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우리의 이 한 목숨 (마16:25~28)

본문

우리 인간은 과학을 연구하고 발전시킴으로 수많은 궁금증을 해결하였고 베일 속에 가려진 신비의 세계도 하나 둘 정복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과학의 업적을 통해 불가능은 없다는 듯 과학만능을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도 자기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분야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바로 생명에 관한 것이다. 아무리 과학의 힘이 대단하다고 해도 생명을 창조하지는 못한다. 겉으로 보기에 꼭같은 콩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콩 속에 생명을 줄 수는 없다. 생명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만이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다(마10:29)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의 이 한 목숨의 귀중성과 그 귀중한 생명을 어떻게 잃지 아니하고 간수할 것인지…. 그리고 값지게 사용할 것인지를 일러주시는 주님의 말씀이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은 생명의 귀중성을 너무도 모르고 있다. 인간의 생명을 곧 우리의 이 한 목숨을 너무나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파리 목숨 취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과학의 힘으로 신의 무덤 을 만들 수 있다 부르짖으며 인간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그들이 스스로의 생명의 값어치를 파리 목숨 으로 끌어내리는 모순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조그마한 욕심 때문에, 조그마한 감정 때문에, 조그마한 명예와 자존심 때문에 남의 생명을 해치는 살인극 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명도 내팽개치는 자살극 도 벌어지고 있다. 그렇습니다. 살인극 자살극이다. 연극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진지한 삶이 아니라 연극이다. 너무도 가볍게 생각하는 연극 같은 삶이지만 막이 내리고 연극이 끝났을 때 그것으로 영원히 끝나 버린다. 다시 재연할 수 있는 연극이 아니다. 모두가 생명을 경시하는 우리의 이 한 목숨의 귀중성을 알지 못한 잘못된 가치관에서 빚어진 어처구니없는 삶의 모습이다. 우리의 이 한 목숨의 귀중성을 알아야 한다.
1.하나 밖에 없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생명은 하나 밖에 없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에게도 두개의 생명을 주신 일이 없다. 인류의 조상 아담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이 되었다(창2:7) 에베소 4:4절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설명하면서 “몸이 하나이요 성령님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고 했다. 한 몸에 한 영이다. 결코 두 영이 아니다. 영과 육의 분리가 죽음이다(마27:50)
그러므로 사람은 두번 죽을 수 없다. 히브리 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다. 한번 죽는 것이 사람에게 정하신 하나님의 법이다. 다시 말해서 두번 죽을 수 없는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이라는 말이다. 이는 공평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하나 밖에 없는 생명
그러므로 귀중하고 값진 것이다. 우리가 가치를 결정함에 있어서 질과 양을 따진다. 이는 상대적 비교이다. 그보다 희귀성을 따진다. 만약 이 세상에서 딱 하나 뿐이라면 이는 절대적이다. 곧 절대가치로 상대적 평가를 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파리 목숨 이라지만 그 파리가 지구상에서 멸종 되어 가는 마지막 남은 한 마리의 파리 라면 지금의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액의 파리가 될 것이다. 우리의 이 한 목숨은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이다. 고유한 생명이요 절대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신 딱 하나 뿐인 생명이다. 더 가진 자도 덜 가진 자도 없는 꼭 같은 사람이다. 천부인권(天賦人權) 남녀노소, 빈부귀천 차별 없이 다 같이 공평하게 하나님께 부여받은 권리를 말한다.
2.온 천하보다 귀하다. 본문 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했다. 우리의 이 한 목숨의 진가를 일러주시는 주님의 말씀이다. 한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잃으면 소용이 없는 그래서 온 천하보다 더 귀중한 생명이라는 말씀이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 그 어느 누가 우리의 이 한 목숨을 아니 나의 이 한 목숨을 값지게 평가해 주었나 내 스스로도 자신의 생명을 그렇게도 귀중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든 게 아니던가 사도행전 3:14-15절에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고 했다. “생명의 주” 이는 생명의 주인이요 또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생명의 주인이시기에 생명의 진가를 잘 알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주신 생명을 거저 받아 가지고 있는 소유주에 불과하다. 그래서 생명의 진가를 모르고 있다. 생명의 가치는 얼마만큼 그 생명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평가되는 것 같다. 주님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다. 자기의 생명을 십자가에 대속물로 내어놓으시기까지 사랑하셨다.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나 대구 가스 폭발 사고 등 불의 사고로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을 보세요. “천만금을 준다해도 소용없으니 내 자식을 살려내라” 때로는 실신을 하면서 울부짖는 그분들의 가슴 속에 있는 생명의 값어치는 돈으로 평가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가 아니겠는가 우리의 이 한 목숨 천하보다 귀중한 생명이다. 우리 성도는 자신의 생명을 사랑해야 한다. 주님 주신 생명이다. 소중히 간수해야 한다. 자신을 천대시 해도 자신을 무리하게 사용해도 안된다. 먼저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귀중성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소중함을 알아야 상대방의 소중함도 인정하게 된다. 자신과 상대방의 생명이 귀중하게 여겨질 때 우리의 이 한 생명의 값어치가 제자리를 찾게 된다.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서 우리의 이 한 생명이 소중하게 여겨질 때 연극처럼 생각하는 가벼운 삶의 모습은 사라지고 진지한 삶의 모습이 참으로 서로에게 소중하고 의미 있는 삶이 펼쳐지리라.
3.주님 피로 사신 생명이다. 마태 26:28절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했다. 히브리 9:12절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했다. 허물과 죄로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셨다(엡2:1) 진노의 심판에서 멸망의 자리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주님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의 이 한 생명을 사셨다. 우리의 이 한 생명은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생명을 화목제물로 바치심으로 피 흘려 값 주고 사신 생명이다. 우리 인간의 생명은 어느 누구 없이 모두 다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생명이다. 우리 인간 편에서 받아들이든 않든 거기에 상관없이 우리의 생명은 멸망의 자리에서 피로 사신 구속받은 생명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이제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사실을 믿느냐 아니냐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요한 16:9절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했다 요한 3:17-18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했다. 기억이 희미합니다만 뉴스의 초점 인물이 되었던 어느 일본 병사의 얘기를 보세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수 십년 어느 밀림 속 동굴에서 대일본 제국의 승전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사로잡혀 나오는 그날까지 하늘이 내린 임금이요 신으로 받들어 섬기며 충성을 다한 천황인데 사실은 그 소화 천황은 자신의 육성으로 방송을 통해 항복을 전세계에 알렸다. 대일본 제국 천황폐하의 신민으로 밀림 속 동굴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그 일본 병사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그날 주님의 대속을 믿지 않는 이들이 바로 그 일본 병사의 꼴이 되고 만다.
4.구원 얻은 생명이다. 요한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다. 예수를 믿는 우리 성도들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은 구원 받은 자들이다. 우리의 이 한 생명은 이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른 생명이다. 하나님의 자녀된 생명이다. 내 생명과 예수의 생명이 바뀌어진 생명이다. 죄로 물든 내 생명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지고 이제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생명이다(갈2:20) 주가 나를 사랑하듯 내가 주를 사랑해야 한다. 또한 주님이 계신 나를 사랑해야 한다. 나를 사랑함으로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발견함으로 자신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서로의 소중함을 알고 존중할 때 참으로 의미 있는 삶이 펼쳐지게 된다. 소중하고 값진 우리의 이 한 생명값지게 사용하자. 주를 위해 사용하자. 그것이 가장 값지게 사용하는 길이요 잘 간수하는 길이다. 마가 8:35절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했다. ' p.s ' 여러분 가운데 어느 일본 병사의 얘기를 정확히 알고 계시거나 스크랩 등의 자료를 갖고 계시면 연락을 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913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