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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을 버리자 (눅3:23-38)

본문

예수님의 족보는 본문과 마태복음 1장 두 곳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족보에는 상이점이 있다는 것을 금방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조상으로부터 후손으로 내려오는 순서를 채택한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후손으로부터 조상으로 거슬러올라가는 순서를 채택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최초의 인물이 아브라함이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은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 혈통을 취급하지만 누가복음은 다윗과 그의 또 다른 아들 나단 혈통을 취급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두 가지 족보가 같은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법적 아버지 요셉의 족보를 다룬 것이고,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족보를 다룬 것이나 당시 여성의 이름을 족보에 언급하지 않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마리아의 이름을 남편 요셉의 이름으로 대치시킨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버려야 할 편견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나이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23절). 우리 나라는 유교적인 전통이 깊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유교 도덕의 근간이 되는 삼강오륜 가운데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른이 먼저이고 아이는 나중이며, 나이 많은 사람이 먼저 존경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식사 중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고 자식은 나중에 듭니다. 스승과 제자가 길을 갈 때 스승이 앞서고 제자는 그 뒤를 따릅니다. 연상인 사람에게 연하의 사람이 먼저 인사를 합니다. 나이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낼 것을 권장하는 좋은 미덕입니다. 그러나 이 미덕도 다른 미덕과 마찬가지로 경직된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대중 앞에 나서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 나이가 30세쯤 되었습니다. 그분이 오늘날 우리나라에 오셔서 사역을 시작하신다면 과연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나타낼까 궁금합니다. 우리 자녀 앞에 30세 된 사람이 선생으로 나서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40대, 50대 인데 30세의 젊은이가 나서서 가르친다면 과연 얼마나 진지하게 경청하겠습니까 저는 28세 때 처음으로 500여 명 모이는 교회의 강단에 서서 설교했습니다. 회중의 반응은 다양했지만 어느 정도의 사회적인 지위나 학문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는 내용과 상관없이 50대, 60대 설교자의 설교가 더 은혜롭다는 편견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에 나이는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나이 외에도 경험, 학식, 재능, 인격 등도 무시될 수 없는 요소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역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세계 제일의 주일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미국 인디아나 주 제일침례교회(First Baptist Church)의 잭 하일즈 목사님은 19세에 강단에 섰습니다. 미국의 흑인인권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알라바마 주의 한 침례교회로부터 목사 청빙을 받은 때가 그의 나이 25세 때였습니다. 그리고 35세에 세상에서 가장 젊은 나이로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둘째, 우리는 지식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23절).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알았지만 정확한 실상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동정녀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해서 너무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 사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일 수도 있고, 편협적일 수도 있고, 불완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 점을 겸손히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지식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전부인 양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완전한 것인 양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천지만물이 진화의 소산이라는 편견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완전한 지식을 전해 주는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합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셋째, 우리는 민족과 인종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38 절). 오늘도 지구상 여러 곳에서 민족과 인종 간의 갈등과 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침략 전쟁과 정복 전쟁은 잘못된 편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양태가 다르게 진행되지만 그 근본 원인은 같은 무역 장벽과 경제 전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 위로 하나님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만이 아닌 모든 민족의 구주이십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행17:26)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세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세계주의를 내세워야 합니다. 우리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 모든 민족과 더불어 잘 살아야 합니다. 형제지간에는 타산보다는 우애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양보할 것은 양보해야 합니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너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살벌한 무한 경쟁 개념은 비성서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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