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강을 건넙시다 (수3:1-6)
본문
지금으로부터 한 50년 전에 영국 해협을 헤엄 쳐서 왕복해 뉴스의 초점이 된 플로렌스 채드윅이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수영 선수 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은 36세가 되던 해인 1952년 7월 4일, LA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주 아름다운 섬인 카타리나 섬에서부터 캘리포니아 해변까지 수영해서 가겠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굉장한 화제가 되었습니다. 미국 TV는 전국에 이 광경을 방영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착 시간을 전후해서 수많은 캘리포니아 사람들이 해변가에 와서 그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6시간이나 계속 수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짙은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안개를 헤치고 나아가던 플로렌스는 사력을 다했지만 자기 힘이 점점 달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권을 하고 자기를 따라오던 구조선에 승선하게 되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녀가 기권을 하고 육지로 돌아와서 보니까 안개 때문에 못 보았던 거리가 불과 육지에서 500미터도 안되는 거리였던 것입니다. 실패 이후에 기자들과 인터뷰를 가진 자리에서 ‘왜 실패를 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플로렌스 채드윅은 매우 흥미로운 대답을 했습니다. “추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피곤했기 때문도 아니였습니다. 사실은 안개 때문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안개 때문에 제가 목표를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표 지점을 볼수 있었다면 저는 어찌해서든 도착을 했었을 것입니다.” 풀로렌스 채드윅에게 있어서 안개는 마지막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실패의 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 길에는 많은 장애물들을 만나게 되고, 그 장애물 때문에 포기해야하고, 성공하지 못하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세상 살면서 어려움없이, 문제 없이, 별 탈 없이 잘 되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세상사가 그렇지 못합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어떤이는 몸이 아파서, 아픈 몸 때문에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이는 일이 잘 안되어서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해서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이는 몸도 건강하고, 돈도 있는데 자식 때문에 속을 썩으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이는 부모나, 형제, 친척과 이웃과의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해서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지금, 여러분들이 행복한 삶, 축복된 삶,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런 삶을 방해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들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었던 성경은, 우리들에게 있는 이런 여러 모양의 문제와 사건과 일들을 요단강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 요단강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만나는 장애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들의 꿈의 성취요, 그들의 목표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요단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목표를 실현하기 전에 뛰어넘어야 할 최후의 과제요,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어려움, 문제, 방해의 모습들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매우 힘든 상황, 요단강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 개인이나, 가정을 보면 나름대로의 다 요단강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여러 모양의 요단강이 있습니다. 요단강의 폭이 짧으냐 길으냐의 차이지 다 요단강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격고 있는 민족적인 시련이나 개인, 그리고 가정이 격고 있는 시련들이 결코 이유없는 고난이라 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 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회개하고, 다시 바로 선다면 민족적인 시련이, 개인과 가정과 교회의 당한 시련이, 우리 민족과 가정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사건을 반드시 보게 되리라 믿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지난 주일에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만난 요단강을 어떻게 건너게 되었는지를 살피면서, 오늘 우리 민족이, 우리 가정과 교회가, 그리고 우리 성도들 한 사람 사람이 어떻게 하면 요단강을 건너 주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축복된 삶을 살수 있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잘 붙들어서 우리 앞에 있는 요단강을 건널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모습의 요단강이던 건너가야 합니다. 그래야 가나안이 주어집니다. 어떤 요단강이던 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건너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처럼 건너기 위해서 아침 일찍이 일어나 건널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났다는 것은 여호수아는 가나안, 축복의 역사를 이루려고 들어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요단강을 건널 길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 힘으로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건날 수 없나이다. 길을 내시옵소서” 이렇게 하기를 몇일 요단강 도하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온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드디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힘으로는 요단강을 건널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 건너려다 오히려 빠져 죽습니다. 지금 내게 당한 이 힘들고 어려운 문제, 답답하고 괴로운 문제, 불안하고 초조한 문제, 미치고 팔딱 뛰고 싶은 일들을 여러분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해결하실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요단강을 건널수 있도록 길을 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요단강을 건너야 할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준비해야 합니다. 즉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앞에 우리들의 요단강을 가지고 나아와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 참 답답합니다. 정말 힘듭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해결하여 주시옵솟. 하나님 길을 내시기 원합니다.” 부르짖을 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널 길을 내실줄 믿습니다. 우리앞에 있는 요단강(문제, 사건, 어려움)를 건너려면
1.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요단강을 건널수 있도록 명령하신 명령이 무엇입니까 3절 말씀을 같이 봅니다.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 ‘언약궤를 보고 쫓아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 언약궤가 상징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광야를 행진 할 때에는 제일 앞에 언약궤를 앞세우고 그들이 뒤를 따라 갔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그들 앞서 간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이 진행하다가 머물면 장막을 치는데 이 언약궤는 한 복판(중앙)에 세웁니다. 그리고 그 언약궤를 중심하여 12지파가 진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행진할 때에는 언약궤를 앞세우고, 진을 칠 때에는 가운데 둔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상한 것은 행진 할 때에 그 언약궤 가까이 가지 말고 이천 규빗(약 1Km)정도 앞서 가게 하라고 합니다. 1Km정도면 굉장히 먼 거리입니다. 왜 언약궤를 멀리 있게 했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모든 백성이 언약궤를 볼수 있도록, 모두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광야를 행진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는 적어도 200만명이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이런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가는데 언약궤를 바로 앞에 세웠다면 앞에 있는 사람의 뒤통수만 보이지 언약궤는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모습만 보이고, 사람들의 소리만 듣다가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요단강을 건널때에 언약궤를 바라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앞사람, 뒷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 네게 호흡을 주시고, 너를 이 땅에 존재케 한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신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언약궤, 곧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언약궤를 바라보지 않고 요단강을 본다고 해 보십시오. 즉, 우리에게 있는 문제만 바라보고, 안되고, 힘든것만 바라보십시오. 우리들은 건널수가 없습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 이 사람, 저사람을 기도중에 생각해 봅니다. 어떤 때는 그 성도만 생각하면 안타깝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일이 잘되어야 할 텐데, 왜 일이 그렇게 잘 안풀리는지, 이제 문제가 그만좀 있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문제속에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힘을 주소서. 일이 잘되게 하소서. 어려움을 잘 이기게 하소서. 축복하여 주소서”
그런데 어떤이들을 생각하면 참 속이 상합니다. 열심히 해야 데는데, 주님을 붙들어 하는데, 그렇게 해야할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있으면 속이 상합니다. 목사가 시험에 듭니다. “왜 저럴까 왜 안할까” 낙심이 됩니다. 왜 이런 마음이 듭니까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보기 때문입니다. 또 앞사람, 뒷사람을 바라 본다고 해보십시오. 즉, 이 사람, 저 사람의 경험과 말과 생각들을 듣는다고 했을 때 우리들은 요단강을 건너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생각과 경험과 말들이 다 틀리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람들에게서 듣는 것은 부정적인 말, 실패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여호수아 돈게 아니야, 지금 요단강물이 철철 넘치고 있는데 말이야, 어떻게 여기를 건널수 있다고 그래” 제발 부정적인 말, 유익이 안되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한다고 이득이 없습니다. 하는 사람 은혜 떨어져, 듣는 사람 시험에 들어,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더 괴로워 합니다. 부족하거나 연약한 모습을 보거든 ‘기도해 주세요’‘힘을 북돋아 주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요단강을 내 생각과 지혜와 방법으로는 건널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건널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 생각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은 요단강을 못건넌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요단강을 건널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앞과 뒤의 사람이 무엇이라 하든 말든, 요단강물이 철철 흘러 넘치든 말든 우리는 오직 언약궤, 하나님, 주께서 주신 말씀을 따라 나아가면 요단강이 갈라지게 될줄 믿습니다. 내가 갈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가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건널수 있도록 길을 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길이 되십니다. 생명이 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인도하는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앞서 가시는 하나님, 그분은 분명 우리를 살길로 인도하십니다. 되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 있게 하시기 위하여 백성들 앞서 요단강에 먼저 들어가셔서 그것을 바라보고 뒤쫓아 오라고 합니다. 오직 우리들은 주님만 바라보고 나가면 어떤 요단강이든 분명히 건너게 될줄 믿습니다. 오늘날 앞서 가시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 문제와 사건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럴 때 문제를 바라보기 전에 문제의 해결자 되시는 주님께 초점을 맞추십시오. 그럴 때 문제는 적게 보이고, 주님은 크게 보이기에 문제속에서 승리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좇아 가느냐갸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물위로 걸어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나갔던 베드로도 주님처럼 물위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시선을 바다에 두지 않고 주님께 둘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선을 주께 두지 않고 바다의 물과 바람에 두었더니 (마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오직 주만 바라봅시다. 주님이 무엇이라 말씀하는지에 귀를 기울입시다. 살고 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되고 안되고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이 요단강을 건너게 하는 힘이 될것입니다.
2.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 하나님은 ‘백성들의 삶을 성결케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야 할 시점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듣기를 원하는 말씀은 ‘어떻게 하면 요단강을 쉽게 건너갈 수 있겠느냐’라는 것일것니다. 지금 경제위기시대에 있는 우리 민족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이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빨리 극복해 나가고, 해결해 나갈수 있을 것인가가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쉽게 경제를 회복할 것인가가 아닙니까 오늘 나름대로의 문제들이 있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듣기를 원하는 말씀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몸이 아픈 사람이라면 금방 나을수 있을 해결책, 사업이 잘 안되는 분이라면 어떻게 하면 사업이 잘 될 수 있을까에 대한 해답을 듣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저도 관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전도를 잘해서, 또 잘하게 해서 영혼구원의 역사를 많이 이룰수 있을까
그런데 이때 속 시원한 해답을 들려 주시던, 길을 열어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널 그들에게 무슨 해결책을 내어 놓습니까 5절 말씀을 같이 봅니다. 무엇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이것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 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하는 내 앞에 오늘 말씀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상관이 없는것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 하고 아주 중요한 상관이 있습니다. 자 보십시다.
요즘 여러분들이 메스컴을 통해 경제회복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빨리 경제를 회복할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져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무엇을 기도합니까 “하나님, 빨리 이 어려운 시기를 지나게 하옵소서. 경제를 빨리 회복시켜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문제가 있고, 아픔이 있고,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 어려움을 빨리 해결하여 주옵소서. 빨리 병을 고쳐 주옵소서. 빨리 물질의 복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좋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한가지 있습니다. 오늘 이시간, 이시점에서 우리 민족의 최대문제가 경제회복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경제회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문제해결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병 고침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물질의 축복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 경제가 번영할 때 어떠했습니까 호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돈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관리하고, 무엇을 위하여 써야 할지에 대한 바른 기준이 없었기에 마구 써 버렸습니다. 정말 사용해야 할 때는 사용하지 않고 죄짓는데, 자기 욕심을 부리는데 사용을 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그 대가를 지불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할 때 어떠했습니까 우리에게 문제가 없고 평탄할 때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사업이 잘될 때 어떠했습니까 우리들은 건강을 주셨을때는 정작 그 건강한 몸을 가지고 주를 섬기며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좋은대로, 내 가고싶은대로, 내 원하는대로 했습니다. 우리가 문제가 없고 어려움이 없을때는 하나님을 찾지도않고, 하나님께대한 마음이 멀어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업이 잘될때에 사업이 바쁘다는 핑계로 사업에만 몰두하며 하나님도, 교회도 나 몰라라 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지금 빨리 경제가 회복되면 큰 일납니다. 지금 건강주시면, 문제해결해 주시면, 사업이 잘되게 하시면 큰 일납니다. 제가 악담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누구 못지않게 여러분들이 잘되기를 원하고, 어려움이 없으면 좋겠고, 사업이 잘되었으면 좋겠고, 빨리 경제가 회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회복되기전에, 건강하기 전에, 사업이 잘되기전에, 해결이 되기전에 먼저 선행이 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 외부에 있는것들의 해결이 아니라 우리 내면이 준비되어지는 일입니다. 지금 경제회복이 된다면 우리는 과거 허랑방탕하던 그시절로 돌아갑니다. 죄만 짓습니다. 지금 문제가 해결이 된다면 우리들은 예전의 삶의 모습으로, 즉 하나님도 필요없고 거저 세상속으로 또 들어가 죄를 지을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우리 인생이 끝이 날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다급한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해결을 주셨을 때에 이제는 전에와 같은 삶, 생활, 생각이 아니라 어떤 것을 주셔서도 정말 하나님앞에서 믿음의 길로 행할 수 있는 그릇이 준비되는것입니다. 요단강 도하를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라는 말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면 그들이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가나안땅에 들어갈것인데,
그런데 그들이 그런 상태로 요단강을 건너가봐야 가나안땅에 들어가서도 광야에서 하나님을 배반하며, 하나님앞에 범죄했던 일들이 그대로 있었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성결케하고 나아갔더니 요단강은 하나님이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있는 문제들 자체만 바라보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하나님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것보다도,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을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을 믿음으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절대적인 하나님을 의지하고, 내 남은 생애 주님을 믿고 따라가겠다는 믿음의 그릇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준비될 때에 그때 요단강이 갈라질것이고, 그렇게해서 들어간 가나안, 그렇게 해서 얻은 건강, 그렇게 해서 얻은 사업의 축복이 절대적인 복인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려움 문제를 통하여 내 믿음을 굳게 세워놓았더니 사업이 아무리 바빠도 주님을 우선할수 있게 되는 것이고, 몸이 아픈 것을 통해서 내 믿음을 굳게 해 놓았더니 주신 건강가지고 주님앞에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여러 많은 일들을 통해 자족할 수 있는 은혜를 얻게 됩니다. 여러분, 문제가 문제 아닙니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급한 것은 우리가 성결케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준비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들앞에 있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줄 믿습니다.
3.믿음으로 앞으로 나가라고 명령하십니다. 6절말씀을 다 같이 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씀입니까 제사장들에게 백성앞서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너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의 요단강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15절의 상황을 보면 요단강물이 넘칠 때입니다. 물이 하나도 없는 요단강이 아니라 요단강 물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 앞에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내 앞에 있습니다. 우리들은 강이 갈라져야 갈수 있다고 지금 버티고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주시지도 않았지만, 여전히 힘들고 어렵지만, 여전히 몸은 아프고 불편하지만, 상황은 변함이 없지만, 우리들은 그 문제 때문에 아무것도하지 못하고 주저 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문제속을 지나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능력을 주셔야 전도하겠습니다.”가 아니라, “하나님, 나는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나는 입이 둔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나를 통해서 예수의 복음을 듣게 하실줄 믿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나갈 때 요단강이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앞으로 나가라고 하십니다. “주님만 믿습니다. 나는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지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갑니다. 찬양하며 갑니다. 찬양할 거리가 없어 보이는 내 삶의 장에서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며 믿음으로 나갈 때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이 있을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한 우리 앞에 있는 어떤 요단강일지라도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고, 세상의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질병의 요단강을 갈라지게 합니다. 문제의 해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막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몹시 추운 겨울에 험한 산길을 어린아이를 업은 어머니가 걷고 있었습니다. 너무너무 추워서 그만 그 어머니는 온 몸이 얼어 얼마 안가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에 마침 어떤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가다가 그 애처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이 운전수는 그 여인을 살리기 위해 한가지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 옆에 도착하여 이 운전수는 그 여인에게 어린아기만 차에 태우게 하고는 그 여인은 차에 타지 아니하고 멀찍이 갔습니다. 이 운전수는 그 여인의 발걸음에 맞추어서 천천히 가는 듯 하다가 속력을 내서 달아나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런 생각없이 뒤따라오던 그 어머니는 이 운전수를 어린이 유괴범으로 알고 소리지르면서 있는 힘을 다해서 뛰어갔습니다. 얼마쯤 가노라니 그 차가 눈앞에 보이더니 아주 천천히 갑니다. 거의 다 갔을 무렵에 이 차는 또 달아나 버립니다. 이렇게 하기를 십여리를 뛰다보니 추워서 얼어 죽어가던 그 여인의 몸은 다 녹아지고 온 몸에서 땀이 날 정도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운전수는 그제서야 정차를 하고 차에 올라 타게하고 어린아기를 주었답니다. 이 여인은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원망 섞인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때 운전수는 말하기를 ‘당신이 만약 대뜸 차에 올라타고 갔으면 좋을 것 같지만 너무 몸이 얼었기 때문에 그대로 탔다가는 당신도 이 어린이도 다 죽기 쉽기 때문에 몸을 녹이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랬노라’고 말했답니다. 가나안 땅, 하나님의 축복된 삶을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단강을 주심은 우리를 애태우고, 고생케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복되게 하시려고,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더 잘되게 하시려고 요단강을 주셨습니다. 요단강을 주셨다고 원망불평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이 요단강으로 인하여 우리들 자신을 준비합시다. 하나님은 더 큰 축복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로 준비케 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가운데 굳게 서는 사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줄 믿습니다. 고난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조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그러나 고난의 건너편에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가나안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 우리앞에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축복이 열려질 줄 믿습니다. 나를 향한 이런 하나님의 축복의 사건을 볼수 있다면 우리는 요단강을 건널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의 꿈을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성은 36세가 되던 해인 1952년 7월 4일, LA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주 아름다운 섬인 카타리나 섬에서부터 캘리포니아 해변까지 수영해서 가겠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굉장한 화제가 되었습니다. 미국 TV는 전국에 이 광경을 방영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착 시간을 전후해서 수많은 캘리포니아 사람들이 해변가에 와서 그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6시간이나 계속 수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짙은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안개를 헤치고 나아가던 플로렌스는 사력을 다했지만 자기 힘이 점점 달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권을 하고 자기를 따라오던 구조선에 승선하게 되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녀가 기권을 하고 육지로 돌아와서 보니까 안개 때문에 못 보았던 거리가 불과 육지에서 500미터도 안되는 거리였던 것입니다. 실패 이후에 기자들과 인터뷰를 가진 자리에서 ‘왜 실패를 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플로렌스 채드윅은 매우 흥미로운 대답을 했습니다. “추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피곤했기 때문도 아니였습니다. 사실은 안개 때문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안개 때문에 제가 목표를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표 지점을 볼수 있었다면 저는 어찌해서든 도착을 했었을 것입니다.” 풀로렌스 채드윅에게 있어서 안개는 마지막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실패의 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 길에는 많은 장애물들을 만나게 되고, 그 장애물 때문에 포기해야하고, 성공하지 못하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세상 살면서 어려움없이, 문제 없이, 별 탈 없이 잘 되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세상사가 그렇지 못합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어떤이는 몸이 아파서, 아픈 몸 때문에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이는 일이 잘 안되어서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해서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이는 몸도 건강하고, 돈도 있는데 자식 때문에 속을 썩으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이는 부모나, 형제, 친척과 이웃과의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해서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지금, 여러분들이 행복한 삶, 축복된 삶,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런 삶을 방해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들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었던 성경은, 우리들에게 있는 이런 여러 모양의 문제와 사건과 일들을 요단강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 요단강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만나는 장애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들의 꿈의 성취요, 그들의 목표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요단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목표를 실현하기 전에 뛰어넘어야 할 최후의 과제요,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어려움, 문제, 방해의 모습들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매우 힘든 상황, 요단강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 개인이나, 가정을 보면 나름대로의 다 요단강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여러 모양의 요단강이 있습니다. 요단강의 폭이 짧으냐 길으냐의 차이지 다 요단강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격고 있는 민족적인 시련이나 개인, 그리고 가정이 격고 있는 시련들이 결코 이유없는 고난이라 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 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회개하고, 다시 바로 선다면 민족적인 시련이, 개인과 가정과 교회의 당한 시련이, 우리 민족과 가정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사건을 반드시 보게 되리라 믿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지난 주일에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만난 요단강을 어떻게 건너게 되었는지를 살피면서, 오늘 우리 민족이, 우리 가정과 교회가, 그리고 우리 성도들 한 사람 사람이 어떻게 하면 요단강을 건너 주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축복된 삶을 살수 있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잘 붙들어서 우리 앞에 있는 요단강을 건널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모습의 요단강이던 건너가야 합니다. 그래야 가나안이 주어집니다. 어떤 요단강이던 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건너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처럼 건너기 위해서 아침 일찍이 일어나 건널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났다는 것은 여호수아는 가나안, 축복의 역사를 이루려고 들어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요단강을 건널 길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 힘으로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건날 수 없나이다. 길을 내시옵소서” 이렇게 하기를 몇일 요단강 도하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온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드디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힘으로는 요단강을 건널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 건너려다 오히려 빠져 죽습니다. 지금 내게 당한 이 힘들고 어려운 문제, 답답하고 괴로운 문제, 불안하고 초조한 문제, 미치고 팔딱 뛰고 싶은 일들을 여러분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해결하실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요단강을 건널수 있도록 길을 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요단강을 건너야 할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준비해야 합니다. 즉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앞에 우리들의 요단강을 가지고 나아와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 참 답답합니다. 정말 힘듭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해결하여 주시옵솟. 하나님 길을 내시기 원합니다.” 부르짖을 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널 길을 내실줄 믿습니다. 우리앞에 있는 요단강(문제, 사건, 어려움)를 건너려면
1.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요단강을 건널수 있도록 명령하신 명령이 무엇입니까 3절 말씀을 같이 봅니다.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 ‘언약궤를 보고 쫓아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 언약궤가 상징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광야를 행진 할 때에는 제일 앞에 언약궤를 앞세우고 그들이 뒤를 따라 갔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그들 앞서 간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이 진행하다가 머물면 장막을 치는데 이 언약궤는 한 복판(중앙)에 세웁니다. 그리고 그 언약궤를 중심하여 12지파가 진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행진할 때에는 언약궤를 앞세우고, 진을 칠 때에는 가운데 둔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상한 것은 행진 할 때에 그 언약궤 가까이 가지 말고 이천 규빗(약 1Km)정도 앞서 가게 하라고 합니다. 1Km정도면 굉장히 먼 거리입니다. 왜 언약궤를 멀리 있게 했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모든 백성이 언약궤를 볼수 있도록, 모두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광야를 행진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는 적어도 200만명이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이런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가는데 언약궤를 바로 앞에 세웠다면 앞에 있는 사람의 뒤통수만 보이지 언약궤는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모습만 보이고, 사람들의 소리만 듣다가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요단강을 건널때에 언약궤를 바라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앞사람, 뒷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 네게 호흡을 주시고, 너를 이 땅에 존재케 한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신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언약궤, 곧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언약궤를 바라보지 않고 요단강을 본다고 해 보십시오. 즉, 우리에게 있는 문제만 바라보고, 안되고, 힘든것만 바라보십시오. 우리들은 건널수가 없습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 이 사람, 저사람을 기도중에 생각해 봅니다. 어떤 때는 그 성도만 생각하면 안타깝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일이 잘되어야 할 텐데, 왜 일이 그렇게 잘 안풀리는지, 이제 문제가 그만좀 있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문제속에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힘을 주소서. 일이 잘되게 하소서. 어려움을 잘 이기게 하소서. 축복하여 주소서”
그런데 어떤이들을 생각하면 참 속이 상합니다. 열심히 해야 데는데, 주님을 붙들어 하는데, 그렇게 해야할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있으면 속이 상합니다. 목사가 시험에 듭니다. “왜 저럴까 왜 안할까” 낙심이 됩니다. 왜 이런 마음이 듭니까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보기 때문입니다. 또 앞사람, 뒷사람을 바라 본다고 해보십시오. 즉, 이 사람, 저 사람의 경험과 말과 생각들을 듣는다고 했을 때 우리들은 요단강을 건너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생각과 경험과 말들이 다 틀리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람들에게서 듣는 것은 부정적인 말, 실패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여호수아 돈게 아니야, 지금 요단강물이 철철 넘치고 있는데 말이야, 어떻게 여기를 건널수 있다고 그래” 제발 부정적인 말, 유익이 안되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한다고 이득이 없습니다. 하는 사람 은혜 떨어져, 듣는 사람 시험에 들어,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더 괴로워 합니다. 부족하거나 연약한 모습을 보거든 ‘기도해 주세요’‘힘을 북돋아 주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요단강을 내 생각과 지혜와 방법으로는 건널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건널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 생각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은 요단강을 못건넌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요단강을 건널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앞과 뒤의 사람이 무엇이라 하든 말든, 요단강물이 철철 흘러 넘치든 말든 우리는 오직 언약궤, 하나님, 주께서 주신 말씀을 따라 나아가면 요단강이 갈라지게 될줄 믿습니다. 내가 갈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가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건널수 있도록 길을 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길이 되십니다. 생명이 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인도하는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앞서 가시는 하나님, 그분은 분명 우리를 살길로 인도하십니다. 되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 있게 하시기 위하여 백성들 앞서 요단강에 먼저 들어가셔서 그것을 바라보고 뒤쫓아 오라고 합니다. 오직 우리들은 주님만 바라보고 나가면 어떤 요단강이든 분명히 건너게 될줄 믿습니다. 오늘날 앞서 가시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 문제와 사건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럴 때 문제를 바라보기 전에 문제의 해결자 되시는 주님께 초점을 맞추십시오. 그럴 때 문제는 적게 보이고, 주님은 크게 보이기에 문제속에서 승리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좇아 가느냐갸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물위로 걸어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나갔던 베드로도 주님처럼 물위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시선을 바다에 두지 않고 주님께 둘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선을 주께 두지 않고 바다의 물과 바람에 두었더니 (마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오직 주만 바라봅시다. 주님이 무엇이라 말씀하는지에 귀를 기울입시다. 살고 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되고 안되고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이 요단강을 건너게 하는 힘이 될것입니다.
2.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 하나님은 ‘백성들의 삶을 성결케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야 할 시점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듣기를 원하는 말씀은 ‘어떻게 하면 요단강을 쉽게 건너갈 수 있겠느냐’라는 것일것니다. 지금 경제위기시대에 있는 우리 민족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이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빨리 극복해 나가고, 해결해 나갈수 있을 것인가가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쉽게 경제를 회복할 것인가가 아닙니까 오늘 나름대로의 문제들이 있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듣기를 원하는 말씀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몸이 아픈 사람이라면 금방 나을수 있을 해결책, 사업이 잘 안되는 분이라면 어떻게 하면 사업이 잘 될 수 있을까에 대한 해답을 듣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저도 관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전도를 잘해서, 또 잘하게 해서 영혼구원의 역사를 많이 이룰수 있을까
그런데 이때 속 시원한 해답을 들려 주시던, 길을 열어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널 그들에게 무슨 해결책을 내어 놓습니까 5절 말씀을 같이 봅니다. 무엇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이것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 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하는 내 앞에 오늘 말씀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상관이 없는것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 하고 아주 중요한 상관이 있습니다. 자 보십시다.
요즘 여러분들이 메스컴을 통해 경제회복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빨리 경제를 회복할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져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무엇을 기도합니까 “하나님, 빨리 이 어려운 시기를 지나게 하옵소서. 경제를 빨리 회복시켜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문제가 있고, 아픔이 있고,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 어려움을 빨리 해결하여 주옵소서. 빨리 병을 고쳐 주옵소서. 빨리 물질의 복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좋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한가지 있습니다. 오늘 이시간, 이시점에서 우리 민족의 최대문제가 경제회복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경제회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문제해결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병 고침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물질의 축복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 경제가 번영할 때 어떠했습니까 호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돈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관리하고, 무엇을 위하여 써야 할지에 대한 바른 기준이 없었기에 마구 써 버렸습니다. 정말 사용해야 할 때는 사용하지 않고 죄짓는데, 자기 욕심을 부리는데 사용을 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그 대가를 지불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할 때 어떠했습니까 우리에게 문제가 없고 평탄할 때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사업이 잘될 때 어떠했습니까 우리들은 건강을 주셨을때는 정작 그 건강한 몸을 가지고 주를 섬기며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좋은대로, 내 가고싶은대로, 내 원하는대로 했습니다. 우리가 문제가 없고 어려움이 없을때는 하나님을 찾지도않고, 하나님께대한 마음이 멀어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업이 잘될때에 사업이 바쁘다는 핑계로 사업에만 몰두하며 하나님도, 교회도 나 몰라라 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지금 빨리 경제가 회복되면 큰 일납니다. 지금 건강주시면, 문제해결해 주시면, 사업이 잘되게 하시면 큰 일납니다. 제가 악담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누구 못지않게 여러분들이 잘되기를 원하고, 어려움이 없으면 좋겠고, 사업이 잘되었으면 좋겠고, 빨리 경제가 회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회복되기전에, 건강하기 전에, 사업이 잘되기전에, 해결이 되기전에 먼저 선행이 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 외부에 있는것들의 해결이 아니라 우리 내면이 준비되어지는 일입니다. 지금 경제회복이 된다면 우리는 과거 허랑방탕하던 그시절로 돌아갑니다. 죄만 짓습니다. 지금 문제가 해결이 된다면 우리들은 예전의 삶의 모습으로, 즉 하나님도 필요없고 거저 세상속으로 또 들어가 죄를 지을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우리 인생이 끝이 날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다급한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해결을 주셨을 때에 이제는 전에와 같은 삶, 생활, 생각이 아니라 어떤 것을 주셔서도 정말 하나님앞에서 믿음의 길로 행할 수 있는 그릇이 준비되는것입니다. 요단강 도하를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라는 말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면 그들이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가나안땅에 들어갈것인데,
그런데 그들이 그런 상태로 요단강을 건너가봐야 가나안땅에 들어가서도 광야에서 하나님을 배반하며, 하나님앞에 범죄했던 일들이 그대로 있었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성결케하고 나아갔더니 요단강은 하나님이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있는 문제들 자체만 바라보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하나님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것보다도,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을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을 믿음으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절대적인 하나님을 의지하고, 내 남은 생애 주님을 믿고 따라가겠다는 믿음의 그릇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준비될 때에 그때 요단강이 갈라질것이고, 그렇게해서 들어간 가나안, 그렇게 해서 얻은 건강, 그렇게 해서 얻은 사업의 축복이 절대적인 복인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려움 문제를 통하여 내 믿음을 굳게 세워놓았더니 사업이 아무리 바빠도 주님을 우선할수 있게 되는 것이고, 몸이 아픈 것을 통해서 내 믿음을 굳게 해 놓았더니 주신 건강가지고 주님앞에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여러 많은 일들을 통해 자족할 수 있는 은혜를 얻게 됩니다. 여러분, 문제가 문제 아닙니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급한 것은 우리가 성결케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준비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들앞에 있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줄 믿습니다.
3.믿음으로 앞으로 나가라고 명령하십니다. 6절말씀을 다 같이 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씀입니까 제사장들에게 백성앞서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너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의 요단강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15절의 상황을 보면 요단강물이 넘칠 때입니다. 물이 하나도 없는 요단강이 아니라 요단강 물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 앞에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내 앞에 있습니다. 우리들은 강이 갈라져야 갈수 있다고 지금 버티고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주시지도 않았지만, 여전히 힘들고 어렵지만, 여전히 몸은 아프고 불편하지만, 상황은 변함이 없지만, 우리들은 그 문제 때문에 아무것도하지 못하고 주저 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문제속을 지나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능력을 주셔야 전도하겠습니다.”가 아니라, “하나님, 나는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나는 입이 둔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나를 통해서 예수의 복음을 듣게 하실줄 믿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나갈 때 요단강이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앞으로 나가라고 하십니다. “주님만 믿습니다. 나는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지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갑니다. 찬양하며 갑니다. 찬양할 거리가 없어 보이는 내 삶의 장에서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며 믿음으로 나갈 때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이 있을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한 우리 앞에 있는 어떤 요단강일지라도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고, 세상의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질병의 요단강을 갈라지게 합니다. 문제의 해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막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몹시 추운 겨울에 험한 산길을 어린아이를 업은 어머니가 걷고 있었습니다. 너무너무 추워서 그만 그 어머니는 온 몸이 얼어 얼마 안가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에 마침 어떤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가다가 그 애처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이 운전수는 그 여인을 살리기 위해 한가지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 옆에 도착하여 이 운전수는 그 여인에게 어린아기만 차에 태우게 하고는 그 여인은 차에 타지 아니하고 멀찍이 갔습니다. 이 운전수는 그 여인의 발걸음에 맞추어서 천천히 가는 듯 하다가 속력을 내서 달아나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런 생각없이 뒤따라오던 그 어머니는 이 운전수를 어린이 유괴범으로 알고 소리지르면서 있는 힘을 다해서 뛰어갔습니다. 얼마쯤 가노라니 그 차가 눈앞에 보이더니 아주 천천히 갑니다. 거의 다 갔을 무렵에 이 차는 또 달아나 버립니다. 이렇게 하기를 십여리를 뛰다보니 추워서 얼어 죽어가던 그 여인의 몸은 다 녹아지고 온 몸에서 땀이 날 정도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운전수는 그제서야 정차를 하고 차에 올라 타게하고 어린아기를 주었답니다. 이 여인은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원망 섞인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때 운전수는 말하기를 ‘당신이 만약 대뜸 차에 올라타고 갔으면 좋을 것 같지만 너무 몸이 얼었기 때문에 그대로 탔다가는 당신도 이 어린이도 다 죽기 쉽기 때문에 몸을 녹이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랬노라’고 말했답니다. 가나안 땅, 하나님의 축복된 삶을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단강을 주심은 우리를 애태우고, 고생케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복되게 하시려고,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더 잘되게 하시려고 요단강을 주셨습니다. 요단강을 주셨다고 원망불평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이 요단강으로 인하여 우리들 자신을 준비합시다. 하나님은 더 큰 축복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로 준비케 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가운데 굳게 서는 사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줄 믿습니다. 고난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조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그러나 고난의 건너편에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가나안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 우리앞에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축복이 열려질 줄 믿습니다. 나를 향한 이런 하나님의 축복의 사건을 볼수 있다면 우리는 요단강을 건널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의 꿈을 이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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