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신30:15-20)
본문
지난 주간은 추석명절이 있어서 다들 어디를 다녀왔을 것입니다. 저도 오래간만에 아이들 이모가 있는 경기도 파주 지역에 있는 법원리를 다녀왔습니다. 평소에 가지 않던 길로, 갈때는 그래도 잘 찾아 갔는데 오는 시간이 밤 시간이라 한참 헤메이다가 찾아왔습니다. 오는 길이 의정부를 거쳐서 서울로 오는 길이었는데 이정표를 보고 잘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오는중에 두 갈래의 길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이정표라도 있으면 헷갈리지를 않았을 터인데 이정표도 없고 그냥 판단에 ‘이쪽인가 보다’하고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어뚱한 데로 들어섰던 것입니다. 한참 가다가 다시 돌아 와서 계속 왔습니다.
그런데 의정부 시내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이 두갈래가 있는데 한 길은 서울 동부간선도로가 연결되는 길이 있고, 한 길은 서울 도봉구로 나오는 길이 있습니다. 저는 동부간선도로를 타야 빨리 올수 있기에 이것을 염두에 두고 오는데 동부간선도로로 올려면 좌회전을 해야 하는데 직전을 해버렸습니다. 직전을 해서 가다보면 내가 들어서기를 원하는 길이 나올까 싶어서입니다. 그 순간 이럴까 저럴까 혼자서 갈등하다가 그냥 직진을 해버린 것이 얼마나 고생케 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동부간선도로 오면 신호없이 그냥 달릴텐데 잘못 들어선 길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신호가 걸리며, 길을 찾아 헤메였는지 모릅니다. 오면서 내 마음속에, 그리고 입으로는 얼마나 후회를 하고 왔는지 모릅니다. ‘그 의정부에서 동부간선도로 왔으면 이런 고생하지 않고 빨리 왔을텐데, 에이’ 그러나 후회해봤자 아무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택을 해야 하는 길목에서 잘못 선택을 해서 저가 격었던 이런 후회하는 일들을 여기 계신 분중에서도 많이 격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 당하고 나서, 다 격고 나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들이요, 일들인데 말입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오늘 여러분과 저 앞에 이 두 길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면서, 이 두길 가운데 우리들이 어떤 길을 선택해야 후회함이 없는, ‘참 잘했구나’하는 이런 축복된 삶을 살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 인생길에 있는 두 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 길이 어떤 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15,19절에 ‘생명과 복’이 있게하는 길이 있고, ‘사망과 화’를 당케하는 길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두 길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7:13-1
4'좁은 길과 넓은 길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고, 창2:9'생명과와 선악과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고, 갈6:8'육신의 것과 성령님의 것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3:10-1
5'타지는 것과 타지지 않는 것이있고, 계3:15-16'차가운것과 뜨거운 것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4:18'잠깐의 것이 있고, 영원의 것이 있다고 있고, 골1장에는 '하늘의 것이 있고, 땅의 것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두 길중, 한 길은 쉬운길이고, 한 길은 어려운 길이라는 것입니다. 한 길은 사람들이 많이 가고, 한 길은 사람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한 길은 사람을 복되게 하는 길이지만, 한 길은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어렵지만, 그래서 그 길로 가는 사람이 적지만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길은 좁은 길이요, 생명과를 먹는 것이요, 성령님의 것을 좇는 것이요, 영원한 것이요, 하늘의 것이요, 뜨거운 것이 우리를 복되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은 손에 잡히는 것은 적고, 눈에 보이는 것은 없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길로 가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쉽고, 편하고, 좋아서 사람들이 많이 가지만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길은 넓은 길이요, 선악과를 먹는 것이요, 육신의 것을 좇는 것이요, 땅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며,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을 얻는 것입니다. 이 길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일까요 손에 잡히는 것이 많고,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 길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성경에는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 두 길을 15절-‘네 앞에 두었노니’ 19절-‘네 앞에 두었은즉’ 여러분과 자 앞에 이 두 길에 놓여 있습니다. 놓여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어느 누구나 이 두 길중에 한 길을 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두 길중에 한 길을 택하여 갔을 때 그 결과는 하늘과 땅만큼 처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7-18절에보면-불행한 삶을, 멸망의 삶을 살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에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2.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19절) 여기서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는 말의 의미는
1우리 앞에 놓여 있는 두 길중에 생명의 길을 선택해서 축복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저 앞에는 항상 이 두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길중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킹스톤대학 법과대학은 미국에서 법과대학중에는 유명합니다. 거기서 법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하던 두 사람이 졸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주에 오래간만에 편안한 마음을 가지면서 저녁에 둘이서 술도 마시고, 도박도 하고 그리고 춤을 추기위하여 도박장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걸어가는데 그 옆에 교회가 있었는데 교회 게시판에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저녁설교 제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보고 한 청년은 가슴에 뜨끔했습니다. 그래서 한 친구가 ‘우리 술집 가지말고 오늘 여기들어가서 은혜받자’고 했더니 한친구는 ‘아니다. 다음주부터 가서 은혜받아도 되지않느냐, 우리 졸업하고 처음주일인데 가서 좀 즐기자라’고하면서 서로싸움을 하다가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교회들어가서 죄의값은 사망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술집에 들어가 평소에 마시지 못한 술을 실컷 마셨습니다. 그리고 30년이지났습니다. 그때 교회갔던 친구는 미국의 대통령이되었는데, 그가 바로 ‘크레버란트’대통령입니다. 그가 대통령 취임식을 하는 그날 온 세계의 신문은 그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며 온 신문이 그의 기사로 꽉찼습니다.
그런데 그때 술집에 갔던 그 친구는 살인범이 되어 그 신문을 들여다 보면서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이 친구가 30년전 교회앞에서 ‘죄의값은 사망이다’라고 설교를 들으려가자고 싸웠던 친구로구나. 그는 은혜받고 대통령이 되었고, 나는 감옥에서 사형당할날을 기다리고 있구나”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이렇게 인생의 질이 달라집니다. 인생이 질만이 아니라 영원이 결정이 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당장만 생각해서 오늘 좋은대로, 오늘 편한대로, 오늘 하고 싶은 길을 찾아서는 안됩니다. 지금 당장은 좀 힘이 들고 어렵지만, 고통이 따르고, 즐기지를 못하지만 우리는 그 길이 바른 길이라면 그 길을 택하여야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오늘 살고 끝낼 인생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고, 천국이 있고, 하나님의 심판대앞에 서야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기 위해서 비록 믿음으로 살기 힘든 세상이지만 믿음의 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힘이들고 사람이 적지만 좁은 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잠깐 있다가 없어질 땅의 것을 좇지 말고 영원히 존재할 하늘의 것 신령한 것을 택하라는 말입니다. 살기 위해서 먹기에 좋다고 선악과를 따먹지 말고 생명과를 따먹으라는 것입니다. 그저 세상 흘러 가는대로, 일이 되는대로 놓아 둘 것이 아니라 우리는 적극적으로 믿음의 길, 생명의 길을 좇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기 위해서 생명의 길을 택합시다. 이것이 내가 살 길일뿐 아니라 네 자손이 살길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와 맥스쥬크 미국에서 최초로 부흥운동을 일으킨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죠나단 에드워드입니다. 이 죠나단 에드워드에게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그가 살던 동네에 ‘맥스 쥬크’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전과자였고, 질이 좋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회학자가 이 두사람의 가계도를 조사했더니 아주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답니다. 이 사회학자가 조사할 당시에 죠나단 에드워즈의 후손은 873명이었답니다. 그 중에 대학 총장이 12명 나왔고, 대학 교수가 65명 나왔으며, 의사가 60명 나왔고, 목사가 100명 나왔습니다. 군대 장교가 75명, 베스트셀러 작가가 80명, 변호사가 100명, 판사가 30명, 정부의 고급 공무원이 80명, 하원의원이 3명, 상원의원이 1명 그리고 미국 부통령이 1명 배출되었답니다. 대단한 명문가입니다. 지금도 조나단 에드워즈가는 매국 내에서 전통있는 명문가로 통합니다.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친구였던 맥스 쥬크의 가계도는 이랬습니다. 그의 후손은
1,292명으로 에드워즈가계보다 419명이 더 많은 셈입니다. 자손이 많다고 좋은것만 아닙니다. 그 자손들이 어떠했느냐가 중요한것입니다. 쥬크의 후손 중에 만 4세가 되기전에 죽은 사람이 309명, 직업거지가 310명, 일하다가 한눈 팔아 불구가 된 사람이 440명, 매춘부가 50명, 투옥된 도둑이 60명, 살인자가 70명 그리고 실업자가 50명 이었답니다. 무슨 말입니까 부모의 신앙이 후손들에게 이렇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 생명의 길을 택하느냐, 사망의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자신뿐 아니라 후손에게 까지 영향이 끼쳐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려분들 자신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자식들을 위해, 후손들을 위해 생명의 길을 택합시다.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는 말의 의미는
2하느냐, 안하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들에게 달려있지만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두 길을 놓았다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사망과 화의 길을 택하지 말고 살기 위하여 생명과 복의 길을 택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을 기계나, 로봇으로 만들지 아니하셨습니다. 즉, 우리 사람을 어떤 프로그램에 입력해서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굳이 우리 앞에 ‘두 길’-생명과 복, 사망과 화를 둘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생명과 복의 길을 만들어 놓고 그대로 움직이게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격이 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시고 우리를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인격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에 우리 사람들을 인격적인 존재로 대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앞에 두 길을 놓아 두신것입니다. 하므로 우리 사람들은 생명의 길을 택할수도 있고, 안 택할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사망과 길을 택할 수도 있고, 안 택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로 복된 삶을 살게 하시기를 원하셔서 우리를 복고 생명의 길을 택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안택하면 너 죽어’해서 억지로 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길을 택함이 너의 복이니 너 그 길을 택해라’고 권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저에게는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습니다. 즉, 어떤 일들을 할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올수도 있고, 안 올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교회에 올 날에, 시간에 교회오는 길을 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내일부터 있는 ‘98엑소더스를 위한 특별새벽기도회’에 올수도 있고, 안올수 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려면 기도해야 하는데, 그것도 다 같이 마음을 모아 합심하여 부르짖기를 원하시므로 축복의 일들을 이루기를 원하니 특별새벽기도회에 참여토록 해라는 것입니다. 편한 것은 새벽을 깨우지 말고 그냥 잠을 자는 것이 훨씬 더 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기 위해서,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새벽을 깨워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전도를 할수도 있고 안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 전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편한 것은 전도 안하는 것이 훨씬더 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려면 전도해야 합니다. 지난주일에 말씀을 드렸듯이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해서 감사기뻐할 수도 있고, 원망불평할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칭찬하고 격려할수도 있고, 비판하고 흉볼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을 보던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생각할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소극적으로 생각할수 있습니다. 쉬운 것은 원망불평이요, 비판과 흉을 보는 것이요, 부정적으로 소극적으로 보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감사하고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역사하는 사람이 되려면 칭찬하고 격려하라고 하십니다. 긍정적으로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든 그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하느냐, 안하느냐는 것은 여러분의 전적인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힘이 들더라도, 고통이 있더라도, 좀 귀찮더라도,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생명의 길, 믿음의 길을 택해야 합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왜 안달 복달입니까 그냥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대로, 그냥 편한대로, 그냥 되는대로 놓아두면 ‘어련히 알아서 잘 할까 왜들 그렇게 성가시게 하느냐’ 할것입니다. 왜 기도하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고, 왜 교회오지 않는다고 뭐라하고, 왜 예배를 빠지느냐고 합니까 기도해야, 말씀을 붙들어야, 예배를 드려야, 봉사를 해야, 전도를 해야, 믿음으로 살아야 여러분들의 영혼이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도 “너희가 살기 위하여” 생명의 길을 택하라고 정말 간곡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가 어떻게 행하는가는 전적인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말할수 없이 크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주어져 있는 자유의지를 여러분들이 쓰고 싶은대로, 사용하고 싶은대로 놓아두지 말고, 의식적으로라도, 강제적으로라도, 강권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자유의지를 생명의 길을 택하는데 사용케 하라는 것입니다. 스탈린 시대에 보리스 콘펠드라는 젊은 유대인 의사가 스탈린에 대한 좋지않는 말을 했다고해서 체포를 당했습니다. 시베리아의 집단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는데, 마침 그 수용소에 그리스도인이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 유대인 의사에게 집요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러시아 정교회 교인들에게 많은 박해를 당하던 터라 예수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이 의사도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지만 그리스도인의 집요한 전도끝에 드디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의사는 예수를 받아들이고 영혼의 자유와 평안을 얻고나서 두가지의 결심을 했습니다.
첫째는 이 놀라운 사랑을 가르쳐 준 그 그리스도인처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겠다는 결심이고, 또 하나는 나에게 기쁜 소식이었던 이 복음을 나도 전하면서 살아야 겠다는 결심 이었습니다. 수용소 안에서도 그는 의사로서 있었는데, 부정이 횡행하는 그곳에서 의사로서의 활동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가지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고, 또 부정에 협조해야하는 일들이 있어지만 그는 일체를 거절하고 신앙인 답게 살아 갔습니다. 그때에 한 젊은이가 암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수술 환자의 명단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사는 그를 수술하기로 결심하고 수술을 했습니다. 이 소문이 알려지자 규칙을 어겼다해서 그에게는 말할 수 없는 박해가 옵니다. 어느 날 밤, 이 의사는 자기가 수술했던 젊은이 곁에 앉아서 밤늦도록 그에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소식에 대해서 증거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튿날 아침에 이 의사는 처형을 당했습니다. 처형 당하기 직전에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선택에 후회함이 없소” 이때 그는 유명한 대답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후회함이 없습니다” 그는 한 영혼을 사랑했고, 복음을 전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약속을 그에게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이 유대인 의사에게 수술을 받아서 생명을 회생(回生)하고,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을 하게된 젊은이는 바로 그유명한 노벨 수상작가인 알렉산더 솔제니친 입니다. 생명의 길을 택하는 것이 잠간의 고통이요, 죽음으로 나타나지만 잠간의 고통과 죽음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순교자 폴리캅 교회사를 보면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흥분시키는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 폴리캅이라는 분은 예수를 믿고, 섬긴다고 잡혀 로마 황제앞에 끌려 갔습니다. 그리고는 화형대 앞에 세워놓고 화형을 집형하려는 집형관이 폴리캅에게 물었습니다. “폴리캅, 지금 이 시간에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황제를 섬기면 너를 이 화형대에서 사형하는 것을 면하여 주겠다” 그때 폴리캅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 생애 86년동안 예수님은 늘 나와 함께 계시면서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겠소” 결국 폴리캅은 산채로 화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든지 살길이 있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면 그의 육신의 생명을 살릴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육신은 고통가운데 죽어갈지라도 그가 믿음을 지킴이 그의 영혼이 살길인줄 알고 그는 영생하는 쪽으로 그의 의지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자유의지를 생명의 길을 택하는 쪽으로 쳐 복종을 시키십시오. 바울 사도가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고전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나를 쳐 복종시켜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고자 하는 내 마음과 정욕을 복종시켜 하나님을 향한, 영원을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육신의 안일과 평안과 유익을 좇아가고자 하는 이런것들을 쳐 복종시켜 신령한 것을 얻고, 영원한 것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고자 하는 내 마음과 육신을 복종시켜서 기도케 해야합니다. 이런것들은 내가 의지를 가지고 행하면 그렇게 되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실 것입니다. 그냥 어떻게 되겠지가 아닙니다. 하고자 하여 덤벼들때에 생명의 길에서게 됩니다. 마치는 말 하기 나름입니다. 마음 먹기 나름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두 길중에 한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는 이 길이냐, 저 길이냐, 이렇게 해야 하나, 저렇게 해야 하나라는 길목들이 많습니다. 그때 잠간의 유익과 만족과 안일을 생각해서 편한 쪽으로 선택하지 말고, 잠간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고, 손해가 있고, 고통이 따른다 해도 그것이 영원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라면 그쪽을 선택하는 의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게 주어져 있는 자유의지를 생명의 길을 택하고 나아갈 때 우리는 분명 생명과 복의 길에 서서 축복된 삶을 살아가게 될것입니다.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합시다.
그런데 한참 오는중에 두 갈래의 길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이정표라도 있으면 헷갈리지를 않았을 터인데 이정표도 없고 그냥 판단에 ‘이쪽인가 보다’하고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어뚱한 데로 들어섰던 것입니다. 한참 가다가 다시 돌아 와서 계속 왔습니다.
그런데 의정부 시내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이 두갈래가 있는데 한 길은 서울 동부간선도로가 연결되는 길이 있고, 한 길은 서울 도봉구로 나오는 길이 있습니다. 저는 동부간선도로를 타야 빨리 올수 있기에 이것을 염두에 두고 오는데 동부간선도로로 올려면 좌회전을 해야 하는데 직전을 해버렸습니다. 직전을 해서 가다보면 내가 들어서기를 원하는 길이 나올까 싶어서입니다. 그 순간 이럴까 저럴까 혼자서 갈등하다가 그냥 직진을 해버린 것이 얼마나 고생케 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동부간선도로 오면 신호없이 그냥 달릴텐데 잘못 들어선 길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신호가 걸리며, 길을 찾아 헤메였는지 모릅니다. 오면서 내 마음속에, 그리고 입으로는 얼마나 후회를 하고 왔는지 모릅니다. ‘그 의정부에서 동부간선도로 왔으면 이런 고생하지 않고 빨리 왔을텐데, 에이’ 그러나 후회해봤자 아무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택을 해야 하는 길목에서 잘못 선택을 해서 저가 격었던 이런 후회하는 일들을 여기 계신 분중에서도 많이 격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 당하고 나서, 다 격고 나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들이요, 일들인데 말입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오늘 여러분과 저 앞에 이 두 길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면서, 이 두길 가운데 우리들이 어떤 길을 선택해야 후회함이 없는, ‘참 잘했구나’하는 이런 축복된 삶을 살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 인생길에 있는 두 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 길이 어떤 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15,19절에 ‘생명과 복’이 있게하는 길이 있고, ‘사망과 화’를 당케하는 길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두 길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7:13-1
4'좁은 길과 넓은 길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고, 창2:9'생명과와 선악과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고, 갈6:8'육신의 것과 성령님의 것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3:10-1
5'타지는 것과 타지지 않는 것이있고, 계3:15-16'차가운것과 뜨거운 것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4:18'잠깐의 것이 있고, 영원의 것이 있다고 있고, 골1장에는 '하늘의 것이 있고, 땅의 것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두 길중, 한 길은 쉬운길이고, 한 길은 어려운 길이라는 것입니다. 한 길은 사람들이 많이 가고, 한 길은 사람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한 길은 사람을 복되게 하는 길이지만, 한 길은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어렵지만, 그래서 그 길로 가는 사람이 적지만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길은 좁은 길이요, 생명과를 먹는 것이요, 성령님의 것을 좇는 것이요, 영원한 것이요, 하늘의 것이요, 뜨거운 것이 우리를 복되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은 손에 잡히는 것은 적고, 눈에 보이는 것은 없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길로 가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쉽고, 편하고, 좋아서 사람들이 많이 가지만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길은 넓은 길이요, 선악과를 먹는 것이요, 육신의 것을 좇는 것이요, 땅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며,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을 얻는 것입니다. 이 길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일까요 손에 잡히는 것이 많고,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 길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성경에는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 두 길을 15절-‘네 앞에 두었노니’ 19절-‘네 앞에 두었은즉’ 여러분과 자 앞에 이 두 길에 놓여 있습니다. 놓여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어느 누구나 이 두 길중에 한 길을 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두 길중에 한 길을 택하여 갔을 때 그 결과는 하늘과 땅만큼 처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7-18절에보면-불행한 삶을, 멸망의 삶을 살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에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2.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19절) 여기서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는 말의 의미는
1우리 앞에 놓여 있는 두 길중에 생명의 길을 선택해서 축복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저 앞에는 항상 이 두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길중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킹스톤대학 법과대학은 미국에서 법과대학중에는 유명합니다. 거기서 법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하던 두 사람이 졸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주에 오래간만에 편안한 마음을 가지면서 저녁에 둘이서 술도 마시고, 도박도 하고 그리고 춤을 추기위하여 도박장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걸어가는데 그 옆에 교회가 있었는데 교회 게시판에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저녁설교 제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보고 한 청년은 가슴에 뜨끔했습니다. 그래서 한 친구가 ‘우리 술집 가지말고 오늘 여기들어가서 은혜받자’고 했더니 한친구는 ‘아니다. 다음주부터 가서 은혜받아도 되지않느냐, 우리 졸업하고 처음주일인데 가서 좀 즐기자라’고하면서 서로싸움을 하다가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교회들어가서 죄의값은 사망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술집에 들어가 평소에 마시지 못한 술을 실컷 마셨습니다. 그리고 30년이지났습니다. 그때 교회갔던 친구는 미국의 대통령이되었는데, 그가 바로 ‘크레버란트’대통령입니다. 그가 대통령 취임식을 하는 그날 온 세계의 신문은 그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며 온 신문이 그의 기사로 꽉찼습니다.
그런데 그때 술집에 갔던 그 친구는 살인범이 되어 그 신문을 들여다 보면서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이 친구가 30년전 교회앞에서 ‘죄의값은 사망이다’라고 설교를 들으려가자고 싸웠던 친구로구나. 그는 은혜받고 대통령이 되었고, 나는 감옥에서 사형당할날을 기다리고 있구나”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이렇게 인생의 질이 달라집니다. 인생이 질만이 아니라 영원이 결정이 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당장만 생각해서 오늘 좋은대로, 오늘 편한대로, 오늘 하고 싶은 길을 찾아서는 안됩니다. 지금 당장은 좀 힘이 들고 어렵지만, 고통이 따르고, 즐기지를 못하지만 우리는 그 길이 바른 길이라면 그 길을 택하여야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오늘 살고 끝낼 인생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고, 천국이 있고, 하나님의 심판대앞에 서야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기 위해서 비록 믿음으로 살기 힘든 세상이지만 믿음의 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힘이들고 사람이 적지만 좁은 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잠깐 있다가 없어질 땅의 것을 좇지 말고 영원히 존재할 하늘의 것 신령한 것을 택하라는 말입니다. 살기 위해서 먹기에 좋다고 선악과를 따먹지 말고 생명과를 따먹으라는 것입니다. 그저 세상 흘러 가는대로, 일이 되는대로 놓아 둘 것이 아니라 우리는 적극적으로 믿음의 길, 생명의 길을 좇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기 위해서 생명의 길을 택합시다. 이것이 내가 살 길일뿐 아니라 네 자손이 살길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와 맥스쥬크 미국에서 최초로 부흥운동을 일으킨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죠나단 에드워드입니다. 이 죠나단 에드워드에게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그가 살던 동네에 ‘맥스 쥬크’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전과자였고, 질이 좋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회학자가 이 두사람의 가계도를 조사했더니 아주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답니다. 이 사회학자가 조사할 당시에 죠나단 에드워즈의 후손은 873명이었답니다. 그 중에 대학 총장이 12명 나왔고, 대학 교수가 65명 나왔으며, 의사가 60명 나왔고, 목사가 100명 나왔습니다. 군대 장교가 75명, 베스트셀러 작가가 80명, 변호사가 100명, 판사가 30명, 정부의 고급 공무원이 80명, 하원의원이 3명, 상원의원이 1명 그리고 미국 부통령이 1명 배출되었답니다. 대단한 명문가입니다. 지금도 조나단 에드워즈가는 매국 내에서 전통있는 명문가로 통합니다.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친구였던 맥스 쥬크의 가계도는 이랬습니다. 그의 후손은
1,292명으로 에드워즈가계보다 419명이 더 많은 셈입니다. 자손이 많다고 좋은것만 아닙니다. 그 자손들이 어떠했느냐가 중요한것입니다. 쥬크의 후손 중에 만 4세가 되기전에 죽은 사람이 309명, 직업거지가 310명, 일하다가 한눈 팔아 불구가 된 사람이 440명, 매춘부가 50명, 투옥된 도둑이 60명, 살인자가 70명 그리고 실업자가 50명 이었답니다. 무슨 말입니까 부모의 신앙이 후손들에게 이렇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 생명의 길을 택하느냐, 사망의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자신뿐 아니라 후손에게 까지 영향이 끼쳐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려분들 자신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자식들을 위해, 후손들을 위해 생명의 길을 택합시다.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는 말의 의미는
2하느냐, 안하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들에게 달려있지만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두 길을 놓았다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사망과 화의 길을 택하지 말고 살기 위하여 생명과 복의 길을 택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을 기계나, 로봇으로 만들지 아니하셨습니다. 즉, 우리 사람을 어떤 프로그램에 입력해서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굳이 우리 앞에 ‘두 길’-생명과 복, 사망과 화를 둘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생명과 복의 길을 만들어 놓고 그대로 움직이게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격이 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시고 우리를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인격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에 우리 사람들을 인격적인 존재로 대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앞에 두 길을 놓아 두신것입니다. 하므로 우리 사람들은 생명의 길을 택할수도 있고, 안 택할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사망과 길을 택할 수도 있고, 안 택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로 복된 삶을 살게 하시기를 원하셔서 우리를 복고 생명의 길을 택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안택하면 너 죽어’해서 억지로 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길을 택함이 너의 복이니 너 그 길을 택해라’고 권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저에게는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습니다. 즉, 어떤 일들을 할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올수도 있고, 안 올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교회에 올 날에, 시간에 교회오는 길을 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내일부터 있는 ‘98엑소더스를 위한 특별새벽기도회’에 올수도 있고, 안올수 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려면 기도해야 하는데, 그것도 다 같이 마음을 모아 합심하여 부르짖기를 원하시므로 축복의 일들을 이루기를 원하니 특별새벽기도회에 참여토록 해라는 것입니다. 편한 것은 새벽을 깨우지 말고 그냥 잠을 자는 것이 훨씬 더 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기 위해서,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새벽을 깨워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전도를 할수도 있고 안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 전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편한 것은 전도 안하는 것이 훨씬더 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려면 전도해야 합니다. 지난주일에 말씀을 드렸듯이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해서 감사기뻐할 수도 있고, 원망불평할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칭찬하고 격려할수도 있고, 비판하고 흉볼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을 보던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생각할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소극적으로 생각할수 있습니다. 쉬운 것은 원망불평이요, 비판과 흉을 보는 것이요, 부정적으로 소극적으로 보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감사하고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역사하는 사람이 되려면 칭찬하고 격려하라고 하십니다. 긍정적으로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든 그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하느냐, 안하느냐는 것은 여러분의 전적인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힘이 들더라도, 고통이 있더라도, 좀 귀찮더라도,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생명의 길, 믿음의 길을 택해야 합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왜 안달 복달입니까 그냥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대로, 그냥 편한대로, 그냥 되는대로 놓아두면 ‘어련히 알아서 잘 할까 왜들 그렇게 성가시게 하느냐’ 할것입니다. 왜 기도하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고, 왜 교회오지 않는다고 뭐라하고, 왜 예배를 빠지느냐고 합니까 기도해야, 말씀을 붙들어야, 예배를 드려야, 봉사를 해야, 전도를 해야, 믿음으로 살아야 여러분들의 영혼이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도 “너희가 살기 위하여” 생명의 길을 택하라고 정말 간곡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가 어떻게 행하는가는 전적인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말할수 없이 크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주어져 있는 자유의지를 여러분들이 쓰고 싶은대로, 사용하고 싶은대로 놓아두지 말고, 의식적으로라도, 강제적으로라도, 강권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자유의지를 생명의 길을 택하는데 사용케 하라는 것입니다. 스탈린 시대에 보리스 콘펠드라는 젊은 유대인 의사가 스탈린에 대한 좋지않는 말을 했다고해서 체포를 당했습니다. 시베리아의 집단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는데, 마침 그 수용소에 그리스도인이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 유대인 의사에게 집요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러시아 정교회 교인들에게 많은 박해를 당하던 터라 예수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이 의사도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지만 그리스도인의 집요한 전도끝에 드디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의사는 예수를 받아들이고 영혼의 자유와 평안을 얻고나서 두가지의 결심을 했습니다.
첫째는 이 놀라운 사랑을 가르쳐 준 그 그리스도인처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겠다는 결심이고, 또 하나는 나에게 기쁜 소식이었던 이 복음을 나도 전하면서 살아야 겠다는 결심 이었습니다. 수용소 안에서도 그는 의사로서 있었는데, 부정이 횡행하는 그곳에서 의사로서의 활동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가지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고, 또 부정에 협조해야하는 일들이 있어지만 그는 일체를 거절하고 신앙인 답게 살아 갔습니다. 그때에 한 젊은이가 암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수술 환자의 명단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사는 그를 수술하기로 결심하고 수술을 했습니다. 이 소문이 알려지자 규칙을 어겼다해서 그에게는 말할 수 없는 박해가 옵니다. 어느 날 밤, 이 의사는 자기가 수술했던 젊은이 곁에 앉아서 밤늦도록 그에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소식에 대해서 증거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튿날 아침에 이 의사는 처형을 당했습니다. 처형 당하기 직전에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선택에 후회함이 없소” 이때 그는 유명한 대답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후회함이 없습니다” 그는 한 영혼을 사랑했고, 복음을 전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약속을 그에게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이 유대인 의사에게 수술을 받아서 생명을 회생(回生)하고,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을 하게된 젊은이는 바로 그유명한 노벨 수상작가인 알렉산더 솔제니친 입니다. 생명의 길을 택하는 것이 잠간의 고통이요, 죽음으로 나타나지만 잠간의 고통과 죽음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순교자 폴리캅 교회사를 보면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흥분시키는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 폴리캅이라는 분은 예수를 믿고, 섬긴다고 잡혀 로마 황제앞에 끌려 갔습니다. 그리고는 화형대 앞에 세워놓고 화형을 집형하려는 집형관이 폴리캅에게 물었습니다. “폴리캅, 지금 이 시간에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황제를 섬기면 너를 이 화형대에서 사형하는 것을 면하여 주겠다” 그때 폴리캅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 생애 86년동안 예수님은 늘 나와 함께 계시면서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겠소” 결국 폴리캅은 산채로 화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든지 살길이 있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면 그의 육신의 생명을 살릴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육신은 고통가운데 죽어갈지라도 그가 믿음을 지킴이 그의 영혼이 살길인줄 알고 그는 영생하는 쪽으로 그의 의지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자유의지를 생명의 길을 택하는 쪽으로 쳐 복종을 시키십시오. 바울 사도가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고전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나를 쳐 복종시켜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고자 하는 내 마음과 정욕을 복종시켜 하나님을 향한, 영원을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육신의 안일과 평안과 유익을 좇아가고자 하는 이런것들을 쳐 복종시켜 신령한 것을 얻고, 영원한 것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고자 하는 내 마음과 육신을 복종시켜서 기도케 해야합니다. 이런것들은 내가 의지를 가지고 행하면 그렇게 되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실 것입니다. 그냥 어떻게 되겠지가 아닙니다. 하고자 하여 덤벼들때에 생명의 길에서게 됩니다. 마치는 말 하기 나름입니다. 마음 먹기 나름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두 길중에 한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는 이 길이냐, 저 길이냐, 이렇게 해야 하나, 저렇게 해야 하나라는 길목들이 많습니다. 그때 잠간의 유익과 만족과 안일을 생각해서 편한 쪽으로 선택하지 말고, 잠간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고, 손해가 있고, 고통이 따른다 해도 그것이 영원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라면 그쪽을 선택하는 의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게 주어져 있는 자유의지를 생명의 길을 택하고 나아갈 때 우리는 분명 생명과 복의 길에 서서 축복된 삶을 살아가게 될것입니다.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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