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침례교도 (눅3:1-22)
본문
침례교도가 가장 친근감을 느끼는 인물은 예수님 다음으로 침례 요한입니다. 침례교도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는 성경 인물도 단연코 침례 요한입니다. 한글개역성경에는 그를 세례 요한이라고 번역했으나 영어성경에는 “침례자 요한(John the Baptist)”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침례교도를 영어로 Baptist라고 하고 침례교회를 Baptist Church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름으로 볼 때 침례 요한과 침례교도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30세 쯤 되어 가르치심을 시작하시기 전에 침례를 받으시기 위하여 요단강으로 요한을 찾아오셨습니다. 요한은 회개의 표시로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 그분은 죄가 조금도 없으신 분이심을 성령님의 감동으로 알았기 때문에 요한은 처음에 한사코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3:15).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신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메시야로서의 직임을 공식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의식의 의미라고 볼 수도 있고 죄인들과 하나 되기 위해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주 간과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침례 요한의 멧세지와 사역을 인정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심으로써 요한의 멧세지 를 인정하셨습니다. 요한은 회개의 멧세지를 전했습니다. 이 회개는 그저 죄에 대한 통회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가올 천국과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메시야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한 회개였습니다. 그는 그의 멧세지와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예비하고 있었습니다. 침례 요한이란 이름은 요한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소개하기를 즐겨했습니다(요1:22,23). 아마도 사람들이 그가 침례를 주는 것을 보고 그에게 침례자 요한이라고 붙였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도 그는 침례교도와 유사합니다. 침례교도 혹은 침례교인이란 이름은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친히 붙인 것이 아닙니다. 참된 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고 침례는 회개하여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내적으로 이루어진 구원을 외적으로 나타내는 표시임을 믿기 때문에,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받은 침례는 무효이고 뒤늦게 구원받게 된다면 다시 받아야 한다고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이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기독교가 국교로 선포되었고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 유아침례 혹은 유아세례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고 구원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원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갓난 아이가 어떻게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들이 성장하여 복음을 깨닫고 회개한다면 그 때 비로소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침례 받을 것을 요구하고 다시 침례를 주었습니다. 제도권에 있는 자들이 이를 근거로 재(再)침례교도라고 조롱조로 불렀는데 오늘날 “재”자를 빼고 침례교도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요한이 죄를 통렬하게 지적한 것도 침례교도와 같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유약한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폭언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 헤롯이 자신의 아내인 아라비아의 아레타스 4세의 딸과 이혼하고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유혹하여 결혼한 죄악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요한의 침례를 인정하셨습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준 침례는 세례가 아니라 전신이 완전히 물 속에 잠기는 침례입니다. 요한은 일부러 물이 많은 요단강을 선택했습니다(요3:23). 그리고 누가복음 본문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셨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마3:16; 막1:10). 모든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이 받으신 의식이 침례였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교만하여 요한의 침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침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눅7:30) 침례교도들이 세례가 아닌 침례를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구원의 방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원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째, 예수님은 요한을 극진히 칭찬하셨습니다(눅7:24-28).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로 당연히 제사장으로 성전에서 봉사해야 했지만 성전이 아닌 광야를 택했습니다. 그 당시의 타락한 제사장직과 형식에 치우친 종교에 속해 있지 않고 홀로 광야에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사람이 인정해 주기를 기대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요샛말로 그는 제도권 밖에 있는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그들과 하나로 남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분리주의자였습니다. 침례교도의 역사는 분리주의의 역사입니다. 믿음과 진리가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은 결국 비진리로부터의 분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요한을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하셨으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침례 요한의 발자취를 따르는 침례교도들도 칭찬하시지 않겠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심으로써 요한의 멧세지 를 인정하셨습니다. 요한은 회개의 멧세지를 전했습니다. 이 회개는 그저 죄에 대한 통회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가올 천국과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메시야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한 회개였습니다. 그는 그의 멧세지와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예비하고 있었습니다. 침례 요한이란 이름은 요한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소개하기를 즐겨했습니다(요1:22,23). 아마도 사람들이 그가 침례를 주는 것을 보고 그에게 침례자 요한이라고 붙였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도 그는 침례교도와 유사합니다. 침례교도 혹은 침례교인이란 이름은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친히 붙인 것이 아닙니다. 참된 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고 침례는 회개하여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내적으로 이루어진 구원을 외적으로 나타내는 표시임을 믿기 때문에,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받은 침례는 무효이고 뒤늦게 구원받게 된다면 다시 받아야 한다고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이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기독교가 국교로 선포되었고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 유아침례 혹은 유아세례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고 구원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원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갓난 아이가 어떻게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들이 성장하여 복음을 깨닫고 회개한다면 그 때 비로소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침례 받을 것을 요구하고 다시 침례를 주었습니다. 제도권에 있는 자들이 이를 근거로 재(再)침례교도라고 조롱조로 불렀는데 오늘날 “재”자를 빼고 침례교도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요한이 죄를 통렬하게 지적한 것도 침례교도와 같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유약한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폭언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 헤롯이 자신의 아내인 아라비아의 아레타스 4세의 딸과 이혼하고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유혹하여 결혼한 죄악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요한의 침례를 인정하셨습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준 침례는 세례가 아니라 전신이 완전히 물 속에 잠기는 침례입니다. 요한은 일부러 물이 많은 요단강을 선택했습니다(요3:23). 그리고 누가복음 본문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셨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마3:16; 막1:10). 모든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이 받으신 의식이 침례였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교만하여 요한의 침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침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눅7:30) 침례교도들이 세례가 아닌 침례를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구원의 방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원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째, 예수님은 요한을 극진히 칭찬하셨습니다(눅7:24-28).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로 당연히 제사장으로 성전에서 봉사해야 했지만 성전이 아닌 광야를 택했습니다. 그 당시의 타락한 제사장직과 형식에 치우친 종교에 속해 있지 않고 홀로 광야에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사람이 인정해 주기를 기대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요샛말로 그는 제도권 밖에 있는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그들과 하나로 남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분리주의자였습니다. 침례교도의 역사는 분리주의의 역사입니다. 믿음과 진리가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은 결국 비진리로부터의 분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요한을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하셨으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침례 요한의 발자취를 따르는 침례교도들도 칭찬하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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