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 누구인가? (눅3:21-22)
본문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같은 한 주간 만에 여러분을 대합니다만 아주 오랜만에 여러분을 만난 느낌입니다. 지난 한 주간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90여명의 성도들이 서울 온누리 교회당에서 가진 "비전과 리더십 축제"를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바쁜 가운데서도 1박 2일 혹은 4박 5일간 시간을 내어 함께 하신 분들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바쁘고 쫓기다보면 시간내기가 쉽지 않은데 울산교회의 비전을 위하여 축제에 참석하신 것을 감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결단에 좋은 것으로 갚아주셨으리라 믿습니다. 또 참석한 모든 분들이 은혜받고 오도록 위해서 기도해 주신 모든 성도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응답으로 저희는 무사히 다녀왔고 뜻깊은 축제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월요일 점심 때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선발대로부터 금요일에 우리 울산교회가 새벽기도회에 찬양을 하며 제가 10분 정도의 울산교회 비전을 나누도록 부탁을 전해 받고는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뒷날인가 10분 간증 대신 30분 새벽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날 이후 내내 무슨 말씀을 전할 것인가 고민하며 준비했지만 준비한 그것을 과연 전하시기를 원하는가 하는 본문에 대한 확신은 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중 목요일 주제강의를 듣고 있는데, 본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금요일 새벽에 전했던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그날 새벽에 전한 바로 그 본문의 말씀을 나누므로 이번 축제에 함께 하지 못한 분들과도 비전과 리더십을 공유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지도자, 누구인가"를 설교하기로 맘을 먹었습니다. 특별히 그날 새벽 4시부터 일어나셔서 기도를 해주신 권사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공동체를 남달리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셔서 우리들 모두에게 좋은 감화를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금요일 새벽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주일 낮까지도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흠모해야 할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성경에는 많은 지도자들과 그들이 보여주는 지도자상이 있습니다. 모세도 나오고 여호수아도 등장합니다. 다윗도 나오고 솔로몬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도 예레미야도 한 시대의 지도자로서 삶을 살았습니다. 신약을 보면 베드로도 요한도 지도력을 행사하였던 사람들입니다. 바나바와 바울도 새로운 선교의 시대를 열어간 지도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만큼 완벽한 지도자의 모습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성경적이고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 준비 장면을 보여주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지도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지도자는 그 백성과 하나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세례를 받으시는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차근차근 그것을 입증해 봅시다. 우선 우리는 오늘 본문이 길 예비자 요한과 그 길로 오시는 왕의 만남을 최초로 기록한 부분이라는 것을 집고 넘어갑시다. 어떻게 말하면 요한과 예수님은 그 이전에 만났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 다 태어나기 전에 모태에서의 만남입니다. 수태를 통보받은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만났을 때 그 태중의 요한은 성령님에 충만하여 기뻐뜀으로 마리아의 태중에 있던 주님을 맞이했습니다. 또 오늘 세례사건 이전에 실제로 만남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만 기록상 이 사건이 최초의 직접적 대면이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한 시대를 살았던, 아니 역사상 가장 걸출한 두 인물이 만나는 기록을 오늘 본문은 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한 사람 요한과 이땅에 태어났던 많은 사람가운데서 가장 위대하신 예수와의 만남을 오늘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간접적인 만남은 그 이전에도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아야 할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나아오십니까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온 예수님을 향해 요한은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4,15) 마태 복음은 이와같이 구체적으로 두 분의 만남과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 복음서에는 정작 주님께 세례를 베풂으로 주님의 사역준비를 완성시킨 요한의 이름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세례도 요한이 베푼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께 세례를 베푼 분도 요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의 이름은 빠져 있습니다. 마치 누가는 이 사건을 요한의 목회 좌우명에 따라서 기록한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목회 좌우명이 무엇입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주님의 사역 준비를 결정적으로 감당한 요한의 이름은 감추어지고 예수님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일하고 있습니까 성가대 봉사를 하든지, 반주를 하든지, 지휘를 하든지, 그 모든 우리의 사역들을 통해서 나타나야 할 분은 주님이십니다. '아무개 교회 성가대 유명하다더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봉사한다고 하면 동기가 잘못되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반주자 최고라더라', '지휘자가 훌륭하다더라'고 사람들이 말하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빼앗고 있을지 모릅니다. 주일학교 봉사를 해도 마찬가지고 구역을 섬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개 구역장이 참 잘한다더라. 그렇게만 이야기된다는 것은 우리가 권장할만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최선을 다해서 교사로서 구역장으로 봉사를 하게 된다고 하면 그 일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뚜렷이 부각되어야만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패역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행위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다윗왕에게 나아가는 사람들을 가로채어서 백성의 마음을 도적질하던 패륜아입니다. 어떤 종류의 봉사를 하든지, 길든지 짧든지 예수님의 이름이 나타나도록 사역하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러면 첫 대지의 명제를 입증하기 위해서 본격적인 질문을 합시다. 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셔야 했습니까 여러분이 알다시피 요한의 세례는 죄사함을 위한 세례였습니다. 요한이 베푼 물세례는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 죄 용서의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까 예수님도 용서받아야 할 죄가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께서 "성령님으로 잉태하사"라고 고백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우리처럼 죄인으로 태어나지 않았음을 말하기 위해서 성령님으로 잉태하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죄하신 분입니다. 그 입술에 거짓조차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왜 요한이 베푼 세례를 받습니까 그것은 당신께서 구원하시기 위한 백성과 당신이 하나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지금껏 사적 삶을 사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인류를 구원하는 구주로서 공적인 걸음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가 구원하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선상에 두는 결단을 합니다. 그들의 죄를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지금 죄사함의 세례를 받습니다. 이제 그는 사람들을 섬기고 그의 목숨을 그들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놓는 첫 걸음을 내딛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는 누구나 그 백성의 수치와 허물을 자기 것으로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을 멸절시키려 했을때 모세가 어떻게 기도했는지를 아시지요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데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제하여 주옵소서" 모세는 생명을 걸고 그 백성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왕 다윗을 보십시오. 시편 3편을 보면 다윗은 위급한 상황 속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고 다급한 도움을 간청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서 자신을 죽일려고 달려드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기 속에서도 백성을 기억하는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살고 죽는 것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내생명 하나가 살든지 죽든지 하는 것은 주께 달려있는 것이고 주님! 임금과 왕자가 싸우는 틈속에서 고통당하는 이백성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지도자는 위기에서 자신을 위한 처신만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백성을 돌아볼 줄 아는 자입니다. 평소에는 민족과 조국을 내세우다가도 다급하면 제 살길 찾는 사람들과는 달리 다윗은 그 위기 속에서도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라고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는 지도자로서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해야 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 특정한 사람만이 지도자는 아닙니다. 여러분은 거의 누구나 지도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부모들은 가정의 지도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의 모든 필요를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교사는 그 가르치는 학생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자기 시간을 기꺼이 쓰는 사람입니다. 구역장은 섬기는 구역원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잘못을 대신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맡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성숙시키기 위해서 자기 가진 것 어떤 것도 아끼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맡은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을 때에 여러분의 지도력은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둘째로 지도자는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백성의 구원자로서 나서면서 성령님을 체험합니다. "성령님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누가복음 4장 18절은 이 사건을 성령님의 기름부음으로 설명합니다. "내게 성령님이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첫 문장에서는 성령님이 임하셨다고 말하고 나서 두 번째 문장에서는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첫 설교뿐 아니라 사도행전 10장 38절의 베드로의 설교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님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여기서는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능력주심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사실은 신구약의 일관된 원리입니다. 구약에는 백성의 대표적인 지도자들, 왕, 선지자, 제사장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황소의 뿔에 기름을 채워 당사자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백성의 지도자들로 부름 받았기에 그 직무를 감당할 능력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의식이였습니다. 그런 의식은 오늘 신약교회도 계승되고 있습니다. 왜하필이면 안수집사를 세울 때, 장로를 세울 때, 목사를 세울 때 손을 얹고 안수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계승되는 것을 상징하는 의식입니다.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의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는 의식입니다. 지도자는 그 직무를 수행해야할 능력을 받아야만 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은 그 직무를 수행할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았습니다. 신약의 가장 대표적인 기름부음 받은 자는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직책의 문자적인 의미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왕이하던 일, 선지자가 하던 일, 제사장이 하던 일을 모두다 혼자서 감당하신 기름부음 받은자였습니다. 지금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성령님께서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라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셔서 거기 머물러 계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3장 34절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한량없이" 부어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3장에서 "성령님께서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신 사건의 의미를 양의 제한없이 성령님의 능력을 주신 것을 말합니다. 성령님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오셔서 예수님 위에 머물러 계심으로 새로운 차원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지도자는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달리 말해 지도자는 성령님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안수집사는 장로는 목사는 그런 의미에서 머리에 사람의 손이 얹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을 부어 주실 때까지는 자기의 직무 수행을 위해서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되는 사람입니다. 요단강에서 돌아오실 때에 그는 성령님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광야에 시험을 이기시고 갈릴리로 가서 사역하실 때에 성령님의 권능으로 돌아가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가는 곳마다 권세 있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고향에서 첫 설교하실 때에 사람들은 넋을 잃고 들었습니다.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눅4:22)라고 반응하고 있습니다. 뭔가 권세 있는 말씀이 고향사람들 모두 회심하게 만든 건 아닙니다. 오히려 고향사람들은 그를 낭떠러지에 밀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능력 있는 설교는 언제나 모든 사람들의 갈채만 받게 하는 설교가 아닙니다. 원치 않지만 그런 경우를 전혀 바라지 않지만 때로는 말씀이 예리하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공격을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배척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가르치심도 탁월했습니다.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눅4:32).
비단 기록은 누가복음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는 산상설교를 끝내신 주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 마가의 증거도 동일합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1:22).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 도다"(막1:27). 요한복음에는 재미있는 사건의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를 시샘한 기성 종교 지도자들이 급기야 '예수 체포령'을 내립니다. 예루살렘에서 하속들이 파송을 받습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형사대가 급파된 셈입니다. 가보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설교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백성이 선지자로 여기고 있는 예수를 바로 그 자리에서 잡아가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을 들어 쳤을 것입니다. 우선 설교가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기다리기 위해서 서있다보니 귀에 말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듣다보니 말말이 옳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잡지 않고 돌아온 것입니다. 왜 체포해서 오지 않았느냐고 묻는 상전들을 향해서 담대히 말합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을 우리가 이때까지 만나본적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을 잡아오면 천벌을 받습니다. 빈손으로 와서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들을 파송한 바리새인들이 체념한 듯 말합니다. "아니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성령님의 능력을 부여받은 결과는 그의 말씀 뿐 아니라 사역 일반에도 나타납니다. 귀신을 꾸짖자 귀신도 쫒겨납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그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다 놀라 서로 말하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모두들 감탄했습니다. 오순절날 베드로는 주님의 사역을 두고 사람들에게 도전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세와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셨느니라" 너희 아는바 아니냐 너희 모두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큰 권세와 기사와 표적을 너희가운데서 행하신 것을 너희가 모두 알고 있지 않느냐 그들 중에서 예수가 하신 표적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충분한 증거였습니다. 이런 논지는 사도행전 10장 베드로의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는 고넬료가 이방인들을 모아서 지금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조차도 예수의 사역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님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시니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그가 행한 모든 놀라운 역사는 욥바에 모인 이방인 무리조차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신약의 공동체는 성령님의 능력을 받은 공동체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님을 체험한 교회였습니다. 특히 그들의 지도자들은 모두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3년간 주님을 따라다니며 배운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마지막 분부가 무엇입니까 졸업장만 가지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허증만 가지고 사역을 나서기 전에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몇 날 못되어 너희가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오직 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다시금 확인합니다. 지도자는 임명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파송장 수여로서 능력있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우리의 힘과 지혜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능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님의 능력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도 성령님의 능력을 입음으로 임명받은 사역을 착수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맡은 사람들은, 누가 무슨 사역을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성가대를 하든지 주일학교 봉사를 하든지 구역봉사를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역을 하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신으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 없이는 신자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기름부음 없이도 신자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주심 없이도 신자노릇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능력 있는 사역은 성령님의 기름부음만이 가능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은 우리를 이름 값하는 사역자로 만들어 줄것입니다.
셋째로 지도자는 성령님의 인치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요단강에서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습니다. 열려진 하늘로 성령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 결과 성령님의 능력을 한량없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요한복음 6장 27절은 이 사건을 두고 인자는 '성령님의 인치심'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하늘의 음성은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확인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서류를 작성하고 인을 치므로 기록된 사실이 진실함을 확증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늘 음성은 우리의 지도자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지를 확증합니다. 첫 선언은 무엇입니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익히 알고계신 사실입니다. 적어도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열 두 살 때부터는 알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사흘만에 찾아온 부모를 향해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는 하늘 아버지가 내아버지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그 날 이후 주님은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아니 이 인식이 지금 요단강으로 그를 나아오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지
금 하늘 음성은 그 기본 사실을 재확인하게 만듭니다. 인류를 대신한 그를 향한 사랑의 선언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향해 하시고자 하는 하늘 아버지의 바램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비전을 가지고 지도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달리 말해 여러분은 사람다운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늘 아버지의 사랑받는 대상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며 사랑받고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물고기가 물이 필요하듯이 새가 공중에서 살 듯이 사람은 사랑 속에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인류의 대표자요 구원자께서 당신의 과업을 수행해가기 위해 망각해서 안되는 첫 번째 진리는 자신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사실이 변치 않고 남아야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사람들의 유익을 끼치기 위해서 하늘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신의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의 공격목표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공격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선포하신 사실을 물고 흔듭니다. 신자로서,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망각해서는 안되는 사실은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오늘도 선언하십니다. 비록 우리에게 빵문제를 지금 해결해 주지 않으신다고 하더라도 하늘아버지는 우리의 배고픔을 아시며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믿으셔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문제는 이 사실을 망각할 때 일어납니다. 지도력의 위기도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언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을 크게 느낍니까 성령님으로 충만해질 때 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살 깊이 느끼고 그 사실로 인해 감격합니다. 성령님을 체험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이전보다는 분명하게 우리의 마음속에 뜨겁게 다가옵니다. 전에 지금껏 믿어왔던 것이 믿기지 아니하리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우리는 녹아드는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을 들어본 경험이 있습니까 이 선언을 개인적으로 듣는 것은 청교도의 표현을 빌리면 "땅에서 하늘을 맛보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 휩싸이게 되면 차원을 달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새로운 역사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선언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앞의 것이 관계에 관한 선언이라면 이 선언은 사역에 관한 선언입니다. 앞의 것이 아들됨을 말하고 사랑을 강조한다면 뒤에 선언은 사역을 말하고 사역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지금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을 좀 풀어서 번역한다면 "지금부터 네가 하게될 그 일을 내가 기뻐하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이 그 말 같아 보이지만 서로 다른 말입니다. 열 자식이 있어도 부모에게는 그들 모두가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기쁘게 하는 자식은 따로 있습니다. 누가 부모를 기쁘게 합니까 순종하는 자식입니다. 말 잘 듣는 자식입니다. 지금 인류 구원의 큰 사역을 위해 첫 발을 내딛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하늘 아버지의 심정을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천지 창조 후, 인간 타락 후부터 오직 아버지께서는 인류를 구원하는 이날을 기다려 오셨습니다. 지금껏 하늘이 푸르른 것도 이날을 위해서 였습니다. 이제 그 결정적인 걸음을 내딛는 아들을 바라보시는 하늘 아버지의 만족이 여기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너 하는 일을 기뻐하노라"고 선언하십니다. 백성과 하나되신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향한 아버지의 특별한 그 뜻을 순종하고 있습니다. 중재자 없음을 보시고 안타까이 여기시던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을 여시고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례를 받는 아들을 보시고 내가 네가 하게 되는 그 일을 인해서 기뻐하노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시금 묻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삽니까 속되게 표현하면 제 잘난 맛에 삽니다. 좀 고상한 표현을 사용하면 사람은 의미로 삽니다. 신앙인은 언제 침체에 빠집니까 의미를 상실했을 때입니다. 실직 자체가 가장 고통스런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를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실직 그 자체보다 고통스런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는 명제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 우리는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가는 길을 기억하고 계시는지에 대해서 내가 가는 길이 하나님의 눈에 의미 있는 길인지에 대해서 우리가 의문을 가질 때 우리는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은 언제 가장 활기찬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가는 길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인할 때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임을 알 때 우리는 미칠 만큼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 하늘 음성을 개인적으로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삶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역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비전은 분명해질 것입니다 . 여러분의 지도력은 놀랍게 향상될 것입니다. 결코 난관은 우리를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결코 골짜기는 우리를 절망시키지 못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자는 어떤 절망의 수렁텅이를 통과해도 그는 낙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련을 인해서 나를 정금같이 단련시키는 그날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습니다. 누가 지도자입니까 그는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과 하나되는 사람입니다. 그들과 더불어 웃고 울며 살고 죽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지도자, 누구입니까 지도자는 성령님의 기름부음, 아니 그것이 상징하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으로 우리를 하나님 백성으로 만들러 오신게 아니라 백성의 지도자로서 우리를 세우는 의식입니다. 마땅히 지도자는 그 직무를 수행할 특별한 능력을 하나님으로 수여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누가 지도자입니까 자기 삶을 향한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자기 사역을 향한 하늘 아버지의 인정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지도자는 마땅히 자신과 사역에 대해서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확신을 믿는 자입니다. 마땅히 자기 사역과 사랑과 의미를 확인할 때 놀라운 비전과 지도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모두 성령님의 사람, 비전의 사람, 지도력을 겸비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러나 뒷날인가 10분 간증 대신 30분 새벽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날 이후 내내 무슨 말씀을 전할 것인가 고민하며 준비했지만 준비한 그것을 과연 전하시기를 원하는가 하는 본문에 대한 확신은 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중 목요일 주제강의를 듣고 있는데, 본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금요일 새벽에 전했던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그날 새벽에 전한 바로 그 본문의 말씀을 나누므로 이번 축제에 함께 하지 못한 분들과도 비전과 리더십을 공유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지도자, 누구인가"를 설교하기로 맘을 먹었습니다. 특별히 그날 새벽 4시부터 일어나셔서 기도를 해주신 권사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공동체를 남달리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셔서 우리들 모두에게 좋은 감화를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금요일 새벽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주일 낮까지도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흠모해야 할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성경에는 많은 지도자들과 그들이 보여주는 지도자상이 있습니다. 모세도 나오고 여호수아도 등장합니다. 다윗도 나오고 솔로몬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도 예레미야도 한 시대의 지도자로서 삶을 살았습니다. 신약을 보면 베드로도 요한도 지도력을 행사하였던 사람들입니다. 바나바와 바울도 새로운 선교의 시대를 열어간 지도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만큼 완벽한 지도자의 모습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성경적이고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 준비 장면을 보여주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지도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지도자는 그 백성과 하나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세례를 받으시는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차근차근 그것을 입증해 봅시다. 우선 우리는 오늘 본문이 길 예비자 요한과 그 길로 오시는 왕의 만남을 최초로 기록한 부분이라는 것을 집고 넘어갑시다. 어떻게 말하면 요한과 예수님은 그 이전에 만났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 다 태어나기 전에 모태에서의 만남입니다. 수태를 통보받은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만났을 때 그 태중의 요한은 성령님에 충만하여 기뻐뜀으로 마리아의 태중에 있던 주님을 맞이했습니다. 또 오늘 세례사건 이전에 실제로 만남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만 기록상 이 사건이 최초의 직접적 대면이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한 시대를 살았던, 아니 역사상 가장 걸출한 두 인물이 만나는 기록을 오늘 본문은 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한 사람 요한과 이땅에 태어났던 많은 사람가운데서 가장 위대하신 예수와의 만남을 오늘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간접적인 만남은 그 이전에도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아야 할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나아오십니까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온 예수님을 향해 요한은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4,15) 마태 복음은 이와같이 구체적으로 두 분의 만남과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 복음서에는 정작 주님께 세례를 베풂으로 주님의 사역준비를 완성시킨 요한의 이름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세례도 요한이 베푼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께 세례를 베푼 분도 요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의 이름은 빠져 있습니다. 마치 누가는 이 사건을 요한의 목회 좌우명에 따라서 기록한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목회 좌우명이 무엇입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주님의 사역 준비를 결정적으로 감당한 요한의 이름은 감추어지고 예수님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일하고 있습니까 성가대 봉사를 하든지, 반주를 하든지, 지휘를 하든지, 그 모든 우리의 사역들을 통해서 나타나야 할 분은 주님이십니다. '아무개 교회 성가대 유명하다더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봉사한다고 하면 동기가 잘못되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반주자 최고라더라', '지휘자가 훌륭하다더라'고 사람들이 말하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빼앗고 있을지 모릅니다. 주일학교 봉사를 해도 마찬가지고 구역을 섬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개 구역장이 참 잘한다더라. 그렇게만 이야기된다는 것은 우리가 권장할만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최선을 다해서 교사로서 구역장으로 봉사를 하게 된다고 하면 그 일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뚜렷이 부각되어야만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패역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행위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다윗왕에게 나아가는 사람들을 가로채어서 백성의 마음을 도적질하던 패륜아입니다. 어떤 종류의 봉사를 하든지, 길든지 짧든지 예수님의 이름이 나타나도록 사역하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러면 첫 대지의 명제를 입증하기 위해서 본격적인 질문을 합시다. 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셔야 했습니까 여러분이 알다시피 요한의 세례는 죄사함을 위한 세례였습니다. 요한이 베푼 물세례는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 죄 용서의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까 예수님도 용서받아야 할 죄가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께서 "성령님으로 잉태하사"라고 고백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우리처럼 죄인으로 태어나지 않았음을 말하기 위해서 성령님으로 잉태하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죄하신 분입니다. 그 입술에 거짓조차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왜 요한이 베푼 세례를 받습니까 그것은 당신께서 구원하시기 위한 백성과 당신이 하나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지금껏 사적 삶을 사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인류를 구원하는 구주로서 공적인 걸음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가 구원하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선상에 두는 결단을 합니다. 그들의 죄를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지금 죄사함의 세례를 받습니다. 이제 그는 사람들을 섬기고 그의 목숨을 그들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놓는 첫 걸음을 내딛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는 누구나 그 백성의 수치와 허물을 자기 것으로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을 멸절시키려 했을때 모세가 어떻게 기도했는지를 아시지요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데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제하여 주옵소서" 모세는 생명을 걸고 그 백성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왕 다윗을 보십시오. 시편 3편을 보면 다윗은 위급한 상황 속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고 다급한 도움을 간청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서 자신을 죽일려고 달려드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기 속에서도 백성을 기억하는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살고 죽는 것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내생명 하나가 살든지 죽든지 하는 것은 주께 달려있는 것이고 주님! 임금과 왕자가 싸우는 틈속에서 고통당하는 이백성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지도자는 위기에서 자신을 위한 처신만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백성을 돌아볼 줄 아는 자입니다. 평소에는 민족과 조국을 내세우다가도 다급하면 제 살길 찾는 사람들과는 달리 다윗은 그 위기 속에서도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라고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는 지도자로서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해야 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 특정한 사람만이 지도자는 아닙니다. 여러분은 거의 누구나 지도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부모들은 가정의 지도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의 모든 필요를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교사는 그 가르치는 학생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자기 시간을 기꺼이 쓰는 사람입니다. 구역장은 섬기는 구역원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잘못을 대신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맡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성숙시키기 위해서 자기 가진 것 어떤 것도 아끼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맡은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을 때에 여러분의 지도력은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둘째로 지도자는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백성의 구원자로서 나서면서 성령님을 체험합니다. "성령님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누가복음 4장 18절은 이 사건을 성령님의 기름부음으로 설명합니다. "내게 성령님이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첫 문장에서는 성령님이 임하셨다고 말하고 나서 두 번째 문장에서는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첫 설교뿐 아니라 사도행전 10장 38절의 베드로의 설교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님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여기서는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능력주심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사실은 신구약의 일관된 원리입니다. 구약에는 백성의 대표적인 지도자들, 왕, 선지자, 제사장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황소의 뿔에 기름을 채워 당사자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백성의 지도자들로 부름 받았기에 그 직무를 감당할 능력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의식이였습니다. 그런 의식은 오늘 신약교회도 계승되고 있습니다. 왜하필이면 안수집사를 세울 때, 장로를 세울 때, 목사를 세울 때 손을 얹고 안수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계승되는 것을 상징하는 의식입니다.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의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는 의식입니다. 지도자는 그 직무를 수행해야할 능력을 받아야만 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은 그 직무를 수행할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았습니다. 신약의 가장 대표적인 기름부음 받은 자는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직책의 문자적인 의미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왕이하던 일, 선지자가 하던 일, 제사장이 하던 일을 모두다 혼자서 감당하신 기름부음 받은자였습니다. 지금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성령님께서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라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셔서 거기 머물러 계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3장 34절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한량없이" 부어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3장에서 "성령님께서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신 사건의 의미를 양의 제한없이 성령님의 능력을 주신 것을 말합니다. 성령님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오셔서 예수님 위에 머물러 계심으로 새로운 차원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지도자는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달리 말해 지도자는 성령님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안수집사는 장로는 목사는 그런 의미에서 머리에 사람의 손이 얹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을 부어 주실 때까지는 자기의 직무 수행을 위해서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되는 사람입니다. 요단강에서 돌아오실 때에 그는 성령님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광야에 시험을 이기시고 갈릴리로 가서 사역하실 때에 성령님의 권능으로 돌아가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가는 곳마다 권세 있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고향에서 첫 설교하실 때에 사람들은 넋을 잃고 들었습니다.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눅4:22)라고 반응하고 있습니다. 뭔가 권세 있는 말씀이 고향사람들 모두 회심하게 만든 건 아닙니다. 오히려 고향사람들은 그를 낭떠러지에 밀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능력 있는 설교는 언제나 모든 사람들의 갈채만 받게 하는 설교가 아닙니다. 원치 않지만 그런 경우를 전혀 바라지 않지만 때로는 말씀이 예리하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공격을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배척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가르치심도 탁월했습니다.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눅4:32).
비단 기록은 누가복음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는 산상설교를 끝내신 주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 마가의 증거도 동일합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1:22).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 도다"(막1:27). 요한복음에는 재미있는 사건의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를 시샘한 기성 종교 지도자들이 급기야 '예수 체포령'을 내립니다. 예루살렘에서 하속들이 파송을 받습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형사대가 급파된 셈입니다. 가보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설교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백성이 선지자로 여기고 있는 예수를 바로 그 자리에서 잡아가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을 들어 쳤을 것입니다. 우선 설교가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기다리기 위해서 서있다보니 귀에 말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듣다보니 말말이 옳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잡지 않고 돌아온 것입니다. 왜 체포해서 오지 않았느냐고 묻는 상전들을 향해서 담대히 말합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을 우리가 이때까지 만나본적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을 잡아오면 천벌을 받습니다. 빈손으로 와서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들을 파송한 바리새인들이 체념한 듯 말합니다. "아니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성령님의 능력을 부여받은 결과는 그의 말씀 뿐 아니라 사역 일반에도 나타납니다. 귀신을 꾸짖자 귀신도 쫒겨납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그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다 놀라 서로 말하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모두들 감탄했습니다. 오순절날 베드로는 주님의 사역을 두고 사람들에게 도전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세와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셨느니라" 너희 아는바 아니냐 너희 모두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큰 권세와 기사와 표적을 너희가운데서 행하신 것을 너희가 모두 알고 있지 않느냐 그들 중에서 예수가 하신 표적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충분한 증거였습니다. 이런 논지는 사도행전 10장 베드로의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는 고넬료가 이방인들을 모아서 지금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조차도 예수의 사역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님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시니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그가 행한 모든 놀라운 역사는 욥바에 모인 이방인 무리조차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신약의 공동체는 성령님의 능력을 받은 공동체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님을 체험한 교회였습니다. 특히 그들의 지도자들은 모두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3년간 주님을 따라다니며 배운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마지막 분부가 무엇입니까 졸업장만 가지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허증만 가지고 사역을 나서기 전에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몇 날 못되어 너희가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오직 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다시금 확인합니다. 지도자는 임명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파송장 수여로서 능력있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우리의 힘과 지혜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능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님의 능력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도 성령님의 능력을 입음으로 임명받은 사역을 착수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맡은 사람들은, 누가 무슨 사역을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성가대를 하든지 주일학교 봉사를 하든지 구역봉사를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역을 하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신으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 없이는 신자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기름부음 없이도 신자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주심 없이도 신자노릇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능력 있는 사역은 성령님의 기름부음만이 가능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은 우리를 이름 값하는 사역자로 만들어 줄것입니다.
셋째로 지도자는 성령님의 인치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요단강에서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습니다. 열려진 하늘로 성령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 결과 성령님의 능력을 한량없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요한복음 6장 27절은 이 사건을 두고 인자는 '성령님의 인치심'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하늘의 음성은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확인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서류를 작성하고 인을 치므로 기록된 사실이 진실함을 확증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늘 음성은 우리의 지도자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지를 확증합니다. 첫 선언은 무엇입니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익히 알고계신 사실입니다. 적어도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열 두 살 때부터는 알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사흘만에 찾아온 부모를 향해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는 하늘 아버지가 내아버지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그 날 이후 주님은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아니 이 인식이 지금 요단강으로 그를 나아오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지
금 하늘 음성은 그 기본 사실을 재확인하게 만듭니다. 인류를 대신한 그를 향한 사랑의 선언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향해 하시고자 하는 하늘 아버지의 바램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비전을 가지고 지도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달리 말해 여러분은 사람다운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늘 아버지의 사랑받는 대상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며 사랑받고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물고기가 물이 필요하듯이 새가 공중에서 살 듯이 사람은 사랑 속에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인류의 대표자요 구원자께서 당신의 과업을 수행해가기 위해 망각해서 안되는 첫 번째 진리는 자신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사실이 변치 않고 남아야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사람들의 유익을 끼치기 위해서 하늘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신의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의 공격목표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공격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선포하신 사실을 물고 흔듭니다. 신자로서,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망각해서는 안되는 사실은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오늘도 선언하십니다. 비록 우리에게 빵문제를 지금 해결해 주지 않으신다고 하더라도 하늘아버지는 우리의 배고픔을 아시며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믿으셔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문제는 이 사실을 망각할 때 일어납니다. 지도력의 위기도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언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을 크게 느낍니까 성령님으로 충만해질 때 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살 깊이 느끼고 그 사실로 인해 감격합니다. 성령님을 체험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이전보다는 분명하게 우리의 마음속에 뜨겁게 다가옵니다. 전에 지금껏 믿어왔던 것이 믿기지 아니하리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우리는 녹아드는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을 들어본 경험이 있습니까 이 선언을 개인적으로 듣는 것은 청교도의 표현을 빌리면 "땅에서 하늘을 맛보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 휩싸이게 되면 차원을 달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새로운 역사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선언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앞의 것이 관계에 관한 선언이라면 이 선언은 사역에 관한 선언입니다. 앞의 것이 아들됨을 말하고 사랑을 강조한다면 뒤에 선언은 사역을 말하고 사역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지금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을 좀 풀어서 번역한다면 "지금부터 네가 하게될 그 일을 내가 기뻐하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이 그 말 같아 보이지만 서로 다른 말입니다. 열 자식이 있어도 부모에게는 그들 모두가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기쁘게 하는 자식은 따로 있습니다. 누가 부모를 기쁘게 합니까 순종하는 자식입니다. 말 잘 듣는 자식입니다. 지금 인류 구원의 큰 사역을 위해 첫 발을 내딛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하늘 아버지의 심정을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천지 창조 후, 인간 타락 후부터 오직 아버지께서는 인류를 구원하는 이날을 기다려 오셨습니다. 지금껏 하늘이 푸르른 것도 이날을 위해서 였습니다. 이제 그 결정적인 걸음을 내딛는 아들을 바라보시는 하늘 아버지의 만족이 여기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너 하는 일을 기뻐하노라"고 선언하십니다. 백성과 하나되신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향한 아버지의 특별한 그 뜻을 순종하고 있습니다. 중재자 없음을 보시고 안타까이 여기시던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을 여시고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례를 받는 아들을 보시고 내가 네가 하게 되는 그 일을 인해서 기뻐하노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시금 묻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삽니까 속되게 표현하면 제 잘난 맛에 삽니다. 좀 고상한 표현을 사용하면 사람은 의미로 삽니다. 신앙인은 언제 침체에 빠집니까 의미를 상실했을 때입니다. 실직 자체가 가장 고통스런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를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실직 그 자체보다 고통스런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는 명제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 우리는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가는 길을 기억하고 계시는지에 대해서 내가 가는 길이 하나님의 눈에 의미 있는 길인지에 대해서 우리가 의문을 가질 때 우리는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은 언제 가장 활기찬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가는 길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인할 때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임을 알 때 우리는 미칠 만큼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 하늘 음성을 개인적으로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삶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역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비전은 분명해질 것입니다 . 여러분의 지도력은 놀랍게 향상될 것입니다. 결코 난관은 우리를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결코 골짜기는 우리를 절망시키지 못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자는 어떤 절망의 수렁텅이를 통과해도 그는 낙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련을 인해서 나를 정금같이 단련시키는 그날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습니다. 누가 지도자입니까 그는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과 하나되는 사람입니다. 그들과 더불어 웃고 울며 살고 죽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지도자, 누구입니까 지도자는 성령님의 기름부음, 아니 그것이 상징하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으로 우리를 하나님 백성으로 만들러 오신게 아니라 백성의 지도자로서 우리를 세우는 의식입니다. 마땅히 지도자는 그 직무를 수행할 특별한 능력을 하나님으로 수여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누가 지도자입니까 자기 삶을 향한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자기 사역을 향한 하늘 아버지의 인정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지도자는 마땅히 자신과 사역에 대해서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확신을 믿는 자입니다. 마땅히 자기 사역과 사랑과 의미를 확인할 때 놀라운 비전과 지도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모두 성령님의 사람, 비전의 사람, 지도력을 겸비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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