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 (요1:1-18)
본문
하나님의 말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곧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성경이다. 성경은 여러 기록자 곧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자신들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깊이 살펴보면 이 “말씀”은 하나님이요(1절), 또 예수님이다(14절). 그리고 성경이다(계1:19). 곧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문자로 기록되어진 책이다. 천지(天地) 곧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존재”의 시작이요, 원인이요, 근원이다. 또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능력이다. 이 “말씀”으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기에 그분은 우주 만물의 창조자요, 주인이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은 바로 “살아 있는 말씀”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요, “역사하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 “살아 있는 말씀”이다. 그러기에 “역사하는 능력”이 있고, 천지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했다.
그 “살아 있는 말씀”이 바로 모든 존재의 시작이요, 원인이요, 근원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 성도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 성도들의 신앙의 “표준”이요, 삶의 “표준”이다.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표준”이요, 틀림이 없는 “표준”이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제 각각의 눈”으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고, “제 각각의 생각”으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해석하기에, 각인(各人)의 견해 차이가 나는 것이다. 우리는 “장님 코끼리 구경” 얘기를 잘 안다. 다리를 만져 보고 “큰 기둥”이라는 사람도 맞는 말이요, 귀를 만져 보고 “큰 부채”라는 사람도 맞는 말이요, 넓은 배를 만져 보고 “큰 벽”이라는 사람도 맞는 말이다. 자신의 체험을 기준으로 보면 모두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어느 한 사람도 “장님”이 아닌 건강한 사람이 눈으로 직접 보고 말하는 “코끼리”와는 거리가 멀다. 일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아야 한다. 눈이 감겨져 손으로 만져 보는 “느낌(feeling)”이 아니라 눈이 열려 직접 보아야 한다. 우리는 누가복음 24장 13절 이하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의 얘기를 잘 안다. 그들이 바로 “장님 코끼리 구경” 하던 사람들이다.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시는데도, 3년간이나 함께 했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도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했다(눅24:16). 그러나,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았다고 했다(눅24:30-31). 더욱 기막힌 사실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24:32)고 고백하고 있는 점이다.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 오는 성령님의 감동”이 주어졌는데도, 저들의 판단 기준인 “feeling” 때문에 “성령님의 역사”가 막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머리, 인간의 지식, 인간의 이성, 인간의 경험 등등, 이 모든 인간적인 요소가 “성령님의 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P.C 통신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복제 인간”이나 “이단 시비” 등을 살펴보면, 어쩐지 “장님 코끼리 구경”을 연상케 한다. 물론 “나 자신”도, “우리 모두”도 다 “장님 코끼리 구경”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아집”을 버리고 “전체”를 보려고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이단 논쟁”의 시비는 거의 대부분이 “장님 코끼리 구경” 식의 “일방적 자기 주장”에서 비롯된다. 아니 “이단 논쟁”이 아니라도 “신앙 논쟁”은 그렇게 마련이다. 이미 돌아설 수 없는 두 갈래의 길을 제각기 걷는 두 사람이 벌이는 상대방과의 논쟁은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한번씩 이 마을을 찾아오지요 그들이 교회 안에까지 찾아와 저와 논쟁을 벌이려 한다. 요한2서 1:10-11절에 보면, 이런 자는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고 했다.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라고 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런 자들과 논쟁한다는 자체가 잘못이다. 혹자는 “그들을 구원”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보다 못해서 저들과 인사하지도 말고 내치라 했겠는가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요한2서”를 잘 읽어보라고 했다. 다음 기회에 또 들려서 잘 읽어보았다며, 우리가 참으로 이단이라면 우리를 “구원해야 할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하든 논쟁을 해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물론 나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 자세가 내가 전하는 “구원”을 받아들일 자세가 아니다. 당신이 믿고 전하는 진리에 “확신”이 없느냐 나는 일백번 죽고 죽어도 변치 않을 “확신” 속에 있다. 대화하는 가운데 “잘못 된 진리”라고 판단이 되면 “버릴 수” 있느냐 고 했다. 그것이 아니면 우리의 논쟁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당신들은 왔다가 가면 그만이지만 나는 이 마을에서 목회를 하는 입장이다.
저 불신자들의 눈에 우리의 논쟁이 어떻게 보이겠는가…. “예수쟁이 지들끼리 서로 좋은 것 하려 하네” 하는 조롱을 받지 않겠느냐 그게 “여호와의 영광”을 위한 일인가 아닌가 한번 잘 생각해 보라. 당신들, 여호와의 증인들이 전하는 “여호와”는 그런 “영광”을 찾으시는 “여호와”인가 그런 “여호와”가 아니란다. 그러면 조용히 가라고 했다. 그 후로는 마을을 돌면서도 교회로 찾아오지는 않고 있다. 그들을 상대로 그 불쌍한 영혼 내가 “구원해야지”하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이다. 지난주일 저녁 살펴 본 하와의 뱀과의 대화에서 나타난 “거짓말의 메아리” 현상에 휘말리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것 하나만 우리 성도가 “열린 눈(눅24:31)”으로 볼 수 있다면 모든 논쟁에서, 시비에서 놓이게 된다. “열린 눈” 그것은 주님이 주신다. 또 성령님이 역사하셔야 한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나에게) 주심”이 있어야 한다. 저들이 그 주님의 모습을 보고 기억한 것이다. 지난날 주님과 함께 했을 때의 주님을 기억한 것이다. 이 기억케 하시는 일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이다. 요한복음 14: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했다. 성령님이 역사하여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기억케) 하시고, 가르쳐 깨닫게 하신다. 성도 여러분! 신앙 문제로, 하나님의 말씀문제로 논쟁을 하지 마세요. 결코 여러분에게 득이 없다. 논쟁을 하지 말고 “상담”을 하라. 논쟁은 내가 상대방을 내게 “굴복”시키려는 의도가 이미 깔려 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굴복”시켜도 “시인”은 받아 낼 수 있으나 “신앙”은 받아 내지 못한다. “신앙”은 결코 “시인”이 아니다. 내가 주장하는하나님의 말씀에 “시인”한다고 해서 “신앙”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인간의 결정 여하에 따라 좌우되고 만다(인간 중심).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마16:17, 엡2:8). 곧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요, 받을 자격도 없는데 주시니 은혜요, 선물이다(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성도가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성경을 대하면서, 오늘도 성령님이 역사하시어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쳐 깨닫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우리 그런 마음으로 본문 말씀을 중심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살펴보고져 한다.
1.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 히브리서 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다. 베드로전서 1: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역사하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는 바로 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어졌다. 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그 말씀대로 되어진다. 곧 존재 형식을 취하게 된다.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빛이 있으라”하면 빛이 있는 것이다. 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하면 “그대로” 되는 것 뿐이다. 곧 존재 형식을 취하게 된다.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바로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가라사대”로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창세기 3:19절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으로 범죄한 아담에게 징벌을 내리셨다. 다른 말로 하면 저주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산다”는 말의 실상은 “죽어 간다”는 말이다. 어느 원시족들은 나이를 태어날 때 60에서 시작하여 59, 58, 57….
2,
1, 0.으로 센다고 한다. 우리 보다 오히려 그들이 더 정확한 나이를 계산하는지도 모른다.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실상은 “죽어 가는 인생”이다. 이것이 범죄한 인생의 결과이다. 첫사람 아담이 창조함을 받을 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더불어 함께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인생”으로 창조함을 받았다. 그러나 그 좋은 축복을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잃어버렸다. 소위 말하는 실낙원失樂園)이다. 본문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다. 바로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다. 그분은 나와 같은 성정(性情)을 가지신 인간이요, 또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다. 그래서 그분이 입을 열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나온다. 천지 창조 때의 바로 그 “능력의 말씀”이다. 그분이 “달리다굼” 하시면(마가5:41), 죽은 소녀가 살아서 일어나는 존재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분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임을 알지 못하는, 위로차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모인 사람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하시는 그분을 산 자와 죽은 자도 구별 못하는 나사렛 촌놈, 목수의 아들, 미친자로 비웃었다. 누가복음 7:14절에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했다. 결과는 뻔한 일이다.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그분의 입에서 나왔을 때 “그대로 되니라”밖에 무엇이 또 있겠는가 죽은 시체지만, 관속에 든 시체지만 그분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 앞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요한복음 11:43절에 “나사로야 나오라”고 했다. 주여! 주여! 주님을 부르던 마르다, 주님을 그 집에 모셨던 마르다, 주님 대접하기에 분주했던 마르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은 꿈도 꾸어 보지 못할 축복을 받았던 마르다, 그러나 그녀도 예수님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는 말이 너무도 쉽게 나왔다. 그러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신 그분이 “나사로야 나오라”하시니 죽은 나사로, 무덤 속에 묻힌 나사로, 장사지낸지 나흘이 된 나사로 지만 살아서 나올 수밖에 없다. “주님! 죽은지 나흘이 되었고, 썩어 냄새가 나는데 못나가겠다”고 거부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와 여러분이, 우리 모든 성도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다. 우리 예수님의 말씀이 이렇게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다. 이토록 권세 있는 말씀이다. 능력 있는 말씀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으로 깨닫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공자의 말씀” 정도로 본다. “석가의 말씀” 정도로 본다. “마호메트의 말씀” 정도로 본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본다. 여기서 우리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시는(마16:15) 주님의 “물음” 앞에 서 보아야 한다. 과연 나는 주님의 말씀을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으로 믿고 고백하는가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내 삶 속에 역사하고 있는가 내 신앙 속에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진정 내 삶의 인도자가 되고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솔직히 많은 부분을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아닌 나의 자아(自我)가 지배하고 있음을 바라보게 된다. 이 자아를 버려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마태복음 16:24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다 예수를 따르르면, 다른 말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내 속에 거하려면, 다시 말해서 내 삶 속에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역사하려면 자기를 부인하라고 한다. 자기를 이기라고 한다. 자기를 버리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쫓으라고 한다. 곧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말이다. 갈라디아 5: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했다. 예수의 사람들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육체의 소욕인 정과 욕심까지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했다. 이미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과거형이다. 십자가에 “못박으라”가 아니다. 십자가에 “못박으리라”가 아니다.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다”가 아니다.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도 아니다. 십자가에 “목박았느니라”이다. 곧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이다. 자아가 죽을 때 비로소 내 속에 영접한 “주님”이 살아 역사하신다. 그분은 바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다.
그러므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백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한다(고전15:31). 날마다 자신을 죽일 수 있었기에 “예수의 사람”이 되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능력으로 “주의 일”을 감당했다. 그래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다(고전9:16). “부득불 할 일”이라고 했다. 바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역사라는 고백이다. 만일 않으면 화가 미친다고 했다.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거역하면 징벌을 받는다는 말이다. 저 아담 하와처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다.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이다. 그리고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이다. 다음 주일에 계속하여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존재”의 시작이요, 원인이요, 근원이다. 또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능력이다. 이 “말씀”으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기에 그분은 우주 만물의 창조자요, 주인이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은 바로 “살아 있는 말씀”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요, “역사하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 “살아 있는 말씀”이다. 그러기에 “역사하는 능력”이 있고, 천지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했다.
그 “살아 있는 말씀”이 바로 모든 존재의 시작이요, 원인이요, 근원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 성도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 성도들의 신앙의 “표준”이요, 삶의 “표준”이다.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표준”이요, 틀림이 없는 “표준”이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제 각각의 눈”으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고, “제 각각의 생각”으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해석하기에, 각인(各人)의 견해 차이가 나는 것이다. 우리는 “장님 코끼리 구경” 얘기를 잘 안다. 다리를 만져 보고 “큰 기둥”이라는 사람도 맞는 말이요, 귀를 만져 보고 “큰 부채”라는 사람도 맞는 말이요, 넓은 배를 만져 보고 “큰 벽”이라는 사람도 맞는 말이다. 자신의 체험을 기준으로 보면 모두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어느 한 사람도 “장님”이 아닌 건강한 사람이 눈으로 직접 보고 말하는 “코끼리”와는 거리가 멀다. 일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아야 한다. 눈이 감겨져 손으로 만져 보는 “느낌(feeling)”이 아니라 눈이 열려 직접 보아야 한다. 우리는 누가복음 24장 13절 이하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의 얘기를 잘 안다. 그들이 바로 “장님 코끼리 구경” 하던 사람들이다.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시는데도, 3년간이나 함께 했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도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했다(눅24:16). 그러나,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았다고 했다(눅24:30-31). 더욱 기막힌 사실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24:32)고 고백하고 있는 점이다.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 오는 성령님의 감동”이 주어졌는데도, 저들의 판단 기준인 “feeling” 때문에 “성령님의 역사”가 막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머리, 인간의 지식, 인간의 이성, 인간의 경험 등등, 이 모든 인간적인 요소가 “성령님의 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P.C 통신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복제 인간”이나 “이단 시비” 등을 살펴보면, 어쩐지 “장님 코끼리 구경”을 연상케 한다. 물론 “나 자신”도, “우리 모두”도 다 “장님 코끼리 구경”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아집”을 버리고 “전체”를 보려고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이단 논쟁”의 시비는 거의 대부분이 “장님 코끼리 구경” 식의 “일방적 자기 주장”에서 비롯된다. 아니 “이단 논쟁”이 아니라도 “신앙 논쟁”은 그렇게 마련이다. 이미 돌아설 수 없는 두 갈래의 길을 제각기 걷는 두 사람이 벌이는 상대방과의 논쟁은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한번씩 이 마을을 찾아오지요 그들이 교회 안에까지 찾아와 저와 논쟁을 벌이려 한다. 요한2서 1:10-11절에 보면, 이런 자는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고 했다.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라고 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런 자들과 논쟁한다는 자체가 잘못이다. 혹자는 “그들을 구원”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보다 못해서 저들과 인사하지도 말고 내치라 했겠는가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요한2서”를 잘 읽어보라고 했다. 다음 기회에 또 들려서 잘 읽어보았다며, 우리가 참으로 이단이라면 우리를 “구원해야 할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하든 논쟁을 해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물론 나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 자세가 내가 전하는 “구원”을 받아들일 자세가 아니다. 당신이 믿고 전하는 진리에 “확신”이 없느냐 나는 일백번 죽고 죽어도 변치 않을 “확신” 속에 있다. 대화하는 가운데 “잘못 된 진리”라고 판단이 되면 “버릴 수” 있느냐 고 했다. 그것이 아니면 우리의 논쟁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당신들은 왔다가 가면 그만이지만 나는 이 마을에서 목회를 하는 입장이다.
저 불신자들의 눈에 우리의 논쟁이 어떻게 보이겠는가…. “예수쟁이 지들끼리 서로 좋은 것 하려 하네” 하는 조롱을 받지 않겠느냐 그게 “여호와의 영광”을 위한 일인가 아닌가 한번 잘 생각해 보라. 당신들, 여호와의 증인들이 전하는 “여호와”는 그런 “영광”을 찾으시는 “여호와”인가 그런 “여호와”가 아니란다. 그러면 조용히 가라고 했다. 그 후로는 마을을 돌면서도 교회로 찾아오지는 않고 있다. 그들을 상대로 그 불쌍한 영혼 내가 “구원해야지”하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이다. 지난주일 저녁 살펴 본 하와의 뱀과의 대화에서 나타난 “거짓말의 메아리” 현상에 휘말리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것 하나만 우리 성도가 “열린 눈(눅24:31)”으로 볼 수 있다면 모든 논쟁에서, 시비에서 놓이게 된다. “열린 눈” 그것은 주님이 주신다. 또 성령님이 역사하셔야 한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나에게) 주심”이 있어야 한다. 저들이 그 주님의 모습을 보고 기억한 것이다. 지난날 주님과 함께 했을 때의 주님을 기억한 것이다. 이 기억케 하시는 일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이다. 요한복음 14: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했다. 성령님이 역사하여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기억케) 하시고, 가르쳐 깨닫게 하신다. 성도 여러분! 신앙 문제로, 하나님의 말씀문제로 논쟁을 하지 마세요. 결코 여러분에게 득이 없다. 논쟁을 하지 말고 “상담”을 하라. 논쟁은 내가 상대방을 내게 “굴복”시키려는 의도가 이미 깔려 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굴복”시켜도 “시인”은 받아 낼 수 있으나 “신앙”은 받아 내지 못한다. “신앙”은 결코 “시인”이 아니다. 내가 주장하는하나님의 말씀에 “시인”한다고 해서 “신앙”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인간의 결정 여하에 따라 좌우되고 만다(인간 중심).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마16:17, 엡2:8). 곧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요, 받을 자격도 없는데 주시니 은혜요, 선물이다(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성도가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성경을 대하면서, 오늘도 성령님이 역사하시어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쳐 깨닫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우리 그런 마음으로 본문 말씀을 중심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살펴보고져 한다.
1.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 히브리서 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다. 베드로전서 1: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역사하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는 바로 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어졌다. 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그 말씀대로 되어진다. 곧 존재 형식을 취하게 된다.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빛이 있으라”하면 빛이 있는 것이다. 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하면 “그대로” 되는 것 뿐이다. 곧 존재 형식을 취하게 된다.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바로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가라사대”로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창세기 3:19절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으로 범죄한 아담에게 징벌을 내리셨다. 다른 말로 하면 저주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산다”는 말의 실상은 “죽어 간다”는 말이다. 어느 원시족들은 나이를 태어날 때 60에서 시작하여 59, 58,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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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으로 센다고 한다. 우리 보다 오히려 그들이 더 정확한 나이를 계산하는지도 모른다.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실상은 “죽어 가는 인생”이다. 이것이 범죄한 인생의 결과이다. 첫사람 아담이 창조함을 받을 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더불어 함께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인생”으로 창조함을 받았다. 그러나 그 좋은 축복을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잃어버렸다. 소위 말하는 실낙원失樂園)이다. 본문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다. 바로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다. 그분은 나와 같은 성정(性情)을 가지신 인간이요, 또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다. 그래서 그분이 입을 열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나온다. 천지 창조 때의 바로 그 “능력의 말씀”이다. 그분이 “달리다굼” 하시면(마가5:41), 죽은 소녀가 살아서 일어나는 존재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분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임을 알지 못하는, 위로차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모인 사람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하시는 그분을 산 자와 죽은 자도 구별 못하는 나사렛 촌놈, 목수의 아들, 미친자로 비웃었다. 누가복음 7:14절에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했다. 결과는 뻔한 일이다.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그분의 입에서 나왔을 때 “그대로 되니라”밖에 무엇이 또 있겠는가 죽은 시체지만, 관속에 든 시체지만 그분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 앞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요한복음 11:43절에 “나사로야 나오라”고 했다. 주여! 주여! 주님을 부르던 마르다, 주님을 그 집에 모셨던 마르다, 주님 대접하기에 분주했던 마르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은 꿈도 꾸어 보지 못할 축복을 받았던 마르다, 그러나 그녀도 예수님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는 말이 너무도 쉽게 나왔다. 그러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신 그분이 “나사로야 나오라”하시니 죽은 나사로, 무덤 속에 묻힌 나사로, 장사지낸지 나흘이 된 나사로 지만 살아서 나올 수밖에 없다. “주님! 죽은지 나흘이 되었고, 썩어 냄새가 나는데 못나가겠다”고 거부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와 여러분이, 우리 모든 성도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다. 우리 예수님의 말씀이 이렇게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다. 이토록 권세 있는 말씀이다. 능력 있는 말씀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으로 깨닫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공자의 말씀” 정도로 본다. “석가의 말씀” 정도로 본다. “마호메트의 말씀” 정도로 본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본다. 여기서 우리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시는(마16:15) 주님의 “물음” 앞에 서 보아야 한다. 과연 나는 주님의 말씀을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으로 믿고 고백하는가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내 삶 속에 역사하고 있는가 내 신앙 속에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진정 내 삶의 인도자가 되고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솔직히 많은 부분을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아닌 나의 자아(自我)가 지배하고 있음을 바라보게 된다. 이 자아를 버려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마태복음 16:24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다 예수를 따르르면, 다른 말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내 속에 거하려면, 다시 말해서 내 삶 속에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역사하려면 자기를 부인하라고 한다. 자기를 이기라고 한다. 자기를 버리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쫓으라고 한다. 곧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말이다. 갈라디아 5: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했다. 예수의 사람들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육체의 소욕인 정과 욕심까지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했다. 이미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과거형이다. 십자가에 “못박으라”가 아니다. 십자가에 “못박으리라”가 아니다.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다”가 아니다.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도 아니다. 십자가에 “목박았느니라”이다. 곧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이다. 자아가 죽을 때 비로소 내 속에 영접한 “주님”이 살아 역사하신다. 그분은 바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다.
그러므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백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한다(고전15:31). 날마다 자신을 죽일 수 있었기에 “예수의 사람”이 되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능력으로 “주의 일”을 감당했다. 그래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다(고전9:16). “부득불 할 일”이라고 했다. 바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역사라는 고백이다. 만일 않으면 화가 미친다고 했다. 곧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거역하면 징벌을 받는다는 말이다. 저 아담 하와처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다.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이다. 그리고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이다. 다음 주일에 계속하여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역사하는 말씀(Acting Word)”을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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