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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족보가 주는 의미 (마1:1-17)

본문

오늘도 지난 주일에 이어 예수님의 족보가 주는 의미를 살펴 보고져 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족보”를 통하여 우리 성도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지난 주일에 살펴 본 내용은 “예수님의 족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구세주”의 족보로서 세상의 사람들의 족보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어졌고, 진실하다는 것이다. “낳고” “낳고”의 연속으로 지루하고 무미건조 해 보이나 실상은 구약과 신약을 있는 다리로 그 족보 속에 구약 전체가 들어 있다는 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면면을 묵상하면 곧 구약 전체가 된다.
그러므로 신약의 서두(書頭)에 둠으로 구약과 신약이 다른 책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진 하나의 책 곧 하나님의 말씀이란 점이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 곧 잘난 자, 못난 자, 존귀자, 비천자, 성공자, 실패자, 의로운 자, 불의한 자, 남자, 여자 등등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대하신 구원 계획을 이루는 일에 쓰임 받고 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잘난 사람들의 “잘남”은 두 말할 필요도 없기에 접어 두고(성경 본문에도 기록 않음) 못나고, 실패하고, 불의하고, 나 같은 부족한 사람도 손가락질하며 조롱하고 업신여길 수 있는 이들의 치부를 살펴 보고, 그래도 그들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는 일에 들어 쓰시는 하나님, 잘난 사람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못난이의 하나님도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얼마든지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가지고, 우리 성도들이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열심을 내고 헌신 하자는 것이다. 예수님의 족보가 주는 의미 오늘은 그 두 번째로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을 살펴 보고져 한다.
3.하나님의 선택 본문 마태복음 1:2절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라 했다. 언뜻 보면 아브라함-이삭-야곱, 한 개인, 개인인 것 같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실상은 그게 아니다. 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한 가정, 한 지파, 한 나라가 필요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구세주 곧 “여인의 후 손”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 해서는 어느 한 나라가 필요했다. 바로 아브라함-이삭-야곱은 그 한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선택을 보여 준다. 한 개인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축복을 주셨다(창12:2) 또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해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심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예수”가 오신다는 말씀이다. 곧 예수님의 조상이 된다는 것이다. “조상”이라 하면 “아담”이라고도 하겠지만 인류의 “원조(元祖)”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족보상의 조상을 말한다(요8:53, 56) 한 개인, 조상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 아들 가운데 이삭을 통해 한 가정을 선택하셨다.
이삭은 조상들 가운데 모범적인 한 가정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순종심과 친화력, 장자를 향하는 마음 등 가정적인 요소가 많다. 이삭의 아들 가운데 야곱을 선택하신다. 그는 열 두 아들을 두어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이룬다. 곧 한 나를 이룬다.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고(창32:28) 그의 이름을 따라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이룬다. 곧 한 나라가 선택된다.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 “여인의 후손”이, 구세주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이 선택하셨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되어지기 위해 필요, 충분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였다. 이 하나님의 선택의 축복을 받은 백성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불리워진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나라가 “하나님의 택한 나라”가 되고, 이방 나라와 구별 되어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누리게 된다. “이스라엘”. 그들은 택한 백성이요, 택한 나라이다. 그들이 우리와 다를 게 무엇이 있는가. 따지고 보면 다같은 “아담의 후손”이다. 그들이 잘나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것 아니다. 이방인이 못나서 하나님의 선택에서 버려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일 뿐이다.
4.두 족보의 차이 본문 마태복음 1:1-2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라 했다. 같은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3:23-24절에는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심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라고 했다. 다같이 한 사람 “예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데 다른 점이 너무 많다. 그 차이점을 살펴 보자.
1.기록 순서 본문 마태복음 1:2절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라 했다. 본문 누가복음 3:23절에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심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라고 했다. 우리 성도들이 잘 아는 대로 마태복음의 족보는 내림차순으로 기록이 되고, 누가복음의 족보는 올림차순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우리가 두 족보의 기록을 대하면서 누구나 곧바로 느낄 수 있는 차이이다. 누가복음은 데오빌로 곧 이방인에게 주신 말씀이다(누1:3) 그에 반해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들에게 곧 유대인에게 주어진 말씀이라 특징 지을 수 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를 “왕”으로 바라보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두 복음서의 특징을 놓고 보면 기록 순서가 하향식과 상향식으로 차이 남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길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특권으로(롬9:4-5)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통하여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았다. 그래서 “오실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것도 메시아 왕국의 “왕”으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도 그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방인은 다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곧 인류의 구원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기다릴 메시아”도 없었다. 베들레헴 마구간의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한 동방 박사들과 목자들을 보라! 마태복음의 동방 박사들은 별(계시)을 보고 찾아 나선다. 주어진 말씀(미5:2)의 인도함을 받아 찾는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목자의 경우는 다르다. 천사가 전하여 준 말씀을 듣고 찾아 나선다(눅2:10-14)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를 주실 분, 그분의 탄생 소식을 듣고 다윗의 동리로 달린다.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고 달려간다(눅2:15) 이방인은 오신 메시아 곧 “예수님의 소식” 복음을 듣지 않고는 메시아 곧 “구세주”를 만날 수 없다. 이방인들. 그들에게 아브라함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예수를 알고, 예수를 영접할 때 이방인에게도 아브라함이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다.
2.시작과 끝 본문 마태복음 1:2절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라 했다. 본문 누가복음 3:23절에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심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라고 했다. 같은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두 복음서의 족보에서 그 시작과 끝이 각각 다르다. 이를 자세히 살펴 보면 마태복음의 족보에서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내림차순으로 예수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에서 시작하여 하나님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에서는 이스라엘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나라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택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는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을 알지 못한다. “오신 예수”를 통하여 알 수 있게 된다. 예수를 통하여야만 하나님을 알게 된다. 요한복음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다. 하나님이 주신 독생자,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해서 주신 독생자, 저를 믿느냐 아니냐 거기에 따라 멸망과 영생의 길이 갈라진다. 독생자 예수, 구세주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다(요14:6) 이방인은 예수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고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진다. 예수를 알고서야 아브라함도, 하나님도 알게 된다. 어디서 떨어져 나온 것 같은(계2:5) 희미한 기억을 가지고 찾는 하나님이 아니다(행17:27)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참 하나님, 나의 창조자 하나님이시다.
3.등장되는 사람의 수(계대)의 차이 본문 마태복음 1:17절에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고 했다. 결국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는 14×3= 42 대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구약에 나타난 실제는 그렇지 않다. 8절의 요람(여호람, 대하21:2)과 웃시야(아사랴, 왕하15:1) 사이에 아하시야(대하22:1), 요아스(왕하11:2), 아마샤(왕하14:1) 세 사람이 없다(대상3:11-12) 11절의 요시야와 여고냐(여호야긴, 대하36:8) 사이에 여호야김(엘리아김, 대하36:4)이 빠져 있다. 한 대를 건너 뛴 셈이다. 그래서 바벨론 이거 후 스알디엘부터 예수까지는 본문의 기록에서도 13 대가 된다. 한편 누가복음에서는 전체 등장 인물이 더 많다. 다윗 대 까지는 거의 같으나 다윗부터 예수까지는 마태복음은 27 대로, 누가복음은 42 대로 기록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버지 요셉의 족보요, 누가복음의 족보는 어머니 마리아의 족보로 보고 있다. 누가복음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나, 다윗에서 예수까지의 기록은 구약에서 찾기 힘들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족보는 이름이 빠진 경우가 많고, 14×3= 42의 틀을 맞추려는 흔적이 엿보인다. 곧 마태복음의 족보에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통한 선택적 구원과 같은 어떤 틀에 맞추려는 의도성이 짙고, 누가복음의 족보에서는 전 인류를 상대로 한 “저를 믿는 자마다”의 구원과 같은 어떤 틀에 얽매이지 않은 모습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본 예수님의 족보가 주는 의미를 간추려 보면,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야 했다. 그 준비를 위한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다. 하나님의 선택이나 예정은 “예수”를 위한 것이었고, 그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 택한 백성에게는 주어진 계시이지만 이방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스라엘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으나, 아니 아직도 기다리고 있으나 이방인은 오신 메시아 곧 예수의 복음을 믿고 영접함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 하나님을 “만남”이 이스라엘에게는 선택의 결과라 하겠으나 이방인에게는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족보가 예수에서 시작을 하여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이방인에게는 예수 없는 아브라함도, 예수 없는 다윗도, 예수 없는 하나님도 아무 의미가 없다. 예수를 믿고 영접할 때 이방인에게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된다.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롬8:15)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다(요14:6) 이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다(요14:6) 이 예수만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구원의 이름이다(행4:12) 이 예수만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시다(히12:2) 이 예수만이 어저께나 오늘이나 또 영원토록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히13:8) 이 예수만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죽기까지 사랑하신다(요13: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자. 우리 모두 예수님의 족보가 주는 의미를 묵상하자. 그의 말씀을 묵상하자. 그의 뜻을 묵상하자. 그의 사랑을 묵상하자. “나도 주를 닮아 그렇게 살게 하소서” 우리 모두 손 모아 기도하자. 세상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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