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예수는 하늘로 올라 가셨다 (눅24:49-53)

본문

지음 받은 피조 세계가 온통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의 표적입니다. 하늘이, 궁창이 그리고 그의 손으로 지은 모든 것들이 하나님 자신의 창조와 통치와 섭리의 표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신 표적은 그가 세상 중에 나타내신 ‘나사렛 예수 운동’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님으로 동정녀 몸을 통하여 탄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고, 나사렛에서 사시고, 예루살렘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무덤에 장사지낸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한지 40일 만에 다시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고 계십니다. 실로 엄청난 뉴스입니다. 경이로운 뉴스입니다. 2000년 동안 역사의 한가운데 없어질 줄 모르는 연속적 톱 뉴스로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복음(福音)의 뉴스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경제적, 문화적, 과학적 뉴스가 아니라 영원한 복음의 뉴스, 구원의 뉴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중에 죄인이 살고 있을 동안 죄인들에게는 언제나 기다려지는 소망의 뉴스입니다. 바로 복음의 쾌보(快報)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사건마다 그 어떤 사건도 충격적이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제한된 이성적인 지식으로는 불가해(不可解)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役事)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뉴스는 ‘권능’(δναμι), ‘표적’(τερ), ‘이적’(σμειον)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다른 여러 곳에 나오는 성경의 기록과 함께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 가셨다고 하는 그의 영광스러운 최후의 모습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실로 그의 지상에서의 종말은 십자가의 죽음과 권능의 부활로 말미암아, 축복으로 가득차 버린 영화로운 종말로 빛나고 있습니다.
I. 예수의 승천은 하나의 종말과 또 하나의 시작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에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과 그 사건 후에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그의 부활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부활 사건은 또한 거기에서 끝나거나 없어지거나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은 또 다른 사건으로 엄청난 진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부활하신 사건 후 40일 만에 하늘로 올라가는 일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51절에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 중에는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대단하고 엄청난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서 하늘로 옮기시는 경이로운 이동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기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에로의 옮김이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과학이나 기타 인간의 지식들이 자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의 종말과 또 하나의 시작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한 무대는 지나가고 또 다른 한 새로운 무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한한 시공계를 떠나 또 다른 무한한 공간 세계로 옮겨지는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보이는 세계를 지나 보이지 아니하는 새로운 실존의 영역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고별사 첫 머리에 말씀하신 ‘내 아버지 집’으로의 귀향이었습니다(요 14:1-3).
Ⅱ. 예수의 승천은 공개적인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1. 예수의 승천 장소는 베다니 앞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4장 50절에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누가가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기록한 예수님의 최후 승천 장소입니다. 바로 그 베다니 앞에는 감람산이 있었습니다(행 1:12).
그렇다면 예수는 베다니 앞에 있는 감람산에서 승천하셨다는 승천 장소의 명백한 입증이 됩니다. 역사 성립의 진실성은 어디에서 사건이 일어났는가 하는 장소(공간)성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2. 예수의 승천은 공개적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50절, 51절, 52절에 계속해서 저희 라고 하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저희를 데리고 , 저희를 떠나 , 저희가 큰 기쁨으로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9절에는 더 구체적으로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라고 하였습니다. 10절에 올라가실 때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라고 하였습니다. 11절에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 성경 구절들에는 제자들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승천을 친히 목격했다는 사실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희’는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을 위시하여 그를 따르던 여러 문도들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예수의 승천은 베다니 감람산에서 여러 목격자들이 보는 데서 이루어진 공개적 사건이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 사건의 역사적 공개성은 바단 승천 뿐아닙니다. 그의 성탄과, 무죄의 삶과, 이적과 기사 그리고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이 만인 앞에서 공개된 역사적 사건이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예수의 부활 사건을 증거할 때 이것은 한편 구석에서 되어진 일이 아니라고 설파하였습니다(행 26:21). 예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은 만인공지의 역사적 사실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승천은 예외없이 만인공지의 공개적 사건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만민을 위한 속죄 사역 성취의 영광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만인의 구주요 만민에게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눅 2:10).
3. 예수의 승천은 축복의 승천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50절에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라고 하였습니다. 51절에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은총의 장면입니다. 예수는 인생을 축복하러 오셨습니다. 그는 친히 ‘복’의 설교를 하였습니다(마 5:1-11). 그리고 친히 어린아이들을 품에 품으시고 축복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여 저들에게 복을 빌고 어떤 때는 안수하시며 복을 빌어 주시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디베랴 언덕에서 오병이어를 축사 하사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기도 하였고, 마지막 성만찬의 식탁에서도 축사하였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도 사죄의 축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도 저들에게 평강의 축복을 기원했습니다. 지금, 그는 하늘에 오르시는 마지막 순간에도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축복 행위는 예수 사건의 계속과 진행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대제사장으로서의 축복기도를 계속 하시고 있다고 하였습니다(롬 8:34, 히 24:25). 결코 그의 종말은 어둡지 않았습니다. 결코 그의 종말은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쓸쓸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패전의 쓴잔을 마시고 역사 속에 사라져 버렸던 알렉산더나 시저, 나폴레옹 같은 세상의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최후는 저렇게 밝았고, 부유했고, 풍성했고, 빛났습니다. 이유는 그가 패하여 없어지거나 사라지거나 물러감이 아니라, 살아서 승리하여 영광스럽게 하늘로 올라가시고 지금도 살아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그 두 손을 높이 들고 끝까지 축복하시던 영광스러운 주님이었습니다.
Ⅲ. 예수의 승천은 새 삶의 원동력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 24장 52절로 53절에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고 했습니다.
1.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 승천의 영광 앞에 경배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그의 탄생이 동방 박사들의 기쁜 경배를 받으심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의 승천은 제자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진실로 영화로운 예수는 우리 인간들의 예배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2. 큰 기쁨과 찬미를 불러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 하거나 불안해하거나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저희를 떠난 마당에 저들은 큰 기쁨을 맛보았고 찬송이 터지는 새로운 감격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저들을 떠나므로 그 관계가 끝남이 아니라, 하늘에 오르사 영존하시는 새로운 관계를 맺는 확신의 은총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3.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늘 성전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이제 새로운 또 하나의 다른 사건을 맞이한 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성령님으로 다시 저들 가운데 오실 오순절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늘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앞으로 예수의 축복을 받을 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님이었습니다(행 1:4-5). 저들은 새롭게 될 성령님세례를 받을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권능을 덧입을 자들이었습니다. 그 후에 저들은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으로 불을 지르는 세기적 복음의 폭탄들이 될 자들이었습니다(행 1:8) 그래서 저들은 바로 새로운 세기의 새 사건을 맞이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대기발령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사건은 언제나 역사의 한가운데 신비로운 사건으로 남아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언어의 서술로 남겨질 역사적 기록인 동시에, 그 기록보다 더한 영감의 사실로 마음 속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예수의 승천도 바로 그러합니다. 그의 승천은 그것을 친히 목도한 제자들 뿐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 사건을 기록한 성경을 믿는 모든 신자들의 마음 속에 불멸의 영감으로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어디로 가셨는가 지금 어디 계시는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부활하신 예수는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시작과 출발을 알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만인공지의 역사적 사건이요 사실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는 자들에게 사람들의 본분인 경배와 찬양과 기도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예수 승천은 슬픔의 이별이 아니라 기쁨의 새 출발이었습니다. 예수 승천은 그가 우리에게 인생의 최후 승리가 축복의 환희로 가득 차 버린다고 하는 미래적 소망을 보여준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들이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최후의 날 우리 승천의 예조입니다. 바로 예수 승천은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최후의 영광을 보여주는 보장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이런 소망의 미련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어느 섬에 야자잎이 높이 솟았는지 나로서는 모르옵니다. 내가 아는 것은 단 한 가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으로부터 떠날 수 없다는 것··· 사람이 사는 세상에 죄인의 역사가 계속될 동안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 가셨다는 이 사실은 영원한 복음의 쾌보(快報)가 될 것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904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