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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롬12:1-2)

본문

오늘 본문 말씀은 11장까지의 교리에 대한 교훈을 마치고 실천에 대한 교훈을 시작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성도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구원을 받을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말한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인가를 일러주시는 사도 바울의 태도는 “너희를 권하노니.”이다. 곧 권위를 내세우는 “명령”도 아니요, 매달리는 듯한 “호소”도 아니다.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도 바울의 태도에서 바람직한 목회자상을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의 사자라며 무조건 따라오라는 “명령형”은 양들로 하여금 “복종”은 얻어낼 수 있으나 “순종”을 얻기는 힘들어진다. 아니 어쩌면 “순종”이 안되니까 “명령형”으로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고 “호소형”도 곤란하다. 목자로서의 권위가 사라진 상태라고 보여진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보다도 양 떼가 더 크게 보여지는 것이다. 그래서 “호소”하는 사람은 “자신의 하고픈 말”을 못하게 된다. 눈치를 보게 되고 상황에 따라 메시지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참으로 바람직한 목회자상이다. 사도 바울 정도라면, 당당하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할 수도 있다. 아니 “내가 명령하노니.”라고도 할 수 있다.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면 사도 바울만 못한 사람들도 “명령”을 당당하게 하고 있는데. 하물며 사도 바울이랴. 그러나 사도 바울은 교리적인 면에서는 “명령”을 하고 있지만, 실천적인 면에서는 “권고”를 하고 있다. 부부 생활에 대한 교훈에서 사도 바울의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고전 7:6절에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고 했다. 고전 7:10-12절에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라고 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도 바울은 “명령”을 할 때는 “주의 명령”으로, “권고”를 할 때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하고 있다. “내가 너희를 권고하노니.”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자바하심”에 맡기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우리 성도들이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의 “바람직한 목회자상” 만이 아니다.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권고의 대상이 “너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구원 얻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안다.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여 주심도, 영영 죽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나를 구원해 주심도, 날 구원하시려 독생자를 내어 주심도, 길이 참고 기다리심도. 그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고하고 있다. 그러기에 왜 너희가 “권고”를 받아야 하는지. 거기에 대하여 구차히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예수를 믿어 구원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앞에서 “권고”를 받으라고 한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앞에서 주시는 사도 바울의 권고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고져 한다.
1.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 본문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다. 사도 바울의 첫 번째 권고는 너희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다. 곧 신령한 예배를 드리라는 말이다. “예배”라고 하면 주일이나 수요일 등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생각한다. 곧 설교, 찬송, 기도, 등. 모여서 함께 드리는 예배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⑴.영적 예배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릴 때, 이것을 “영적 예배”라고 했다. 이 말은 “마땅한 예배”, 혹은 “신령한 예배”라는 말이다. 요한복음 4: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했다. 곧 내 심령 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감사이요, 찬양이요, 섬김이요, 영광 돌림이다. 곧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형식적인 면을 뛰어넘어, 내면 깊숙이에서 솟아 나오는 감사, 찬양, 섬김, 영광 돌림이다. 시편 51:17절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했다. 다윗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 곧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송아지를 잡고, 양을 잡아서 드리는 제물이 아니라 상한 심령 곧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⑵.너희 몸을 산 제물로 제물은 본래 죽여서 드리는 것이다. 곧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다(히9:22).
곧 그 제사는 “죄사함”이 없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제사가 되고 만다. 그러나 이 모든 의식적인 제물 대신에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요1:29),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주님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에(히9:12), 이제 더 이상의 제물이 필요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의 제물이 되시어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나 사이의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어 버렸다(엡2:14). 나 같은 죄인 위해 몸 버려 피흘리신 주님의 은혜가 놀라와 나 또한 몸 드려 섬기는 것이다. “예배”라는 말의 뜻은 “섬긴다”, “봉사한다”는 말이다. 몸을 산 제사로 드림이 “영적 예배”라고 한다. 곧 “나의 영”이 주를 “섬김”에는 몸이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몸을 떠난 “영혼”이 따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내 영이 주를 찬양” 해도, 감사해도, 기도를 해도 몸이 따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도를 해도, 심방을 해도, 봉사 활동을 해도, 철야를 해도 몸이 따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6:41절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했다. 우리 성도들이 잘 아는 말씀이다. 몸을 드리지 않고는 “깨어 있어 기도” 할 수도 없다. “마음의 소원” 만으로 기도가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몸이 함께 드려질 때 “깨어 있어 기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신다. 곧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릴 때 신령한 예배, 마땅한 예배. 곧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수 있는 “향기로운 제사”가 된다. 나의 몸이 산 제물로 드려지려면. 시간도, 노력도, 물질도, 희생도, 따라야 한다. 곧 삶의 전부를 드리라는 말씀이다.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본문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 했다. 사도 바울의 두 번째 권고의 말씀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이 세대는 세상에 속한 세대이다. 심판 받아야 할 세대이다. 멸망 받아야 할 세대이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성도가 구원받아 나온 세대이다.
그러므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권고하신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 세대”를 살펴보면,
⑴.죄악이 관영한 세대이다(창6:5)
⑵.악하고 음란한 세대이다(마12:39)
⑶.무관심한 세대이다(마11:16-17)
⑷.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세대이다(엡4:22) ⑸.돈을 사랑하는 세대이다(딤전6:10, 딤후3:2) ⑹.마음이 미혹된 세대이다(히3:10) ⑺.사랑이 식어진 시대이다(마24:12) ⑻.난리와 지진과 기근이 심한 말세이다(마24:7)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세대에서 십자가의 보혈로 씻음을 받아 희게 하였다(계7:14). 씻음 받은 우리 성도들의 흰옷을 더럽히면 안된다. 이 세대를 본받고 다시 이 세대를 즐겨하고 돌아가는 것은 마치 개가 그 토한 것에 돌아가는 것과 같고, 씻은 돼지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것과 같다고 했다(벧후2:22).
3.마음을 새롭게 하라 본문 2절에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했다. 사도 바울의 세 번째 권고의 말씀은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것이다. “마음을 새롭게” 하려면 변화를 받아야 한다. 곧 죄로 찌든 내 마음이 중생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변화를 받아 새롭게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 성도들의 마음은 늘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
⑴.새 마음 시편 51:10절에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후5:17). 중생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는 역사로(딛3:5) 이 세대에 속하였던 나의 이전 것이 변하여 정한 마음,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변한다. 곧 새 마음이다.
⑵.새 사람 에베소 4:22-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라”고 했다. 옛 사람을 벗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새 마음”이 되지 않고는 “옛 사람”을 벗을 수 없고, 심령이 새롭게 된 사람은 “새 사람”이 된다는 말씀이다. 고후 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창조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불러 사용하시는 창조의 능력이다(롬4:17). 하물며 더러워진 죄인이지만. 깨끗하게 “새것”으로 만드는 것이랴.
⑶.새 생활 고후 4: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고 하는 것은 “새 생활”을 말한다. 곧 “새 사람의 생활”이다. “새 마음”을 가진 “새 사람”이 “새 생활”을 하는 것이다. 벧전 4:2-3절에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하신다. 이방인의 뜻을 쫓아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연락, 우상숭배에 빠졌던 생활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고 한다. 이제는 “새 마음”을 가진 “새 사람”이 되어 “새 생활”을 하라고 한다.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쫓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쫓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가라고 한다. 곧 여생을 바쳐 오직 하나님의 뜻을 쫓으라고 한다. 너희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다.
4.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본문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다. 사도 바울의 네 번째 권고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하신다. 바로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어 새 생활로, 몸을 산 제물로 주께 드리는 헌신의 생활을 할 때, 어떻게 해야 “섬김의 생활”를 바르게 할 것인가 여기에 대답을 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서, 그 뜻에 순종하고, 그 뜻을 온전하게 이루어 드리라는 것이다. 곧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는 말씀이다.
⑴.선하심 마가복음 10:1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했다. 선의 표준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다. 인간이 표준이 된 선은 상대적 선이다. 남보다 좀더 선할 뿐이다. 절대적 선이 못된다. 절대적 선은 하나님 한분 외에는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가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 항상 있어야 한다. 곧 하나님께로 얼굴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 성도의 얼굴이 부모, 형제, 처자에게로 향하면 선에서 멀어져 가는 것이다. 범죄한 아담을 보라.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고 나무 뒤에 숨고 만다.
⑵.기뻐하심 시편 51:19절에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고 했다. 의로운 제사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를 기뻐하신다고 했다. 곧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이다. 제물을 바쳐 제사를 드림은 중간에 가로막힌 담을 헐고, 화목 하려는 것이다. 에스겔 33:11절에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라고 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악인이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로 일러주시는 말씀이다. 돌이켜 자신에게로 오라고 하신다. 고전 1: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했다. “악인이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신 사실이다.
그런데도 믿지 못하고 멀어져 간다면 하나님의 슬픔이 진노로 변하시리라. “악인이 그 길을 떠나”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신데.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얼마나 기뻐하실 일이 되겠는가.
⑶.온전하심 마태복음 5:48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했다. 하나님의 요구는 절대적이다. 추호의 오차도 인정치 않으신다. 모자람도, 더함도 없어야 한다. 이 요구에서 빗나가는 것이 곧 죄가 된다. 다시 말해서 100%의 완전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요구는 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
출애굽기 20:3절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했다. 살전 5:16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다. 누가복음 14:26절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 했다. 창세기 22:2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했다. 이상의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의 온전하신 요구는 절대적이다. 타협의 여지도 없다. 더더욱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의 입장이 아니다. 원망도, 불평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순종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고 하신다. 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곧 우리 성도들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섬기라는 것이다(막12:30). 곧 전심전력하여(딤전4:15)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를 가까이 하며, 그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명령”이 아닌 권고를 하고 있다.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고를 하고 있다.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한다. 이것이 영적 예배라고 한다. 곧 몸이 따라 주지 않는 감사, 찬양, 섬김, 영광 돌림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나의 몸이 가기에 나의 시간도, 노력도, 물질도, 희생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죄악으로 물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새 마음으로, 새 사람이 되어, 새 생활을 하라고 한다.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며, 세상 것 다 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한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일. 바로 우리 성도들이 드려야 할 “영적 예배”라고 한다. 오늘 내가 드리는 예배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권고하시는 “신령한 예배”인가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보자. 그리고 다짐을 하자. 나 같은 죄인 살리려 몸 버려 피흘리신 그 은혜 놀랍고 감사하여, 벌레 같은 이 몸이지만, 이 몸 바쳐 산 제사를 드리자. 신령한 예배를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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