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을 바라며 (눅4:18-19)
본문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 날 나사렛 회당에서 읽으신 선지 자 이사야의 글입니다. 그 글을 현대인 성경으로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성령님으로 충만케 하셨으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려고 나를 택하여 보내셨다. 그가 나를 보내 신 것은 마음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석방을 선언하며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복수 하는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며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슬픔대신 기쁨과 즐거움을 주고 근심대신 찬송을 주어 그들이 여호와께서 심은 의의 나무와 같아서 그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사 61:1-3) 이 말씀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리는 예언입니다. 백성들은 오랫동안 이 약속과 예언이 언제 누구를 통하여 자기들에게 이루어지게 될 것인가를 기 다려 왔습니다.
그런데 이날 예수님은 회당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이 말씀을 낭독하신 후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신 다음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 에 응하였느니라'(눅 4:21)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 이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또 수많은 서기관들과 랍비들이 이 말씀 을 가르치고 해석하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이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이루어졌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누구도 하지않았고 또 할 수도 없었던 대담한 선언을 확실하게 하셨습니다. 600년전 이사야가 그 백성들에게 예언한 그 예언의 내용이 이제 '나를 통해 서 너희들에게 이루어진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성령님이 내게 임했고', '나를 보내셨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나'는 곧 예수님 자신이시라는 선언입니다. 성경말씀은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는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 말이 너희에게 응하였다'고하신 그 선언은 예수님 이후 2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도 응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1990년대를 살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모두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현대의 언어로 말하자면 '해방과 자유의 복음'인 것입니다. 또 이 이사야의 예언은 그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가서 안식일과 희년의 사상에서 나오게 된 예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레 25:8-13) 하나님께서는 그 옛날 모세에게 희년 제도에 대하여 제 50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레 25:10) 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7년에 한번 맞이하는 안식년을 일곱번째 맞이 하고 그 다음해가 50년이 되는 해인데 그 해를 희년으로 정하여 사람과 땅 과 가축과 들짐승에게 자유를 공포하며 모든 빚을 탕감하여 주도록 한 특별 한 절기입니다. 그 날을 희년이라고 하였는데 원어로는 [슈낫요벨] 즉, '수양 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부는 해' 라고하여 '나팔절'이라고도 하며 영어로는 Jubilee라고 번역했고 우리말 성경에는 '희년'이라고 하였습니다.
희년이란 '복되고 길(吉)한 해'라는 뜻입니다. 그 해는 50년에 한번 오는 귀한 해로 용서와 화해,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해로 하나님이 정하신 해입니다. 죄를 용서하고 빚을 탕감해주며 팔았던 땅이나 집을 도로 찾고 잡힌 자 들이 놓임을 받는 일이 전 민족적으로 그 해에 모두 이루어집니다. 원래 이 제도는 노예나 종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인도주의적인 제도였습니다. 전쟁포 로로 잡아왔던지 돈을 주고 사왔던지, 노예를 적어도 7년간 부렸으면 7년째는 쉬게 하고 7년을 일곱번이나 맞도록 부렸다면 50년되는 해에는 무조건 자유를 주고 그 가족들과 후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한 것입니다. 노예뿐 아 니라 땅이나 농토에도 희년의 혜택을 베풀어 주어서 모두가 다 하나님이 지 으신 피조물 답게 살도록 해주라고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희년에는 가난 한 자들이 진 빚, 저당잡힌 집이나 땅, 할 수 없어 팔아 먹은 모든 것들을 형편에 따라 다 반환해 주도록 명하시고 있습니다. 즉 이 희면에 해는 가난 한 사람, 마음 상한 사람, 포로로 잡힌 사람, 옥에 갇힌 사람 등 , 불 운하고 불행한 사람들에게 그렇지 아니한 사람들이 인간적인 대우를 해 주 고 그 사랑을 베풀어 주라고 정해 주신 해였습니다. 세속의 역사에서 보는 것처럼 없는 자들과 눌린자들이 피 비린내 나는 혁명을 일으켜 기존의 질서를 타파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사람들이 먼저, 가진 자들이 사랑의 마음으로 자원하여, 없는자 . 약한자들에게 베풀어 주는 해가 희년입니다.
그래서 그 날은 전민족의 큰 절기이며 모두 기뻐하고 모 두 감사하고 모두 사랑하고 모두 마음이 같아지는 그야말로 복되고 길한 해 인 것입니다. 희년제도는 인간을 모두 인간답게 살게 하라는 하나님의 의지 를 나타내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이 제도와 그 뜻을 생각하면서 진정한 은혜의 해를 선포할 구 세주가 오시기를 대망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복되고 길한 소식이 들려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아직도 비극의 휴전선이 가로막혀 있고 남과 북이 분단된 채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은혜를 베풀지 못하고 화해하 지 못하는 상황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근래에 보시는 대로 동구권의 여러나라들은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고 그야말로 동구권의 희년을 맞이한 것같습니다. 전에 우리가 기대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정세의 변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는 8 15 광복과 국토의 분단 50주년이 되는 1995년을 민족통일의 희년으로 정하고 적어도 남과 북이 왕 래하며, 그것이 않될 경우 남과 북에 있는 교회만이라도 통일을 이루자고 선 언하였습니다. 이러한 선언을 알리는 것은 그 때가 통일을 이루는 소망의 날 이 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하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보자는 뜻 인 줄로 압니다. 우리가 국가의 통일을 생각할 때에 바로 이 말이 오늘 우리 귀에 응하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대안에 남북통일을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쁜일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이 희년을 선포하며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시기 위해 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사역이며 오늘 우리시대에는 그리스도 의 교회가 이 일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희년을 제정하며 계명으로 지키 도록 하신 그 하나님, 또 이 말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선언하신 예수님, 그리고 그 분의 사역을 이어 받은 오늘의 교회 , 이것이 역사를 꿰 뚫어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사업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사역이 이루어 지려면 먼저 주의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여 오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주의 성령님이 내게 임하셨으니 '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는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제조건입니다. 그리고 이 해방과 자유의 복음을 받는 대상은 모두가 다 우리사회에 소외계층들입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입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나 육 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가난한 이들, 정신적으로 포로된 이들, 영적 으로 눈먼 이들 , 그런 이들을 망라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해방과 자유, 참된 인간의 권리, 그리고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한말로 이들은 서민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누가 상류층이고 누가 중산층이고 또 누가 가난한 사람인지 이것을 구분하기가 참 어렵게 되었다고 느껴집니다. 생활수준이나 사람들의 의 식으로 보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 이 있는가 라고 물으면 대개는 '그저 먹고는 삽니다' 라고 합니다. '꽃동네 마을' 은 거지들을 수용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을 '거지 마을'이라고 하지 않고 '꽃동 네'라고 했고,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은혜'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가면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 아프리카 같은데는 정말 먹을 것이 없어 피골이 상접하여 굶어 죽는 어린이 노 인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하루에 6만명 이상 된다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연초에 방영된 TV방송에서 소박한 서울시민들의 금년 소원이 무어냐고 물으니까 작은 아파트라도 하나 마련하는 것, 교통문제가 해결되는 것, 마음놓고 수도물을 마실 수 있는 것 그 런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것이 가난한 우리 서민들의 소원이라면 당장 끼니 가 없어 굶어 죽는 사람들 보다야 얼마나 부자이며 얼마나 행복한가 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 라고 하신 말씀은 그러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한 자'의 의미는 사회적인 계급이나 빈부간에 계층을 구분한 것은 아 닌 것 같습니다. 예수의 말씀과 구원이 복음으로 들려지고, 이해되며, 받아들 여 질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는 그 지위, 혹은 그 소유와 관 계없이 복음이 복음으로 받아 드려지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여기서 가난 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없이는 살 수 없고 신앙 아니면 못사는 그러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겸손하고 그들의 심령은 가난합니다.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천당에 갔다는 것은 그가 가난하게 사는 거지여서가 아닙니다. 그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 믿고 사는 자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 의 선언은 복음인 것입니다. 언제나 복음은 그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 집니다. 그리고 복음을 복음으로 받은 자들은 마음을 비우고 사심이 없고 미 련이 없으며 세상과 그 일들에 대하여 초연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는 많은 '포로된 자들'이 있습니다. 그 무엇인가에 사로잡 혀 있는 사람, 그 어디엔가 얽매어 자유와 평화를 빼앗긴 사람들, 이들은 모 두 포로된 자들입니다. 자유가 사람을 인간답게 만들 것입니다. 그 자유를 얻지 못하는 한 그는 결국 그 무엇에든 포로입니다. 어떤 이는 물욕의 포로, 어떤 이는 명예의 포로, 또 어떤 이는 죄와 나쁜 습관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또 어떤이는 감정과 혈기의 포로가 될 수도 있고 또는 외곡된 심리현상 때문에 포로가 되어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같이 그 무 엇인가에 사로잡혀서 포로가 된 사람들을 자유케 합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8)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는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서 눈먼 자라고하는 것은 것은 육체적 시각장애를 말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영적 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들에 게 그 영적인 세계의 일들과 가치들을 깨닫도록 하는데 힘쓰셨습니다. 인간 은 영적존재이나 육적인 존재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영적존재로 다시 각성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보게 한다는 것은 치유를 통하여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완악한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너희가 소경이 되었다면 죄가 없으 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눌린 자를 해방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눌린 자란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부당하게 억압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심리적인 억압 으로 불안과 공포와 근심과 염려에 싸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을 부당하 게 억압하는 사회적인 여건과 제도를 개선해 나가야 하고 인간의 심리적 억 압은 하나님의 속죄의 은총을 체험함으로 없애야 합니다. 인간의 영혼과 육 체를 억압하는 모든 형태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하는 영'에 의하여 용서되지 않으면 않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눌린 자를 해방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해방자요 구원자이 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고, 이 역사안에 오시고, 우리의 삶의 한 중심에 오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나 혼자 아무리 잘 살고 아무 걱정이 없다고 해도 불행한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는 한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사회는 나만 편안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연대적인 관계가 있고 이웃에게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이 이 땅에 있는 한 누구도 행복한 생활을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 크리스챤은 오히려 그런 이들 이 있음으로해서 더 큰 도전을 받고 더 큰 사랑과 사명에 불타 오르게 되어 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감동된 사람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 사명 가운데 보내졌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 이 사명을 감당하 면 세상에서 슬퍼하는 자들에게 슬픔 대신 환희를 안겨주며 근심대신 즐거 운 찬송을 부르게 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해 볼만한 사명이요 또 우리 모두가 다 해야 될 영광스러운 책임입니다. 희망 속에 사는 사람들 성경
본문:눅 2:25-38, 눅 24:21 사도 바울이 말한 소망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희망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희망처럼 좋은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살아 갑니다. 내 일의 희망이 없고 꿈이 없다는 것처럼 서글픈 일은 없습니다. 영국의 작가 사무엘 죤슨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요, 희 망 그 자체가 행복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희망이 없다면 노력도 없습니다. 희망이 없는 곳에는 기쁨도 없습니다. 사람이 사는데 활력소가 없기 때문에 살 맛이 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항상 희망을 가지고 살아온 백성입니다. 그들은 환경도 좋지 못하고 오랜 세월 동안 수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꿈 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온 백성입니다.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가 나안 복지의 희망과 꿈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유랑 생활을 시 작한 것입니다.당장 그 꿈이 실현되지는 않아도 실망하지 않고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견디어 냈습니다. 그들이 비록 타국에서 나그네 생활을 할 때에도 희망만은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희망을 포기했으면 그들은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시므온과 안나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온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 줄 대망의 메시야를 기다리면 살아왔습니다. 보다 뛰어난 사람이 나타나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기대했다가 그가 죽으면 또 다른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그렇기 하기를 여러 번 되풀이 했지 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사는 것이 그들의 장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성전에 서 어린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그들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오 랫동안 이스라엘의 구속을 기다리면서 84년을 성전에서 살아왔습니다. 금식 하고 기도하며 목메어 기다리던 구속자 그가 세상에 오셨음을 확인하고 기 뻐 찬양하고 메시야의 장래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희망의 성취를 생각하면서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고 백하였습니다. 희망 그것은 힘이 원천이요 삶의 터전입니다. 유명한 화가 왓츠가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그린 그림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둥근 지구 위에 한 젊은 여인이 외롭게 앉아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수 건으로 눈을 가리웠는데 그녀는 소경입니다. 비파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 모 든 줄이 다 끊어지고 한 줄만 남아 있었으며 그녀의 뒤에는 희미한 별 하나 가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뒤에는 희미한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외줄로 아름다운 노래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 남은 줄 하나가 그녀에게는 희망의 줄입니다. 이 희망의 줄마저 끊어지 면 그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이 지옥에 가보니까 그 문에 "마지막 희망까지 끊긴 자들이 들어가는 집"이라는 문패가 걸려 있더라는 것입니다. 희망을 버리면 죽습니다. 인 생이 끝이납니다.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끝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보 통 사람과는 다른 면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을 때 다른 사람으로 변합니다. 천국을 바라보는 소망의 눈을 가진 분이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 소망의 사람들이 바로 나 자신인지를 점검해 귀한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갑니다. 본문에 나오는 노인들은 인생의 낙조에서 아무런 낙이 없이 살아야 할 처 지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생동하는 힘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구속자를 기다리면 살아온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삶의 힘이 되는 것은 바로 희망입니다. 영국의 시인 요 신학자인 죠지 허버트는 "희망은 가난한 자가 살아가는 양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가진 것이 없는다 사람이라 할지라도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이 넘치는 사람은 지금은 비록 힘든 일을 하지만 그 일에 짜증을 내지 않고 신바람 나게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난과 궁핍에 쫓겨 다녔지만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맹인 작가 헬렌 켈러는 "희망은 사람을 성공으로 이끄는 신앙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취와 부유가 또 다른 희망을 가지지 못하면 결국 부패해 버리거나 허무감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사람은 또다 른 목표를 위하여 계속 일합니다. 열심히 뜁니다. 영국의 문인
C.S.LW
IS는 "역사를 읽어 보면 현세를 위하여 가장 많이 일 하는 사람은 내세를 가장 많이 생각한 사람들이다."라는 말을 남기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지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늘의 별과 바다 의 모래와 같은 많은 자손의 환상을 가지고 그의 꿈을 펴갔습니다. 영국의 신학자 토마스 풀러는 "위대한 희망은 위대한 인물을 만든다"고 하 였습니다. 로마를 변화시킨 사도들, 노예 제도를 폐지시킨 복음주의자들, 이 땅 위에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안에 서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의욕이 차고 넘칩니다. 생기가 있습니다. 지금 이 어 려움을 대처해 나갈 힘이 없습니까 실패와 어려움에 빠져 가슴앓이를 하고 있습니까 그대의 가슴에 소망의 불이 꺼져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의 문을 여 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입으로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시인하는 당신의 가슴에 믿음을 부어 주십니다. 바로 그 믿음 이 바라는 것을 보게 하는 실상이 되어 줄 것입니다.
2. 희망은 인생의 악조건을 이기게 합니다. 본문의 노인들은 100세가 넘도록 오랫동안 살아온 분들입니다. 당시 안나 의 나이는 최소한 107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고통을 스스로 참아 내 고 슬픔을 달래고 살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이라는 보약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엘리오트 웨렌 라이스는 "희망은 질병,재앙,죄악을 고치는 특효약 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난치병도 희망이 있는 사람은 쉽게 치유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정신과 의사가 그의 수기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우리 사무실에는 실의에 차서 아무 감정도 없이 침울에 빠져 있는 환자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상담역을 맡은 의사가 그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놀라 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살 맛이 떨어진채 실의에 빠져 있던 환자들의 눈빛 이 반짝이며 얼굴에 생기가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희 망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영이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킨 것 입니다." 범죄한 사람이라도 개선의 희망이 있을 때 사랑할 수 있고 원만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잘못했어도 개선에 대한 희망을 가질 때 미워 하지 않게 됩니다. 부모 자식간에도 어떤 희망이 보이지 아니하면 그 관계 가 악화됩니다.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큰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에 대한 희망이 있을 때 회심하여 새사람이 됩니다. 소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그릇된 삶에서 돌아올 줄을 모릅니다. 희망은 사람 사이에 있는 상처를 치유합니다. 희망은 어떠한 고통이나 재난도 이기게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 라 나는 네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11).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은 어떤 환난과 어려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갑니다. 환난도 그들에게 고통을 주지 못합니다. 희망이 치유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은 기쁨을 잃지 않게 되며 언제나 밝고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안나처럼 희망을 가지고 건겅하고 장수하여 은혜의 축복을 누리고 주님의 오심을 눈으로 보는 축복을 입으시기를 바랍니다.
3. 희망을 가진 사람은 깨끗하게 살아 갑니다.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바라는 그 날을 위하여 늘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기다리는 지루함이나 곤고함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도 나이는 들었으나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 왔습니다. 안나 역시 늙도록 기도로 살아왔습니다. 수절하며 살아왔습니다. 깨끗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지조를 지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킵니다. 희망은 가진 사람들은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기 위하여 노력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죄를 멀리하고 주님을 본받 아 살기를 힘씁니다. 희망이 그들의 그릇된 삶에 경고를 줍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 게 하느니라"(요일 3:23). 하늘에 소망을 두는 자는 자기 자신을 세속에 물들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 합니다. 소망 중에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가 신랑 예수님을 맞아 영화로운 혼인 잔치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사는생활을 했습니다.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금식하면서 살았습니다. 말씀을 상고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을 따라 힘을 얻고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주님의 오심을 대망하며 살아가는 신앙인들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생활을 하며 삽시다. 기도로 준비합시다. 말씀으로 전도합시다. 전도로 준비합시다. 성전을 중심하여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사십시다. 의롭고 경건하게 사십시다. 감사하며 찬송함으로 기쁘게 살아갑시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 시므온과 안나처럼 여한이 없는 영광을 볼 것입니다. 희년의 축복 성경
본문:사 61:1-3 요즘의 사회에 자반 병리 현상에 대해 사회양심으로 부르짖는 사람들은 '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회복'을 한결같이 지적합니다. 바로 희년이란 말의 뜻은 '회복'이란 말입니다. 문제는 인간성 회복이 어떻게 바로 이루어지는가하는 방법론입니다. [용어해설] 가난한 자
(1):마음이 겸비한 자 (마 5:3). 은혜의 해
(2):희년(안식년을 일곱번 보낸 후 50년째 되는 해) (동) 상기하다, 회복, 복구하다. 재
(3):회개의 표현
1. 희년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게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 위한 안식의 규레 가 세가지 입니다.
첫째가 안식일이요(출 20:8-11), 7년마다 1년을 지키는 안식년이며 (레 25:1-7), 그리고 안식년이 일곱번 지난 다음 해 50년째 되는 해인 희년입니다 (레 25:8-5
5). 이 희년에는 파종도 추수도 않고 본인이나 친족 중에서 시간 주인에게 값을 치루고 되려 물려받은 것입니다.
2. 희년의 축복은 어떤 것입니까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게로 부터 온 축복을 사단에게 빼앗기는 결과로 나타 났습니다 (눅 4:6).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셔서 다시 본래 의 하나님의 소유로 넘겨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년의 축복은 해방얻은 것입니다 (레 25:11,12). 땀흘리며 수고 의 길을 가는 피곤한 인생이 안식을 누리는 날입니다 (계 14:13). 또 물욕, 정욕, 권력의 포로가 되어있는 현대인들에게 해방을 주는 영적 자유의 날 (사 61:11,눅4:18)입니다. 이 속박하는 영인 사단이 성령님의 법으로 묶이게 됩니다(롬8:2). 그리고 이 희년의 복은 근원적인 상처를 입은 인간에 대한 치유입니다 (사 6:11). 슬픔대신 찬송으로 옷입는 기쁨을 누리는 날 (사 61:1)입니다. 피곤한 육 신도 함께 치유함을 받습니다 (마 8:16,17). 또 이날은 욕심이 '무저갱'같은 인간의 욕망에 더이상 갇히지 않도록 채우는 풍요의 날입니다 (61:1 상, 빌 4:11-13).
3.희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두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희년은 맞이하기 전에 금식하며 회개햐야 합니다 (레 22:26-27). 그리고 화제를 드려야 합니다. 이는 부흥사경회와 총동원 새벽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전파한다'는 말이 세번 나옵니다. 이는 '숫양의 뿔'로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이 나팔을 불어 희년을 알렸습니다. 우리도 속죄 의 소리, 자유를 선포하는 소리, 안식, 풍요, 치유, 심판의 소리를 불어 넣 어야 합니다 (살전 4:16). [ 결 지금 우리 교회나 사회, 나라와 세계를 볼 때 그 어떤 정치나 사회단체가 인간으리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같은 절박한 때 우리 교회가 50일간의 영 적대각성 운동을 실시하여 희년의 은총을 받으십시다.
그런데 이날 예수님은 회당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이 말씀을 낭독하신 후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신 다음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 에 응하였느니라'(눅 4:21)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 이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또 수많은 서기관들과 랍비들이 이 말씀 을 가르치고 해석하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이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이루어졌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누구도 하지않았고 또 할 수도 없었던 대담한 선언을 확실하게 하셨습니다. 600년전 이사야가 그 백성들에게 예언한 그 예언의 내용이 이제 '나를 통해 서 너희들에게 이루어진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성령님이 내게 임했고', '나를 보내셨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나'는 곧 예수님 자신이시라는 선언입니다. 성경말씀은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는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 말이 너희에게 응하였다'고하신 그 선언은 예수님 이후 2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도 응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1990년대를 살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모두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현대의 언어로 말하자면 '해방과 자유의 복음'인 것입니다. 또 이 이사야의 예언은 그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가서 안식일과 희년의 사상에서 나오게 된 예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레 25:8-13) 하나님께서는 그 옛날 모세에게 희년 제도에 대하여 제 50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레 25:10) 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7년에 한번 맞이하는 안식년을 일곱번째 맞이 하고 그 다음해가 50년이 되는 해인데 그 해를 희년으로 정하여 사람과 땅 과 가축과 들짐승에게 자유를 공포하며 모든 빚을 탕감하여 주도록 한 특별 한 절기입니다. 그 날을 희년이라고 하였는데 원어로는 [슈낫요벨] 즉, '수양 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부는 해' 라고하여 '나팔절'이라고도 하며 영어로는 Jubilee라고 번역했고 우리말 성경에는 '희년'이라고 하였습니다.
희년이란 '복되고 길(吉)한 해'라는 뜻입니다. 그 해는 50년에 한번 오는 귀한 해로 용서와 화해,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해로 하나님이 정하신 해입니다. 죄를 용서하고 빚을 탕감해주며 팔았던 땅이나 집을 도로 찾고 잡힌 자 들이 놓임을 받는 일이 전 민족적으로 그 해에 모두 이루어집니다. 원래 이 제도는 노예나 종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인도주의적인 제도였습니다. 전쟁포 로로 잡아왔던지 돈을 주고 사왔던지, 노예를 적어도 7년간 부렸으면 7년째는 쉬게 하고 7년을 일곱번이나 맞도록 부렸다면 50년되는 해에는 무조건 자유를 주고 그 가족들과 후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한 것입니다. 노예뿐 아 니라 땅이나 농토에도 희년의 혜택을 베풀어 주어서 모두가 다 하나님이 지 으신 피조물 답게 살도록 해주라고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희년에는 가난 한 자들이 진 빚, 저당잡힌 집이나 땅, 할 수 없어 팔아 먹은 모든 것들을 형편에 따라 다 반환해 주도록 명하시고 있습니다. 즉 이 희면에 해는 가난 한 사람, 마음 상한 사람, 포로로 잡힌 사람, 옥에 갇힌 사람 등 , 불 운하고 불행한 사람들에게 그렇지 아니한 사람들이 인간적인 대우를 해 주 고 그 사랑을 베풀어 주라고 정해 주신 해였습니다. 세속의 역사에서 보는 것처럼 없는 자들과 눌린자들이 피 비린내 나는 혁명을 일으켜 기존의 질서를 타파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사람들이 먼저, 가진 자들이 사랑의 마음으로 자원하여, 없는자 . 약한자들에게 베풀어 주는 해가 희년입니다.
그래서 그 날은 전민족의 큰 절기이며 모두 기뻐하고 모 두 감사하고 모두 사랑하고 모두 마음이 같아지는 그야말로 복되고 길한 해 인 것입니다. 희년제도는 인간을 모두 인간답게 살게 하라는 하나님의 의지 를 나타내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이 제도와 그 뜻을 생각하면서 진정한 은혜의 해를 선포할 구 세주가 오시기를 대망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복되고 길한 소식이 들려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아직도 비극의 휴전선이 가로막혀 있고 남과 북이 분단된 채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은혜를 베풀지 못하고 화해하 지 못하는 상황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근래에 보시는 대로 동구권의 여러나라들은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고 그야말로 동구권의 희년을 맞이한 것같습니다. 전에 우리가 기대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정세의 변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는 8 15 광복과 국토의 분단 50주년이 되는 1995년을 민족통일의 희년으로 정하고 적어도 남과 북이 왕 래하며, 그것이 않될 경우 남과 북에 있는 교회만이라도 통일을 이루자고 선 언하였습니다. 이러한 선언을 알리는 것은 그 때가 통일을 이루는 소망의 날 이 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하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보자는 뜻 인 줄로 압니다. 우리가 국가의 통일을 생각할 때에 바로 이 말이 오늘 우리 귀에 응하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대안에 남북통일을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쁜일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이 희년을 선포하며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시기 위해 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사역이며 오늘 우리시대에는 그리스도 의 교회가 이 일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희년을 제정하며 계명으로 지키 도록 하신 그 하나님, 또 이 말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선언하신 예수님, 그리고 그 분의 사역을 이어 받은 오늘의 교회 , 이것이 역사를 꿰 뚫어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사업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사역이 이루어 지려면 먼저 주의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여 오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주의 성령님이 내게 임하셨으니 '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는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제조건입니다. 그리고 이 해방과 자유의 복음을 받는 대상은 모두가 다 우리사회에 소외계층들입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입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나 육 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가난한 이들, 정신적으로 포로된 이들, 영적 으로 눈먼 이들 , 그런 이들을 망라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해방과 자유, 참된 인간의 권리, 그리고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한말로 이들은 서민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누가 상류층이고 누가 중산층이고 또 누가 가난한 사람인지 이것을 구분하기가 참 어렵게 되었다고 느껴집니다. 생활수준이나 사람들의 의 식으로 보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 이 있는가 라고 물으면 대개는 '그저 먹고는 삽니다' 라고 합니다. '꽃동네 마을' 은 거지들을 수용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을 '거지 마을'이라고 하지 않고 '꽃동 네'라고 했고,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은혜'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가면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 아프리카 같은데는 정말 먹을 것이 없어 피골이 상접하여 굶어 죽는 어린이 노 인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하루에 6만명 이상 된다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연초에 방영된 TV방송에서 소박한 서울시민들의 금년 소원이 무어냐고 물으니까 작은 아파트라도 하나 마련하는 것, 교통문제가 해결되는 것, 마음놓고 수도물을 마실 수 있는 것 그 런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것이 가난한 우리 서민들의 소원이라면 당장 끼니 가 없어 굶어 죽는 사람들 보다야 얼마나 부자이며 얼마나 행복한가 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 라고 하신 말씀은 그러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한 자'의 의미는 사회적인 계급이나 빈부간에 계층을 구분한 것은 아 닌 것 같습니다. 예수의 말씀과 구원이 복음으로 들려지고, 이해되며, 받아들 여 질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는 그 지위, 혹은 그 소유와 관 계없이 복음이 복음으로 받아 드려지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여기서 가난 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없이는 살 수 없고 신앙 아니면 못사는 그러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겸손하고 그들의 심령은 가난합니다.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천당에 갔다는 것은 그가 가난하게 사는 거지여서가 아닙니다. 그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 믿고 사는 자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 의 선언은 복음인 것입니다. 언제나 복음은 그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 집니다. 그리고 복음을 복음으로 받은 자들은 마음을 비우고 사심이 없고 미 련이 없으며 세상과 그 일들에 대하여 초연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는 많은 '포로된 자들'이 있습니다. 그 무엇인가에 사로잡 혀 있는 사람, 그 어디엔가 얽매어 자유와 평화를 빼앗긴 사람들, 이들은 모 두 포로된 자들입니다. 자유가 사람을 인간답게 만들 것입니다. 그 자유를 얻지 못하는 한 그는 결국 그 무엇에든 포로입니다. 어떤 이는 물욕의 포로, 어떤 이는 명예의 포로, 또 어떤 이는 죄와 나쁜 습관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또 어떤이는 감정과 혈기의 포로가 될 수도 있고 또는 외곡된 심리현상 때문에 포로가 되어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같이 그 무 엇인가에 사로잡혀서 포로가 된 사람들을 자유케 합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8)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는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서 눈먼 자라고하는 것은 것은 육체적 시각장애를 말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영적 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들에 게 그 영적인 세계의 일들과 가치들을 깨닫도록 하는데 힘쓰셨습니다. 인간 은 영적존재이나 육적인 존재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영적존재로 다시 각성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보게 한다는 것은 치유를 통하여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완악한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너희가 소경이 되었다면 죄가 없으 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눌린 자를 해방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눌린 자란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부당하게 억압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심리적인 억압 으로 불안과 공포와 근심과 염려에 싸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을 부당하 게 억압하는 사회적인 여건과 제도를 개선해 나가야 하고 인간의 심리적 억 압은 하나님의 속죄의 은총을 체험함으로 없애야 합니다. 인간의 영혼과 육 체를 억압하는 모든 형태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하는 영'에 의하여 용서되지 않으면 않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눌린 자를 해방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해방자요 구원자이 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고, 이 역사안에 오시고, 우리의 삶의 한 중심에 오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나 혼자 아무리 잘 살고 아무 걱정이 없다고 해도 불행한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는 한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사회는 나만 편안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연대적인 관계가 있고 이웃에게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이 이 땅에 있는 한 누구도 행복한 생활을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 크리스챤은 오히려 그런 이들 이 있음으로해서 더 큰 도전을 받고 더 큰 사랑과 사명에 불타 오르게 되어 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감동된 사람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 사명 가운데 보내졌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 이 사명을 감당하 면 세상에서 슬퍼하는 자들에게 슬픔 대신 환희를 안겨주며 근심대신 즐거 운 찬송을 부르게 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해 볼만한 사명이요 또 우리 모두가 다 해야 될 영광스러운 책임입니다. 희망 속에 사는 사람들 성경
본문:눅 2:25-38, 눅 24:21 사도 바울이 말한 소망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희망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희망처럼 좋은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살아 갑니다. 내 일의 희망이 없고 꿈이 없다는 것처럼 서글픈 일은 없습니다. 영국의 작가 사무엘 죤슨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요, 희 망 그 자체가 행복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희망이 없다면 노력도 없습니다. 희망이 없는 곳에는 기쁨도 없습니다. 사람이 사는데 활력소가 없기 때문에 살 맛이 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항상 희망을 가지고 살아온 백성입니다. 그들은 환경도 좋지 못하고 오랜 세월 동안 수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꿈 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온 백성입니다.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가 나안 복지의 희망과 꿈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유랑 생활을 시 작한 것입니다.당장 그 꿈이 실현되지는 않아도 실망하지 않고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견디어 냈습니다. 그들이 비록 타국에서 나그네 생활을 할 때에도 희망만은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희망을 포기했으면 그들은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시므온과 안나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온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 줄 대망의 메시야를 기다리면 살아왔습니다. 보다 뛰어난 사람이 나타나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기대했다가 그가 죽으면 또 다른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그렇기 하기를 여러 번 되풀이 했지 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사는 것이 그들의 장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성전에 서 어린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그들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오 랫동안 이스라엘의 구속을 기다리면서 84년을 성전에서 살아왔습니다. 금식 하고 기도하며 목메어 기다리던 구속자 그가 세상에 오셨음을 확인하고 기 뻐 찬양하고 메시야의 장래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희망의 성취를 생각하면서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고 백하였습니다. 희망 그것은 힘이 원천이요 삶의 터전입니다. 유명한 화가 왓츠가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그린 그림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둥근 지구 위에 한 젊은 여인이 외롭게 앉아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수 건으로 눈을 가리웠는데 그녀는 소경입니다. 비파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 모 든 줄이 다 끊어지고 한 줄만 남아 있었으며 그녀의 뒤에는 희미한 별 하나 가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뒤에는 희미한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외줄로 아름다운 노래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 남은 줄 하나가 그녀에게는 희망의 줄입니다. 이 희망의 줄마저 끊어지 면 그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이 지옥에 가보니까 그 문에 "마지막 희망까지 끊긴 자들이 들어가는 집"이라는 문패가 걸려 있더라는 것입니다. 희망을 버리면 죽습니다. 인 생이 끝이납니다.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끝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보 통 사람과는 다른 면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을 때 다른 사람으로 변합니다. 천국을 바라보는 소망의 눈을 가진 분이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 소망의 사람들이 바로 나 자신인지를 점검해 귀한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갑니다. 본문에 나오는 노인들은 인생의 낙조에서 아무런 낙이 없이 살아야 할 처 지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생동하는 힘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구속자를 기다리면 살아온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삶의 힘이 되는 것은 바로 희망입니다. 영국의 시인 요 신학자인 죠지 허버트는 "희망은 가난한 자가 살아가는 양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가진 것이 없는다 사람이라 할지라도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이 넘치는 사람은 지금은 비록 힘든 일을 하지만 그 일에 짜증을 내지 않고 신바람 나게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난과 궁핍에 쫓겨 다녔지만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맹인 작가 헬렌 켈러는 "희망은 사람을 성공으로 이끄는 신앙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취와 부유가 또 다른 희망을 가지지 못하면 결국 부패해 버리거나 허무감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사람은 또다 른 목표를 위하여 계속 일합니다. 열심히 뜁니다. 영국의 문인
C.S.LW
IS는 "역사를 읽어 보면 현세를 위하여 가장 많이 일 하는 사람은 내세를 가장 많이 생각한 사람들이다."라는 말을 남기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지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늘의 별과 바다 의 모래와 같은 많은 자손의 환상을 가지고 그의 꿈을 펴갔습니다. 영국의 신학자 토마스 풀러는 "위대한 희망은 위대한 인물을 만든다"고 하 였습니다. 로마를 변화시킨 사도들, 노예 제도를 폐지시킨 복음주의자들, 이 땅 위에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안에 서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의욕이 차고 넘칩니다. 생기가 있습니다. 지금 이 어 려움을 대처해 나갈 힘이 없습니까 실패와 어려움에 빠져 가슴앓이를 하고 있습니까 그대의 가슴에 소망의 불이 꺼져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의 문을 여 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입으로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시인하는 당신의 가슴에 믿음을 부어 주십니다. 바로 그 믿음 이 바라는 것을 보게 하는 실상이 되어 줄 것입니다.
2. 희망은 인생의 악조건을 이기게 합니다. 본문의 노인들은 100세가 넘도록 오랫동안 살아온 분들입니다. 당시 안나 의 나이는 최소한 107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고통을 스스로 참아 내 고 슬픔을 달래고 살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이라는 보약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엘리오트 웨렌 라이스는 "희망은 질병,재앙,죄악을 고치는 특효약 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난치병도 희망이 있는 사람은 쉽게 치유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정신과 의사가 그의 수기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우리 사무실에는 실의에 차서 아무 감정도 없이 침울에 빠져 있는 환자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상담역을 맡은 의사가 그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놀라 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살 맛이 떨어진채 실의에 빠져 있던 환자들의 눈빛 이 반짝이며 얼굴에 생기가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희 망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영이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킨 것 입니다." 범죄한 사람이라도 개선의 희망이 있을 때 사랑할 수 있고 원만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잘못했어도 개선에 대한 희망을 가질 때 미워 하지 않게 됩니다. 부모 자식간에도 어떤 희망이 보이지 아니하면 그 관계 가 악화됩니다.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큰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에 대한 희망이 있을 때 회심하여 새사람이 됩니다. 소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그릇된 삶에서 돌아올 줄을 모릅니다. 희망은 사람 사이에 있는 상처를 치유합니다. 희망은 어떠한 고통이나 재난도 이기게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 라 나는 네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11).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은 어떤 환난과 어려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갑니다. 환난도 그들에게 고통을 주지 못합니다. 희망이 치유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은 기쁨을 잃지 않게 되며 언제나 밝고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안나처럼 희망을 가지고 건겅하고 장수하여 은혜의 축복을 누리고 주님의 오심을 눈으로 보는 축복을 입으시기를 바랍니다.
3. 희망을 가진 사람은 깨끗하게 살아 갑니다.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바라는 그 날을 위하여 늘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기다리는 지루함이나 곤고함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도 나이는 들었으나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 왔습니다. 안나 역시 늙도록 기도로 살아왔습니다. 수절하며 살아왔습니다. 깨끗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지조를 지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킵니다. 희망은 가진 사람들은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기 위하여 노력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죄를 멀리하고 주님을 본받 아 살기를 힘씁니다. 희망이 그들의 그릇된 삶에 경고를 줍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 게 하느니라"(요일 3:23). 하늘에 소망을 두는 자는 자기 자신을 세속에 물들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 합니다. 소망 중에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가 신랑 예수님을 맞아 영화로운 혼인 잔치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사는생활을 했습니다.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금식하면서 살았습니다. 말씀을 상고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을 따라 힘을 얻고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주님의 오심을 대망하며 살아가는 신앙인들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생활을 하며 삽시다. 기도로 준비합시다. 말씀으로 전도합시다. 전도로 준비합시다. 성전을 중심하여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사십시다. 의롭고 경건하게 사십시다. 감사하며 찬송함으로 기쁘게 살아갑시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 시므온과 안나처럼 여한이 없는 영광을 볼 것입니다. 희년의 축복 성경
본문:사 61:1-3 요즘의 사회에 자반 병리 현상에 대해 사회양심으로 부르짖는 사람들은 '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회복'을 한결같이 지적합니다. 바로 희년이란 말의 뜻은 '회복'이란 말입니다. 문제는 인간성 회복이 어떻게 바로 이루어지는가하는 방법론입니다. [용어해설] 가난한 자
(1):마음이 겸비한 자 (마 5:3). 은혜의 해
(2):희년(안식년을 일곱번 보낸 후 50년째 되는 해) (동) 상기하다, 회복, 복구하다. 재
(3):회개의 표현
1. 희년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게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 위한 안식의 규레 가 세가지 입니다.
첫째가 안식일이요(출 20:8-11), 7년마다 1년을 지키는 안식년이며 (레 25:1-7), 그리고 안식년이 일곱번 지난 다음 해 50년째 되는 해인 희년입니다 (레 25:8-5
5). 이 희년에는 파종도 추수도 않고 본인이나 친족 중에서 시간 주인에게 값을 치루고 되려 물려받은 것입니다.
2. 희년의 축복은 어떤 것입니까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게로 부터 온 축복을 사단에게 빼앗기는 결과로 나타 났습니다 (눅 4:6).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셔서 다시 본래 의 하나님의 소유로 넘겨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년의 축복은 해방얻은 것입니다 (레 25:11,12). 땀흘리며 수고 의 길을 가는 피곤한 인생이 안식을 누리는 날입니다 (계 14:13). 또 물욕, 정욕, 권력의 포로가 되어있는 현대인들에게 해방을 주는 영적 자유의 날 (사 61:11,눅4:18)입니다. 이 속박하는 영인 사단이 성령님의 법으로 묶이게 됩니다(롬8:2). 그리고 이 희년의 복은 근원적인 상처를 입은 인간에 대한 치유입니다 (사 6:11). 슬픔대신 찬송으로 옷입는 기쁨을 누리는 날 (사 61:1)입니다. 피곤한 육 신도 함께 치유함을 받습니다 (마 8:16,17). 또 이날은 욕심이 '무저갱'같은 인간의 욕망에 더이상 갇히지 않도록 채우는 풍요의 날입니다 (61:1 상, 빌 4:11-13).
3.희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두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희년은 맞이하기 전에 금식하며 회개햐야 합니다 (레 22:26-27). 그리고 화제를 드려야 합니다. 이는 부흥사경회와 총동원 새벽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전파한다'는 말이 세번 나옵니다. 이는 '숫양의 뿔'로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이 나팔을 불어 희년을 알렸습니다. 우리도 속죄 의 소리, 자유를 선포하는 소리, 안식, 풍요, 치유, 심판의 소리를 불어 넣 어야 합니다 (살전 4:16). [ 결 지금 우리 교회나 사회, 나라와 세계를 볼 때 그 어떤 정치나 사회단체가 인간으리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같은 절박한 때 우리 교회가 50일간의 영 적대각성 운동을 실시하여 희년의 은총을 받으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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