탐욕스럽게 혼자서 다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함께 고기를 잡던 동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동무들과 함께 고기를 잡아 올립니다. 그러니까 그물도 찢어지지 않고, 고기도 한 마리 놓치지 않고 모두 다 잡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날 아침 모두가 함께 기쁨을 누렸습니다. 함께 일하니 쉽고 즐겁고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모습입니까 이것이 협동이고 연합이고 화음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협동이 중요합니다. 이웃과 동료와 구역과 기관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나갈 때 믿음이 커져 갑니다. 이렇게 협동이 잘 이루어지면 주일날 교회에 나가는 일이 그렇게 즐겁습니다. 나가서 함께 일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협동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재미가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매사가 불만스럽고 원망만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는 무엇보다도 협동의 신앙이 중요합니다.
5. 신앙고백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협동한다고 해서 신앙이 다 성장한 것은 아닙니다. 다음에는 신앙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려면 적당한 시점에 가서 신앙고백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죄인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물을 던졌더니 한 배 가득 잡게 되었습니다. 상상을 초월해서 고기들이 잡혔습니다. 베드로가 그날 아침 얼마나 흥분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가 그렇게 흥분한 것으로만 끝났더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아마 베드로가 그날 그렇게 흥분한 것으로만 끝나 버렸다라면 오늘 성경는 그 모습을 기록해 놓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자세하게 그때의 광경을 기록해 놓은 것은 베드로의 의미 심장한 신앙고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가만히 생각을 합니다. “왜 간밤에는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는데도 한 마리도 잡히지 않더니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그렇게 많은 고기들을 잡혀 올라오는가” “고기들이 한 마리도 잡히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텅 빈 바다였는데 없던 고기들이 어디서 떼를 지어 찾아와 주었는가” 베드로는 그 점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합니다. 자신의 무능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깨달은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다가 자신의 모습을 보니까 죄인도 그런 죄인이 없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니 자신이 그렇게 초라하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그러니 저를 떠나십시오.” 이 지점이 바로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는 지점업니다. 이 지점이 바로 신앙인에게는 믿음의 눈이 활짝 열리는 지점입니다. 신앙인은 이 지점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주는 깊은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순종하려는 자세는 어디서 시작됩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 때 비로소 순종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 납니다. 겸손함이 어디서 출발합니까 바로 이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양보와 이해와 협동도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고집이 생기는 것은 내가 잘했다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싸움이 생기는 것은 이 고백이 없어서입니다. “내가”라는 것이 없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있는 한은 주님 앞에 엎드려서 “저는 죄인입니다.”하는 고백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는 나를 조절하는 것이 가장 큰 십자가입니다. 개구리들이 연못에서 함께 놀고 있었습니다. 그때 연못가에 하얗고 날씬한 백조 한 마리가 사뿐히 내려 앉았습니다. 개구리들은 그 모습을 보고 너무나 부러워서 모두들 감탄을 했습니다. 저마다 우리들은 언제나 저렇게 공중을 날아 볼까 하고 부러워했습니다. 그 중 한 마리가 백조에게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내가 이 조그만 나뭇가지를 입으로 물고 있을테니 두 발로 이 나뭇가지를 꼭 잡고 올라가 하늘을 한번만 날게 해주렴.” 그리고 백조를 따라 이 개구리도 하늘을 날 수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연못에 있던 개구리들이 모두 감탄을 합니다. “저 아이디어를누가 냈지” 저런 방법을 누가 생각해 냈을까“ 그 아이디어르 누가 냈습니까 ”이건 내 생각인데.“ 이 개구리가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려 죽겠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 개구리는 자기가 지금 입으로 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고 입을 크게 벌려서 ”내가 했지“ 해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졌으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 ”나“가 문제입니다. 아직도 “나”가 강한 분들은 자신을 보는 눈이 뜨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자신이 보이질 않으니 “저는 죄인입니다” 하는 고백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 순종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베드로는 이 눈이 뜨였습니다. 그러니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을 했습니다. “주여 저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얼마나 성숙한 자세입니까 그러니까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하고 고백하니까 예수께서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10절)”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다른 복음서에서는 “너는 이제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너는 이제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사도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누구에게 사명을 주십니까 바로 말씀 중심으로 살고, 순종할 줄 알고, 체험 신앙이 있고, 협동할 줄 알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에게 주님은 사명을 주십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가장 바람직한 방법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대로 이 땅에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성령님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성숙한 신앙인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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