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극복하자 (마14:22-33)
본문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인생의 모습을 한마디로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고 합니다. 기쁨이 있는가 하면 슬픔이 있고, 좋을때가 있는가 하면 나쁠때가 있다. 있을때가 있는가 하면 없을때가 있고, 잘될때가 있는가 하면 안될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하면 (전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즉, 이말은 우리에게 항상 좋은 날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항상 나쁠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가 있는가 하면, 나쁠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나쁠때가 있는가하면 좋을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바람은 항상 좋기를, 항상 잘되기를, 항상 기쁘기를, 항상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안좋은 일을 만나면, 어려운 일을 만나면, 힘든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 같고, 나와 함께 하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을 갖고 그렇게 됨에 대한 좋지 않는 생각을 갖게됩니다. 물론 우리에게 좋은 일만, 신날만한 일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그런게 그렇지가 않는게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든, 나쁜 일이 일어나든 그 모든 것이 합력여 선을 이루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좋은 일을 만났다고 좋아만 하고 있을것도 아니고, 또는 어려운 위기에 처했다고 슬퍼할 일만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좋은 일이 일어 났다고 해서 그것이 계속 그렇게 있는 법이 없고, 어려운 가운데 처한다 할지라도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건이, 그 일이 복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읽었던 본문의 말씀이 그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물 위로 걷는 때(25-29) 밤 사경(3-6)쯤에 예수님께서 바다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 오실 때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베드로가 자신도 물 위로 걷고 싶어서 주님께 부탁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명하여 물위로 걸어 오도록 하였고, 베드로는 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물 위로 걷는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야 하나님이시니까 물위로 걷는다는 것을 우리가 별로 실감을 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러나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 다녔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요, 행운이요, 기적입니다. 난생 처음 물위로 걸어보는 베드로 얼마나 행복하고, 좋았겠습니까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게 되었으니 그의 마음 뿌듯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위로 걷는 이런 모습들을 우리에게서 찾는 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주안에서 누리는 기쁨, 평안, 즐거움, 확신, 담대함, 용기, 의욕, 소망이 생기는 것일 것입니다. 그 무엇이 없어도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슴 뿌듯하며,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에 자부심이 드는 때가 바로 물위로 걷는 것일 것입니다. 또는 좋은 일이 일어난다든지, 기대치 이상의 좋은 결과를 얻었거나, 문제 없이 형통할 때, 잘될때가 바로 물위로 걷는 때일 것입니다. 이럴때는 누가 무엇이라 해도 상관치 않습니다. 그 무엇에 게의치 않습니다. 그 어떤 것에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좋은 일이 있을 때 맨날 좋은 일만, 좋은 모습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모습이 죽을 때까지 계속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의 말씀에도 나와 있듯이 베드로가 물위로 걷는 것이 그의 평생에 계속되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는 얼마 가지 않아서 물속으로 빠져 갔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까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고, 담대하고, 의욕이 있고, 소망이 있으고, 좋은일이 있고, 형통한 일이 우리의 평생에 계속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물위로 걷는 삶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물속으로 빠져가는 때도 있습니다. 아니 물 위로 걷는 삶 보다는 물 속으로 빠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물 위로 걸을 때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하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들은 물위로 걷는 삶이 계속 될줄 알고, 아니면 그것이 계속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 정도 생각은 하면서도 물 속으로 빠져갈 내일과, 나중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개미는 가을철 까지 열심히 일을 합니다. 누가 뭐라고 그러든 상관치 않고 열심히 땀 흘려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베짱이는 먹을 것이 있고, 살기 좋은 계절에는 그냥 먹고 놀고, 먹고 놀기나 했지 겨울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열심히 준비한 개미는 겨울을 잘 지나지만 베짱이의 신세는 얼마나 처량하게 됩니까 이미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들이 물위로 걷는 것과 같은 참 좋은 마음의 상태, 신앙생활, 문제없는 가정, 형통의 역사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다은 두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1자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2대비하는자 되어야 합니다. 요셉은 애굽에 풍년이 들었을때에 잘 준비 하므로 흉년을 잘 이겨냄을 볼수 있습니다. 문제 없다고 기도를 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없기에 기도의 저축을 많이 해두어야 합니다. 별 어려움이 없다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등한시 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믿음의 삶의 진보를 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빼앗길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9:1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자 이처럼 우리 인생이 물 위를 걷는 그런 좋은 때가 있는가 하면 또 우리의 인생에 이런 때도 있습니다.
2.물 속으로 빠져 가는 때(30-33) 본문의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물위로 걸어 가다가 30절에 보면 ‘물 속으로 빠져 가는 지라’라는 말씀을 합니다. 베드로가 일대 위기를 만났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상태, 아니면 위기,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다 보면 생의 여러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건강의 위기, 경제적인 위기, 신앙적 위기, 사업의 위기, 대인관계에서의 위기, 가정의 위기, 교회의 위기를 만납니다. 저가 몇번 말씀을 드렸었지만, 행복한교회를 개척하고 일정기간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을 했습니다. 참 재미 있었습니다. 야! 목회가 너무 쉽다. 이정도면 할만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냥 성장하고 부흥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제 좀 할만한가 쉽더니 어려움이, 문제가 터지기 시작을 하더니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어려움이 생기더군요. 큼직큼직한 일만해도 몇가지입니다. 교회를 이전하면서 격었던 쓰라림, 교회가 속한 건물이 경매로 넘어가 보증금을 다 날린일, 참 위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어려움이 끝나지 않고 우리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사에 좋은 일보다는 좋지 않는 일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쉬운 일 보다는 어려운일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되는 것보다는 안되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왜 이런 위기를 만나게 되는 것일까요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문제가 끓일날이 없습니다. 우리 주변은 늘 푸른 바다요, 바람이 일고 있는 그런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곤란함을, 위기를 만나는 것은 신앙 년조의 다수에 상관치 않습니다. 얼마나 신앙생활을 했고, 믿음의 체험을 했는냐에 따라 있고 없고가 아닙니다.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느냐를 상관치 않습니다. 저도 그런 위기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처한 환경과 사건 안에 자꾸만 더 깊이 빠져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뎀나무 아래 누워 죽기를 구하였던 엘리야 처럼 ‘하나님, 왜 저를 목사로 세우셨나요, 기왕에 목사를 시켜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려거든 좀 잘되게 하시든지. 왜 이렇게 힘들게, 어렵게 합니까 꼭 이렇게 해야 합니까 그럴바에야 차라리 날 일찍 데려나 가시죠’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며 부르짖어도 보고, 그냥 혼자 앉아서 무능하고, 부족하고, 잘 행하지 못하는 나의 연약한 모습을 보며 실망도 하고, 좌절도 했다가 용기를 내어 다시 일어 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기는 언제나, 어느 누구에게나 다가와 물위를 걷고자 하는 우리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위기 가운데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 속에서 위기의 원인과 그 위기상황에서 극복의 비결을 찾기 바랍니다.
3.
그런데 이런 위기가 언제 올까요 오늘 읽었던 본문에서 베드로가 물 속으로 빠져가는 죽을 위기를 만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의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들이 위기를 만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1바람을 볼 때 위기가 왔습니다. 28-29절의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주님께서 명하여 오라 하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쳐다보고 갔을때는 물속으로 빠지지 않고 잘 걸어 갈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30절에 그는 걷다가 바람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바람을 보았다는 것은 그가 처한 환경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바람을 보는 순간 바다에 빠져가에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바라보고 나가야 할 것은 물 위로 오라고 하신 예수님이신데, 이 예수님을 보지 않고 다른것(바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위기를 만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삶을 사는 우리들이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것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나라를 보고 나가야 합니다. 당연히 믿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하고, 하나님앞에 예배를 드리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살지 않고 다른 것을 바라보고 나가기 때문에 위기를 만나는 것입니다. 잘못 되어 갈 때에 우리로 잘 되어가게 하시기 위하여 위기를 만나게 합니다. 성도로서 주일성수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 일을 하지 않고 주일을 내 마음대로, 일이 되어가는대로 하기 때문에 위기를 만나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늘의 것을 얻기 위하여 좇아가야 하는데 하늘의 것 보다는 세상의, 땅의 것에 마음을 두고 좇아갈 때 위기를 만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나가는데도 물속에 빠져가는 것같은 위기를 만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보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진짜 두려워해야 하고, 가슴을 찢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식이 자식으로 도리를 해야 하는데 자식 도리를 커녕 지 맘대로 살아가고, 패륜아로 살아간다고 합시다. 그런 자식을 보고 부모가 눈하나 꺼덕하지 않는다면 그 자식은 버린 자식이든지, 내 자식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나가야 하는데 바람을 보고 나갈 때 반드시, 당연히 빠져가게 되어 있고, 빠져가야 정상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않는데도 일이 잘되는 것이 좋아야 할 일이 아니라, 두려워해야 할입니다. 우리가 내 뜻대로, 내 맘대로 사는대로 하나님이 눈하나 꺼떡하지 않고 있다면 이 일을 두려워해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시라면 자식된 내가 잘못 되어감을 보고 그냥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히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 으니 (히 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어떠하든, 베드로는 바람을 보았을 때 빠져 갔습니다. 우리도 바람을 보면 빠져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람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것쳐다보고 나가다가 빠져가게 됩니다. 어떤 바람이 있습니까 미풍이 있습니다. 이 미풍은 쎄게 불어서 물건을 넘어뜨리는 것이 아닌 사람의 기분과 신체를 시원케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 바람은 사람의 마음을 잘 빼앗아 가는, 내가 좋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주변의 여러가의 일들과 사건입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갖가지의 바람이 얼마나 많습니까(하와에게 찾아온 마귀의 속삭임) 그런가 하면 광풍이 있습니다. 이 광풍은 손해를 가져오게 하는 광풍입니다. 즉 우리를 어렵게 하고, 힘들게하는 일들과 사건들이 바로 그런 광풍입니다. 우리의 생활에 바람을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을 잘믿고 섬기다가 바람 때문에 믿음의 자리에서 떠나가는이가 있는가 하면, 바람 때문에 망하는 이가 많습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바람이 나면 가정도 자식도 돌보지 않습니다. 겟바람, 춤바람, 돈바람, 집바람, 세상 바람은 모두가 예수님을 떠나가게 합니다. 이 바람은 물위를 걷던 사람을 물 속으로 빠져가게 합니다. 바람을 보고 바람이 들면 예수님도 잃어 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든 사람들이 바람을 보면 교회도 떠나고 직분도 버리고 예수님도 버리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적 바람이라고 부릅니다. 도덕적으로 바람이 나는 것도 큰 일이지만 영적으로 바람이 나면 그것은 더 큰 일입니다. 저는 어려서 겨울이 되면 어머님이 땅을 파고 묻어 두었던 무를 꺼내어 깍두기도 담그고 무국도 끓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를 도마 위에 올려 놓고 싹뚝싹뚝 짜르시다가 ‘이건 바람이 들었어’하고 버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버려지는 무는 심이 박혀 있거나, 썩었거나, 바람이 들어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 바람이 들면 무처럼 버림을 받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람을 보면 빠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일편단신 주님만 바라봅시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2무서워 할 때 위기가 왔습니다. 본문에 ‘무서워 빠져 가는 지라’라고 합니다. 주경가 벵겔이라는 주석가는 ‘그는 비록 어부였고, 수영도 잘 했지만 공포에 질려 물 속으로 빠져 갔다’고 했습니다. 캄캄한 밤, 강풍과 함께 성난 파도가 휘몰아 치고 바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오는 그런 상황에서 두렵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두려움이 일어날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 56: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 56:4)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 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나님은 그 두려움의 일을 통해서 그 사람을 주를 믿는 믿음으로 단단하게 세우려 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그를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세우시기를 위하여 우리들에게 위기를 만나게 합니다. 성경 다니엘서 3장을 보십시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 위기를 만나게 합니다. 느부갓네살왕에게 절하지 않는다면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불속에 집어 넣는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사람을 골탕먹이려고, 괴롭히려고, 일부러 곤란하게 만들려고 함이 아니였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로 주를 의지하게하고, 그렇게 하는자에게 더 큰 은혜와 복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가운데 세우시려고 위기를 주셨을 때 어떻게 합니까 (단 3: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단 3: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 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랬더니 어떤 축복의 역사가 열려집니까 (단 3:29)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 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 (단 3:30)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광풍과, 우리 주변에 넘실거리는 파도를 보면 무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일어나고 있는 여러 문제들, 나를 괴롭히는 일들, 사람들 이것 자체는 크 보입니다. 문제가 대단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기를 주께서 허락하심의 이유를 우리가 분명하게 알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안에 서 있다면, 지금 당한 위기가 오히려 우리의 복이 되어질줄 믿습니다. 별로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나름대로 하나님앞에서 산다고 하는데 위기를 당하는 것은 그 위기를 통해서 축복의 기회로 삼으시게 하기 위해서 위기를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 교회가 당한 여러 연약함, 부족함, 답답함, 어려움이라는 위기가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와 목사와 성도들의 믿음을 굳게 세우시기 위해서 주시는 사건으로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이나 가정이 처해 있는 여러 위기들이 오히려 우리에게 큰 복을 이루는 사건이 될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바다와 바람을 바라보면 빠져 갈 수밖에 없지만 두려운 날에 주를 의지할 때에 주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체험하는 기회가 될줄 믿습니다. 여러분! 기회로 삼읍시다. 기도하는 기회로, 체험하는 기회로, 더 큰 복을 받아 누리는 기회로 말입니다.
4.그러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할수 있을까요 누구에게나 위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기가 문제가 아니라 그 위기 가운데 어떻게 대처하는가가 중요합니다.
1위기가운데 역사하시는 이는 주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건져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배에 오르실때에 바람이 그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위기 가운데 탈출 하려면 그 위가 가운데 건지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은 우리가 물속에 빠져가는 바로 그곳에 같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 주님은 우리가 물 속으로 빠져가는 그 모습을 쳐다보고 계시는 무관심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주님이 그 자리에 계심은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 거하고 계십니다. (사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 니 너는 내 것이라 (사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그렇습니다. 나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역사하심을 믿읍시다. 저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항변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목사로 세우셔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이루는데 쓰시려면 이 일을 위하여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고, 옆에서 동행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째 목사로 쓰시면서 내 주변에, 식구들 중에, 형제중에 믿는 부모나, 형제나, 사람들을 많이 붙여 주셔야지 왜 저 혼자 달랑 있게 해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저는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혼자입니다. 어떻게 저 혼자 이 일을 감당하라고 이렇게 세웠습니까” 라고 기도를 했는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기도의 응답을 주셨습니다. “너 모세알지, 모세가 뭐라고 했니, 나는 입이 둔하고, 뻣뻣해서 잘 못합니다. 저는 혼잡니다. 그럴 때 내가 뭐라고 했니, ‘내가 네 입에 함께 할 것이라, 네가 할 말을 하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위하여 아론을 붙여 주었노라.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니’ 너에게도 마찬가지야” 저에게 온 큰 감동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할 일을 이루게 하겠다. 네가 할 말을 하게 하겠다”
사랑하는 여러분! 빠져가는 우리 삶의 현장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이 말은 우리로 죽도록 내버려 두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분명한 믿음을 가집시다. 이런 믿음을 가질 때 승리하게 될줄 믿습니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2소리 질러야 합니다. 본문에 베드로는 물 속에 빠져 가면서 소리를 질렀다고 하였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마15장에 나오는 귀신들린 두 딸을 두었던 가나안 여인도 소리를 질렀습니다. 소경 바디매오도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경가들은 소리 질렀다는 말을 ‘기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소리 가운데 가장 큰 소리는 기도소리입니다. 제아무리 대포 소리가 크고 핵 폭발 소리가 커도 지구 끝까지 들리진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 소리는 하늘에까지 들립니다. 베드로가 소리 지르자 주님은 들으시고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셨습니다. 물속으로 빠져 가는 사람은 기도해야 합니다. 일이 급한 사람은 기도해야 합니다. 다 죽어가고 있는데도 소리지르지 않는 사람은 정신병이 아니면 죽은 사람입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옆에 서 계시는데 왜 지르지 않습니까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 이리라 행복한교회를 개척하기까지 참 많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강도사로 있을 때 행복한교회를 맞게 되었는데, 부교역자로 있으면서 진로 문제로 참 고심이 많았습니다. 목사안수를 받고 부목사로 있어야 하나-이것도 교회 형펀상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선교사로 나가야 하나-이것도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힘들었습니다. 딱 한가지, 개척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물질적으로나, 환경적으로는 도저히 개척할 여건이 아니였습니다. 가진 돈이 있습니까 누가 개척하면서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습니까 막막한 상황에 집사람도 기도하고, 저도 기도 많이 했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길을 인도하여 주소서.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을 보십시오. 참 기가 막히게 역사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알 듯이 행복한교회의 시작이었던 광명교회, 몇 가정이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교회 건물까지 다 마련해 놓고 몸만 가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연결이 되기까지를 보면 하나님의 기도응답이었습니다. 참 기가 막히게 연결이 되었고, 그 장장한 목사들도 많은데 강도사가 교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이렇듯 제가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을 하셨다면, 지금 우리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기도들, 우리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기도들 또한 하나님은 들어서 역사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도 베드로 처럼 부르짖읍시다. ‘주여 나를 구원 하소서’,‘주여 우리 가정을 구원 하소서’,‘주여 우리 교회를 구원 하소서’ ‘주여 애굽에서 탈출케 하소서. 애굽에서 이끌어 내게 하소서’ 분명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심을 믿습니다.
3주님의 손을 잡았습니다. 본문 31절에 보면 “예수 께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라고 했습니다. 물론 베드로도 주님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바클레이라는 분은 베드로의 위기와 극복을 말하기를 “그는 궁극적으로 실패하지 않았다. 이유는 실패한 순간 언제나 그리스도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섰고, 실수 했으나 주께로 더 가까이 갔다. 성자란 결코 넘어지지 않는 자가 아니라 쓰러졌다 하여도 다시 일어나 정진하는 자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처한 어떠한 위기속에서도 건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주님이 손을 내밀때에 내가 손을 내밀어 붙잡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베드로 처럼 손을 내밀어 주님의 손을 붙잡읍시다. 왜 붙잡아야 합니까 주님의 손을 붙잡고 있다면 실패, 좌절, 절망, 불행, 슬픔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요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4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도 위기를 맞았습니다. 많은 위기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사두개인들과 제사장들이 사도들이 복음전하는 것을 핍박했습니다. 사도들을 잡아다가 매를 때리며 다시는 복음을 증거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복음증거가 중단 될 위기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이 위기를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 위기를 성도들이 하나되는 기회로, 성도들이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는 기회로,하나님의 성령님 을 다 함께 체험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 결과 놀라운 부흥의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마치는 말 위기는 어느 누구나 만나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바른길로 가게 하시기 위하여 위기를 주시기도하고, 더 큰 축복의 기회로 삼으시기 위해서 위기를 만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위기가 문제가 아니라 그 위기 가운데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위기를 만난 그 자리에 서 계시는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읍시다. 그리고 주님께서 손을 내밀때에 나의 손을 내밀어 주님을 꼭 붙읍시다. 위기를 극복합시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위기는 극복이 됩니다. 나의 등 뒤에서(1016장)
그런데 우리들의 바람은 항상 좋기를, 항상 잘되기를, 항상 기쁘기를, 항상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안좋은 일을 만나면, 어려운 일을 만나면, 힘든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 같고, 나와 함께 하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을 갖고 그렇게 됨에 대한 좋지 않는 생각을 갖게됩니다. 물론 우리에게 좋은 일만, 신날만한 일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그런게 그렇지가 않는게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든, 나쁜 일이 일어나든 그 모든 것이 합력여 선을 이루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좋은 일을 만났다고 좋아만 하고 있을것도 아니고, 또는 어려운 위기에 처했다고 슬퍼할 일만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좋은 일이 일어 났다고 해서 그것이 계속 그렇게 있는 법이 없고, 어려운 가운데 처한다 할지라도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건이, 그 일이 복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읽었던 본문의 말씀이 그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물 위로 걷는 때(25-29) 밤 사경(3-6)쯤에 예수님께서 바다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 오실 때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베드로가 자신도 물 위로 걷고 싶어서 주님께 부탁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명하여 물위로 걸어 오도록 하였고, 베드로는 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물 위로 걷는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야 하나님이시니까 물위로 걷는다는 것을 우리가 별로 실감을 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러나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 다녔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요, 행운이요, 기적입니다. 난생 처음 물위로 걸어보는 베드로 얼마나 행복하고, 좋았겠습니까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게 되었으니 그의 마음 뿌듯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위로 걷는 이런 모습들을 우리에게서 찾는 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주안에서 누리는 기쁨, 평안, 즐거움, 확신, 담대함, 용기, 의욕, 소망이 생기는 것일 것입니다. 그 무엇이 없어도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슴 뿌듯하며,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에 자부심이 드는 때가 바로 물위로 걷는 것일 것입니다. 또는 좋은 일이 일어난다든지, 기대치 이상의 좋은 결과를 얻었거나, 문제 없이 형통할 때, 잘될때가 바로 물위로 걷는 때일 것입니다. 이럴때는 누가 무엇이라 해도 상관치 않습니다. 그 무엇에 게의치 않습니다. 그 어떤 것에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좋은 일이 있을 때 맨날 좋은 일만, 좋은 모습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모습이 죽을 때까지 계속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의 말씀에도 나와 있듯이 베드로가 물위로 걷는 것이 그의 평생에 계속되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는 얼마 가지 않아서 물속으로 빠져 갔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까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고, 담대하고, 의욕이 있고, 소망이 있으고, 좋은일이 있고, 형통한 일이 우리의 평생에 계속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물위로 걷는 삶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물속으로 빠져가는 때도 있습니다. 아니 물 위로 걷는 삶 보다는 물 속으로 빠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물 위로 걸을 때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하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들은 물위로 걷는 삶이 계속 될줄 알고, 아니면 그것이 계속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 정도 생각은 하면서도 물 속으로 빠져갈 내일과, 나중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개미는 가을철 까지 열심히 일을 합니다. 누가 뭐라고 그러든 상관치 않고 열심히 땀 흘려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베짱이는 먹을 것이 있고, 살기 좋은 계절에는 그냥 먹고 놀고, 먹고 놀기나 했지 겨울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열심히 준비한 개미는 겨울을 잘 지나지만 베짱이의 신세는 얼마나 처량하게 됩니까 이미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들이 물위로 걷는 것과 같은 참 좋은 마음의 상태, 신앙생활, 문제없는 가정, 형통의 역사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다은 두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1자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2대비하는자 되어야 합니다. 요셉은 애굽에 풍년이 들었을때에 잘 준비 하므로 흉년을 잘 이겨냄을 볼수 있습니다. 문제 없다고 기도를 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없기에 기도의 저축을 많이 해두어야 합니다. 별 어려움이 없다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등한시 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믿음의 삶의 진보를 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빼앗길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9:1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자 이처럼 우리 인생이 물 위를 걷는 그런 좋은 때가 있는가 하면 또 우리의 인생에 이런 때도 있습니다.
2.물 속으로 빠져 가는 때(30-33) 본문의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물위로 걸어 가다가 30절에 보면 ‘물 속으로 빠져 가는 지라’라는 말씀을 합니다. 베드로가 일대 위기를 만났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상태, 아니면 위기,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다 보면 생의 여러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건강의 위기, 경제적인 위기, 신앙적 위기, 사업의 위기, 대인관계에서의 위기, 가정의 위기, 교회의 위기를 만납니다. 저가 몇번 말씀을 드렸었지만, 행복한교회를 개척하고 일정기간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을 했습니다. 참 재미 있었습니다. 야! 목회가 너무 쉽다. 이정도면 할만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냥 성장하고 부흥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제 좀 할만한가 쉽더니 어려움이, 문제가 터지기 시작을 하더니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어려움이 생기더군요. 큼직큼직한 일만해도 몇가지입니다. 교회를 이전하면서 격었던 쓰라림, 교회가 속한 건물이 경매로 넘어가 보증금을 다 날린일, 참 위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어려움이 끝나지 않고 우리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사에 좋은 일보다는 좋지 않는 일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쉬운 일 보다는 어려운일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되는 것보다는 안되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왜 이런 위기를 만나게 되는 것일까요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문제가 끓일날이 없습니다. 우리 주변은 늘 푸른 바다요, 바람이 일고 있는 그런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곤란함을, 위기를 만나는 것은 신앙 년조의 다수에 상관치 않습니다. 얼마나 신앙생활을 했고, 믿음의 체험을 했는냐에 따라 있고 없고가 아닙니다.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느냐를 상관치 않습니다. 저도 그런 위기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처한 환경과 사건 안에 자꾸만 더 깊이 빠져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뎀나무 아래 누워 죽기를 구하였던 엘리야 처럼 ‘하나님, 왜 저를 목사로 세우셨나요, 기왕에 목사를 시켜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려거든 좀 잘되게 하시든지. 왜 이렇게 힘들게, 어렵게 합니까 꼭 이렇게 해야 합니까 그럴바에야 차라리 날 일찍 데려나 가시죠’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며 부르짖어도 보고, 그냥 혼자 앉아서 무능하고, 부족하고, 잘 행하지 못하는 나의 연약한 모습을 보며 실망도 하고, 좌절도 했다가 용기를 내어 다시 일어 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기는 언제나, 어느 누구에게나 다가와 물위를 걷고자 하는 우리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위기 가운데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 속에서 위기의 원인과 그 위기상황에서 극복의 비결을 찾기 바랍니다.
3.
그런데 이런 위기가 언제 올까요 오늘 읽었던 본문에서 베드로가 물 속으로 빠져가는 죽을 위기를 만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의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들이 위기를 만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1바람을 볼 때 위기가 왔습니다. 28-29절의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주님께서 명하여 오라 하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쳐다보고 갔을때는 물속으로 빠지지 않고 잘 걸어 갈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30절에 그는 걷다가 바람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바람을 보았다는 것은 그가 처한 환경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바람을 보는 순간 바다에 빠져가에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바라보고 나가야 할 것은 물 위로 오라고 하신 예수님이신데, 이 예수님을 보지 않고 다른것(바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위기를 만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삶을 사는 우리들이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것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나라를 보고 나가야 합니다. 당연히 믿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하고, 하나님앞에 예배를 드리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살지 않고 다른 것을 바라보고 나가기 때문에 위기를 만나는 것입니다. 잘못 되어 갈 때에 우리로 잘 되어가게 하시기 위하여 위기를 만나게 합니다. 성도로서 주일성수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 일을 하지 않고 주일을 내 마음대로, 일이 되어가는대로 하기 때문에 위기를 만나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늘의 것을 얻기 위하여 좇아가야 하는데 하늘의 것 보다는 세상의, 땅의 것에 마음을 두고 좇아갈 때 위기를 만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나가는데도 물속에 빠져가는 것같은 위기를 만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보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진짜 두려워해야 하고, 가슴을 찢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식이 자식으로 도리를 해야 하는데 자식 도리를 커녕 지 맘대로 살아가고, 패륜아로 살아간다고 합시다. 그런 자식을 보고 부모가 눈하나 꺼덕하지 않는다면 그 자식은 버린 자식이든지, 내 자식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나가야 하는데 바람을 보고 나갈 때 반드시, 당연히 빠져가게 되어 있고, 빠져가야 정상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않는데도 일이 잘되는 것이 좋아야 할 일이 아니라, 두려워해야 할입니다. 우리가 내 뜻대로, 내 맘대로 사는대로 하나님이 눈하나 꺼떡하지 않고 있다면 이 일을 두려워해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시라면 자식된 내가 잘못 되어감을 보고 그냥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히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 으니 (히 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어떠하든, 베드로는 바람을 보았을 때 빠져 갔습니다. 우리도 바람을 보면 빠져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람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것쳐다보고 나가다가 빠져가게 됩니다. 어떤 바람이 있습니까 미풍이 있습니다. 이 미풍은 쎄게 불어서 물건을 넘어뜨리는 것이 아닌 사람의 기분과 신체를 시원케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 바람은 사람의 마음을 잘 빼앗아 가는, 내가 좋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주변의 여러가의 일들과 사건입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갖가지의 바람이 얼마나 많습니까(하와에게 찾아온 마귀의 속삭임) 그런가 하면 광풍이 있습니다. 이 광풍은 손해를 가져오게 하는 광풍입니다. 즉 우리를 어렵게 하고, 힘들게하는 일들과 사건들이 바로 그런 광풍입니다. 우리의 생활에 바람을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을 잘믿고 섬기다가 바람 때문에 믿음의 자리에서 떠나가는이가 있는가 하면, 바람 때문에 망하는 이가 많습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바람이 나면 가정도 자식도 돌보지 않습니다. 겟바람, 춤바람, 돈바람, 집바람, 세상 바람은 모두가 예수님을 떠나가게 합니다. 이 바람은 물위를 걷던 사람을 물 속으로 빠져가게 합니다. 바람을 보고 바람이 들면 예수님도 잃어 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든 사람들이 바람을 보면 교회도 떠나고 직분도 버리고 예수님도 버리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적 바람이라고 부릅니다. 도덕적으로 바람이 나는 것도 큰 일이지만 영적으로 바람이 나면 그것은 더 큰 일입니다. 저는 어려서 겨울이 되면 어머님이 땅을 파고 묻어 두었던 무를 꺼내어 깍두기도 담그고 무국도 끓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를 도마 위에 올려 놓고 싹뚝싹뚝 짜르시다가 ‘이건 바람이 들었어’하고 버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버려지는 무는 심이 박혀 있거나, 썩었거나, 바람이 들어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 바람이 들면 무처럼 버림을 받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람을 보면 빠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일편단신 주님만 바라봅시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2무서워 할 때 위기가 왔습니다. 본문에 ‘무서워 빠져 가는 지라’라고 합니다. 주경가 벵겔이라는 주석가는 ‘그는 비록 어부였고, 수영도 잘 했지만 공포에 질려 물 속으로 빠져 갔다’고 했습니다. 캄캄한 밤, 강풍과 함께 성난 파도가 휘몰아 치고 바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오는 그런 상황에서 두렵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두려움이 일어날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 56: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 56:4)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 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나님은 그 두려움의 일을 통해서 그 사람을 주를 믿는 믿음으로 단단하게 세우려 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그를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세우시기를 위하여 우리들에게 위기를 만나게 합니다. 성경 다니엘서 3장을 보십시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 위기를 만나게 합니다. 느부갓네살왕에게 절하지 않는다면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불속에 집어 넣는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사람을 골탕먹이려고, 괴롭히려고, 일부러 곤란하게 만들려고 함이 아니였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로 주를 의지하게하고, 그렇게 하는자에게 더 큰 은혜와 복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가운데 세우시려고 위기를 주셨을 때 어떻게 합니까 (단 3: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단 3: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 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랬더니 어떤 축복의 역사가 열려집니까 (단 3:29)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 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 (단 3:30)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광풍과, 우리 주변에 넘실거리는 파도를 보면 무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일어나고 있는 여러 문제들, 나를 괴롭히는 일들, 사람들 이것 자체는 크 보입니다. 문제가 대단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기를 주께서 허락하심의 이유를 우리가 분명하게 알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안에 서 있다면, 지금 당한 위기가 오히려 우리의 복이 되어질줄 믿습니다. 별로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나름대로 하나님앞에서 산다고 하는데 위기를 당하는 것은 그 위기를 통해서 축복의 기회로 삼으시게 하기 위해서 위기를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 교회가 당한 여러 연약함, 부족함, 답답함, 어려움이라는 위기가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와 목사와 성도들의 믿음을 굳게 세우시기 위해서 주시는 사건으로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이나 가정이 처해 있는 여러 위기들이 오히려 우리에게 큰 복을 이루는 사건이 될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바다와 바람을 바라보면 빠져 갈 수밖에 없지만 두려운 날에 주를 의지할 때에 주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체험하는 기회가 될줄 믿습니다. 여러분! 기회로 삼읍시다. 기도하는 기회로, 체험하는 기회로, 더 큰 복을 받아 누리는 기회로 말입니다.
4.그러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할수 있을까요 누구에게나 위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기가 문제가 아니라 그 위기 가운데 어떻게 대처하는가가 중요합니다.
1위기가운데 역사하시는 이는 주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건져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배에 오르실때에 바람이 그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위기 가운데 탈출 하려면 그 위가 가운데 건지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은 우리가 물속에 빠져가는 바로 그곳에 같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 주님은 우리가 물 속으로 빠져가는 그 모습을 쳐다보고 계시는 무관심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주님이 그 자리에 계심은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 거하고 계십니다. (사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 니 너는 내 것이라 (사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그렇습니다. 나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역사하심을 믿읍시다. 저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항변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목사로 세우셔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이루는데 쓰시려면 이 일을 위하여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고, 옆에서 동행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째 목사로 쓰시면서 내 주변에, 식구들 중에, 형제중에 믿는 부모나, 형제나, 사람들을 많이 붙여 주셔야지 왜 저 혼자 달랑 있게 해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저는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혼자입니다. 어떻게 저 혼자 이 일을 감당하라고 이렇게 세웠습니까” 라고 기도를 했는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기도의 응답을 주셨습니다. “너 모세알지, 모세가 뭐라고 했니, 나는 입이 둔하고, 뻣뻣해서 잘 못합니다. 저는 혼잡니다. 그럴 때 내가 뭐라고 했니, ‘내가 네 입에 함께 할 것이라, 네가 할 말을 하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위하여 아론을 붙여 주었노라.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니’ 너에게도 마찬가지야” 저에게 온 큰 감동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할 일을 이루게 하겠다. 네가 할 말을 하게 하겠다”
사랑하는 여러분! 빠져가는 우리 삶의 현장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이 말은 우리로 죽도록 내버려 두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분명한 믿음을 가집시다. 이런 믿음을 가질 때 승리하게 될줄 믿습니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2소리 질러야 합니다. 본문에 베드로는 물 속에 빠져 가면서 소리를 질렀다고 하였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마15장에 나오는 귀신들린 두 딸을 두었던 가나안 여인도 소리를 질렀습니다. 소경 바디매오도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경가들은 소리 질렀다는 말을 ‘기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소리 가운데 가장 큰 소리는 기도소리입니다. 제아무리 대포 소리가 크고 핵 폭발 소리가 커도 지구 끝까지 들리진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 소리는 하늘에까지 들립니다. 베드로가 소리 지르자 주님은 들으시고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셨습니다. 물속으로 빠져 가는 사람은 기도해야 합니다. 일이 급한 사람은 기도해야 합니다. 다 죽어가고 있는데도 소리지르지 않는 사람은 정신병이 아니면 죽은 사람입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옆에 서 계시는데 왜 지르지 않습니까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 이리라 행복한교회를 개척하기까지 참 많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강도사로 있을 때 행복한교회를 맞게 되었는데, 부교역자로 있으면서 진로 문제로 참 고심이 많았습니다. 목사안수를 받고 부목사로 있어야 하나-이것도 교회 형펀상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선교사로 나가야 하나-이것도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힘들었습니다. 딱 한가지, 개척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물질적으로나, 환경적으로는 도저히 개척할 여건이 아니였습니다. 가진 돈이 있습니까 누가 개척하면서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습니까 막막한 상황에 집사람도 기도하고, 저도 기도 많이 했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길을 인도하여 주소서.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을 보십시오. 참 기가 막히게 역사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알 듯이 행복한교회의 시작이었던 광명교회, 몇 가정이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교회 건물까지 다 마련해 놓고 몸만 가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연결이 되기까지를 보면 하나님의 기도응답이었습니다. 참 기가 막히게 연결이 되었고, 그 장장한 목사들도 많은데 강도사가 교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이렇듯 제가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을 하셨다면, 지금 우리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기도들, 우리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기도들 또한 하나님은 들어서 역사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도 베드로 처럼 부르짖읍시다. ‘주여 나를 구원 하소서’,‘주여 우리 가정을 구원 하소서’,‘주여 우리 교회를 구원 하소서’ ‘주여 애굽에서 탈출케 하소서. 애굽에서 이끌어 내게 하소서’ 분명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심을 믿습니다.
3주님의 손을 잡았습니다. 본문 31절에 보면 “예수 께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라고 했습니다. 물론 베드로도 주님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바클레이라는 분은 베드로의 위기와 극복을 말하기를 “그는 궁극적으로 실패하지 않았다. 이유는 실패한 순간 언제나 그리스도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섰고, 실수 했으나 주께로 더 가까이 갔다. 성자란 결코 넘어지지 않는 자가 아니라 쓰러졌다 하여도 다시 일어나 정진하는 자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처한 어떠한 위기속에서도 건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주님이 손을 내밀때에 내가 손을 내밀어 붙잡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베드로 처럼 손을 내밀어 주님의 손을 붙잡읍시다. 왜 붙잡아야 합니까 주님의 손을 붙잡고 있다면 실패, 좌절, 절망, 불행, 슬픔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요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4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도 위기를 맞았습니다. 많은 위기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사두개인들과 제사장들이 사도들이 복음전하는 것을 핍박했습니다. 사도들을 잡아다가 매를 때리며 다시는 복음을 증거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복음증거가 중단 될 위기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이 위기를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 위기를 성도들이 하나되는 기회로, 성도들이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는 기회로,하나님의 성령님 을 다 함께 체험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 결과 놀라운 부흥의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마치는 말 위기는 어느 누구나 만나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바른길로 가게 하시기 위하여 위기를 주시기도하고, 더 큰 축복의 기회로 삼으시기 위해서 위기를 만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위기가 문제가 아니라 그 위기 가운데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위기를 만난 그 자리에 서 계시는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읍시다. 그리고 주님께서 손을 내밀때에 나의 손을 내밀어 주님을 꼭 붙읍시다. 위기를 극복합시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위기는 극복이 됩니다. 나의 등 뒤에서(10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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