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 (요1:1-18)
본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는 엄청난 과학의 발달로 과학이 가져다주는 크다란 혜택을 누구나 누리며 산다. 그로 인해 물질문명의 발달이 가속이 붙어 너무도 빨리 변해져 가는 세상이다. 한 눈 팔 사이 없이 쫓아가도 웬만한 실력으로는 쫓아가기도 힘든다. 어느 P.C 대리점 하시는 분은, P.C의 사양이 너무도 빨리 바뀌어 장사를 할 수 없단다. 한가지 사양이 적어도 6개월은 지속되어야 하는데 요즈음은 3개월도 못 견딘다고 한다. 어떤 부분들은 1개월이 못되어 새로운 제품들이 나온다고 한다. 재고 처리가 너무도 힘든다고 한다. 그런 것 같아요. 최고의 과학 기술들이 난무한다. 그래서 “첨단과학”이라고 한다. 끝이 다 되어 간다는 말이리라. 그 “과학 발달의 끝”이 어디일까 과연 과학은 “더 이상” 발달할 수 없는 “끝”에 도달할까…. 더 이상 발달할 수 없는 “완전한 과학”은 과연 무엇일까 저는 생각해 본다. 그 “완전한 과학”은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어떤 “법칙”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의 발달로 “성경”은 더욱 하나님의 말씀임이 증거되어지고 있다. 그 옛날 “비과학적”이라고, 맹목적이고 미신적인 신앙이라고 비웃고 조롱하고 무시했으나, 세월이 흐르며 과학이 발달하니 비웃던 그들의 입에서, 조롱이 그치고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아직도 수많은 “과학 제일 주의자들”에 의해, 소위 과학적 사고방식의 사람들에 의해 “성경”은 짓밟히고 있다. 그러나 사탄의 “성경” 말살 정책에도 숱한 시련을 겪으며 오늘 우리의 손에 이렇게 쥐어져 있다. 우리 손에 쥐어진 “이 성경”만 보더라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난주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임을 살펴보았다. 그 “살아 있는 말씀”은 운동력이 있고 능력이 있어,하나님의 말씀이 “빛이 있으라”하니 “빛”이 그 존재형식을 취했다. “살아 있는 말씀”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그분이 입을 열면 “살아 있는 말씀”이 흘러 나왔다. “달리다굼”하시니 “죽은 소녀”가 살아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살아 있는 말씀”이 인간의 문자로 기록된 것이 “성경” 곧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이다. 오늘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
2.기록된 말씀(Written Word) 기록된 말씀이 무엇인가 바로 성경이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인간의 문자로 기록되어진 것이 성경이다. 이 성경은 여러 사람들이(주로 선지와 사도)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디모데후서 3:16-17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요한복음 20: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1.영감으로 기록된 말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누구에게나 다 임하는 게 아니다. 또 어느 한 순간에 다 주어지는 게 아니다. 시대, 시대를 따라 그 시대의 필요한 말씀을 특별한 사람을 선택해서 하셨다. 이를 신학적으로 “특별 계시”라고 한다. 그 중에서 특별한 사람에게 “영감”을 주셔서 당신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기록하게 하셨다. 당시의 다른 많은 사람에게, 또 후대에도 필요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감동 곧 “영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잘못됨이 없이 정확하게 기록하도록 성령님의 능력으로 성경 기록자를 “사로잡음”을 말한다.
2.기록 목적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라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가 우리 인간의 가족 관계에서처럼 그런 관계가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요한복음 5:18절에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고 했다. 여기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는 곳 “자칭 하나님”이란 말이다(요10:33). 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했다(빌2:6).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그분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요, 그분 속에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뜻임을 유대인들이 알기에 “참람되다”고 예수를 마땅히 죽일 자로 단죄했다(레24:16). ㉡.생명을 얻게 하려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 영생을 얻게 하는 것 곧 “인류의 구원”이 기록 목적이 된다. 그렇다. 죄로 인해 영영 죽고 멸망받을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소식”이야말로 복음이다. 이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한 것이요, 그 약속의 성취가 바로 예수이다(롬1:2) 그 복음은 창세기 3:15절에서부터 주어졌다. “여인의 후손”으로 나타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 3:15절에서 “여인의 후손”만 보고 지나간다. 그래서 인류에게 주신 “최초의 복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인류에게 주신 “최초의 복음”이라기 보다는 사탄의 징벌을 선언하시는 “선고문”이다. “사탄의 멸망”을 담고 있는 내용이다. “사탄의 멸망” 곧 “죄의 근원”을 없앤다는 “선고문”이다. 고린도전서 15:55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했다. 부활의 주님이 무덤을 깨치고 나오시며 외치는 승리의 개가(凱歌)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 성도들의 승리의 환호성이다. 그렇다. “사탄의 멸망”이 곧 인류의 구원이다. “죄의 근원”이 없어질 때, 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어질 때, 거기에 구원이 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여인의 후손”을 주신다는 것이다. 참으로 크고 놀라운 은혜이다. 이 크고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께서 언제 주셨는가 시초 보음이라며 “여인의 후손”만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담이 죄로 “망하고난 후”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아담 하와가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을 받기 이전”이다. 여기에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아야 한다. “크신 은총”을 보아야 한다. 놀랍고 놀라운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 자신이 창조한 아담과 하와, 그들의 범죄의 대가를 스스로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잘 생각해 보라! 그 “여인의 후손”이 누구인가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낳는 아들이요(사7:14),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님으로 잉태하여 낳을 아들이요(눅1:27, 34),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곧 예수이다(마1:21) 그 예수는 누구인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다(본문14절). 바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다.
결국 아담 하와의 죄를 징벌하시기 전에, 그 인생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자신이 스스로 책임지실 것을 결정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마치 부모가 어린 자식의 잘못을 책임지듯 하나님께서도, 자기 중심인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 디모데후서 3:16-17절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즐거워하며 살아가야 할 우리 성도들. 지금의 우리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부족함이다. 마태복음 5:48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했다. 과연 우리 인간이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을 이룰 수 있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힘으로 그것이 어디 될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 인간에게 대속주(代贖主)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란 무슨 말인가 그 “크고 놀라운 은혜!” 곧 받은 은혜에 감사하라는 말이다. 감사하며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말씀이다. 그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의 목숨을 드린들 아까우랴! 이것이 성도라면 누구나의 마음이리라.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롬12:2) 살아가게 된다.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곧 성경이 이러한 사실들을 일깨워 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길잡이가 된다는 것이다(시119:105) 바로 성경의 기록 목적이 된다.
3.기록된 말씀(Written Word)에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찾아야 요한 계시록 1: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인간의 문자로 기록되어져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곧 성경이다. 우리 성도들은 누구나 이 성경을 다 가지고 있다. 이 성경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란 사실 앞에서 고개 숙여 조용히 묵상하노라면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책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아직도 많은 민족들이 자기네의 성경이 없다.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상당수의 민족들이 아직도 자기네의 글이 없다는 사실이다. 선교사들의 소식에 의하면 글자를 만들어 가르쳐 가며 성경을 번역해 간다는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참으로 축복 받은 민족이다.
그리 비싸지 않는 돈으로 쉽게 성경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 생각하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성경이요, 성도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성경이다. 가지고 있다고 무엇이 되는 게 아니다. 읽어야 한다. 읽는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읽고 그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에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찾아야 한다. 곧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내가 읽는 성경이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말씀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서 “남의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읽어보니 “이스라엘의 역사요, 선지와 사도들의 이야기요, 사도 요한의 환상 이야기더라”가 되어서는 안된다. 내 손에 쥐어진 성경 말씀 곧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은 오늘 나에게 들려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선지와 사도들의 손을 빌려 기록한 말씀이다. 그 시대, 그 사람들에게만 필요했던 말씀이라면 굳이 기록할 필요도 없었고, 수많은 순교자들의 핏자국 속에 보존되어 내려올 필요도 없다. 내 손에 쥐어진 성경 말씀 곧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통하여 우리 성도들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찾아야 하고, 재현시켜야 하고, 들어야 한다.
바로 오늘 이 시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바로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깨닫는다”고 한다. 요한복음 12:16절에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것인줄 생각났더라”고 했다. 우리 성도들도 이처럼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다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기도하며(요14:26) 읽고 또 읽는 가운데 깨닫게 된다. 우리가 내 손에 쥐어진 성경 말씀 곧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통하여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깨닫게 되는 길(방법)을 생각해 보자. ㉠.읽음으로 요한 계시록 1: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먼저 읽어야 한다고 했다.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으로 우리 손에 주어진 것은 읽고 깨달아라는 것이다. 그 성경 속에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들으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5: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했다.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 속에 “영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상고해야 한다.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 것은 태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던 바로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4: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했다. 사람의 살길은 인간의 과학이 보기에는 떡에 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 더욱이 40일 금식을 한 인간 예수 앞에 “떡”으로 시험을 했다. 그때 예수님은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으로 마귀를 물리쳤다. 계속 되어지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으로 하셨다.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속에는 이처럼 마귀,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위대한 힘이 있다.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있다. 마태복음 12:3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은 일에 대하여 바리세인들이 “안식일을 범했다”는 힐난에 대하여 주신 주님의 대답이다. 바리세인들이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제대로 읽지 않아서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읽어라!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읽어보리! 그 속에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 신앙인의 삶의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이 된다. ㉡.들음으로 요한 계시록 1: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라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읽는 자”는 단수이나 “듣는 자들”은 복수이다. 성경을 읽는 것은 나 혼자서 할 수 있지만 듣는 것은 최소한 “들려주는 자”와 “듣는 자”로 혼자서는 불가능함을 보여 준다.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나 혼자 읽음으로 깨닫는 부분도 있지만 내가 읽어서 모르는 부분이 사실상 많다. 그럴 때는 “들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를 “들음”으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설교를 통하여 설교는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바로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듣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가 좀더 유능한 목회자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통하여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더 많이 듣고 체험한 목회자를 원하는 것이다. ⓑ.성경 공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의미가 짙다. 그래서 “일방적 전달(one way communication)”이다. 이 “일방적 전달(one way communication”로는 제대로의 “들음”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의문점들을 그때그때 묻고 답해야 곧 “상방 전달(tow way communication)”이 이루어져야 한다. 설교로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 ⓒ.상담 성경 공부는 공개적이어서 성격적으로 질문을 못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사생활과 연관되는 심도 깊은 얘기를 주고받을 수 없게 된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 ㉢.행함으로 요한 계시록 1: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말씀이 있다. 그럴 때는 지키라는 것이다. 곧 믿기워지지 않고 이해되어지지 않더라도 그대로 지켜 행하며 살라는 것이다. 삶을 통하여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신앙적인 차원이다. 알고 믿는 부분도 있지만, 믿고 알게 되는 부분도 있다. 과학적 사고방식의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지만 그러나 실재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체험되어지는 “사실”이다. 말라기 3: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했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마4:7). 그러나 하나님이 예외 규정을 두신 것이 바로 “십일조와 축복”의 관계를 시험해 보라는 것이다. 온전한 십일조가 하나님 앞에 드려질 때 반드시 축복이 따라 온다는 것이다.
수학적인 논리로 얘기하자면 9/10가 10/10보다 더 크다는 얘기가 된다. 수학적이든, 과학적이든, 일반 상식적이든 맞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신앙적인 사람들은 맞는 말이라고 한다. 말라기 3:10절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수학적 논리나 일반 상식으로 보면 분명 거짓말이다. 이런 유(類)의 말씀은 아무리 읽고 듣는다고 이해되어질 말씀이 아니다. “믿으야”할 말씀이다. 그러나 “믿어지지” 않는 말씀이다. 이럴 때 우리가 그 말씀대로 “지켜 행하며 살아봄”으로 깨닫게 된다. 그렇게 살아본 분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는 사실이다. 곧 그분들은 믿겨지지는 않지만 믿고 살아봄으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경험하고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 상식이나 과학적 사고방식이, 그리고 수학적인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말라기 3:10절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라고 믿는 사람들이 일반 상식이나 과학, 그리고 수학적 논리를 몰라서 그렇게 고백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지켜 행하며 살아봄”으로 9/10가 10/10보다 크다는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이다라고 고백하게 하는 것이, 바로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속에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있다는 것이요, 그들은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체험하고 깨달았다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곧 성경을 통하여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들어야 하고, 체험해야 하고, 깨달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요14:26), 그 말씀을 읽어야 하고, 그래도 안되면 들어야 하고, 그래도 안되면 믿고 그 말씀대로 지켜야 한다. 믿고 지켜 행하는 삶을 통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체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다. 그 말씀이 인간의 문자로 기록되어질 때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이다. 이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듣고, 체험하고, 깨달아야 한다. 우리 성도가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듣고, 체험하고, 깨닫게 되면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한다. 바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이다. 이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에 대하여 다음 주일에 계속 살펴보고져 한다.
2.기록된 말씀(Written Word) 기록된 말씀이 무엇인가 바로 성경이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인간의 문자로 기록되어진 것이 성경이다. 이 성경은 여러 사람들이(주로 선지와 사도)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디모데후서 3:16-17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요한복음 20: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1.영감으로 기록된 말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누구에게나 다 임하는 게 아니다. 또 어느 한 순간에 다 주어지는 게 아니다. 시대, 시대를 따라 그 시대의 필요한 말씀을 특별한 사람을 선택해서 하셨다. 이를 신학적으로 “특별 계시”라고 한다. 그 중에서 특별한 사람에게 “영감”을 주셔서 당신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기록하게 하셨다. 당시의 다른 많은 사람에게, 또 후대에도 필요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감동 곧 “영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잘못됨이 없이 정확하게 기록하도록 성령님의 능력으로 성경 기록자를 “사로잡음”을 말한다.
2.기록 목적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라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가 우리 인간의 가족 관계에서처럼 그런 관계가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요한복음 5:18절에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고 했다. 여기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는 곳 “자칭 하나님”이란 말이다(요10:33). 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했다(빌2:6).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그분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요, 그분 속에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뜻임을 유대인들이 알기에 “참람되다”고 예수를 마땅히 죽일 자로 단죄했다(레24:16). ㉡.생명을 얻게 하려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 영생을 얻게 하는 것 곧 “인류의 구원”이 기록 목적이 된다. 그렇다. 죄로 인해 영영 죽고 멸망받을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소식”이야말로 복음이다. 이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한 것이요, 그 약속의 성취가 바로 예수이다(롬1:2) 그 복음은 창세기 3:15절에서부터 주어졌다. “여인의 후손”으로 나타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 3:15절에서 “여인의 후손”만 보고 지나간다. 그래서 인류에게 주신 “최초의 복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인류에게 주신 “최초의 복음”이라기 보다는 사탄의 징벌을 선언하시는 “선고문”이다. “사탄의 멸망”을 담고 있는 내용이다. “사탄의 멸망” 곧 “죄의 근원”을 없앤다는 “선고문”이다. 고린도전서 15:55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했다. 부활의 주님이 무덤을 깨치고 나오시며 외치는 승리의 개가(凱歌)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 성도들의 승리의 환호성이다. 그렇다. “사탄의 멸망”이 곧 인류의 구원이다. “죄의 근원”이 없어질 때, 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어질 때, 거기에 구원이 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여인의 후손”을 주신다는 것이다. 참으로 크고 놀라운 은혜이다. 이 크고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께서 언제 주셨는가 시초 보음이라며 “여인의 후손”만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담이 죄로 “망하고난 후”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아담 하와가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을 받기 이전”이다. 여기에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아야 한다. “크신 은총”을 보아야 한다. 놀랍고 놀라운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 자신이 창조한 아담과 하와, 그들의 범죄의 대가를 스스로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잘 생각해 보라! 그 “여인의 후손”이 누구인가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낳는 아들이요(사7:14),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님으로 잉태하여 낳을 아들이요(눅1:27, 34),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곧 예수이다(마1:21) 그 예수는 누구인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다(본문14절). 바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다.
결국 아담 하와의 죄를 징벌하시기 전에, 그 인생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자신이 스스로 책임지실 것을 결정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마치 부모가 어린 자식의 잘못을 책임지듯 하나님께서도, 자기 중심인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 디모데후서 3:16-17절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즐거워하며 살아가야 할 우리 성도들. 지금의 우리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부족함이다. 마태복음 5:48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했다. 과연 우리 인간이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을 이룰 수 있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힘으로 그것이 어디 될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 인간에게 대속주(代贖主)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란 무슨 말인가 그 “크고 놀라운 은혜!” 곧 받은 은혜에 감사하라는 말이다. 감사하며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말씀이다. 그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의 목숨을 드린들 아까우랴! 이것이 성도라면 누구나의 마음이리라.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롬12:2) 살아가게 된다.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곧 성경이 이러한 사실들을 일깨워 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길잡이가 된다는 것이다(시119:105) 바로 성경의 기록 목적이 된다.
3.기록된 말씀(Written Word)에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찾아야 요한 계시록 1: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인간의 문자로 기록되어져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곧 성경이다. 우리 성도들은 누구나 이 성경을 다 가지고 있다. 이 성경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란 사실 앞에서 고개 숙여 조용히 묵상하노라면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책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아직도 많은 민족들이 자기네의 성경이 없다.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상당수의 민족들이 아직도 자기네의 글이 없다는 사실이다. 선교사들의 소식에 의하면 글자를 만들어 가르쳐 가며 성경을 번역해 간다는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참으로 축복 받은 민족이다.
그리 비싸지 않는 돈으로 쉽게 성경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 생각하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성경이요, 성도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성경이다. 가지고 있다고 무엇이 되는 게 아니다. 읽어야 한다. 읽는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읽고 그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에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찾아야 한다. 곧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내가 읽는 성경이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말씀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서 “남의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읽어보니 “이스라엘의 역사요, 선지와 사도들의 이야기요, 사도 요한의 환상 이야기더라”가 되어서는 안된다. 내 손에 쥐어진 성경 말씀 곧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은 오늘 나에게 들려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선지와 사도들의 손을 빌려 기록한 말씀이다. 그 시대, 그 사람들에게만 필요했던 말씀이라면 굳이 기록할 필요도 없었고, 수많은 순교자들의 핏자국 속에 보존되어 내려올 필요도 없다. 내 손에 쥐어진 성경 말씀 곧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통하여 우리 성도들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찾아야 하고, 재현시켜야 하고, 들어야 한다.
바로 오늘 이 시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바로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깨닫는다”고 한다. 요한복음 12:16절에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것인줄 생각났더라”고 했다. 우리 성도들도 이처럼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다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기도하며(요14:26) 읽고 또 읽는 가운데 깨닫게 된다. 우리가 내 손에 쥐어진 성경 말씀 곧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통하여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깨닫게 되는 길(방법)을 생각해 보자. ㉠.읽음으로 요한 계시록 1: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먼저 읽어야 한다고 했다.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으로 우리 손에 주어진 것은 읽고 깨달아라는 것이다. 그 성경 속에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들으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5: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했다.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 속에 “영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상고해야 한다.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 것은 태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던 바로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4: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했다. 사람의 살길은 인간의 과학이 보기에는 떡에 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 더욱이 40일 금식을 한 인간 예수 앞에 “떡”으로 시험을 했다. 그때 예수님은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으로 마귀를 물리쳤다. 계속 되어지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으로 하셨다.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속에는 이처럼 마귀,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위대한 힘이 있다.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있다. 마태복음 12:3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은 일에 대하여 바리세인들이 “안식일을 범했다”는 힐난에 대하여 주신 주님의 대답이다. 바리세인들이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제대로 읽지 않아서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읽어라!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읽어보리! 그 속에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 신앙인의 삶의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이 된다. ㉡.들음으로 요한 계시록 1: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라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읽는 자”는 단수이나 “듣는 자들”은 복수이다. 성경을 읽는 것은 나 혼자서 할 수 있지만 듣는 것은 최소한 “들려주는 자”와 “듣는 자”로 혼자서는 불가능함을 보여 준다.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나 혼자 읽음으로 깨닫는 부분도 있지만 내가 읽어서 모르는 부분이 사실상 많다. 그럴 때는 “들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를 “들음”으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설교를 통하여 설교는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바로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듣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가 좀더 유능한 목회자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통하여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더 많이 듣고 체험한 목회자를 원하는 것이다. ⓑ.성경 공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의미가 짙다. 그래서 “일방적 전달(one way communication)”이다. 이 “일방적 전달(one way communication”로는 제대로의 “들음”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의문점들을 그때그때 묻고 답해야 곧 “상방 전달(tow way communication)”이 이루어져야 한다. 설교로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 ⓒ.상담 성경 공부는 공개적이어서 성격적으로 질문을 못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사생활과 연관되는 심도 깊은 얘기를 주고받을 수 없게 된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 ㉢.행함으로 요한 계시록 1: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말씀이 있다. 그럴 때는 지키라는 것이다. 곧 믿기워지지 않고 이해되어지지 않더라도 그대로 지켜 행하며 살라는 것이다. 삶을 통하여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신앙적인 차원이다. 알고 믿는 부분도 있지만, 믿고 알게 되는 부분도 있다. 과학적 사고방식의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지만 그러나 실재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체험되어지는 “사실”이다. 말라기 3: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했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마4:7). 그러나 하나님이 예외 규정을 두신 것이 바로 “십일조와 축복”의 관계를 시험해 보라는 것이다. 온전한 십일조가 하나님 앞에 드려질 때 반드시 축복이 따라 온다는 것이다.
수학적인 논리로 얘기하자면 9/10가 10/10보다 더 크다는 얘기가 된다. 수학적이든, 과학적이든, 일반 상식적이든 맞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신앙적인 사람들은 맞는 말이라고 한다. 말라기 3:10절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수학적 논리나 일반 상식으로 보면 분명 거짓말이다. 이런 유(類)의 말씀은 아무리 읽고 듣는다고 이해되어질 말씀이 아니다. “믿으야”할 말씀이다. 그러나 “믿어지지” 않는 말씀이다. 이럴 때 우리가 그 말씀대로 “지켜 행하며 살아봄”으로 깨닫게 된다. 그렇게 살아본 분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는 사실이다. 곧 그분들은 믿겨지지는 않지만 믿고 살아봄으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경험하고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 상식이나 과학적 사고방식이, 그리고 수학적인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말라기 3:10절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라고 믿는 사람들이 일반 상식이나 과학, 그리고 수학적 논리를 몰라서 그렇게 고백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지켜 행하며 살아봄”으로 9/10가 10/10보다 크다는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이다라고 고백하게 하는 것이, 바로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속에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있다는 것이요, 그들은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체험하고 깨달았다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곧 성경을 통하여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들어야 하고, 체험해야 하고, 깨달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요14:26), 그 말씀을 읽어야 하고, 그래도 안되면 들어야 하고, 그래도 안되면 믿고 그 말씀대로 지켜야 한다. 믿고 지켜 행하는 삶을 통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체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다. 그 말씀이 인간의 문자로 기록되어질 때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이다. 이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듣고, 체험하고, 깨달아야 한다. 우리 성도가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듣고, 체험하고, 깨닫게 되면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한다. 바로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이다. 이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에 대하여 다음 주일에 계속 살펴보고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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