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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나님의 은혜로 (엡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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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장1절'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날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410장2절'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410장3절' 왜 내게 성령님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410장4절' 주 언제 강림 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 곳도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여러분들은 정말로 ‘아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하는 가 정말 그렇다. 이 쓸데없는 자를 왜 구속하여 주는지 말이다. 뿐인가 굳센 믿음과 복음을 주셔서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지 말이다. 뿐인가 성령님을 주셔서 내 마음을 감동해 예수를 믿게 하는지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별 감동 없이, 사는 것에 대한 감사 없이 살아간다. 사는 것 뿐 아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거저 할 수 없어서, 마지못해서, 어쩔 수 없어서, 의무 때문에 다니는 모습들이 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성령님이 이런 무의미한 삶을 살고, 별 감동 없이 주님 앞에 나오고 사는 우리의 심령에 한량없는 은혜로 충만케 하시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사는 것이 이렇게 귀하고, 좋은 것이구나. 신앙생활이 이렇게 복된 것이구나 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지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었던 성경 본문은 내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그 은혜가 어떻게 내게 임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삶의 별 감동이 없고, 감사가 없고, 힘이 없고, 외로울 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해 보세요. 그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들마다 가슴이 뜨거워 졌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생의 의욕이 일어났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 할 때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지’,‘내 남은 인생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위하여 살겠다’는 헌신된 고백을 하며 능력 있는 삶을 살수 있게 됩니다. 저는 삶의 의욕이 떨어지고, 지치고 곤할 때마다 이 은혜를 생각하며 힘을 얻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놀라우신 은혜, 앞으로 내게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힘을 얻었습니다. 어떤 은혜가 있었느냐 하면
1.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저는 청년 때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 전까지 교회를 다니기는 다니나 예배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별 관심 없이 다녔습니다. 친구 따라 때로는 내가 관심 있는 행사나 프로그램이 있을 때는 부지런히 좇아 다녔습니다. 거저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모양으로만 열심히 믿는 것 같은 모습으로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저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이었습니다. 이 본문을 그 전에도 몇 번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유난히도 성령님은 저를 붙들고 계셨습니다. 더 이상 성령님은 저를 그 모습으로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도록 감동을 주셨고, 읽는 도중에 성령님은 저의 마음이 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통하여 나의 모습을 보게 하셨고, 그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저의 모습이 1-3절까지의 모습이었습니다.
1이 세상 풍습을 좇아 다녔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저도 유행이라 하면 서러울 정도로 좇아 다녔던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요즘 젊은 청년들과 학생들이 해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면 저게 무슨 멋일까 저게 뭐가 멋지다고 저렇게 해 다닐까 속으로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스럽더군요. 바지를 길게 해서 땅에 질질 끌고 다니는 것이 무엇이 멋인지, 배꼽을 내 놓고 다니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자랑스러운지,
그런데 그들은 그것이 세상의 유행이요, 멋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문뜩 과거의 저의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저도 한 때 세상 유행 따라 간다고 따랐던 적이 있습니다. 한때 긴 머리가 유행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멋이라고 그때는 길렀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얼마나 우스운지, 언젠가 저의 그 사진을 보던 아내가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저가 대학 시험을 치기 전에 1년 반정도 회사를 다녔는데 그 회사를 다니면서 야외에 놀려 가면 그 사람들과 어울려 마시지 못하는 소주병을 들고 잘 부르지 못하는 세상 유행가를 불렀던 때가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의 저의 모습이 참 한스럽기도 하고, 아찔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이후에 그 모든 것들이 나도 모르게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언제 내가 그런 자리에 빠졌던가 하며 의아해 졌습니다. 그때 당시에 그렇게 위대해 보이고, 좋아 보이던 가수들과 유명한 사람들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꿈 많은 청소년 시절 바로 그런 나를 바른 길로 가도록 역사 하신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세상 풍습들을 좇던 것을 좇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2뿐만 아닙니다. 육체의 욕심과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았습니다. 지금도 제겐 욕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원하는 것을 어떻게 하든지 하고야 마는 성질을 가졌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키가 작으면 다른 것이나 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가 자랑인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만은 저가 스스로 보아도 욕심이 참 많은 사람이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들 저를 일컬어서 팔방 미인이라고들 합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를 한다는 이야기 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요즈음에는 전문인 시대가 아닙니까 여러 가지를 잘 못해도 한가지를 잘 하면 살게 됩니다. 어쨌던 욕심이 많은 저로서는 한가지 가지고는 안되었습니다. 저는 남들이 하는 것은 웬만한 것은 합니다. 그것도 가르쳐 주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 배워서 합니다. 컴퓨터도 책을 보고 배웠죠, 기타도 누가 치는 것이 부러워 그날 당장 기타와 책을 사서 두들겼더니 되더라구요. 피아노도 정식으로 배운 것이 아닙니다 만은 그냥 남이 하니까 나도 하고 싶어서 하는 것 쳐다보고 흉내를 내니까 소리가 나더군요. 저는 시험에 욕심이 많습니다. 운전 면허 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접수를 시켰더니 시험을 칠 기간을 따졌더니 7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당장 문제지를 사고, 그 다음날 새벽 예배를 마치고 운동장 옆 탄천에서 하루에 한 시간씩 6시간을 6만원을 들여서 그날 시험을 치르는데 그날 오전에 필기에 합격을 하고, 그날 오후에 코스를 합격을 하고, 그날 오후에 주행을 합격을 해서 하루만에 끝내 버렸습니다. 한 번 할 때에 독한 마음을 품고 덤벼 들니다. 왜 저가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그만큼 저가 마음에 원하는 것이 있었고, 그리고 마음에 원하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이 욕심이 대단히 큰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욕심쟁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통제를 받기 다행이지, 이런 마음의 욕심을 가지고 있는 저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누가 압니까 마음에는 하고 싶은데 되지는 않고, 돈에 대한 욕심이 지나쳐서 총을 들고 은행에 침입을 하다가 잘못되어서 별을 달아야 하는 신세로 지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이런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목사로 살아가는 이 은혜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이런 은혜가 비단 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여기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지난 과거의 삶을 돌아보면 정말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3
그런데 더 놀란 것은 3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라 다니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사는 이들을 향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불같은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산 사람들에게 주어질 상은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 합니다. 저도 그릅니다. 우림 이와 혜림이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자기들 놀고 싶은 대로 놀고, TV나 쳐다보며 빈둥빈둥 거리는 모습을 보고 ‘어이구 잘했구나, 내 새끼야’하고 칭찬을 하지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 저는 3절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두려움을 가지고 읽습니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한 번 죽는 것은 기정 사실인데 그 후에 심판을 받을 때에 과연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저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이 있기 전에 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심판날 내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대로 행한, 내 욕심대로 행한, 세상 풍속을 좇았던 지난날의 나의 행위에 대한 보상을 좋게 해주리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습니다. 죽은 후에 받을 심판을 생각하면 저는 두려워 집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전 꾸었던 꿈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저가 초등 학교 4학년때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저의 아버지를 데리고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순간 보기에 무서워 보였습니다. 그 사람에 의해 이끌려 가는 우리 아버지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끌려가는 아버지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불렀습니다. ‘아버지’하고 그러다가 꿈을 깨었습니다. 그 꿈을 꾼후 몇 칠 후 아버지는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후 꿈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이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천국과 지옥은 실재합니다. 다만 우리의 육안의 눈으로 볼 수 없을 뿐입니다. 언젠가는 그 곳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마귀를 따라 다니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며,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들이 들어갈 곳은 분명 한 곳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영원한 불꽃 가운데 떨어질 것은 뻔한 사실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에는 어느 누구 하나 예외가 없습니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모두가 다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진노를 받을 나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죽음의 자리에서, 멸망의 자리에서, 영원의 사망의 자리에서 건져 주셨고, 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살려 주셨을 뿐 아니라, 6절에 보면 하나님이 계시는 그곳, 하나님이 누리시는 그것을 누리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의인이 되어짐은, 나같이 죽은 사람을 생명의 자리로, 심판을 받을 나를 그 심판의 자리에서 건져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나의 공로나, 나의 자격으로나, 나의 행위로 이루어짐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직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직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 때문에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심판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405장1절'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405장2절'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여러분! 세상에 이것보다 더 귀하고 복된 사건이 어디에 있습니까 돈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능으로도 되는 것도 아닌 이 사건, 오직 주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를 쓸모 있는 자로 삼아 주신 이 하나님의 은혜, 낙심이 될 때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좌절이 될 때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삶의 의욕이 떨어 질 때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답답하고, 따분할 때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내것이 손해 되고, 아깝다고 생각할 때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또 어떤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2.지금껏 내가 산것도 주님의 은혜로 살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 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놓치는 한가지 잘못이 무엇이냐 하면 지금까지 산 모든 것이 나의 힘과 나의 노력과 나의 힘씀으로 이루어 졌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가 힘을 썼고, 노력을 했으며, 나의 힘도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보면 내가 아니요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나의 힘과 노력으로, 힘씀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부모를 통하여 나오기는 했지만 그 부모도 부모의 힘으로 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를 갖고 싶다고 갖는 것이 아니 였으며, 또 갖는다 할지라도 내가 원한다고 해서 남자아이를, 여자아이를 갖는 것 아니지 않았는가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나올 때 발가벗긴 채로, 빈손으로 나왔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먹을 것, 입을 것, 행하는 것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살도록, 일하도록, 우리 사람이 살아가기에 필하고 합당한 것으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산소를 10분간만 공급을 하지 않아도 우리들은 모두가 질식해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를 거두어 가시면 우리들은 모두가 얼어서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공급을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목말라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곡식을, 열매를 주시지 않으면 우리들은 더 이상 살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공급하시는 터 위에 우리들이 사람들이 짜낸 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그 일 가운데 우리들이 어떤 일들을 만났을지, 어떤 일이 내게 닥쳐왔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 모두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저는 바울이 말하는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 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말씀을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과연 그렇다. 맞다. 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저 같은 것이 목사가 되고 교회를 섬기는 자로 여러분 앞에 서 있다는 것이 이것이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듯 뭐 잘난 것이 있습니까 키가 큽니까 생긴 것이 잘생겼습니까 물론 키크고 잘 생겨야 목사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은 말이다. 거기다가 말을 잘합니까 그렇다고 뭐 가진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부족하고, 연약하고, 못난 저가 목사로서, 또 행복한교회를 섬기는 목사로 서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될 수 없었음을 압니다. 저는 목사가 되기 전에 강도사로 부교역자로 봉사를 하면서 장래에 대하여 불안해하며, 어쩔쭐 몰랐습니다. 앞으로 목사가 될텐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부목사로 섬겨야 할 것인가 아니면 선교사로 나가야 할 것인가 그렇다고 선교사로 나갈 준비도 다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어느 누가 나를 교회를 섬기도록 청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개척 교회를 하는 것도 엄두도 나지 않았고,
그런데 하나님은 은혜로 목사가 되고 행복한교회를 개척해서 섬기게 했습니다. 그것도 돈 한푼들이지 않고 말입니다. 행복한교회를 알게 된 사건을 보면 과연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할 수 있습니다. 91년도에 사모가 성남에 있는 놀이방에 아이 둘을 데리고 잠실에서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이 집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집사람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이 둘을 데리고 버스에 탔고, 그것도 자리 하나에 자신이 앉고 둘을 앉혔으니 얼마나 비좁았겠는가 차를 타고 오는 도중에 십자가를 사 들고 가던 두 연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집사람이 그 십자가를 붙들었습니다. 그때에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행복한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지내 온 과거의 여러분의 모습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마다, 때마다 우리를 간섭하시고, 돌보시고, 역사 하시어서 지금까지 우리가 여기에 서 있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지난날의 자기의 모습과 지금의 자기의 위치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조금 안다고 껄쩍 거리고 살았던 그, 예수를 핍박하던 그, 그런 그가 사도로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고 있는 지금 그 자리까지의 모습을 돌아 볼 때에 ‘이것은 내가 잘나서 그런 것도 아니고, 어느 누구 도움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뭐가 잘났기에 성도라는 직분, 집사라는 직분, 전도사라는 직분, 목사라는 직분을 받게 되겠습니까 다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405장3절'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05장4절'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아멘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다시 생각하고 붙들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지금까지 산 것이 다 주님의 은혜’라면 앞으로 우리가 살 것도 다 주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지금까지만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가 천국에 이를 때까지 주님은 그의 은혜로 우리들 가운데 역사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가 연약할 때에 그가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가 부족할 때에 그가 채우실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가 곤란할 때에 그가 도우실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가 어찌할 바 알지 못할 때에 그가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의 반석이시며, 요새시며, 바위시며, 구원의 산성이신 주님만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주님만 붙들어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이제껏 내가 산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믿으십시오. 앞으로 살 것도 주님의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여러분이여, 이제 이 은혜로 살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나타내며 사는 삶이 됩시다. (엡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4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 '405장1절'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405장2절'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405장3절'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05장4절'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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