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갈1:6-10)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주는 강한 책망의 말씀이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바을이 전해 준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의 은혜에 감사 찬양하는 삶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날 수 있느냐는 질책의 말씀이요 통탄의 말씀이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남을 책망한다는 것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더욱이 자기의 양떼를 나무라는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는 게 좋을리 없다. 갈라디아 3: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했다. 갈라디아 3:3절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님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했다.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한 강한 질책과 통탄의 목소리이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몰아세우는 책망이 아님을 보게 된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도 바울은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짐으로 그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그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그들 스스로를 살펴보며 무엇을 깨닫기를 기대했을까요
1.누구 앞에서 살아야 하나 본문 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이 사도 바울의 질문은 우리 성도가 누구 앞에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곧 신본주의로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 앞에서 곧 인본주의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묻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삶의 정신”을 말한다. “삶의 정신”이 바르게 되어 있지 않으면 바른 삶의 자세를 가질 수 없고 삶의 자세가 바르지 않으면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사람의 기쁨을 위해 사람들에게 좋게 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본주의이고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하나님께 좋게 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본주의이다. 우리 성도들은 신본주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곧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남이 보던 안 보던, 남이 알아주던 않던, 안 계신 곳 없이 계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요셉의 경우를 보세요. 자기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의 손길을 뻗쳤을 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고 했다(창39:9) 자기 주인 보디발 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불의를 행할 수 없는 요셉의 바른 삶의 정신이 승리를 거두는 장면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확고부동한 삶의 정신이 주어지면 사실상 방황하거나 주저하는 삶의 자세는 있을 수 없다. 이미 해답은 나와 있다.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괴로움도 쉽게 단안을 내리고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2.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나 본문 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나를 포함해서 사람들에게 좋게 기쁘게…. 사람을 위해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것인가를 묻고 있다. 곧 “삶의 목적”을 말씀하신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도 삶의 길도 달라진다. 뿐만 아니라 그 삶의 값어치도 달라진다. 조국과 겨레를 위해 한 평생을 바친 사람도 있고, 자기만을 위해 내 것만 챙기다가 한 평생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또한 남에게 해를 끼치며 범죄를 일삼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도 있다. 삶의 목적이 뚜렷해야 한다. 거기에서 삶의 결과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의 목적이 바르고 확실해야 한다. 우리 성도들의 삶의 목적은 사람을 기쁘게, 사람을 좋게 하는 사람을 위한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사람을 위한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은 말세에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딤후 4:3-4절에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했다. 진리를 외면하고 허탄한 얘기로 귀를 즐겁게 한다고 했다. 자신의 사욕을 채워줄 스승을 많이 둔다고 했다. 그런 스승이 있다는 것도 문제인데 많이 있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예레미야 시대가 그러했다. 아니 오늘의 이 세대가 아닐까요 교회의 권징이 그 의미를 잃어버렸고 목자가 초장을 잃을까 양떼의 비위를 맞추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대기업의 기능공 빼내가기식의 스카웃전이 교회 내에서도 벌어진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내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분토와 같이 여길 수 있어야 한다(빌3:8) 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행20:24)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보세요.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금 신상을 세우고 절하지 않는 사람을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기로 했을 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했다(단3:16-18)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한 사람은 평소 보다 칠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도 두렵거나 무섭지 아니했다.
3.누구를 위해 일을 해야 하나 본문 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사람을 좋게 하려 사람을 위해 일을 할까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까를 묻고 있다. 곧 사명의식을 말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주의 일을 해 왔다는 고백이다. 바울은 심령에 매임을 받아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행20:22-24) 빌립보 1:20-21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했다. 참으로 우리 성도들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하고 주의 영광이라면 죽는 것도 내게 유익이 됨을 고백하는 삶이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책망의 말씀을 들으며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가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 있는가 바른 삶의 정신 위에 참된 삶의 목적을 가지고 불타는 사명의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통탄하고 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님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님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1-3)
본문 6절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을(행20:24) 믿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더니 어찌하여 다시 율법의 멍에를 메고져 하느냐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요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했다(갈5:4)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고 책망하고 있다(갈5:7) 갈라디아 6:12절에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복음 때문에 오는 핍박을 면하기 위해 할례를 받는 일, 율법주의와 타협을 하는 것은 불타는 사명의식을 가진 자의 삶이 아니다. 바른 삶의 정신 참된 삶의 목적을 가진 자의 삶이 아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아니 나를 위해서, 나의 유익을 위해서, 나의 자존심과 채면 때문에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이 될 때는 없는지요 “왕이여 이 일에 대하여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단3:16) 바로 우리의 삶의 자세요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1.누구 앞에서 살아야 하나 본문 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이 사도 바울의 질문은 우리 성도가 누구 앞에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곧 신본주의로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 앞에서 곧 인본주의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묻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삶의 정신”을 말한다. “삶의 정신”이 바르게 되어 있지 않으면 바른 삶의 자세를 가질 수 없고 삶의 자세가 바르지 않으면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사람의 기쁨을 위해 사람들에게 좋게 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본주의이고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하나님께 좋게 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본주의이다. 우리 성도들은 신본주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곧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남이 보던 안 보던, 남이 알아주던 않던, 안 계신 곳 없이 계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요셉의 경우를 보세요. 자기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의 손길을 뻗쳤을 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고 했다(창39:9) 자기 주인 보디발 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불의를 행할 수 없는 요셉의 바른 삶의 정신이 승리를 거두는 장면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확고부동한 삶의 정신이 주어지면 사실상 방황하거나 주저하는 삶의 자세는 있을 수 없다. 이미 해답은 나와 있다.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괴로움도 쉽게 단안을 내리고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2.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나 본문 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나를 포함해서 사람들에게 좋게 기쁘게…. 사람을 위해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것인가를 묻고 있다. 곧 “삶의 목적”을 말씀하신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도 삶의 길도 달라진다. 뿐만 아니라 그 삶의 값어치도 달라진다. 조국과 겨레를 위해 한 평생을 바친 사람도 있고, 자기만을 위해 내 것만 챙기다가 한 평생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또한 남에게 해를 끼치며 범죄를 일삼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도 있다. 삶의 목적이 뚜렷해야 한다. 거기에서 삶의 결과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의 목적이 바르고 확실해야 한다. 우리 성도들의 삶의 목적은 사람을 기쁘게, 사람을 좋게 하는 사람을 위한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사람을 위한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은 말세에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딤후 4:3-4절에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했다. 진리를 외면하고 허탄한 얘기로 귀를 즐겁게 한다고 했다. 자신의 사욕을 채워줄 스승을 많이 둔다고 했다. 그런 스승이 있다는 것도 문제인데 많이 있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예레미야 시대가 그러했다. 아니 오늘의 이 세대가 아닐까요 교회의 권징이 그 의미를 잃어버렸고 목자가 초장을 잃을까 양떼의 비위를 맞추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대기업의 기능공 빼내가기식의 스카웃전이 교회 내에서도 벌어진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내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분토와 같이 여길 수 있어야 한다(빌3:8) 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행20:24)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보세요.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금 신상을 세우고 절하지 않는 사람을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기로 했을 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했다(단3:16-18)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한 사람은 평소 보다 칠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도 두렵거나 무섭지 아니했다.
3.누구를 위해 일을 해야 하나 본문 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사람을 좋게 하려 사람을 위해 일을 할까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까를 묻고 있다. 곧 사명의식을 말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주의 일을 해 왔다는 고백이다. 바울은 심령에 매임을 받아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행20:22-24) 빌립보 1:20-21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했다. 참으로 우리 성도들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하고 주의 영광이라면 죽는 것도 내게 유익이 됨을 고백하는 삶이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책망의 말씀을 들으며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가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 있는가 바른 삶의 정신 위에 참된 삶의 목적을 가지고 불타는 사명의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통탄하고 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님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님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1-3)
본문 6절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을(행20:24) 믿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더니 어찌하여 다시 율법의 멍에를 메고져 하느냐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요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했다(갈5:4)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고 책망하고 있다(갈5:7) 갈라디아 6:12절에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복음 때문에 오는 핍박을 면하기 위해 할례를 받는 일, 율법주의와 타협을 하는 것은 불타는 사명의식을 가진 자의 삶이 아니다. 바른 삶의 정신 참된 삶의 목적을 가진 자의 삶이 아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아니 나를 위해서, 나의 유익을 위해서, 나의 자존심과 채면 때문에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이 될 때는 없는지요 “왕이여 이 일에 대하여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단3:16) 바로 우리의 삶의 자세요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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