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가? (행2:37-42)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하신 후에,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모인 무리들의 반응을 보여 주는 말씀이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은 마음이 찔렸고,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함을 받으라”는 사도들의 말씀을 따라
3,000명의 영혼 구원 역사가 일어났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위대한 설교이요, 능력 있는 설교이다.
3,000명의 영혼을 구원시킨 힘있는 설교이다. 어디 그뿐인가 5,000명의 영혼 구원 역사도 일어났다(행4:4). 그것도 남자 어른의 숫자만이다. 이 놀랍고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아마도 모든 설교자들이 소망하는 설교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듣고 파 하는 설교일 것이다. 이런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가를 살펴보고져 한다.
1.설교자 자신에게서 나온다. 사도행전 2:14절에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다. 오늘 본문의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설교자 베드로 자신에게서 나왔다. 곧 베드로의 설교이다. 주님의 다른 사도들도 많았지만, 다른 사도들의 설교가 아닌 베드로의 설교이다.
⑴.설교자 자신이다. 오늘 본문의 위대한 역사를 일으킨 설교는 베드로의 설교인데, 그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바로 설교자 자신이다.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설교자 자신에게서 나오고, 그 설교가 바로 설교자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 설교 내용도 주요하고, 발표하는 발표력도 중요하다. 그러나 아무리 웅변술이 뛰어나고, 좋은 내용의 원고라 할지라도 설교자 자신이 위대하지 못하면 위대한 설교가 되지 못한다.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 자신의 “인간 됨됨이”이다. 다시 말해서 설교자의 인품, 인격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무디나 스펄죤 같은 분들의 설교가 위대하고, 능력 있는 설교가 되는 것은 그분들의 설교 내용이나 발표력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 훌륭한 웅변가가 있다고 보자. 그가 “무디의 설교 원고”를 가지고 아무리 열의를 다 한다 해도 결코 “무디의 힘있고, 능력 있는 설교”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3,000명의 가슴에 감동을 주고, 회개하여 그 영혼이 구원 얻게 한 베드로의 설교를 우리가 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성경에 기록된 그 베드로의 설교를 제가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아무리 열성을 다해 꼭 같이 설교한다 할지라도 그날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다. 바로 설교자가 베드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 이기 때문이다. 만일 오늘날의 설교자 중에 베드로보다 더 위대하고, 능력 있는 자가 있다면,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알 수 있는 베드로의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보다 더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를 하게 될 것이다. 사사기 8:21절에 “대저 사람이 어떠하면 그 힘도 그러하니라”고 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 힘도 달라진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결국 설교자의 신앙 인격과 인품이 중요하다는 것이 된다. “사람 됨됨이”의 문제이다. 어떤 사람이 위대하고, 능력 있고, 힘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1.지행일치(知行一致) 이 말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삶)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인들이 갖추어야 할 인품이다. 특히 가르치는 사람들이 가지는 힘이다. 능력이요, 위대함이다. 대학 교수가 강단에서 가르칠 때는 “도덕 군자”로 가르치면서, 강단을 떠나서는 “부도덕 한 삶”을 살아간다면, 그가 가르치는 “도덕성”은 이미 힘을 잃은 것이다. 그에게서는 결코 위대하고, 능력 있고, 힘있는 가르침이 나올 수 없다. 그가 아무리 강단 위에서 열강을 하며 “도덕성”을 부르짖어도,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그의 소리가 제대로 들려 오지 않는다. 오히려 “너나 잘 해라”는 반발심과 비웃음만 밀려올 뿐이다. 가르치는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인품이요, 곧 우리가 지니는 힘이 된다. 특히 가르치는 사람들은 이점을 명심해야 한다. 학교 강단에서 가르치든, 가정에서 가르치든, 교회에서 주일 학생을 가르치든, 우리의 가르침이 위대하고, 능력 있고, 힘있는 가르침이 되기 위해서는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삶을 살아야 한다.
2.언행일치(言行一致) 이 말은 “말과 행동(삶)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갖추어야 할 인품이요 힘이지만, 특히 다스리는 자, 곧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인품이다. “사람 됨됨이”이다. 아무리 한 국가의 최고의 힘을 지닌 대통령이라도, 아니 왕이라도, 황제라도,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그의 다스림은 힘을 잃게 된다. 어떤 국민도, 어떤 백성도 그를 따르지 않으려 할 것이다.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사이에는 “신뢰”가 문제이다. 말과 행동이 같지 않은 사람은 남에게 “신뢰감”을 줄 수 없다. 말과 행동이 같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믿고 따르겠는가 우리가 한 나를 다스리든, 한 기관을 다스리든, 한 사업체를 다스리든, 한 단체를 다스리든, 한 가정을 다스리든, 교회의 한 부서를 다스리든, 그 지도자는 말과 행동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거기에 위대함이 있고, 능력이 있고, 힘있는 지도력이 있게 된다. 말(약속)과 행동(실제)이 같지 않을 때 누가 그 말의 약속을 믿겠는가. 그래서 오늘의 사회에서도 보면, “법제화”를 부르짖는다. 쉽게 말하면 권력을 가진 지도자의 말을 믿을 수 없으니, 법이라는 틀 속에 권력자를 가두어 놓자는 것이다. 그 테두리 안에서만 권력을 행사하라는 것이다. 위대하고, 능력 있고, 힘있는 다스림은 권력으로 되지 않는다. 위대하고, 능력 있고, 힘있는 지도력은 제왕의 칼에 있는 게 아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 되는 삶을 통하여 쌓아진 인품이 중요하다. “믿어 주세요!”가 아니라도 모두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이다. 내가 다스리고 이끌어 가야 할 사람들, 곧 백성들이나, 사원들이나, 회원들이나, 조직원들이나, 가족들. 그들에게 내가 “신뢰” 받는 사람이 되면 “이 사람 한 번 믿어 주세요!”는 사실상 필요 없는 말이 된다.
3.신행일치(信行一致) 이 말은 “믿음과 행함(삶)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약2:17).
우리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인품이다. 위대함이요, 능력이요, 힘이다. 성도들의 됨됨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신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인품이라 할 수 있겠다. 교회가 세상 풍조를 지배하고 인도해 가야 하는데,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세상 풍조에 휩싸여 교회의 분위기도, 신앙의 물결도 세상 풍조를 쫓아가고 있다. 성경에 “하지 말라”는 것도 세상의 물결을 쫓아 오히려 당연한 것 같이, 그것도 너무도 당당히 한다. 세상의 풍조에 밀려 “하나님의 법”이 달라지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로마서 12: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다. 성도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다. 거룩하게, 구별하여 따로 모아 놓은 사람들이다. 그 모아 놓은 모임이 교회이다. “에클레시아” 곧 밖으로 불러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이다.
그런데, 이 교회가 세상을 본받으려 하고, 그 물결에 휩싸이려고 한다. 자꾸 함께 따라 가려고 한다. 세상이 하는 것은 다 하려 하고, 세상이 좋다는 것은 다 하려고 한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바로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의 행동과 교회 밖에서의 행동이 달라진다. 스스로가 그것이 잘못임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나만이 아닌 남들도 그러함에 위안을 받고 있다. 그러나 분명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하신다. “변화된 삶”을 살아라고 하신다. 세상 물결에 동조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세상 풍조에 휩싸여 함께 뛰놀며 춤추라는 말씀이 아니다. 분명한 말씀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그 뜻에 합당하게 살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다. 신앙과 행함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성도의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세상 물결에 휩싸여 떠내려가는 삶이 된다. 이러한 자에게는 위대한 삶도, 능력 있는 삶도, 힘있는 삶도 있을 수 없다. 죽은 물고기가 물결 따라 떠내려가듯, 이러한 삶은 곧 죽은 삶이다. 산 물고기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 맑은 물을 찾아 올라간다. 바로 신앙과 행위가 하나가 되어 있는 성도는 살아 있는 성도이다. 세상 물결에 휩싸여 떠내려가지 않고, 세상 물결을 거슬러 주를 앙망하며 독수리의 날개침 같이 올라간다. 이런 성도가 위대하고, 능력 있고, 힘있는 성도이다. 그의 기도에 힘이 있고, 그의 찬송에 힘이 있고, 그의 말에 힘이 있다. 성도의 힘은 직분에 있는 것도, 돈에 있는 것도, 지식에 있는 것도 아니다. 신앙과 행위가 하나 되는 삶에 있다.
4.설행일치(說行一致) 이는 “설교와 행함(삶)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말이 아니라 억지로 맞춘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인품이다. 바로 설교자의 “됨됨이”를 결정해 주는 곳이다.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의 원천이다. 설교자가 강단 위에서 선포한 설교와 강단 아래에서의 말이나 행동이 같지 않을 때 그 설교는 힘을 잃고 만다. 더욱이 교회 밖에서의 생활이 자신이 외친 설교와 하나 되지 못할 때 죽은 설교가 되고 만다. 실화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교회의 목사 사모님이 예배가 끝나 갈 무렵 방으로 가서 이불을 가져 왔다. 예배를 마칠 때 강단 위의 목사님을 향하여, “당신 거기서 내려오지 마세요. 우리 강단 위에서 삽시다. 강단 위의 당신 모습을 보니 천사와 같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보는 당신의 모습은 악마로 보이더라”고 하셨다. 바로 설교와 삶이 하나가 되지 못한 삶의 본보기이다. 강단 위의 설교는 반듯하지만 그의 삶은 반듯하지 못한 삶이다. 가장 이해하고, 위해 주어야 할 사모의 입에서 한 맺힌 소리가 나오게 한 삶이다. 이런 삶에서는 결코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가 나올 수 없다. 설교자의 힘은 자신이 설교한 내용과 삶이 하나 될 때에 솟아난다.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가 된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기도한다. “주여, 큰 것 바라지 않사오니, 내 설교한 것만큼 그렇게 살게 하여 주소서” 또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 바로 설교자이다.
⑵.설교의 내용이다.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가 설교의 내용이 좋은데서 온다. 아무리 인품이 훌륭한 설교자라 하여도 그 설교의 내용이 형편 없으면, 형편 없는 설교가 된다.
1.성경적이어야 설교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기 쉽게 해석하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느8:8). 하나님의 말씀이다. 세상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의 학문도 아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식으로 아니다. 디모데후서 4:3-4절 에“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했다. 말세의 징조 중에 하나이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싫어하고, 귀가 가려워서 긁어 줄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오늘의 설교가 이런 물결을 타고 있다는 것이다. 설교를 하는 것인지 원맨 쇼를 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간다. 코메디 판인지, 정치 판인지 구별이 힘들 때도 있다. 병자를 고치는 병원인지, 은사를 가르치는 학교인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들이다. 성경의 이적과 기사는 그 사건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오늘날의 신유 집회는 병원을 대신하고 있다. 주목적이 치료라는 말이다. 바쳐지는 헌금에 관심이 더 많아지고 있다. 성경 어디에 은사가 훈련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벌서 은사가 아니다. 은사는 거저 주시는 것이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선물로 받은 것이기에 자신의 잘남도, 자랑도 아니다. “할렐루야”를 빨리빨리 반복하는 “할렐루야 학교”, “주”를 빨리빨리 반복하는 “주,주 학교”, 믿습니다의 “믿습”을 빨리빨리 반복하는 “믿습 학교”, 등등이 있다고 한다. 잘못된 모습들이다. 말씀으로 바로 잡아야 할 대상들이다. 설교자가 바른 내용, 곧 성경 중심이 되어야 한다. 남의 귀나 긁어 주는 허탄한 소리를 그쳐야 한다.
2.바른 신학 위에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학문적인 체계를 세워 가며 상고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신학은 중요하다. 성경을 학문적으로 접근하기에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완전히 달라진다. 인간의 생각, 인간의 지식, 인간의 문화, 인간의 편견 등. 인간적인 요소가 작용하니 제각각의 모습이 된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하고, 보아야 하고, 접근해야 한다.
⑶.발표력 다 같은 내용을 가지고 쉽게 표현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자기의 뜻을 잘 전달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재미있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가 무론 여러 가지 요건들이 있겠지만 설교자 바로 자신이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2.듣는 자에게서 나온다. 마태복음 13:23절에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고 했다. 아무리 위대한 설교자가 아무리 능력 있는 설교를 한다 하여도, 그 설교를 듣는 사람이 받아 드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결코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다. 예수님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인간의 몸을 입고(요1:14) 오신 분이다.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길 정도로 권능 있는 분이시다(마9:33)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다(요1:3) 그러나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은 유대인이 얼마나 되는가 자기 땅에 왔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가 아니란 말인가 바로 듣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음을 말해 준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림 비유”는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 밭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 옥토의 마음 밭이다. 한 농부의 손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뿌려진 “씨”이다. 결코 씨 곧 종자의 차이에서 온 결실의 차이가 아니다. 씨가 떨어진 밭의 차이에서 온 결실의 차이를 말씀하고 있다. 같은 교회,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서도 성도들의 반응은 다르다.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은혜를 못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지루했다는 사람도 있다.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듣는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말이다. 옥토와 같은 심령을 가진 곧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된다. 무언가 하나 있으리라고 잔뜩 기대를 걸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눈알을 굴리며 주의 깊게 듣는 사람과 졸림을 참지 못해 하품을 하며 언제 끝나려나 하는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지루하다며 꾸벅꾸벅 조는 사람은 결실을 맺을 수 없다. 그 사람이 말씀을 깨닫고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게 될 것이다. 어느 부흥 강사님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교회 지하 기도실에는, 기도 소리가 울리고 있다. 성도들이 2인 1조가 되어 하루에 2시간씩 기도하는데, 12조가 기도를 이어감으로 24시간 기도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우리 교회에서는 부흥집회 잘 하라고 나를 위해 24시간 기도하고 있는데, 여러분은 나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고 있으며, 받을 은혜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굳은 마음 밭을 갈아 업고, 일구어 옥토로 가꾸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씨가 떨어지면 싹이 나고, 잎이 피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게 될 것이다.
3.성령님의 역사 하심에서 나온다. 사도행전 2:4절에 “저희가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했다. 사도행전 4:7절에“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님이 충만하여 가로되”라고 했다. 초대 교회의 대표적 인물인 베드로, 한 번 설교에
3,000명, 5,000명의 영혼 구원 역사가 일어났다. 참으로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였다. 베드로의 이러한 설교는 성령님의 역사 하심에서 왔다. 아무리 앞에서 살펴본 인간적인 요소가 다 갖추어져도 성령님의 역사 하심이 없으면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일이라면 청중의 호응도에 따라 성패가 결정된다. 그러나 설교는 그렇지 않다. 아무리 한 시간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은혜로웠다고 하드라도 영혼 구원의 역사가 없으면 헛일이다. 성도들의 심령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헛것이다. 수 천, 수 만의 함께한 성도가 은혜 받았다고, 아무리 이구동성(異口同聲)이 되어도 심령이 변화되는 삶이 없으면 헛것이다. 성령님의 역사 하심이 없다는 말이다. 인간적인 생각의 은혜이요, 평가이다.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에는 영혼 구원의 역사가 뒤따라야 한다. 성도들의 심령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성도들의 삶의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성도들의 영적 성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모두는 성령님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가 결국 성령님의 도우심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인간적인 요소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기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는 마가의 다락방 120명 성도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셨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는 초대 교회에
3,000명, 5,000명,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셨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 성령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도록, 성령님의 역사 하심이 나타나도록,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할 수 있도록, 기도로 준비하고,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진행하고, 기도로 마쳐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가 우리가 살펴본 대로 설교자 자신에게 나온다. 바로 설교자의 됨됨이가 그의 설교이다. 그의 설교가 거짓되지 않게 거짓 없는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곧 자신이 설교한대로 사는 삶이다.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가 듣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내가 들을 설교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오늘 받을 은총 위해 기도하자. 마음 밭을 일구어 옥토로 가꾸자. 은혜 받을 마음의 준비를 다하자.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가 성령님의 역사 하심에서 온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다. 기도로 준비하는 삶이 되자. 이러한 준비가 다 되면 우리에게도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가 나오게 된다. 영혼 구원의 역사도, 구원받는 자의 수가 늘어나는 축복도 누리게 될 것이다.
3,000명의 영혼 구원 역사가 일어났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위대한 설교이요, 능력 있는 설교이다.
3,000명의 영혼을 구원시킨 힘있는 설교이다. 어디 그뿐인가 5,000명의 영혼 구원 역사도 일어났다(행4:4). 그것도 남자 어른의 숫자만이다. 이 놀랍고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아마도 모든 설교자들이 소망하는 설교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듣고 파 하는 설교일 것이다. 이런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가를 살펴보고져 한다.
1.설교자 자신에게서 나온다. 사도행전 2:14절에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다. 오늘 본문의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설교자 베드로 자신에게서 나왔다. 곧 베드로의 설교이다. 주님의 다른 사도들도 많았지만, 다른 사도들의 설교가 아닌 베드로의 설교이다.
⑴.설교자 자신이다. 오늘 본문의 위대한 역사를 일으킨 설교는 베드로의 설교인데, 그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바로 설교자 자신이다.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설교자 자신에게서 나오고, 그 설교가 바로 설교자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 설교 내용도 주요하고, 발표하는 발표력도 중요하다. 그러나 아무리 웅변술이 뛰어나고, 좋은 내용의 원고라 할지라도 설교자 자신이 위대하지 못하면 위대한 설교가 되지 못한다.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 자신의 “인간 됨됨이”이다. 다시 말해서 설교자의 인품, 인격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무디나 스펄죤 같은 분들의 설교가 위대하고, 능력 있는 설교가 되는 것은 그분들의 설교 내용이나 발표력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 훌륭한 웅변가가 있다고 보자. 그가 “무디의 설교 원고”를 가지고 아무리 열의를 다 한다 해도 결코 “무디의 힘있고, 능력 있는 설교”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3,000명의 가슴에 감동을 주고, 회개하여 그 영혼이 구원 얻게 한 베드로의 설교를 우리가 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성경에 기록된 그 베드로의 설교를 제가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아무리 열성을 다해 꼭 같이 설교한다 할지라도 그날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다. 바로 설교자가 베드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 이기 때문이다. 만일 오늘날의 설교자 중에 베드로보다 더 위대하고, 능력 있는 자가 있다면,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알 수 있는 베드로의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보다 더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를 하게 될 것이다. 사사기 8:21절에 “대저 사람이 어떠하면 그 힘도 그러하니라”고 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 힘도 달라진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결국 설교자의 신앙 인격과 인품이 중요하다는 것이 된다. “사람 됨됨이”의 문제이다. 어떤 사람이 위대하고, 능력 있고, 힘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1.지행일치(知行一致) 이 말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삶)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인들이 갖추어야 할 인품이다. 특히 가르치는 사람들이 가지는 힘이다. 능력이요, 위대함이다. 대학 교수가 강단에서 가르칠 때는 “도덕 군자”로 가르치면서, 강단을 떠나서는 “부도덕 한 삶”을 살아간다면, 그가 가르치는 “도덕성”은 이미 힘을 잃은 것이다. 그에게서는 결코 위대하고, 능력 있고, 힘있는 가르침이 나올 수 없다. 그가 아무리 강단 위에서 열강을 하며 “도덕성”을 부르짖어도,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그의 소리가 제대로 들려 오지 않는다. 오히려 “너나 잘 해라”는 반발심과 비웃음만 밀려올 뿐이다. 가르치는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인품이요, 곧 우리가 지니는 힘이 된다. 특히 가르치는 사람들은 이점을 명심해야 한다. 학교 강단에서 가르치든, 가정에서 가르치든, 교회에서 주일 학생을 가르치든, 우리의 가르침이 위대하고, 능력 있고, 힘있는 가르침이 되기 위해서는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삶을 살아야 한다.
2.언행일치(言行一致) 이 말은 “말과 행동(삶)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갖추어야 할 인품이요 힘이지만, 특히 다스리는 자, 곧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인품이다. “사람 됨됨이”이다. 아무리 한 국가의 최고의 힘을 지닌 대통령이라도, 아니 왕이라도, 황제라도,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그의 다스림은 힘을 잃게 된다. 어떤 국민도, 어떤 백성도 그를 따르지 않으려 할 것이다.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사이에는 “신뢰”가 문제이다. 말과 행동이 같지 않은 사람은 남에게 “신뢰감”을 줄 수 없다. 말과 행동이 같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믿고 따르겠는가 우리가 한 나를 다스리든, 한 기관을 다스리든, 한 사업체를 다스리든, 한 단체를 다스리든, 한 가정을 다스리든, 교회의 한 부서를 다스리든, 그 지도자는 말과 행동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거기에 위대함이 있고, 능력이 있고, 힘있는 지도력이 있게 된다. 말(약속)과 행동(실제)이 같지 않을 때 누가 그 말의 약속을 믿겠는가. 그래서 오늘의 사회에서도 보면, “법제화”를 부르짖는다. 쉽게 말하면 권력을 가진 지도자의 말을 믿을 수 없으니, 법이라는 틀 속에 권력자를 가두어 놓자는 것이다. 그 테두리 안에서만 권력을 행사하라는 것이다. 위대하고, 능력 있고, 힘있는 다스림은 권력으로 되지 않는다. 위대하고, 능력 있고, 힘있는 지도력은 제왕의 칼에 있는 게 아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 되는 삶을 통하여 쌓아진 인품이 중요하다. “믿어 주세요!”가 아니라도 모두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이다. 내가 다스리고 이끌어 가야 할 사람들, 곧 백성들이나, 사원들이나, 회원들이나, 조직원들이나, 가족들. 그들에게 내가 “신뢰” 받는 사람이 되면 “이 사람 한 번 믿어 주세요!”는 사실상 필요 없는 말이 된다.
3.신행일치(信行一致) 이 말은 “믿음과 행함(삶)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약2:17).
우리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인품이다. 위대함이요, 능력이요, 힘이다. 성도들의 됨됨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신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인품이라 할 수 있겠다. 교회가 세상 풍조를 지배하고 인도해 가야 하는데,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세상 풍조에 휩싸여 교회의 분위기도, 신앙의 물결도 세상 풍조를 쫓아가고 있다. 성경에 “하지 말라”는 것도 세상의 물결을 쫓아 오히려 당연한 것 같이, 그것도 너무도 당당히 한다. 세상의 풍조에 밀려 “하나님의 법”이 달라지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로마서 12: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다. 성도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다. 거룩하게, 구별하여 따로 모아 놓은 사람들이다. 그 모아 놓은 모임이 교회이다. “에클레시아” 곧 밖으로 불러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이다.
그런데, 이 교회가 세상을 본받으려 하고, 그 물결에 휩싸이려고 한다. 자꾸 함께 따라 가려고 한다. 세상이 하는 것은 다 하려 하고, 세상이 좋다는 것은 다 하려고 한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바로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의 행동과 교회 밖에서의 행동이 달라진다. 스스로가 그것이 잘못임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나만이 아닌 남들도 그러함에 위안을 받고 있다. 그러나 분명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하신다. “변화된 삶”을 살아라고 하신다. 세상 물결에 동조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세상 풍조에 휩싸여 함께 뛰놀며 춤추라는 말씀이 아니다. 분명한 말씀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그 뜻에 합당하게 살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다. 신앙과 행함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성도의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세상 물결에 휩싸여 떠내려가는 삶이 된다. 이러한 자에게는 위대한 삶도, 능력 있는 삶도, 힘있는 삶도 있을 수 없다. 죽은 물고기가 물결 따라 떠내려가듯, 이러한 삶은 곧 죽은 삶이다. 산 물고기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 맑은 물을 찾아 올라간다. 바로 신앙과 행위가 하나가 되어 있는 성도는 살아 있는 성도이다. 세상 물결에 휩싸여 떠내려가지 않고, 세상 물결을 거슬러 주를 앙망하며 독수리의 날개침 같이 올라간다. 이런 성도가 위대하고, 능력 있고, 힘있는 성도이다. 그의 기도에 힘이 있고, 그의 찬송에 힘이 있고, 그의 말에 힘이 있다. 성도의 힘은 직분에 있는 것도, 돈에 있는 것도, 지식에 있는 것도 아니다. 신앙과 행위가 하나 되는 삶에 있다.
4.설행일치(說行一致) 이는 “설교와 행함(삶)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말이 아니라 억지로 맞춘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인품이다. 바로 설교자의 “됨됨이”를 결정해 주는 곳이다.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의 원천이다. 설교자가 강단 위에서 선포한 설교와 강단 아래에서의 말이나 행동이 같지 않을 때 그 설교는 힘을 잃고 만다. 더욱이 교회 밖에서의 생활이 자신이 외친 설교와 하나 되지 못할 때 죽은 설교가 되고 만다. 실화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교회의 목사 사모님이 예배가 끝나 갈 무렵 방으로 가서 이불을 가져 왔다. 예배를 마칠 때 강단 위의 목사님을 향하여, “당신 거기서 내려오지 마세요. 우리 강단 위에서 삽시다. 강단 위의 당신 모습을 보니 천사와 같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보는 당신의 모습은 악마로 보이더라”고 하셨다. 바로 설교와 삶이 하나가 되지 못한 삶의 본보기이다. 강단 위의 설교는 반듯하지만 그의 삶은 반듯하지 못한 삶이다. 가장 이해하고, 위해 주어야 할 사모의 입에서 한 맺힌 소리가 나오게 한 삶이다. 이런 삶에서는 결코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가 나올 수 없다. 설교자의 힘은 자신이 설교한 내용과 삶이 하나 될 때에 솟아난다.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가 된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기도한다. “주여, 큰 것 바라지 않사오니, 내 설교한 것만큼 그렇게 살게 하여 주소서” 또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 바로 설교자이다.
⑵.설교의 내용이다.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가 설교의 내용이 좋은데서 온다. 아무리 인품이 훌륭한 설교자라 하여도 그 설교의 내용이 형편 없으면, 형편 없는 설교가 된다.
1.성경적이어야 설교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기 쉽게 해석하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느8:8). 하나님의 말씀이다. 세상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의 학문도 아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식으로 아니다. 디모데후서 4:3-4절 에“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했다. 말세의 징조 중에 하나이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싫어하고, 귀가 가려워서 긁어 줄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오늘의 설교가 이런 물결을 타고 있다는 것이다. 설교를 하는 것인지 원맨 쇼를 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간다. 코메디 판인지, 정치 판인지 구별이 힘들 때도 있다. 병자를 고치는 병원인지, 은사를 가르치는 학교인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들이다. 성경의 이적과 기사는 그 사건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오늘날의 신유 집회는 병원을 대신하고 있다. 주목적이 치료라는 말이다. 바쳐지는 헌금에 관심이 더 많아지고 있다. 성경 어디에 은사가 훈련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벌서 은사가 아니다. 은사는 거저 주시는 것이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선물로 받은 것이기에 자신의 잘남도, 자랑도 아니다. “할렐루야”를 빨리빨리 반복하는 “할렐루야 학교”, “주”를 빨리빨리 반복하는 “주,주 학교”, 믿습니다의 “믿습”을 빨리빨리 반복하는 “믿습 학교”, 등등이 있다고 한다. 잘못된 모습들이다. 말씀으로 바로 잡아야 할 대상들이다. 설교자가 바른 내용, 곧 성경 중심이 되어야 한다. 남의 귀나 긁어 주는 허탄한 소리를 그쳐야 한다.
2.바른 신학 위에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학문적인 체계를 세워 가며 상고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신학은 중요하다. 성경을 학문적으로 접근하기에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완전히 달라진다. 인간의 생각, 인간의 지식, 인간의 문화, 인간의 편견 등. 인간적인 요소가 작용하니 제각각의 모습이 된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하고, 보아야 하고, 접근해야 한다.
⑶.발표력 다 같은 내용을 가지고 쉽게 표현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자기의 뜻을 잘 전달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재미있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가 무론 여러 가지 요건들이 있겠지만 설교자 바로 자신이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2.듣는 자에게서 나온다. 마태복음 13:23절에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고 했다. 아무리 위대한 설교자가 아무리 능력 있는 설교를 한다 하여도, 그 설교를 듣는 사람이 받아 드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결코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다. 예수님은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인간의 몸을 입고(요1:14) 오신 분이다.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길 정도로 권능 있는 분이시다(마9:33)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다(요1:3) 그러나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은 유대인이 얼마나 되는가 자기 땅에 왔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가 아니란 말인가 바로 듣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음을 말해 준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림 비유”는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 밭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 옥토의 마음 밭이다. 한 농부의 손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뿌려진 “씨”이다. 결코 씨 곧 종자의 차이에서 온 결실의 차이가 아니다. 씨가 떨어진 밭의 차이에서 온 결실의 차이를 말씀하고 있다. 같은 교회,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서도 성도들의 반응은 다르다.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은혜를 못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지루했다는 사람도 있다.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듣는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말이다. 옥토와 같은 심령을 가진 곧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된다. 무언가 하나 있으리라고 잔뜩 기대를 걸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눈알을 굴리며 주의 깊게 듣는 사람과 졸림을 참지 못해 하품을 하며 언제 끝나려나 하는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지루하다며 꾸벅꾸벅 조는 사람은 결실을 맺을 수 없다. 그 사람이 말씀을 깨닫고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게 될 것이다. 어느 부흥 강사님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교회 지하 기도실에는, 기도 소리가 울리고 있다. 성도들이 2인 1조가 되어 하루에 2시간씩 기도하는데, 12조가 기도를 이어감으로 24시간 기도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우리 교회에서는 부흥집회 잘 하라고 나를 위해 24시간 기도하고 있는데, 여러분은 나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고 있으며, 받을 은혜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굳은 마음 밭을 갈아 업고, 일구어 옥토로 가꾸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씨가 떨어지면 싹이 나고, 잎이 피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게 될 것이다.
3.성령님의 역사 하심에서 나온다. 사도행전 2:4절에 “저희가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했다. 사도행전 4:7절에“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님이 충만하여 가로되”라고 했다. 초대 교회의 대표적 인물인 베드로, 한 번 설교에
3,000명, 5,000명의 영혼 구원 역사가 일어났다. 참으로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였다. 베드로의 이러한 설교는 성령님의 역사 하심에서 왔다. 아무리 앞에서 살펴본 인간적인 요소가 다 갖추어져도 성령님의 역사 하심이 없으면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일이라면 청중의 호응도에 따라 성패가 결정된다. 그러나 설교는 그렇지 않다. 아무리 한 시간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은혜로웠다고 하드라도 영혼 구원의 역사가 없으면 헛일이다. 성도들의 심령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헛것이다. 수 천, 수 만의 함께한 성도가 은혜 받았다고, 아무리 이구동성(異口同聲)이 되어도 심령이 변화되는 삶이 없으면 헛것이다. 성령님의 역사 하심이 없다는 말이다. 인간적인 생각의 은혜이요, 평가이다.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에는 영혼 구원의 역사가 뒤따라야 한다. 성도들의 심령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성도들의 삶의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성도들의 영적 성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모두는 성령님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가 결국 성령님의 도우심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인간적인 요소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기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는 마가의 다락방 120명 성도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셨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는 초대 교회에
3,000명, 5,000명,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셨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 성령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도록, 성령님의 역사 하심이 나타나도록,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할 수 있도록, 기도로 준비하고,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진행하고, 기도로 마쳐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가 우리가 살펴본 대로 설교자 자신에게 나온다. 바로 설교자의 됨됨이가 그의 설교이다. 그의 설교가 거짓되지 않게 거짓 없는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곧 자신이 설교한대로 사는 삶이다.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가 듣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내가 들을 설교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오늘 받을 은총 위해 기도하자. 마음 밭을 일구어 옥토로 가꾸자. 은혜 받을 마음의 준비를 다하자.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가 성령님의 역사 하심에서 온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다. 기도로 준비하는 삶이 되자. 이러한 준비가 다 되면 우리에게도 위대한 설교, 능력 있는 설교, 힘있는 설교가 나오게 된다. 영혼 구원의 역사도, 구원받는 자의 수가 늘어나는 축복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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