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의미 (눅4:16-20)
본문
성탄절 아침입니다. 이제 성탄절은 그야말로 세계적인 명절이 되었습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공산주의 나라에서까지도 성탄절을 즐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성탄절이 기독교인만의 명절이 아닙니다. 이제는 세속인들이 더 좋아하는 명절이 되었습니다. 석가탄신일이 공휴일로 지정되기 전에 불교인들이 성탄절만 공휴일로 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헌법재판소에서 소를 기각하면서 그 이유를 이맇게 말했습니다. “성탄절은 본래 기독교의 명절이었지만 이제는 그 의미가 퇴색하여 세속인들의 명절로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성탄절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것은 특정 종교를 비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정도로 성탄절은 세속 명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성탄절은 그렇게 마냥 좋아하고 즐기는 날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아주 엄숙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아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잃은 자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취임 설교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설교를 하셨는데 그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첫 설교에서 강조한 점이 “잃은 자를 찾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잃은 자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잃은 양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99마리의 양을 놓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의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사람드은 99마리의 양을 중시하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그냥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목자의 심정으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애씁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도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동전 10개를 줄로 꿰어서 목에 걸고 다녔습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애용했던 액세서리입니다.
그런데 줄이 끊어지면서 동전 하나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 여인은 잃은 동전을 찾아 헤맵니다. 사람들은 찾다가 못 찾으면 나머지 아홉 개를 묶어서 다시 목에 매고 다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밤을 새워서 동전을 찾았습니다. 결국 동전을 찾은 이 여인은 동네 사람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경제 이론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큰 손해입니다. 동전 하나의 값이 잔치하는 경비와 비교해 보면 턱도 없이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여기서 잔치를 했다는 것은 그 한 개의 값어치 때문입니다. 하나가 없어지면 아홉 개는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열 개의 동전을 묶어서 목에 걸고 다니면 악귀가 가까이하지 못한다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개가 없어졌으니 무슨 효험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잃은 동전 한 개를 찾기 위해서 밤을 새워 가며 수고를 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하나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이 아프면 모든 가족이 아픕니다. 한 사람이 울면 모든 사람이 눈물이 나옵니다. 한 사람이 불행해지면 모든 가족이 함께 불행해집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 영혼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집 나간 아들 걱정으로 아버지는 늘 근심입니다. 종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종들로는 마음이 위로되지 않았습니다. 큰 아들도 있었지만 큰 아들만 가지고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농사가 잘되고 소출이 많았지만 그것도 그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저녁 문을 열어 놓고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멀리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버선발로 뛰어나가 아들을 맞아들였습니다. 이것이 잃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는 이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영혼을 귀하게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가난한 자와 함께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마구간 탄생”, 이 짤막한 구절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잘 장싱해 주고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이 짤막한 구절만 보아도 예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가 시작되자마자 갈릴리 바닷가로 가셨습니다. 당시 갈릴리 바닷가는 그 사회에서 가장 소외되고 낙오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은 가난한 사람들로 북적 대던 곳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공생애 기간 동안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보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가운데서 제자들을 선택하십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도 모두 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자연 그의 추종자들은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가난한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적어도 복음을 받아들일 때는 가난한 사람이 더 잘 받아들입니다. 분명히 예수를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데는 가난한 계층의 사람이 더 쉽고 빠릅니다. 복음이 한국에 들오올 때가 오늘과 같은 부요한 시대였더라면 오늘처럼 복음이 이렇게 확산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 100년 전은 아주 가난하고 궁핍했던 시기입니다. 그때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복음을 잘 받아서 오늘과 같이 복음이 넓게 전파된 것입니다. 옛날 우리들이 가난하게 살 때 우리들의 신앙이 얼마나 뜨거웠습니까 밤에도 빠지지 않고 그 먼 길을 걸어서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이웃 교회에 부흥회가 있으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때는 은혜를 얼마나 사모했습니까 모두 가난한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인정이 있고 인간미가 있고 순수함이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가난할 때 예수를 만나기 쉽고 예수를 영접하기가 쉽습니다. 잘 믿던 사람들도 생활이 부해지고 편안해지면 시들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갈릴리 바닷가를 찾아가신 것은 그런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그곳에는 소외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가셔서 복음을 전하고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가난한 자를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3. 병든 자와 함께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주위에는 늘 병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가장 큰 사역은 병자들을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갈릴리는 가난한 지역이었기에 그곳에는 각종 병자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앉은뱅이, 소경, 문둥병자, 귀신들린 자, 혈루병자, 거지들이 많았습니다. 가난한 지역에는 이렇게 병자들이 많고 무당들이 많고 귀신들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회에서 소외되고 병들고 낙오된 사람들을 상대하셨습니다. 사람이 건강하게 살아야겠지만 때로 병드는 일도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이 병들었을 때 예수를 영접하는 일이 아주 쉬워집니다. 그래서 전도가 가장 장되는 곳이 병원입니다.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불신자들이 병상에서 쉽게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신자들도 병상에 있어 보면 예수님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신앙의 느낌도 달라지게 됩니다. 때로 교만한 사람들이 병상에서 예수를 영접하게 되는 원인도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속담에 “사탄도 병들면 천사가 된다”고 했습니다. 1750년 영국 런던에 큰 지진이 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너지는 건물더미에 파묻혀 피를 흘리고 죽어 갔습니다. 그때 웨슬리는 돌아다니면서 더 큰 재앙이 오기 전에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다녔습니다. 그런 와중에 어떤 사람이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는 떨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죽는 것이 무섭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환자가 대답합니다. “죽는 것은 무섭지 않은데 죽은 후가 두렵습니다.” 병상에 누워보니까 비로소 중말을 생각한 것입니다. 종말을 생각하고 보니까 죽음 후의 일까지 무섭게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존의 자리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 자리에 처해 보아야 비로소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이 뜨이고 인생이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운명의 자리에 처하게 되면 악했던 사람들도 선해지고 진실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미국 LA 지역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얼마나 엉망이었습니까 건물이 무너지고 고가도로가 내려앉고 길바닥이 갈라지고 화재가 났습니다. 그때 어느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이번 주일에는 비상 의자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보나마나 이번 주일은 교회가 터지도록 모여들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모두 철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죽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비로소 철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병자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4. 억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사람은 모두 무엇인가 억눌린 채 살아갑니다. 모두 어떤 멍에를 메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술, 담배, 노름, 마약 같은 나쁜 습관의 멍에를 메고 살아갑니다. 이것에 미친 사람들은 모두 이 멍에를 버리지 못하고 그것에 집착해서 살아갑니다. 이것 외에는 세상에 재미가 없는 줄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환한 세상을 등지고 어두컴컴한 방에 갇힌 채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화투에 미쳐 아침이 밝아오는 줄도 모르고 시간을 보냅니다. 얼마나 한심한 인생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모처럼 산을 가도 그 맑고 시원한 바람과 공기와 새들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고 한쪽에 앉아서 고스톱판을 벌립니다. 이것이 바로 멍에입니다. 오늘 이런 멍에를 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멍에는 예수를 믿어야만 벗을 수 있습니다. 예수 없이는 벗을 도리가없습니다. 가정의 주부들이 이 멍에를 벗지 못해서 노름하다가 구속이 되고 재산 날리고 그러지 않습니까 참 무서운 멍에입니다. 그런가 하면 폐쇄된 정신에 억눌려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 지독한 이기주의입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이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멍에의 굴레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어느 때보다 더 부유하게 살면서도 기쁨이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비혼 시대이고 불임 시대입니다. 결혼 적령기가 되면 사람들은 모두 결혼을 합니다. 결혼은 하나의 인생의 질서이고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 결혼마저도 사생활을 누리는 데 방해가 된다고 해서 기피하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미국의 처녀들은 40%나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일본의 처녀들은 60%나 결혼을 기피한다고 합니다. 결혼을 했어도 아이는 낳지 않으려는 풍조도 만연되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가정에 매이게 되고 사생활이 침해되고 직장 생활에 지장이 되니까 모두 구속받지 않으려고 회피합니다. 얼마나 이기적인 생활 태도입니까 이것이 이 시대의 가장 첨예한 이기주의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른들이 이렇게 이기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니까 아이들까지도 이기적이 되어갑니다. 어떤 어머니가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까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어울리지 않게 큰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책을 읽고 있는가 보니까 육아 교육법이라는 책입니다. 어린아기가 왜 그런 책을 읽느냐고 나무라니까 그 아이가 “내가 지금 육아 교육법적으로 교육을 잘 받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이 책을 읽고 있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이기적이 되면 세상이 재미가 없어 집니다. 그 인생도 재미가 없어지지만 주변의 이웃에도 즐거움이나 행복이 없어집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 이기적인 생각들이 가장 큰 멍에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재미도 없고 인간미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잘못된 무지의 멍에”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렇게 자유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무속과 무당신앙의 굴레를 쓰고 무지의 억압 속에서 멍에를 멘 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이름도 마음대로 짓지 못하고 이사도 결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입시 때만 되면 엿을 사다가 교문에 붙여놓고 밖에서 떨면서 빌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옛날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엄청난 축복입니다. 지금도 티베트 사람들은 아침이 되면 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돼지우리에서 기어 나온다고 합니다. 본래 인간은 동물과 하나라고 믿는 신앙 때문입니다. 전생에 내가 돼지였는지, 소였는지, 개였는지 누가 하느냐는 것입니다. 저 개가 지금 나를 잘 따르고 있는데 혹시 저 개가 몇 해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이 환생한 것인지 누가 아느냐는 것입니다. 전생의 개념에 매여 있고 윤회설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부터 자유를 얻은 것도 복음이 준 축복입니다. 멍에 가운데 가장 큰 명에는 죄로부터의 억압일 것입니다. 죄책감은 낮이나 밤니나 서 있으나 앉아 있으나 먹으나 잠을 자나 해결할 수 없는 무거운 멍에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부터 우리는 이런 억압들에게서 모두 자유스러워졌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이 세상을 누구보다도 자신만만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의 문제, 우리의 운명까지도 극복하고 모든 멍에를 벗어 던지고 자유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것이 복음이 준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잔파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우리는 이렇게 자유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큰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이 같은 은혜와 축복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가장 성숙한 도리입니다. 이 같은 은혜와 축복이 성탄절 아침에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고 여러분들의 마음속 깊이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원래 성탄절은 그렇게 마냥 좋아하고 즐기는 날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아주 엄숙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아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잃은 자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취임 설교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설교를 하셨는데 그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첫 설교에서 강조한 점이 “잃은 자를 찾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잃은 자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잃은 양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99마리의 양을 놓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의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사람드은 99마리의 양을 중시하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그냥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목자의 심정으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애씁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도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동전 10개를 줄로 꿰어서 목에 걸고 다녔습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애용했던 액세서리입니다.
그런데 줄이 끊어지면서 동전 하나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 여인은 잃은 동전을 찾아 헤맵니다. 사람들은 찾다가 못 찾으면 나머지 아홉 개를 묶어서 다시 목에 매고 다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밤을 새워서 동전을 찾았습니다. 결국 동전을 찾은 이 여인은 동네 사람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경제 이론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큰 손해입니다. 동전 하나의 값이 잔치하는 경비와 비교해 보면 턱도 없이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여기서 잔치를 했다는 것은 그 한 개의 값어치 때문입니다. 하나가 없어지면 아홉 개는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열 개의 동전을 묶어서 목에 걸고 다니면 악귀가 가까이하지 못한다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개가 없어졌으니 무슨 효험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잃은 동전 한 개를 찾기 위해서 밤을 새워 가며 수고를 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하나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이 아프면 모든 가족이 아픕니다. 한 사람이 울면 모든 사람이 눈물이 나옵니다. 한 사람이 불행해지면 모든 가족이 함께 불행해집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 영혼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집 나간 아들 걱정으로 아버지는 늘 근심입니다. 종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종들로는 마음이 위로되지 않았습니다. 큰 아들도 있었지만 큰 아들만 가지고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농사가 잘되고 소출이 많았지만 그것도 그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저녁 문을 열어 놓고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멀리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버선발로 뛰어나가 아들을 맞아들였습니다. 이것이 잃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는 이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영혼을 귀하게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가난한 자와 함께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마구간 탄생”, 이 짤막한 구절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잘 장싱해 주고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이 짤막한 구절만 보아도 예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가 시작되자마자 갈릴리 바닷가로 가셨습니다. 당시 갈릴리 바닷가는 그 사회에서 가장 소외되고 낙오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은 가난한 사람들로 북적 대던 곳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공생애 기간 동안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보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가운데서 제자들을 선택하십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도 모두 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자연 그의 추종자들은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가난한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적어도 복음을 받아들일 때는 가난한 사람이 더 잘 받아들입니다. 분명히 예수를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데는 가난한 계층의 사람이 더 쉽고 빠릅니다. 복음이 한국에 들오올 때가 오늘과 같은 부요한 시대였더라면 오늘처럼 복음이 이렇게 확산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 100년 전은 아주 가난하고 궁핍했던 시기입니다. 그때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복음을 잘 받아서 오늘과 같이 복음이 넓게 전파된 것입니다. 옛날 우리들이 가난하게 살 때 우리들의 신앙이 얼마나 뜨거웠습니까 밤에도 빠지지 않고 그 먼 길을 걸어서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이웃 교회에 부흥회가 있으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때는 은혜를 얼마나 사모했습니까 모두 가난한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인정이 있고 인간미가 있고 순수함이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가난할 때 예수를 만나기 쉽고 예수를 영접하기가 쉽습니다. 잘 믿던 사람들도 생활이 부해지고 편안해지면 시들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갈릴리 바닷가를 찾아가신 것은 그런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그곳에는 소외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가셔서 복음을 전하고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가난한 자를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3. 병든 자와 함께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주위에는 늘 병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가장 큰 사역은 병자들을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갈릴리는 가난한 지역이었기에 그곳에는 각종 병자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앉은뱅이, 소경, 문둥병자, 귀신들린 자, 혈루병자, 거지들이 많았습니다. 가난한 지역에는 이렇게 병자들이 많고 무당들이 많고 귀신들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회에서 소외되고 병들고 낙오된 사람들을 상대하셨습니다. 사람이 건강하게 살아야겠지만 때로 병드는 일도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이 병들었을 때 예수를 영접하는 일이 아주 쉬워집니다. 그래서 전도가 가장 장되는 곳이 병원입니다.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불신자들이 병상에서 쉽게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신자들도 병상에 있어 보면 예수님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신앙의 느낌도 달라지게 됩니다. 때로 교만한 사람들이 병상에서 예수를 영접하게 되는 원인도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속담에 “사탄도 병들면 천사가 된다”고 했습니다. 1750년 영국 런던에 큰 지진이 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너지는 건물더미에 파묻혀 피를 흘리고 죽어 갔습니다. 그때 웨슬리는 돌아다니면서 더 큰 재앙이 오기 전에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다녔습니다. 그런 와중에 어떤 사람이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는 떨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죽는 것이 무섭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환자가 대답합니다. “죽는 것은 무섭지 않은데 죽은 후가 두렵습니다.” 병상에 누워보니까 비로소 중말을 생각한 것입니다. 종말을 생각하고 보니까 죽음 후의 일까지 무섭게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존의 자리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 자리에 처해 보아야 비로소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이 뜨이고 인생이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운명의 자리에 처하게 되면 악했던 사람들도 선해지고 진실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미국 LA 지역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얼마나 엉망이었습니까 건물이 무너지고 고가도로가 내려앉고 길바닥이 갈라지고 화재가 났습니다. 그때 어느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이번 주일에는 비상 의자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보나마나 이번 주일은 교회가 터지도록 모여들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모두 철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죽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비로소 철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병자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4. 억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사람은 모두 무엇인가 억눌린 채 살아갑니다. 모두 어떤 멍에를 메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술, 담배, 노름, 마약 같은 나쁜 습관의 멍에를 메고 살아갑니다. 이것에 미친 사람들은 모두 이 멍에를 버리지 못하고 그것에 집착해서 살아갑니다. 이것 외에는 세상에 재미가 없는 줄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환한 세상을 등지고 어두컴컴한 방에 갇힌 채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화투에 미쳐 아침이 밝아오는 줄도 모르고 시간을 보냅니다. 얼마나 한심한 인생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모처럼 산을 가도 그 맑고 시원한 바람과 공기와 새들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고 한쪽에 앉아서 고스톱판을 벌립니다. 이것이 바로 멍에입니다. 오늘 이런 멍에를 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멍에는 예수를 믿어야만 벗을 수 있습니다. 예수 없이는 벗을 도리가없습니다. 가정의 주부들이 이 멍에를 벗지 못해서 노름하다가 구속이 되고 재산 날리고 그러지 않습니까 참 무서운 멍에입니다. 그런가 하면 폐쇄된 정신에 억눌려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 지독한 이기주의입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이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멍에의 굴레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어느 때보다 더 부유하게 살면서도 기쁨이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비혼 시대이고 불임 시대입니다. 결혼 적령기가 되면 사람들은 모두 결혼을 합니다. 결혼은 하나의 인생의 질서이고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 결혼마저도 사생활을 누리는 데 방해가 된다고 해서 기피하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미국의 처녀들은 40%나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일본의 처녀들은 60%나 결혼을 기피한다고 합니다. 결혼을 했어도 아이는 낳지 않으려는 풍조도 만연되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가정에 매이게 되고 사생활이 침해되고 직장 생활에 지장이 되니까 모두 구속받지 않으려고 회피합니다. 얼마나 이기적인 생활 태도입니까 이것이 이 시대의 가장 첨예한 이기주의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른들이 이렇게 이기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니까 아이들까지도 이기적이 되어갑니다. 어떤 어머니가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까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어울리지 않게 큰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책을 읽고 있는가 보니까 육아 교육법이라는 책입니다. 어린아기가 왜 그런 책을 읽느냐고 나무라니까 그 아이가 “내가 지금 육아 교육법적으로 교육을 잘 받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이 책을 읽고 있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이기적이 되면 세상이 재미가 없어 집니다. 그 인생도 재미가 없어지지만 주변의 이웃에도 즐거움이나 행복이 없어집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 이기적인 생각들이 가장 큰 멍에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재미도 없고 인간미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잘못된 무지의 멍에”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렇게 자유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무속과 무당신앙의 굴레를 쓰고 무지의 억압 속에서 멍에를 멘 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이름도 마음대로 짓지 못하고 이사도 결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입시 때만 되면 엿을 사다가 교문에 붙여놓고 밖에서 떨면서 빌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옛날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엄청난 축복입니다. 지금도 티베트 사람들은 아침이 되면 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돼지우리에서 기어 나온다고 합니다. 본래 인간은 동물과 하나라고 믿는 신앙 때문입니다. 전생에 내가 돼지였는지, 소였는지, 개였는지 누가 하느냐는 것입니다. 저 개가 지금 나를 잘 따르고 있는데 혹시 저 개가 몇 해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이 환생한 것인지 누가 아느냐는 것입니다. 전생의 개념에 매여 있고 윤회설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부터 자유를 얻은 것도 복음이 준 축복입니다. 멍에 가운데 가장 큰 명에는 죄로부터의 억압일 것입니다. 죄책감은 낮이나 밤니나 서 있으나 앉아 있으나 먹으나 잠을 자나 해결할 수 없는 무거운 멍에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부터 우리는 이런 억압들에게서 모두 자유스러워졌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이 세상을 누구보다도 자신만만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의 문제, 우리의 운명까지도 극복하고 모든 멍에를 벗어 던지고 자유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것이 복음이 준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잔파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우리는 이렇게 자유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큰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이 같은 은혜와 축복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가장 성숙한 도리입니다. 이 같은 은혜와 축복이 성탄절 아침에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고 여러분들의 마음속 깊이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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