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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인간적이신 예수 (눅5:17-26)

본문

저는 예전에 부목사 일을 할 때 참 기가 막힌 경험을 한 적이 한번 있습니다. 수요일 날 예배를 마치고 사택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잠시 후 장로님 한 분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성가대에 관한 이야기도 조금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장로님을 제 방으로 모시고 가서 한 10분 정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교제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장로님이 침을 흘리시면서 갑자기 쓰러지신 것입니다. 저는 깜짝 놀라 그분을 부축해서 일으켜 드렸지만 손발을 전혀 움직이지 못할 뿐 아니라 말도 잘 못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뇌출혈이었습니다. 목사를 찾아와서 이야기하는 사람이면 있던 병도 날아가야 될텐데 어떻게 된 판인지 멀쩡하게 걸어 들어와서 들것에 실려 나가는 판국이 되었으니 새카만 부 목사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일 때문에 이런 저런 구설수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어떻게 목사 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방에서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제가 참 힘들었는데 결국 그 장로님은 그 때 쓰러지신 이후로 나중에 조금 회복이 되어 기동은 하셨습니다만 거의 5,6년을 중풍병자로 사시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가셨습니다. 저로서는 그 때 그 일을 통해 중풍 병이 얼마나 대단한 병인가 하는 것을 피부 깊숙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의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중풍 병은 흔하면서도 고치기 힘든 난치병의 하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요즈음이 이 정도라면 예수님 당시에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중풍 병은 그 병에 걸린 사람들이나 그들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에게 굉장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병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중풍 병자들이 꽤 많았습니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진 이후로 병상에 누운 채 미동을 못하고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숨은 왜 그리 질긴지 차라리 빨리 죽을 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수년이 지나도 병세가 달라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습니다. 중풍 병은 환자에게는 불편함을 안겨주는 반면 그 가족에게는 짐을 안겨주는 무서운 병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한 가지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이 병든 자들을 고치신다는 소문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더라.앉은뱅이가 일어나더라.문둥이가 깨끗해지더라." 하는 소문이 돌고 돌아 수년 동안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귀에까지 들려온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안달을 했겠습니까 '아, 나도 예수님을 만나 봤으면 좋겠다.' 아마도 병상에 누워 있는 해수가 오랠수록 안달의 정도는 더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중풍 병자 역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안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인근 가버나움에 도착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수년 동안 중풍 병으로 식구들을 고생시키던 그가 너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안달을 하니까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은 그의 소원을 이루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들것에 메고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마침 그 때 예수님은 2층 다락에서 많은 사람들을 앞에 앉혀 놓고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도착해 보니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 때문에 도무지 들것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갈 재간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깥으로 통하는 계단을 따라 들 것을 옥상으로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옥상에 있는 구조물을 뜯어 구멍을 낸 다음 이 환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이 얼마나 희한한 일입니까 어떤 면에서 이것은 실례도 보통 실례가 아닙니다. 아무리 유대나라 지붕이 쉽게 뜯을 수 있고 또 쉽게 얹을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갑자기 천장에서 먼지가 뽀얗게 내려오면서 구멍이 뻥 뚫리고 들것이 매달려 내려온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밑에 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을 계속하실 수 없을 정도로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상식이나 예의를 벗어나는 일 인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이 환자를 자기 코앞에다 달아 내려놓는 것을 보시고는 나무라는 대신 참 기가 막힌 말씀을 하셨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누가복음에는 매우 딱딱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만 마태복음에는 보다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 주님은 그 환자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주변 사람들이 '저가 뭐길래 죄까지 용서하느냐' 하고 마음에 좋지 않은 감정을 품었습니다만 주님은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확실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사하면 무슨 죄든 용서받는다."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선언하셨습니다(24절). 그리고는 환자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24절). 이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환자는 벌떡 일어나서 침상을 들고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면서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가는 기적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전체의 내용이요 분위기입니다. 저는 공관복음을 통해 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 중풍병자를 보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씀만 하고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안 하셨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약간 돈키호테 같은 생각이지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하나만 말씀하고 나머지는 말씀 안 하셨다면 그 중풍병자가 과연 기뻐했을까 그 중풍병자가 정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고 믿었을까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하고 영광을 돌렸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면서 제가 얻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앉혀 놓고 죄 사함을 받았다는 복음만 말씀하시고 병을 고치지 않은 채 그대로 내버려두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샅샅이 뒤져보아도 예수님이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기만 하시고 병자는 그대로 남겨 놓고 떠났다는 기록은 단 한 군데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전하시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진리를 가르치시면 반드시 귀신에게 시달리는 자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는 일을 하나로 묶어서 행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께서 죄만 사해 주시고 병은 고치지 않고 내버려두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사실 죄와 병, 죄와 악령, 죄와 재난, 죄와 죽음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죄를 용납하지 않았다면 이런 무서운 저주가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과연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천국 복음을 전하는 분이시라면 반드시 죄가 몰고 온 저주들까지 처리하셔야 됩니다. 죄용서가 모든 저주의 원인인 죄를 처리하는 것이라면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에게 고통 당하는 자를 해방시키는 것은 죄의 결과로서의 저주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진정한 구원자라면 저주의 원인이 되는 죄의 문제를 처리하시는 것은 물론이고, 죄의 결과가 되는 병이나 고통, 재난 등의 문제도 처리해 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원인을 다루시는 분이 결과는 손을 대지 못했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죄 용서를 선언하는 천국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반드시 이 죄를 인해서 고통 당하는 자들이 나음을 입고 자유함을 받는 은혜도 따라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씀만 하시고 병을 고쳐주시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이 본문 말씀을 두고 아주 묘하게 해석한 것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자기에게 이와 같은 질병이 찾아온 것은 죄 값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늘 자기의 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가고 싶었던 이유도 사실은 병 고침을 받기보다 죄 사함을 받기 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설혹 예수님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씀만 하시고 병은 안 고쳐 주었다 할 지라도 중풍병자는 절대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이다." 하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해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중풍병자가 오로지 병 고침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주님을 찾아갔다고 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 용서함을 받아야 되겠다'고 하는 간절한 영혼의 갈망이 생기는 것은 은혜가 임할 때 가능한 것이지 자연인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중에 '나는 죄 용서를 받아야 돼. 하나님이 용서해 주셔야 내가 살 수 있어.' 하는 그런 갈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으려고 찾아온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만일 그런 분이 계시다면 아마도 예수 믿기도 전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는 그런 마음을 가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죄용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중풍병자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봅니다. 그는 '예수가 그렇게 신통하다고 하니 꼭 가서 그를 만나 이 병을 고쳐야 되겠다.'하는 그런 단순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천장을 뚫고 내려온 환자나 또 천장에 구멍을 뚫고 내려보낸 그의 친구나 가족들을 보시고 벌써 그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아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그 마음에 있는 생각이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 세상적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들은 병을 고치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에게 죄 용서를 받겠다는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만약 주님이 그들을 나무라시려고 했다면 이렇게 말씀했을 지 모릅니다. "이 속물들아, 죄 사함을 얻고 영혼의 고침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데 너희는 병만 나으려고 하냐 "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모르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세속적인 생각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것인지 다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족한 믿음도 굉장히 높이 평가해 주셨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말씀입니까 중풍환자는 분명 자기 병이 낫기만을 원하여 찾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 인간적인 믿음도 크게 보시고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마음을 일컬어서 '인간적'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인간적'이라는 말은 자칫 잘못하면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다시 한번 생각하면 긍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 줌의 흙으로 빚어진 인간들이기에 그 이상을 뛰어 넘지 못합니다. 몸이 불편하면 영혼의 불편보다도 더 민감하게 받아들입니다. 세상의 행복이 별 것 아닌데도 인간이기 때문에 내세에 있는 행복보다 이 세상에 있는 행복이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영적인 사람이라 해도 아프면 낫는 것을 더 바라고, 아무리 내세를 사모하는 자라도 현실의 고통이 심하면 그것에서부터 벗어나기를 먼저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목사라면 늘 대단한 영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데 그렇지 못합니다. 몸이 아프고 보니 '나도 역시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너무나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대할 때도 이 사실을 긍정하고 들어가야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렇게 나약하고, 인간적이고, 세상적이고,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것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을 나무라기보다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시고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망각하거나 과소평가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영적인 분야에서만 능력을 행하시고 은혜 베풀기를 기뻐하신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영적인 것을 아주 높게 평가하신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세상적인 갈망이나 소원을 가지고 자꾸 보채면 주님께서 못마땅하게 여기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은근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단히 영적인 분이신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인간적인 분이셨습니다. 시편 103편 14절을 보십시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일컬어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시는 분"이라고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으로서의 무엇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간으로 이해하고 보십니다. 우리가 한 줌의 흙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분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십시오. 한 문둥병자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당신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했을 때 주님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할렐루야. 또 백부장이 찾아와서 자기 하인이 지금 중풍 병으로 고생한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당장 가서 고쳐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38년 동안 제대로 사람 구실 한번 못해 본 병자를 친히 찾아 가셔서 인생의 고난으로 인해서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진 그의 얼굴과 눈동자를 들여다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나흘 가까이 예수님과 함께 들판에 머물면서 제대로 먹지 못한 군중들이 이제 헤어져야 될 시간이 되었을 때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영적인 면에만 치중하는 분이셨다면 아마 이렇게 말씀했을 것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나흘 동안 거의 먹지 못하고 있었지만 돌아가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영적으로 큰 힘을 주실 것이다. 믿고 돌아가라."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나 되었다. 게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을 텐데 만일 굶겨서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 할 것이다"(마15:32)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이게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또 제자들이 너무 피곤에 지쳐있는 것을 보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기도해. 기도하면 하늘로부터 큰 은혜가 임한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막6:31).
얼마나 동정이 많으신 분이십니까 성경을 통해서 만나는 예수님은 이와 같이 우리가 진토와 같은 인간임을 이해하시고, 우리를 기꺼이 도와주시려는 인간적인 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사용하신 '구원'이라는 말도 사실은 영혼의 구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18장 11절을 보십시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구원'이란 죄 용서와 영혼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구원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9장 22절과 누가복음 7장 50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혈루병 앓는 여인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죄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여기서는 '구원'이 질병에서 고침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병에서 나음을 입는 것도 구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가복음 13장 16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귀신에게 사로잡혀 오래 동안 고생한 여자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십 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사단의 매임에서 푸는 것은 구원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에는 영혼의 구원 뿐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동안 병에서 놓이고 악령에게서 벗어나고 갖가지 고통에서 건짐을 받는 것도 포함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은 죄 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 뿐 아니라 친히 환자의 병을 고쳐주시고, 풍랑을 만나 고통 하는 자들을 풍랑에서 건져내시고, 세상에서 버림받고 사람 구실 제대로 못하는 죄인이나 창녀, 세리들을 인간적인 동정심을 가지고 찾아 가셔서 그들과 함께 앉아 잡수시고 우정을 나누셨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동안 행하신 이적 기사는 두 가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 해 주는 표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표적 기사를 통해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적 기사를 행하신 또 하나 이유가 있었습니다.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주님께서 몸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면 죽은 자를 살리고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그 표적들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실제로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행하신 표적과 기사는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행하신 일을 하나하나 읽으면 그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구원자라는 것을 분명히 믿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기 위해서는 기록된 표적 이외의 어떠한 표적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에는 예수님이 그와 같은 이적기사를 행하지 않으신다고 단정지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이라는 위대한 종교개혁자는 "사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이적기사, 특별히 치료하시는 이적은 이제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고 단정지어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서 다시는 치유하시지 않으며, 우리의 인간적인 면을 동정하지 않으신다고 단정해 버린다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너무 거룩하시고 너무 영적이고 너무 멀리 계시는 분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 용서함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병이 나거나 고통을 당해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처럼 멀리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 저는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시던 그 때나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지금이나 동일하다고 분명히 믿습니다.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가난한 자를 동정하셨고, 병든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한없이 동정하셨던 그 주님이라면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그러하시리라는 것을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신 그 주님께서 우리와 항상 동행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계실 때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고통 당하는 자를 동정하셨던 그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우리를 동정하시고 우리를 치료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저는 이것을 분명히 확신합니다. 로마서 8장 32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것만 은혜로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용서는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인간으로서 겪는 모든 고통에 대해서도 응답해 주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의 체질을 이해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영적인 문제보다 육적인 문제에 더 민감하며, 육적인 고통부터 앞세워 해결 받기를 원하는 질그릇임을 주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생활이 쪼들리다 보면 영혼이 부요해지는 것 보다 한 푼이라도 더 벌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인간성이라는 것을 주님은 이해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육신의 고통을 해결 받지 못하면 절대 영혼의 평안을 사모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는 것을 주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함없이 우리를 동정하시고 치료하시고 은혜를 베푸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은 가난한 자나 병든 자나 죄인을 보면 그냥 지나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가까이 찾아가 슬픔을 함께 나누고, 고통을 짊어지시려 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자에게 다가가 함께 눈물을 흘리기 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약하고 병든 것들을 고쳐주시려고 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가 앞서 살펴본 대로 한 가지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저는 또한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사랑 많으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지만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시는, 사랑이 무궁무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니 죄인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겠습니까 병든 자의 고통을 얼마나 가슴 아프게 보셨겠습니까 가난한 자의 한숨소리를 얼마나 안타깝게 들으셨겠습니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셨기에 그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환자를 만나면 고쳐주셨고, 가난자를 만나면 위로해주셨고, 주린 자를 만나면 먹을 것을 주셨고, 어려움 당하는 자를 만나면 위기에서 건져 주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픈 사람의 사정은 잘 모릅니다. 또 생활형편을 따져봐도 외국 선진국가에 사는 사람들하고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괜찮게 삽니다. 그렇게 모든 면에서 형통하니까 예수님의 이와 같은 인간적인 면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어떤 것만을 추구하고 강조하기 쉽습니다. 죄 사함을 얻는 문제나 영생을 얻는 문제,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문제, 이런 영적인 것들만 고상하게 여기고 추구하려는 마음이 더 강합니다. 그 결과 병들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사정에 대해서는 귀를 잘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다가가시는 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또 자신이 어떤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영적인 부분에만 치우쳐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믿음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냉정합니다. 병든 사람을 보아도 냉정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아프게 됐지 하지만 병원에서 못 고친다 하면 소망이 없는 거지 뭐.' 하고 쉽게 생각합니다. 또 어떤 어려운 재난을 만날 경우에도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같이 기도합시다." 하고 제법 믿음 있는 것처럼 굴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해결이 안되면 기도도 접어 버립니다. '내 팔자가 그래서 그런 것을 어쩌란 말이냐' 하고 체념해 버립니다.
또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겪는 어떤 애로가 있다 해도 그것을 자기가 짊어져야 될 십자가로만 해석하지 주님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분명 이런 면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가 너무 건강하고 풍요롭게 살다보니 인간적인 부분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달동네에 한번 가 보십시오. 병자들이 우글거리는 저 수용소 같은 곳에 한번 가 보십시오. 그들은 병을 앓고 고통 하는 인간의 처참한 모습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에 해답을 주시는 주님에게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그들의 인간적인 믿음을 비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그러한 믿음도 용납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시각을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문제들을 직접 다루어 주시는 주님을 체험하게 되면 우리 믿음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문제를 안고 고통 하는 형제를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플 때 주님이 이렇게 해 주시더라 하는 것을 체험하면 병든 자를 그냥 스쳐지나가지 못합니다.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예수님이 꼭 고쳐주실 것입니다." 하고 그에게 힘을 주고 그의 마음속에 믿음의 불씨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부도를 당한 분이 있습니까 생활터전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낙망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이럴 때는 제 아무리 인간적인 수단을 써 봐도 별로 신통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 문제를 직접 다루어 주시고 반드시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힘껏 매달리기만 하면 주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매달리는 사람에게 주님은 반드시 해답을 주실 것입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너무나 인간적으로 우리의 아픔에 동정해 주시고, 넘어진 자리에서 우리를 다시금 일으켜 세워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예수님을 보는 우리 눈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똑같은 문제를 안고 씨름하는 사람을 보는 눈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생길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들의 손을 붙잡고 그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에게 바로 이와 같은 실제적인 자세가 절실하게 요청된다고 봅니다. 가끔 저는 집사람에게 이런 핀잔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너무 건강하다보니 약한 사람의 입장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병을 몰랐을 때만 해도 너무너무 건강하고 강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도 조금 약한 사람을 이해를 못했습니다. 집사람은 조금 체력이 약한 편입니다.
똑같이 뛰어가도 제가 100미터를 갈 수 있으면 그 사람은 50미터밖에 못 갈 정도로 약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 자신이 100미터를 갈 수 있으니까 50미터밖에 못 오는 사람을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힘이 없냐'하고는 제 기분대로 스케줄을 정하고 밀어붙인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옆에서 따라오는 사람 입장에서는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었습니까 건강한 사람은 건강이 약한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하나 봅니다.
그런데 제 몸에 덜컥 병이 나니까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몸에 병이 난 뒤로는 몸이 약한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그 사람이 조금 피곤해 하는 것을 보면 괜찮으냐고 염려도 해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집사람이 조금 바쁘다 싶으면 그렇게 바빠도 괜찮겠냐는 말도 가끔 하게 되었습니다. 집사람의 표현대로 몸에 병이 난 뒤로 제가 많이 온유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미주지역 평신도를 깨운다 지도자 훈련 세미나로부터 시작해서, 연변 과학 기술대학교 개교식에 참석하느라 나흘 동안 강행군을 을 했는데도 끄떡도 없는 것을 보고 제가 자꾸 뭔가 하려고 하니까 집사람이 다시 핀잔을 줍니다. "당신, 조금 건강해 지니까 또 사나와지네요." 사람이라는 게 그런 것 같습니다. 자기가 안 아파 보면 아픈 사람의 사정을 잘 모릅니다. 자기가 약해져 보지 않으면 약한 사람의 사정을 절대 모릅니다. 자기가 실패해 본 적이 없으면 실패한 사람의 사정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너무 문제를 모르고 살다보니까 예수님을 보는 눈도 너무 편협해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대각성 전도집회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야, 저 사람 지옥 갈 것을 생각하니까 너무 불쌍하다. 목에다가 밧줄을 동여매서라도 끌고 나오자. 코를 꿰어 가지고라도 끌고 나오자."하고 전도하는 것도 우리가 대각성 전도집회에 임하는 한 가지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약함을 통해서 만난 예수님, 이 좋은 예수님을 저 형제에게 전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하고 전도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겉으로는 건강한 것 같아도 마음에 공포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순장들 중에도 중병으로 기도해 주어야 할 사람이 스물 다섯 명이나 됩니다. 멀쩡한 것 같은데 병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수 주 전에 아주 가깝게 지내던 집사님 한 분을 잃었습니다. 아직도 50대인데 전화를 걸다가 하나님의 부름 받고 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에게 그 동안 남에게 숨겨왔던 약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걱정근심이 전혀 없는 것 같은 사람도 마음속에 늘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대각성 전도집회를 위해 예수를 바로 전하고 싶으면 우리의 문제나 약함을 가지고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는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몸이 아픕니까 주님 앞에 나가서 치료하시는 주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이 그 병을 어떻게 고쳐주시는 가를 한번 체험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천국에 불러들일 사람이 아니고는 고쳐주시는 일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우리'지에서 "상국이의 폐가 살아났다"는 제목의 글을 읽으셨을 줄 압니다. 경희의료원 중환자 실에 스물 두 살 먹은 젊은이가 입원했지만 폐병이 악화되어 간까지 나빠진 상태라 도저히 소생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피가 호흡기로 들어와서 도무지 약도 쓸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때 어떤 집사님 두 분이 찾아가서 "하나님, 우리 상국이를 찾아주십시오. 너무 젊은데 아직 부르지 마시고 살려주십시오." 하고 눈물로 열심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청년부 형제자매들이 순서를 정해 번갈아 가면서 심방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엑스레이에도 나타나지 않던 폐가 자력으로 살아나서 호흡을 시작했습니다. 너무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에 감동을 받은 아버지와 친척들이 예수님을 믿기로 했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은 이런 예수님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저는 제자신이 4년 동안 병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 사람이다 보니 치료하시는 주님에 대해 관심이 참 많습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사람은 절대 안 고쳐주십시다. 그러나 아직 세상에 남겨 놓을 사람에 대해서는 주님은 오늘도 치료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 몸에 크고 작은 질병들이 있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십시오. 인간적으로 우리의 아픔을 동정해 주시고 능력으로 치료해 주시는 그 주님을 만나보십시오. 지난 '우리'지에 실린 글 중에 "사랑부에 보내는 편지-장애를 알렸더니 응답이 왔어요"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장애아를 데리고 고통 하는 어떤 어머니의 글인데 한번 들어보십시오. "날로 회복되어 가는 송이의 장애에 대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처음에는 가족이 외출할 때마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 대해 창피하게 여겼고 감추고만 싶었던 것이 저희들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정상적인 아이가 아닐 때는 부모들이 남에게 그 아이를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그 심정을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랑부에 나가면서 소망을 얻고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서 이웃에게 이해 받게 되고 여러 형제들의 기도제목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송이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특히 다락방의 형제들은 모일 때 마다 송이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제 송이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산 체험이 되었습니다." 송이가 온 가족이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는 체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믿음의 결속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송이를 보면 마음 깊은 데서부터 찬송이 울려 나옵니다.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이 찬송이 항상 마음속에 울려 퍼집니다. 우리가 고통중일 때 주님께 알리고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 주님께 아뢰면 불쌍히 보시고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이제 송이는 사랑부를 떠나서 유아부로 갔습니다." 고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아이들 반으로 옮길 수 있을 정도로 주님이 고쳐주신 것입니다. 멀리 있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의 문제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죄 용서를 선언하실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약함을 해결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체험하게 되면 믿음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고, 뜨거워지게 됩니다. 대각성 전도집회를 위해 나가서 전도하기를 원하십니까 체험이 없는 사람보다 상국이나 송이의 아빠 엄마, 사랑부 교사들, 호스피스 집사님들이나 권사님들이 훨씬 뜨거운 마음으로 전도하리라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바울 이후로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는 어거스틴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더 이상 치료하고 고치는 일은 안 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관리하는 교구 안에서 2년 사이에 70건이나 되는 신유의 은사가 일어났습니다. 환자들이 있을 때 교인들이 가서 기도해 주었더니 환자들이 낫는 일이 70건이나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계기로 어거스틴의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치료하신다. 오늘도 우리 예수님은 우리 연약한 것을 도우시며, 우리가 구하면 들어주신다." 하고 주장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지만 70 평생에 67세가 되어서야 겨우 그 진리를 깨달은 것이니 때늦은 깨달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어거스틴처럼 죽을 날이 다 되어서야 깨닫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체질을 잘 아시고 이해해주시는 너무나 인간적인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 앞에 우리의 크고 작은 문제를 가지고 나가 인간적인 주님이심을 체험해봅시다. 그럴 때 대각성 전도집회를 위해 우리가 나가서 전도할 때도 정말 힘있게 전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을 볼 때마다 불쌍해 가지고 밤이고 낮이고 가서 끌어오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당하는 약함은 예수님을 만나는 찬스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인간적인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이 예수님을 만납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말씀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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