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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눅3:7-14)

본문

오늘 본문 말씀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요단강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전파하는 세례 요한에게 많은 바리세인과 사두개인이 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고 호통을 치며 회개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촉구하는 말씀이다. 세례 요한의 호된 책망 앞에서도 저들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인데”라며 받아들이지 못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도 저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며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요한8:33)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인데” 하는 것 곧 아브리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 저들이 그토록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도 세례 요한은 그렇게 귀히 여기지 않았다.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1.아브라함 자손이 누리는 특권. 소위 말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가지는 기득권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아 누렸다.
1.선택받은 자. 아브라함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이다. 창세기 12:1-3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고 했다.
2.하나님 나라 백성.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시키심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이루셨다. 이 이스라엘은 땅 위의 수많은 나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로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다. 하나님은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실로 놀라운 축복이다.
3.하나님의 자녀.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워졌고 또 저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신약에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은 구원받은 자로 나타난다. 누가 19: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했다. 회개하는 삭개오를 향하여 구원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자손이 가지는 특권은 대단하다. 물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위해 개인도 필요하고 가정도, 민족도, 나라도 필요해서 선택받은 저들이지만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를 심고 가꾸기 위해 하나님은 엄청난 복락의 강수를 쏟아 부으셨다. 인류의 역사는 알고 보면 구원사임으로 이스라엘은 역사의 핵심이요 구심점이 될 수 밖에 없다. 초림의 주님을 위해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린 은혜가 대단했던 것처럼 재림의 주님을 위한 저들에게 베풀어질 축복은 더욱 크리라 보아야 한다.
2.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게 다가 아니다 본문 8절에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혈통을 이어 받아 태어나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혈통적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로마서 2:28절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저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능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했다. 저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의 특권을 의식하고 세례 요한의 책망에도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인데를 되뇌이고 있다. 그러나 저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의 특권만을 의식하였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합당하게 살아가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3.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살아야 한다. 본문 8절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여진 심판을 선언했다. 그때 저들은 세례 요한에게 물어 왔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본문 11절에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고 했다. 세례 요한의 대답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저들은 사랑을 베풀며 살지를 못했다. 나그네와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이다. 히브리 13:1-2절에 “형제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은 아브라함과 롯을 두고 하는 말씀으로 아브라함은 나그네와 손님 대접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요한 8:39절에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것이어늘”이라고 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의 행사 곧 아브라함의 삶을 본받아 살아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권리만을 생각지 말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살아가는 의무를 먼저 다 하라는 말씀이다. 헐벗은 자를 입혀 주고 굶주린 자를 먹여 주는 사랑을 베풀라는 말씀이다. 바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지극히 적은 자 하나 를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저들이 개, 돼지 취급하는 사마리아인에게는 이웃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저들에게는 없었다(눅10:33) 그러나 저들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인데”하며 사마리아인을 천히 여기고 무시하며 상종치 아니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아닌가 보다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아니냐가 문제이다. 로마서 2:28-29절에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 받지 못해 아브라함의 자손의 모습은 없지만은 아브라함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씀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그 사람이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우리 성도들은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한다. 누구의 자손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자손으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살아가야 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았다. 본향을 향해 나아갔다. 나온바 본향이 아닌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시고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성을 바라보고 나아갔다. 아브라함에게도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많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길은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돌아가는 길 다시 말해서 뒤로 물러가는 길이다.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고향 찾는 이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 겨레의 고유의 명절인 추석이다. 이런 명절의 분위기에 휩싸여 세상적인 즐거움을 쫓아가는 뒤로 물러가는 길이 되어서는 안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따르는아브라함의 자손으로더 나은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는 성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히브리 11:16절에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했다. 우리 성도들의 가슴 속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바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는 삶”이다. 추석 명절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부끄러워 하시는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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