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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지 유혹 (눅4:1-13)

본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모든 말씀은 그분이 먼저 친히 실천하셨고 실천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신을 비워 종이 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또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6:33). 이 말씀은 광야에서 마귀에게 유혹을 받는 과정에서 그분이 실천하셨습니다. 마귀의 유혹 내용과 예수님께서 그 유혹을 물리치신 것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교훈받을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떡이 전부인 양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4절).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 것아 아니라 살기 위해 먹는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은 삶을 지탱해 주는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에만 집착하는 유혹에 빠져 있습니다. 마귀 사단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먹는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땅의 것만 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 행위는 배부른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떡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떡 외에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있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떡 말고도 사람이 취해야 할 갓은 책입니다. 흔히들 책을 가리켜 마음의 양식이라고 합니다. 육신에 떡이 필요하듯이 마음에도 양식이 필요합니다.
책을 읽음으로 우리는 마음의 양식을 얻게 됩니다. 영국 교회 주교인 리챠드 드베리는 책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책은 매나 채찍 없이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이요, 말이나 성냄아 없이,빵이나 돈 없이 가르치는 스승이다. 그대가 가까이 가면 결코 잠들어 있지 않고, 그대가 찾으면 결코 숨지 않는다. 그대 가 큰 실수를 해도 힐책하지 않으며, 그대가 무식하다고 결코 그대를 조소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책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좋은 책을 가려서 읽어야 합니다. 악서는 독약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존 머레이라는 영국 작가는 악서의 해악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한 첩의 독약의 작용은 단 한 번 뿐이나, 악서가 인간의 마음을 중독시키는 것은, 강 상류에서 독약을 뿌려 그 영향권 내에 있는 고기는 모두 죽어버리듯, 그 악서의 영향을 받은 인간의 마음은 모두 중독된다.” 또 미국 신학자 트라이언 에드워즈는 “악서는 마치 독주와 같아서 영양을 공급하는 것도 아니고 약을 주는 것도 아니다. 악서나 독주는 다 부당하게 흥분시킨다. 하나는 마음을 흥분시키고 다른 것은 육신을 흥분시킨다. 먹으면 먹을수록 더 욕망만 커진다. 둘 다는 멸망으로 이끈다. 하나는 지성을, 다른 하나는 건강을 망친다. 그리고 이 둘은 합하여 영혼을 파멸로 이끈다. 이것들에 대한 안전대책은 똑같이 마음 과 몸이 도취되지 않도록 전적으로 자제하는 것뿐이다.”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양서는 영양가 높은 음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양서란 읽는 자로 하여금 가장 많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며 읽는 자는 깊은 사색으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마4:4).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책중의 책입니다. 여느 책처럼 마음의 양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생명을 걸어도 아깝지 않는 진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반 서적의 가치에 대해서도 그렇게 높게 평가할진대 이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하겠습니까 당신은 이처럼 귀중한 말씀을 얼마나 읽고 있으며 취하고 있으며 붙들고 있습니까
둘째, 우리는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겨야 합니다(8절). 마귀 사단은 세상 권세와 영광을 미끼로 예수님께 절하라고 제의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귀 사단에게 딱 한 번 절하는 것이 뭐 그렇게 문제 될 것이 있겠습니까 불의와 단 한 번 타협하는 것이 뭐 그리 큰 일이라고 야단법석입니까 그렇게만 하면 세상 권세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논리에 빠진다면 이미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호히 이 유혹을 뿌리치셨습니다. 그분은 한 순간이라도 마귀를 높이고자 하시지 않았습니다. 죄와 불의를 허용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불쌍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6:24).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만 경배해야 합니다. 돈을 숭배하는 배금주의, 우상 숭배, 사단 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12). 마귀는 세번째로 성경 말씀을 이용하여 유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수퍼맨임을 입증해 보이고 하나님께서 시편 91:11-12의 약속대로 천사를 보내 지켜 주실지 시험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완전한 신뢰를 한다면 어떤 시험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시험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것이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이 학생에게 하는 것이지 학생이 선생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피조물이 창조주를 시험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으려고 하는 것은 불경스런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귀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논리로 성경을 곡해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의도를 행여나 가지지 않을까 경계해야 합니다. 불가항력으로 인한 사태에 처한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고공에서 뛰어내리는 행동은 믿음이 아니라 무모한 행동이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행여나 베드로처럼 호수 위를 걸으려는 시도는 하지 마십시오. 행여나 자의적으로 독극물을 마시려는 시도는 하지 마십시오(막16:18).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지켜 주실 책임이 없으시며 어느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분 자신의 선하신 뜻을 따라 행하십니다. 성령님을 시험하려고 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죽임을 당했습니다(행5: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 자(고전10:9).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를 시험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시험하시도록 해야 합니다(시139:23). 굳이 시험하고 싶다면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시험하십시오. 나 스스로 내가 믿음에 있는가 시험햬야 합니다(고후13:5).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시험해야 합니다(요일4:111; 딤전3:10). 십일조로 시험하십시오(말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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